명문대 나오면 뭐해 절반이 백수인데 - 6.25, '깡패 국가' 미국을 낳았다
명문대 나오면 뭐해 절반이 백수인데
‘영유-사초-국중-특고-명대 코스.’ 한국 사회의 과도한 학벌 지향을 나타내는 말이다. 하지만 취업난은 이런 코스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제 교과 중심의 교육을 멈추고 맞춤형 교육으로 나아가야 한다.
| [457호] 승인 2016.06.24 18:29:58 |
오늘은 개인적으로 뜻깊은 날이다. 15년 기자 생활을 정리하는 마지막 날이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강의를 준비하면서 지난 세월을 돌아보는 계기도 가질 수 있었다.
기자 생활 전반부에는 주로 금융 쪽을 담당했다. 한국은행, 기획재정부, 은행·증권·보험사 등이 주된 출입처였다. 이쪽을 출입하며 만난 취재원 중에는 세련되고 똑똑하며 신사적인 분들이 많았다. 한국의 금융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자부심도 강했다. 다만 자부심이 강한 만큼 이너서클도 강고했다. 모피아(재무부 영문 약자인 ‘MOF’와 ‘마피아’의 합성어)라는 말이 보여주듯 자기들끼리의 내부 결속력을 자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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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윤무영 최중혁 기자는 교육 분야를 오래 취재했다. 그는 취재 경험을 나누며 “성공의 기준을 바꾸면 행복이 보인다”라고 말했다. |
이들의 애국심이 강하면 국익에도 도움이 된다. 그런데 개중에는 공익보다 사익을 추구하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드는 경우도 있었다. 벌써 10년 전 일인데, 하루는 북한이 핵실험을 발표하면서 난리가 났다. 이런 날은 환율이 급등하는 게 통례다. 한반도 리스크가 커지면서 원화 값어치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은 오히려 환율이 떨어졌다. 이상해서 외환 딜러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한 딜러는 다음 날 미국에서 고용지표를 새로 발표하는데 그것이 미리 반영된 결과 같다고 했다. 반면 크로스체크 차원에서 통화한 다른 딜러는 아무래도 큰손이 개입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게 누구냐고 물었더니 “그건 나도 모르죠”라는 반응이었다. 찜찜한 마음으로 기사를 썼다.
몇 달 뒤 또 다른 딜러와 밤늦도록 술을 마시다 놀라운 얘기를 들었다. 외환 딜러는 대개 고학력자다. 유학은 기본이고, 난다 긴다 하는 세계적인 금융기관에 근무한 경험도 풍부하다. 이른바 ‘검은 머리 외국인’들이다. 그런데 이 중 하나가 당시 외환시장에서 거액의 손실을 입었던 모양이다. 그러자 대학 동문들이 그의 손실을 만회할 방법을 궁리하던 중 북한 핵실험 사태가 터졌고, 이에 ‘몰아주자’식으로 작전을 벌이면서 환율이 떨어졌던 것이다.
이런 이너서클이 외환시장에만 있을까. 법조계·산업계·의학계·체육계…. 끝이 없다. 정운호 게이트 같은 것이 한국 사회에 끊이지 않는 이유다. 언론계도 마찬가지다. 내가 기업을 담당하는 산업부 기자를 해보고 싶다고 하자 언론사 동기가 말렸다. “넌 사장 얼굴도 못 본다”라고. 사장들은 대학 동문인 기자만 상대해준다는 것이다.
거창한 분들만의 얘기가 아니다. 이는 우리가 흔히 접하는 일상이기도 하다. 며칠 전 장인어른을 모시고 병원에 가서 진료실 앞에서 한 시간쯤 대기하고 있는데 갑자기 진료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담당 의사가 꽁지에 불붙듯 어디론가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럴 땐 십중팔구 병원에 VIP가 왕림했다는 얘기다. 그 바람에 일반인 진료가 차례로 밀린 것이다.
이런 현상이 심해지면 공익이나 합리성이 떨어지면서 사회적 폐해가 커질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한 피해는 ‘흙수저’만 입는 것이 아니다. 최근 식사 자리에서 만난 청와대 고위 인사가 “대한민국은 참 살기 어려운 나라”라고 한탄하는 것을 보며 만감이 교차했다. 아무리 불합리한 판단·선택·결정일지라도 ‘그들만의 이너서클’에서 결정이 나면 무조건 따라야 하는 구조에 그 또한 일반 회사원처럼 비참함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럴 때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세상이 본래 그렇지 뭐’ 하면서 염세에 빠지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기도 이너서클에 들어가려 노력하는 것이다. 여기 계신 분들에게 솔직히 묻겠다. 내 자식, 아니면 가까운 주변 사람 중에라도 검사·판사·의사가 있었으면 하시는 분! 거의 모든 분이 손을 들어주셨다. 당연한 결과다. 이너서클 주변에라도 있어야 손해를 덜 보니까.
이너서클에 들어가고자 하는 이들은 그 해결책을 교육에서 찾는 경향이 있다. 좋은 대학을 졸업하면 아무래도 이너서클에 진입할 가능성이 높아질 거라는 기대에서다. 그 결과 ‘영유-사초-국중-특고-명대(영어 유치원, 사립 초등학교, 국제중학교, 특목고, 명문대학의 약칭) 코스’를 밟으려 기를 쓴다. 아이가 유치원에 입학할 때 함께 신청 대기줄에 서 있던 부모들한테 “아이가 어떻게 컸으면 좋겠느냐?”고 물은 일이 있다. 당시 내가 기대한 대답은 “건강하게 잘 컸으면” 정도였다. 그런데 부모 10명 중 6명은 이렇게 답하는 것이었다. “우리 애는 국제중이 단기 목표예요.”
교육에 대한 생각을 송두리째 흔드는 취업난
그 와중에 교육 분야를 맡게 됐는데, 경제 기자로서 보기에 이건 아무리 봐도 합리적인 선택이 아닌 듯했다. 영어 유치원 3년, 사립 초등학교 6년이면 적어도 학비로만 1억원쯤 쓰게 된다. 그런데도 부모들은 ‘영어 유치원까지 보낸 우리 애를 어떻게 공립 초등학교에 보내?’ 하는 식이다. 초등학교 졸업 무렵, 아이를 국제중에 못 보낸 부모들은 또다시 기로에 선다. ‘사립 초등학교 나온 애를 어떻게 동네 중학교에 보내?’ 싶어서다. 이에 조기 유학을 선택하면서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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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독서와 여행을 중심으로 교과·비교과의 균형을 맞춰갈 필요가 있다. |
돈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해도 된다. 이게 경제 활성화를 돕는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위 10%에 들지도 못하면서 스스로를 중산층이라 믿는 분들이 이랬다간 가랑이가 찢어지기 십상이다. 한동안은 ‘2060 대 3050’이라는 신조어로 독자들을 설득하려고도 했다. 자식한테 20년 투자하면 60세까지 40년은 먹고살 수 있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30년 투자해봐야 50세까지도 보장하기 힘든 세상이니, 비합리적인 투자를 계속해봐야 노후에 쪽박만 찰 거라고. 그런데 이게 먹히지가 않았다. 누가 뭐라든 “너희들이 특목고 맛을 알아?” 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최근 이런 흐름이 저절로 무너지고 있다. 내 생각에 그 핵심 계기는 취업난이다. 대학 공시를 보면 ‘SKY (서울대·고려대·연세대)’의 취업률이 50% 안팎이다. 비정규직 일자리를 포함한 수치가 이렇다. 명문대 나오고 유학을 다녀와봐야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됐다. 취업난이 우리 사회를 송두리째 흔들고 있는 것이다. 삼성전자도 현대자동차도 앞날을 낙관할 수 없는 시대다. 이를 두고 위기라 하는 분들이 많은데 나는 위기가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본다.
얼마 전 김범수 카카오 의장이 경기도 스타트업캠퍼스 초대총장 취임식에서 한 연설이 인상 깊었다. 그는 취업의 시대가 끝났다고 말한다. 고용의 종말과 저성장을 동시에 맞이한 시대,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의 65%는 현재 세상에 없는 직업을 갖게 될 전망이다. 그런 만큼 지식을 주입하는 교육은 더 이상 의미가 없으며, “평생 몰두할 업은 공부로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현장 경험으로부터 오는 직관”이라는 것이다.
“취업의 시대는 끝났다”라는 말을 교육에 대입해보면 “교과의 시대는 끝났다”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물론 국·영·수 시대가 완전히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비중은 줄어들 것이다. 1990년 한국의 노령화지수(65세 이상 인구를 0~14세 유소년 수로 나눠 100을 곱한 수)는 20이었다. 노인보다 청년 수가 5배 많았다는 얘기다. 이 시기 필요한 것은 경쟁 교육이었다. 청년 수가 많으니까 서로 경쟁시켜 똘똘한 놈을 키울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2015년 노령화지수는 94이다. 노인과 청년 숫자가 비슷해졌다. 노령화지수가 100 즈음이면 맞춤형 교육이 필요하다고 한다. 요리에 소질이 있으면 여기 필요한 교육을 제공하는 식이다.
그렇다면 미래는? 2050년 한국의 노령화지수는 376으로 추정된다. 청년보다 노인 수가 4배 가까이 많아지는 셈이다. 이 시기는 맞춤형 교육만으로도 안 된다. 내 식대로 표현하자면, 이 시기 필요한 것은 불이(不二) 교육이다. ‘나’와 ‘너’가 둘이 아닌 교육, 내 아이뿐 아니라 다른 아이도 성공하게끔 도와주는 교육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교육은 아직 맞춤형 교육은커녕 경쟁 교육 단계에 머물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는 맞춤형 교육으로 나아가야 한다. 교과의 시대를 멈추고, 교과와 비교과의 끊임없는 비교를 통해 적성을 찾는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국·영·수 중심의 교과 교육과 달리 비교과 교육의 핵심은 체험이다. 체험에는 직접체험과 간접체험이 있다. 직접체험의 정수가 여행이라면 간접체험의 정수는 독서다. 독서와 여행을 중심으로 교과·비교과의 균형을 맞춰갈 필요가 있다. 문제는 가난하고 기회가 없는 아이들의 경우 비교과 영역에서의 격차가 국·영·수 격차보다 오히려 커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기자를 그만둔 뒤엔 창업해 이런 격차를 해소할 플랫폼을 만들어볼 생각이다.
교육에 대한 사고 또한 직선에서 순환식으로 바뀔 필요가 있다. 고등학교 졸업-대학교 졸업-취업-정년퇴직으로 이어지던 시대는 끝났다. 미국인들은 이미 순환식 사고에 익숙하다. 고교 졸업 후 창업을 했다 나중에 필요를 느껴서 대학에 진학하고, 다시 재취업이나 창업을 하는 식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내가 평생 해야 할 업(業)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나는 본다. 이른바 창직(創職)이다. 이를 독려하려면 부모부터 바뀔 필요가 있다. 부모부터 장하다고 격려해줘야 아이들이 용기 있게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다.
자녀를 일찍 품에서 놓아주자는 제안도 하고 싶다. 요즘은 아이들이 성인식을 해도 자기가 성인이 됐다고 느끼질 못한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부모가 자식 뒷바라지하는 걸 당연하게 여겨서다. 그럴 게 아니라 자랄 때 자녀에게 사교육을 시키는 대신 모은 돈 3000만~5000만원을 성인식 날 건네며 독립하게 해주면 어떨까. 창업을 하든 해외여행을 하든 이 돈을 쓰는 것은 자녀한테 맡기는 것이다. 결혼은 취직한 다음에나 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바꿀 필요가 있다. 자녀를 일찍 출가시키면 부모 부담도 줄어든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사회 시스템부터 바뀌어야 할 것이다. 신혼부부에게 임대주택을 현재보다 훨씬 좋은 조건으로 분양하는 등 청년층의 결혼과 출산, 창업 등을 장려하는 획기적인 정책이 나와주어야 한다. 여전히 직선의 시대에 맞춰져 있는 사회 시스템이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관료들도 순환적 시스템으로 전환할 미래 사회에 걸맞은 인프라가 무엇이고 우리가 어떤 정책을 선택해야 할지 끊임없이 모색해야 한다. 어쩌면 이것이 진정한 창조 경제다. 어느 날 갑자기 푸드트럭 몇 대 갖다놨다고 창조 경제가 실현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요즘 스웨덴·노르웨이 같은 북유럽 시스템을 얘기하는 이들이 많은데 이들 국가는 환경이 정말로 척박하다. 그렇다 보니 개인이 이들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고, 따라서 사회적 합의도 잘 이뤄지는 편이다. 그 결과 국민들이 높은 세금도 감수한다. 반면 한국은 사정이 다르다. 그런 만큼 우리에게 적합한 모델을 새롭게 찾아가는 것이 현재 시점에서 정말 중요할 것 같다.
15년 기자 생활을 마감하면서 가장 보람 있게 여기는 일은 사교육걱정없는세상과 함께 ‘루저 없는 사회-성공의 기준을 바꾸자’는 캠페인을 진행한 일이다. 명문학교, 높은 연봉, 사회적 지위 등을 성공 기준으로 삼는 이상 1%를 제외한 나머지는 루저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왜 그렇게 살아야 하나. 강지원 변호사, 김준희 전 능률교육 대표 등 캠페인에 참여해준 분들이 한결같이 해준 얘기가 있다. 하고 싶은 일을 찾고, 경제적 자립을 이루고, 사회적 기여를 하면 그것이 바로 성공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성공의 기준을 바꾸면 행복이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나 또한 성공한 인생을 산다고 믿고 싶다.
정리·김은남 기자
생기부 쓰느라 생기 잃은 중학교 교실
중학교에는 ‘생기부’가 있다. 특목고 등에 진학할 학생과 학부모에게 생기부는 중요한데, 그로 인해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곤 한다.
| [457호] 승인 2016.06.24 18:29:58 |
학생들의 자발성과 교사의 도움이 만나 생동하는 학교는 가능한가. 그런 시도를 하다가 ‘불온서클 금지 교칙’을 어겼다고 징계를 받던 1980년대의 고등학생들도 있었고, ‘학생회 직선제’를 논의하다가 교무실 바닥에서 엉덩이가 터지도록 매를 맞은 1990년대의 중학생들도 있었으며 그로부터 십수년이 지난 2016년에도 대한민국 학교는 여전히 학생들의 자발적 활동을 팔 벌려 안아주지 않는다. 그래서 수업 중에 학생들에게 말하곤 한다. “학교에 선택할 동아리가 별로 없다고 불만만 털어놓지 말고 너희 스스로가 하고 싶은 동아리를 구상해 그것을 이해해줄 만한 교사에게 도움을 청하라.”
그 수업이 끝나고 한 학생이 내게 찾아왔다. “선생님, 정말 저희가 동아리를 만들 수 있어요? 만들면 지도교사 해주실 거예요?” 그렇게 해서 우리는 ‘풀꽃샘 글쓰기 동아리’를 만들었다. 나는 작게나마 아이들 손으로 만들어진 동아리에 내가 참여하게 된 것이 기쁘고 좋았다. 그런데 며칠 후 또 다른 상설 동아리를 만들겠다고 동아리 담당 교사를 찾아온 중학교 3학년 아이들이 있었다. “저희가 영자신문반을 만들어도 되나요?”라고 묻는 아이들에게 담당 교사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는다. “그런데 너희 정말 제대로 열심히 활동할 자신 있어? 그냥 만들어만 놓고 하는 둥 마는 둥 하면 안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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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성 그림 |
아이들의 자발성에 찬물을 끼얹는 발언인가. 저렇게 이야기할 교사가 아닌데 이상하다 싶었다. 알고 보니 중학교 3학년 아이들 사이에서 상설 동아리를 여러 개 가입해놓고 활동을 열심히 하지 않는 아이들이 자꾸 생겨난다는 것이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답은 바로 ‘학생 생활기록부(생기부)’였다. 고등학교에서는 ‘학생부 종합전형(학종)’이라 해 논란이 되고 있는 ‘학생부’를 우리 중학교에서는 줄여서 ‘생기부’라 부른다.
학생들이 여러 동아리에 가입하는 까닭
중학교에서도 특목고나 특성화고등학교에 진학할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생기부는 중요하다. 여기에는 수상 경력 같은 것은 기록할 수 없는 대신 방과후 수업 참여와 동아리 활동, 독서 활동, 봉사 활동을 기록할 수 있다. 거기에 기록할 거리를 마련하려고 마구잡이로 동아리 활동을 하는 아이들이 생기는 것이다.
대학 입시에서 학생부 종합전형이 생긴 목적은 분명 학생회 활동이나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한 학생, 일찌감치 나름 ‘끼’와 ‘꿈’을 모색했던 학생, 진정으로 남을 위한 봉사 활동이 무엇인지 깨우친 학생들이 학업 성적에 밀려 대학에 못 가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독서를 열심히 해서 학생부에 기록이 된 건지, 기록을 하기 위해 억지로 책을 읽거나 읽는 시늉을 한 건지, 자율적인 학생회를 이끌기 위해 내신을 돌보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열심히 움직인 건지, 차라리 내신 대신 학생회나 동아리 활동의 기록을 위해 뭔가를 한 건지….
내 제자 중에는 학교 성적은 중간 정도이지만 1년 동안 아주 알찬 책으로만 60권을 넘게 읽은 아이가 있었다. 중학교 3학년이던 그때 우리 반 학급문집에 ‘의 책’이라는 코너를 따로 마련했을 정도다. 또 다른 제자 중에는 ‘서체(캘리그래피)’에 관심을 가지고 독학하던 아이도 있었다. 혼자 전시회도 찾아가고 관련 서적을 탐독했다. 그 똘똘한 아이가 성적이 잘 나오지 않은 이유는 관심사가 다양해서 그랬으리라 생각한다. 이런 아이들을 놓치지 말라는 것이 바로 ‘학종’의 목적이 아니었을까. 만약 학생종합부가 본질을 잘 살리려면 저런 학생들이 소외되지 않고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도록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
남들은 다 해야 6면이면 끝나는 중학교 생활기록부를 20면 가까이 기록하고도 ‘우리 아이 봉사활동은 (분량이 많아 보이게) 날짜별·항목별로 나눠서 기록해주세요’라고 요구하는 학부모, 특목고 진학을 위해 각종 체험활동 등에 너무 많이 참여하다 보니 더 이상 기록할 자리가 없게 된 학생, 도대체 이 많은 책을 언제 다 읽은 건지 알 수 없는 독서기록장을 들고 온 학생을 위해 방학 내내 ‘한글 워드프로세서 입력 귀신’이 되어야 하는 교사….
중학교부터 이런 기형적인 생기부로 몸살을 앓는 현상이 정상은 아니지 않은가. 중학교의 생기부도 고등학교처럼 본래의 좋은 의도와 취지에서 벗어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보아야 한다.
평범한 사람들이 1987년 6월을 달구다
6월 항쟁의 물꼬를 튼 사람들은 걸출한 영웅이나 능력자가 아니었다.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평범한 의사와 법의학자, 교도관의 목숨 건 결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 [457호] 승인 2016.06.24 18:30:36 |
오늘날 대한민국의 헌정 체제인 제6공화국을 탄생시킨 건 1987년에 일어난 6월 항쟁이었어. 아빠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일이야. 고달픈 고3 생활 속에서도 거의 모든 국민이 떨쳐 일어나 전두환 정권의 멱살을 거머쥐고 ‘독재 타도’를 외쳤던 그해 6월의 기억은 선명하구나. 부산 서면 거리에서 대학생 형들은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 동요를 이렇게 바꿔 불렀지. “새 나라의 대통령은 대머리가 아닙니다.” 완강히 버티던 전두환의 제5공화국 정권은 국민의 힘에 굴복했고 현행 헌법을 토대로 한 6공화국이 수립됐다.
이 위대한 6월 항쟁의 물꼬를 터서 폭포를 이루게 한 의인이 몇 명 있었어. 오늘 아빠는 그 의인들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 우선 박종철이라는 부산 출신 대학생. 1987년 1월16일 <중앙일보> 사회면에는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死)’라는 2단짜리 작은 기사가 실렸어. 죽은 사람은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생 박종철이었지.
박종철의 친구들에 따르면 그는 더할 수 없을 만큼 착한 사람이었어. “따뜻한 점퍼를 입으면… 원래 소유자는 종철인데 학교 친구들이 보면 제가 입고 다니는 일이 더 많은… 친구들은 점퍼를 제 걸로 알지 종철이 것으로 알고 있지 않고 결국 제 것이 되는 그런 점퍼가 있었어요. 보통 사람이면 불만이 있을 수도 있을 텐데 종철이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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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조남진 박종철 고문 치사가 자행된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실에 박종철 열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
그런 그에게 수배 중인 선배가 찾아왔고 박종철은 돈 1만원과 함께 누나가 짜준 목도리까지 건넸다고 해. 그 며칠 뒤 박종철은 이 선배를 추적하던 경찰들에게 연행돼. 박종철은 선배가 갈 만한 곳을 알고 있었으나 입을 다물었어. 경찰들은 이 어진 젊은이의 팔다리를 잡아채 물이 가득한 욕조로 끌고 간다. 얼마 후 기차게 착하고 순진했던 청년, 하지만 “우리 앞에는 외면할 수 없는 역사와 현실이 있습니다”라고 단호하게 부르짖을 수 있었던 청년 박종철은 죽고 말았어. 경찰은 박종철이 어떤 ‘쇼크’로 죽었다고 우겼단다. 박종철의 죽음을 특종 보도한 기자는 이 희한한 사인(死因)에 특별히 따옴표를 쳐놨어. ‘쇼크사’라고. 따옴표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지. “쇼크사? 웃기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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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황적준 박사가 작성한 사인 감정서. |
그런데 이 ‘쇼크사’가 세상에 알려진 데에도 한 평범한 의사의 결단이 필요했어. 물고문을 당하던 박종철이 의식을 잃자 경찰들은 인근의 중앙대학교 부속병원 응급실 의사를 불렀어. 달려온 이는 나이 서른한 살의 의사 오연상. 그는 가운이 젖을 만큼 물이 흥건한 취조실을 보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직감했어. 그때 그의 심경이 어땠을까. 어제만 해도 쾌활하게 생활하던 한 젊은이를 간단히 죽여버린 살인마들 틈에 끼어 그들의 주목을 받는 판국이었어.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자신도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분명히 했을 거야. 실제 경찰은 다음 날 그의 진료실 문 앞을 교대로 지키며 외부인과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던 중 화장실에서 오연상 의사는 기자를 만났고 사건의 진실을 비춘다.
“청진기를 대보니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났고 폐에서는 수포음이 들렸습니다.” 수포음이란 폐에 피나 기타 체액이 스며들어 나는 소리다. 사실은 물고문과 직접적 연관이 없어. 그러나 어떻게든 물고문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싶었던 의사가 그렇게 용기를 냈던 거야. “이 말을 하지 않으면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리리라”고, 자신을 가다듬으면서.
박종철의 사인을 확실히 밝혀야 하는 곳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였어. 치안본부장 이하 경찰의 고위 간부들이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로 총출동했다. 심장 쇼크사로 하자거나 질병으로 사망했다고 발표하자는 등 갖가지 사악한 시나리오들이 제시됐다. 심지어 치안본부장이 목욕이나 하라며 100만원 현금 다발을 담당자에게 건네기도 했어. 이 절체절명의 순간, 박종철의 사인을 밝히는 임무를 맡은 이는 황적준이라는 법의학자였단다.
“1억 줄게, 입 다물어” 협박을 목격하자…
그 역시 고민을 거듭한다. 눈 질끈 감고 ‘원래 폐에 병이 있었으며 사인은 그것’이라고 써놓고 서명 한번 해버리면, 상황이 정리될 수 있었어. 부검이 끝나면 곧바로 시신을 화장터로 옮기도록 만반의 태세가 갖춰져 있었으니, 다른 의사가 시신을 볼 틈도 없었지. 하지만 황적준 박사는 깊이 잠든 자기 아이들의 얼굴을 보면서 역사적 결단을 하게 돼. “정의의 편에 서서 감정서를 작성하겠다.” 대한민국 역사는 이 결연한 의사의 증언으로 서서히 태풍권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경찰이 물고문으로 한 대학생을 죽여버렸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알려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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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기념관 1987년 1월26일 명동성당에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신부 100여 명이 박종철 추모미사를 봉헌했다. |
박종철의 슬픈 죽음이 용기 있는 의사들의 폭로를 통해 국민의 가슴을 울리는 종소리로 변해갈 즈음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린 전두환 정부는 또 다른 음모를 꾸미고 있었어. 박종철의 죽음에 관계된 경찰관들이 더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사건을 축소 조작해서 경찰관 두 명에게 뒤집어씌우려 했던 거야. 그런데 이런 상황을 낱낱이 지켜보던 한 교도관이 있었다. 서울영등포구치소 보안계장 안유였어. “당시 경찰 수뇌부들이 구속된 경찰들을 찾아와 입 닥치고 있으면 1억원을 주겠다고 회유하고 가족을 내세워 협박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 그의 눈앞에서 경찰들이 무슨 영화 속 조직폭력배들처럼 “1억 줄게, 입 다물어” 따위의 대사를 연출할 수 있었던 것도 그만큼 교도관들을 ‘우리 식구’로 믿었기 때문이었을 거야. 그런데 교도관은 너무도 억울하게 죽어간 대학생의 죽음 앞에서 그야말로 영웅적으로 경찰의 믿음을 배신해. 이 사실을 구치소에 갇혀 있던 재야 인사에게 털어놓은 거야.
자신이 감시하는 수용자에게 자신이 속한 국가기관으로부터 얻은 비밀을 털어놓는 교도관을 상상해보자. 그 마음은 어땠을까? 만약 발각이라도 된다면 자신에게 어떤 일이 들이닥칠지 당연히 고민했을 거야. ‘교도소 침투 간첩단’의 일원으로 조작되어 대공분실에 끌려가 욕조에 머리 담근 채 버르적거리는 자신의 모습을 분명히 그려보았을 거야. ‘가족들에게 해가 미치면 어쩌나’ 하고 이맛살도 찌푸렸을 거다. 그러나 안유 보안계장은 용기를 냈다. “이럴 수는 없어!”
안유는 양심의 소리에 화답했고 스스로를 파멸시킬 수도 있는 비밀을 누설함으로써 역사의 물꼬를 텄다. 그가 토로한 비밀은 또 다른 양심의 전달자들을 통해 외부로 누출됐어. 1987년 5월18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발표한 ‘고문 경찰 축소 조작’ 실태는, 안유 계장이 전한 내용 그대로였지. 생으로 한 젊은이를 죽여놓고 사인 및 범인들까지 축소 조작하려 했던 전두환 정부의 징그러운 알몸이 5월의 햇살 아래 적나라하게 드러났어. 그로부터 20일 뒤 6월 항쟁의 태양은 휴전선 이남 9만8000㎢의 남한 땅 전역을 벌겋게 달구게 돼.
여기서 한번 돌이켜보자. 6월 항쟁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거대한 산맥을 솟게 만든 힘은 어느 걸출한 영웅이나 출중한 능력자로부터 나온 게 아니었어. 오히려 전철 안에서 꾸벅꾸벅 졸고 앉은 아저씨일 수도 있고, 술 취해서 시끄럽게 노래 부르며 지나는 대학생 오빠일 수도 있고, 병원에서 우리더러 “아~ 해보세요” 하며 플래시를 켤 수도 있는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나왔지. 그들이 애면글면 고민하다가 주먹 쥐고 일어서서 내린 결단, 그들이 짜냈던 소박한 용기, “이럴 수는 없지 않아?” 하면서 내젓는 고개가 일으킨 바람이 모이고 쌓여 1987년 6월이 왔던 거란다. 아빠도 그리고 너도 그럴 수 있어. 그게 1987년 6월의 교훈인지도 모르지.
6.25, '깡패 국가' 미국을 낳았다
[프레시안 books] <한국전쟁>

▲ 한국 전쟁의 최대 피해자인 우리 보통 사람은, 역설적이게도 전쟁 후 잊혔다. ⓒwikimedia.org

▲ <한국 전쟁>(베른트 슈퇴버 지음, 황은미 옮김, 한성훈 해제, 여문책 펴냄). ⓒ여문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