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박근혜, 언터쳐블과 브레이커블
김정은-박근혜, 언터쳐블과 브레이커블
[정욱식 칼럼] 책임감 없는 남북의 지도자들
물론 경험에 대한 해석도, 미래에 대한 예측도 완벽할 수는 없다. 오히려 현재의 선택을 정당화하기 위해 경험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미래를 아전인수식으로 예측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선택에 따른 이익의 편협성을 보편성이나 국익의 이름으로 포장하는 경우도 많다. 북핵을 둘러싼 국내외 정치가 이에 해당하지 싶다.
'언터쳐블'을 꿈꾸는 김정은
어느덧 북핵 문제도 20년을 훌쩍 넘겼다. 하지만 20여 년의 역사에 대한 객관적이고 냉철한 해석과 평가의 자리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그 대신에 핵 문제 역사에 대한 아전인수식 해석이 판을 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주요 당사국들의 정책적 선택은 악순환의 화학작용을 야기하면서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던 문제 해결의 교집합마저 지워버리고 있다. 그리고 각자 '막연한 바람'(wishful thinking)에 기대어 미래의 위험을 키우고 있다.
김정은 정권은 '언터쳐블'(untouchable)한 나라를 꿈꾼다. 핵무기라는 '만능의 보검'을 손에 쥐게 된 만큼, 이제는 누구도 건드릴 수 없게 되었다고 자랑한다. 안보가 언터쳐블이 되면 안보 비용을 절감해 경제도 살릴 수 있다고 호언장담한다.
북한이 언터쳐블이 되겠다고 다짐한 데에는 북한이 주장하는 '미국의 적대시 정책'에 대한 자기식의 해석이 주효했다. 협력의 대가는 인색하고도 짧았고 미국의 적대시 정책은 강력하고도 길었다는 것이 북한이 20여 년간의 핵 게임에서 내린 결론이다.

▲ 지난 5월 10일 열린 당 대회 경축 행사에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군중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AP=연합뉴스
그런데 북한의 선택에는 타자의 사례도 큰 영향을 미쳤다. 걸프전 이후 사실상의 무장해제를 당했던 이라크 후세인의 최후, 미국의 관계 개선 약속을 믿고 대량살상무기 개발을 포기한 리비아 카다피의 피살, 한때 세계 3위의 핵보유국이었다가 미국과 러시아를 비롯한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의 안전보장을 약속받고 핵을 모두 포기한 우크라이나의 현실 등은 북한에게 반면교사로 작용했다. 믿을 건 핵무기밖에 없다고 말이다.
'브레이커블'을 도모하는 박근혜와 오바마
반면 박근혜 정부와 오바마 행정부는 북한을 '브레이커블'(breakable)한 상대로 바라본다. 핵무기를 먹을 수는 없는 만큼 가난한 북한이 핵에 의존할수록 종말이 다가올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김정은 정권이 무너지면 북핵 문제도 풀릴 것이라고 속삭인다.
'브레이커블'이라는 말 속에는 '깨지기 쉬운, 깨뜨릴 수 있는, 깨뜨려야 하는' 등 세 가지 의미가 동시에 함축되어 있다. 최악의 빈곤국이자 폐쇄 국가인 북한은 '깨지기 쉬운' 나라로 비춰진다. 압박과 제재를 크게 높이면 '깨뜨릴 수 있는' 존재로도 간주된다. 그리고 최악의 독재국가이자 인권탄압국이며 세계 평화의 최대 위협국가로 악마화된 북한을 '깨뜨려야 한다'는 다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책임성'을 상실한 두 지도자
그렇다. 언터쳐블과 브레이커블. 두 개의 단어 속에 북핵 문제를 둘러싼 갈등의 역사가 압축되어 있다. 강력한 핵보유국이 되겠다는 김정은의 오늘날의 다짐과 "역사상 가장 강력하다"는 대북 제재에 나선 한미일의 현재의 선택은 미래의 불안감을 가중시키고 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남북 양측 지도자의 '책임성의 실종'을 발견하게 된다. 양측 지도자는 왕조시대를 뺨칠 정도로 전권을 행사한다. 핵무기를 실험하고 로켓과 미사일을 쏘라고 지시하는 사람은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다. 하지만 이러한 선택에 따른 고통의 비용은 주민들에게 흘러들어간다. 핵을 가지면 민생과 경제도 일으켜 세울 수 있다고 장담하지만, 이미 시장화와 무역 수준이 크게 높아진 북한이 자력갱생을 통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는 극히 회의적이다.
박근혜 정부도 크게 다르지 않다. 대표적인 게 남북한의 합의도, 법도, 절차도 무시하고 닫아버린 개성공단이다. 이를 두고 혹자들은 남측이 입을 피해가 더 크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때린 주목이 더 아프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때린 사람은 박근혜 정부이고 아픈 사람은 기업인과 노동자, 그리고 그 가족들이다.
선택을 독점하는 관(官)과 그 고통을 떠안는 민(民) 사이의 불일치야말로 오늘날 한반도 정치의 가장 큰 폐해인 셈이다.

▲ 지난 5월 27일(현지 시각)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에 위치한 아프리카연합(AU) 본부를 방문해 연설을 하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 ⓒAP=연합뉴스
터치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
대북 제재가 효과를 발휘하더라도 그 결과는 무너진 북한도, 잘못했다고 살려달라는 북한도 아닐 것이다. 채찍으로 표현되는 제재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북한은 핵무기의 칼날을 더욱 날카롭게 갈게 될 것이다. 그 결과 북한은 '굶주린 야수'가 될 공산이 크다.
이렇게 되면 북한을 터치하기란 더욱 어려워진다. 이건 강경정책과 햇볕정책 모두 마찬가지이다. 절멸의 무기를 손에 쥔 북한을 공격하거나 무너뜨리는 것도, 그렇다고 핵 문제 해결의 진전 없이 화해협력을 추진하기도 모두 여의치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한을 터치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가 있다. 바로 박근혜 정부이다. 이렇게 보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박근혜 정부는 '현재 권력'이다. 반면 상기한 내용은 다가올 미래이다. 현재의 선택에 따라 미래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뜻이다.
또한 박근혜 정부는 대화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있다. 북한은 이미 남북대화를 제안해놓고 있다. 중국은 비핵화와 평화협정 논의를 동시에 진행하자고 하고 러시아도 이에 동의한다. 미국은 대북 제재를 강화하면서도 간혹 대화 가능성을 내비치기도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박근혜 정부는 '선 비핵화'에만 매달려 남북대화와 다자 대화 모두 거부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박근혜 정부는 '보수' 정권이다. 한국의 정치 현실에서 이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가령 박근혜 정부가 비핵화를 중장기적인 과제로 상정하면서 남북관계를 풀겠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단언컨대, 반대에 부딪칠 일이 별로 없을 것이다. 아니 야권을 비롯한 중도·진보 진영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다. 이건 어쩌면 보수 정권의 특권에 해당된다. 안타깝게도 그 특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대북압박 일로매진 한국, '낙동강 오리알' 되나?
북핵 문제에 대해 북한과 중국, 미국이 각자 나름대로의 병진 전략을 구체화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경제·핵무력 건설 병진 노선'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북핵 문제 해결과 북중 관계 강화 병행 전략'을 들고 나왔습니다. 미국은 '북핵 해결과 평화협정 체결'의 동시 추진을 꾀하고 있습니다. 반면 박근혜 정부는 실효성 없는 대북 압박에 올인 하고 있습니다.
원래 병진 전략의 원조는 한국입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남북관계 개선과 북핵 해결의 병행 추진'이 그것입니다. 남북관계 개선과 북핵 문제를 분리해 한국은 남북관계 개선에 주력하고, 북핵 문제는 해결 당사자인 미국이 적극 나설 수 있도록 조력한다는 전략입니다. 한국식 병진 전략은 2008년 이명박 정부의 '비핵 개방 3000'으로 무력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의 역량으로는 결코 풀 수 없는 북핵 문제의 해결을 남북관계 개선의 전제 조건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올해 들어 북한의 4차 핵실험과 장거리 로켓 발사에 대해 박근혜 정부는 개성공단 폐쇄와 대북 제재 등 강경 대응했습니다. 이로써 남과 북은 극단적 대결로 치닫고 있습니다.
물론 북한의 병진 노선과 미·중의 병진 전략은 충돌합니다. 북한은 핵무기를 보유한 채 경제 발전을 이루겠다는 것인 반면 중국과 미국은 한반도 비핵화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중국은 북중 관계를 유지, 강화하면서 북핵 포기를 유도하려 합니다. 미국은 평화협정이라는 당근을 내세워 북한 비핵화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반면 한국은 오로지 북에 대한 제재와 압박만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제재와 압박으로 북한을 붕괴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는 듯합니다. 비현실적이고 위험한 전략입니다. 북핵 해결의 당사자인 미국의 노선과도 어긋납니다. 북핵 문제를 둘러싼 국제 외교전에서 외톨이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한국식 병진 전략의 복원이 시급한 까닭입니다. 한국이 미국, 중국의 병진 전략에 발을 맞추는 것만이(이는 미중과의 병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북한의 병진 노선을 저지하고 북핵 포기를 이룰 수 있는 유일하고 현실적인 길이기 때문입니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특사 자격으로 중국을 방문한 리수용 노동당 중앙위 부위원장은 지난 1일 시진핑 주석을 만난 자리에서 "새로운 (경제·핵무력 건설) 병진 노선은 추호도 변함이 없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앞서 북한은 5월초 개최된 노동당 7차 당대회에서 김정은 위원장의 사업 총화 보고에 따라 경제·핵무력 건설 병진 노선을 '조선노동당의 항구적 전략 노선'으로 결정했습니다. 36년만의 당대회에서 채택된 최고 수준의 결정 사항인 만큼 웬만한 반대급부가 없이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 시진핑 주석은 "한반도 문제에 대한 (중국의) 입장은 일관되고 명확하다"면서 (관련 당사국들의) "냉정과 절제, 소통과 대화"를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북중 관계를 "고도로 중시한다"고 말했습니다. '북핵 반대'의 뜻을 우회적으로 밝히는 동시에 북중관계 강화를 천명한 것입니다. 지난 2013년 최룡해 방중 이후 3년만에 김정은의 특사를 만나준 시 주석의 이 같은 발언에 대해 정지융 상하이 푸단대 교수는 "핵 문제와 다른 문제를 병행하는 중국식 '병진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북한의 병진 노선을 문제 삼아 모든 관계를 단절하지도, 그렇다고 병진 노선을 용인하지도 않는 '중국식 북핵문제 해결과 북중관계 강화 병행 전략'이라는 겁니다.
이와 관련해 중국의 한 언론은 "국제사회의 많은 이들이 북중 대립을 바라지만, 이는 양국에 이롭지 않다"면서 "리수용 부위원장의 이번 방문은 북중이 이런 함정을 이성적으로 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평가했습니다. 리수용의 이번 방중을 통해 중국식 병진 전략이 그 실체를 명확히 드러낸 것입니다.
(☞관련 기사 : "시진핑, 중국식 병진 전략 구사…핵문제-관계 강화 병행")

▲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리수용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연합뉴스
사실 중국의 이러한 병진 전략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북핵 해결에 관한 일관된 입장입니다. 이미 북한의 4차 핵실험 직후인 1월 7일 왕이 외교부장은 케리 미 국무부 장관과의 전화 통화에서 '북한 핵 및 로켓 활동 동결' 대 '한미 합동 군사훈련의 축소 내지 중단'을 첫 단계로 하는 비핵화 협상을 제안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북핵 포기와 북미 관계 정상화를 맞바꾸자는 것이죠. 미국 또한 북한 핵실험 직전인 지난 해 연말 북한과 평화협정 문제를 비밀리에 논의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 협상은 미국의 '선 핵포기' 주장과 북한의 '동시 추진' 입장이 맞부딪히면서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난 3월 11일자 '프레시안 뷰'에서 지적한 것처럼, 미국이 1990년대 초 북핵 문제 발생 이후 줄곧 고수해 온 '북한의 선 핵포기' 입장을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입니다. 이와 관련, 이정철 숭실대 교수는 3월 9일자 창비주간논평('평화체제 입구론과 비핵화 팻말론')에서 "미국이 25년간 고수해온 '선 비핵화, 후 평화협정' 원칙을 버리고 비핵화와 평화협정 동시 병행론을 수용해가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사실 북한은 2014년 11월 제임스 클래퍼 미 국가정보국장(DNI)의 방북을 전후해 '한미군사연습과 북한 핵실험의 상호 중단'을 제안했고 2015년 1월 9일에는 이를 공개 제안했습니다. 작년 연말의 북미 협상도 이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클래퍼 국장은 지난 5월 4일 한국을 비밀리에 방문했습니다. 한국 정부와의 구체적 논의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미 정보기관의 최고 수장이 직접 한국을 방문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북미 협상과 관련해 한국의 양보선이 어디까지인가를 타진했다는 관측도 나옵니다.
(☞관련 기사 : 박근혜, 중-미의 대북 협상에 허 찔리나)
또한 지난 2월 독일 베를린에서는 북한 외무성 미국국의 최선희 부국장과 빅터 차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한국 석좌, (미국의 북한 전문 사이트 '38노스'의) 조엘 위트 연구원 등이 만났습니다.
나아가 지난 5월 27일, 스웨덴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IPRI) 학술회의에서 북한 외무성의 미국통인 한성렬 미국국 국장과 최선희 부국장 일행이 토마스 피커링 전 국무부 정무 차관과 에번스 리비어 전 미 국무부 동아태 부차관보 일행을 만났습니다. 미국 측 참석자들은 현직이 아닌 전직 관료들이었지만, 북한은 이를 통해 자신의 의중을 미국 측에 전달했을 것입니다. 북핵 문제와 관련해 북한과 미국 사이에 물밑 접촉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한편 지난 5월 31일에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요리사 출신으로 김정은 위원장의 소년 시절 친분을 맺은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藤本健二)가 방북 길에 나섰습니다. 후지모토는 지난 4월에도 10여 일 간 방북해 김정은과 면담한 바 있습니다. 그는 방북 후 일본 시사주간지 <슈칸겐다이(週刊現代)>에 보도된 방북 수기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자신에게 "북일 수교의 가교 역할을 해달라고 했다"고 밝혔습니다. 북한이 중국, 미국은 물론 일본에 대해서도 전방위 외교를 펼치고 있는 셈입니다.
이렇게 보면 북한은 지금 미국, 중국, 일본을 상대로 활발한 외교전을 펼치고 있는 반면, 한국은 오로지 대북 압박에만 일로매진하고 있습니다. 이러다 한국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는 것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