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문화, 예술

세월호의 의혹

일취월장7 2018. 4. 14. 10:21

해경 123정에 탄 '스즈키복' 남자의 정체?

2016.03.03 15:37:27


[세월호, 의혹의 확정 ①] 세월호 의혹들이 사라졌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의혹은 수백 가지가 넘습니다. 의혹이 수백 가지가 넘게 되면 한 가지 결과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바로 사실상 의혹이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의혹이 한 두 가지인 경우, 사람들은 이를 의혹이라고 인지할 수 있고 또 기억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일정 시간이 지난 후에라도 "그거 어떻게 됐지?" 하고 상기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의혹이 수백 가지가 되면 우선 무엇이 의혹이고 무엇이 의혹이 아닌지 구별하기가 대단히 힘들어집니다. 그러다 보니 의혹을 인지하기가 힘들어지고, 인지하기도 힘든 상황에서 기억하기는 더더욱 힘든 일이 돼 버립니다. 의혹이 수백 가지가 되면 모든 것들이 뿌옇게 흐려지게 됩니다. 그리고 잊힙니다. 

그동안 국회 국정조사 특위의 활동이 있었고, 선장·선원·123정장·청해진해운·진도VTS 등에 대한 검찰 수사와 재판이 있었고, 감사원의 감사가 있었고, 지난해 12월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의 청문회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진상 규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떠한 사안이 의혹인지 아닌지 정도는 판단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한 것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앞으로, 이 연재를 통해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뭔가 석연치 않은 문제 중에서 명명백백하게 의혹 사항인 것들을 확정해 나가려고 합니다. 국정조사 때 국회에 제출된 방대한 자료들, 재판 과정에서 제출되고 생산된 방대한 자료들을 충분히 활용하고 문서 자료, 영상 자료, 사진 자료, 음성 녹취록 등 다양한 형태의 자료들을 분석해, 사람이 살다 보면 있을 수도 있는 일인지, 단순히 석연치 않은 수준의 일인지, 아니면 명백한 의혹 사항인지를 확정해 나가고자 합니다. 

의혹을 확정함에 앞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실수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실수할 수도,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소리를 잘 못 들을 수도 있고, 잘 못 볼 수도 있고, 생각과 다른 말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한다면 이는 실수로 하는 말이 아닐 것입니다. 동일한 대상을 일정 시간 계속 볼 수 있다면, 동일한 소리를 일정 시간 계속 들을 수 있다면 착각이나 실수의 가능성은 현저히 낮아질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아래 사진을 한 번 봐 주세요.


▲123정 순경이 채증한 영상 갈무리 화면(이하 동일).


위 사진은 2014년 4월 16일 오전 9시 48분 57초경의 상황입니다. 해경 123정이 세월호 조타실에 접안해 세월호 조타실 안에 있던 사람들을 구조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노란 원 안의 사람은 세월호 2등 항해사로서 조금 전 세월호 조타실에서 내려와 123정 선수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모습을 조금 확대해 보겠습니다. 

독자 여러분께서는 이 사람이 일반 승객으로 보이시나요? 일반 승객이라고 보기 힘든 복장에다가 무전기까지 들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선원들이 있는 곳인 '조타실'에서 나왔습니다. 일반 승객으로 보기 위해 아무리 노력을 해 보아도 그렇게 보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지금 저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일명 '스즈키복'이라고 하는 상하 일체형 작업복입니다. 스즈키복을 잘 모르는 일반인의 눈으로 보아도 저 사람을 일반 승객으로 보기는 무리가 있다고 보입니다.

그런데 당시 세월호 침몰 현장으로 출동했던 해경 123정 승조원 13명 전체는 저 사람을 포함해 세월호 선원들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고 그냥 일반 승객인 줄 알았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의경 한 사람은 나중에 무전기를 보고 알아봤다고 이야기합니다만 나중 일입니다.)

저 사람이 선원임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요? 몇 가지 가정을 해보겠습니다. 만약 저 사람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면 선원임을 못 알아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저 사람이 바깥에는 잠시 나와 있고 대부분의 시간을 어딘가 으슥한 장소에 머물러 있었다면 선원임을 알아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 사람은 123정에 올라탄 이후 계속적으로 왕성한 활동을 합니다.




10시 6분 42초경에는 해경과 이야기도 하고, 



10시 7분 37초경에는 해경과 함께 세월호 3층 유리창으로 로프를 집어넣어 승객들을 일부 구조하는 활동을 합니다. 

10시 46분경에는 해경과 함께 학생에게 인공호흡을 하기도 합니다. (이 부분에서는 희생자 학생의 모습이 있어서 사진을 넣지 않겠습니다.) 

저 사람을 못 볼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입니다. 

또 다른 가정을 해보겠습니다. 만약 세월호 선원들을 볼 수 있는, 즉 당시 현장으로 출동한 해경이 몇 명 되지 않는다면 선원들을 확인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123정의 승조원은 총 13명(의경 3명 포함)이었습니다. 위 사진들에서 볼 수 있듯이 세월호 선원들은 123정 승조원 여러 명과 계속 함께 일정한 활동을 합니다. 또 123정 조타실에서 이 모습들을 바라보고 있는 조타실 해경들도 있었고, 채증을 담당해 이 모습들을 촬영하고 있는 해경도 있었습니다. 

백 번 양보해서 세월호 선원이 저 사람 하나뿐이었다면 또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장 바로 위 10시 7분경 사진에서만 보더라도, 구조 작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뒤에 서 있는 두 사람 중 삭발을 한 사람은 세월호 (견습) 1등 항해사이고 그 뒤에 있는 사람은 세월호 1등 항해사입니다. 1등 항해사의 점퍼 왼쪽 상단에는 회사 마크와 '청해진해운'이라는 한글이 찍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구조하는 사람들 무리 중에서 제일 앞에 하늘색 옷을 입고 있는 사람도 세월호의 조타수입니다. 

그 어떤 가정을 해 봐도 해경이 선원을 인지하지 못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입니다. 이렇게 봤을 때 당시 세월호 참사 현장에 출동했던 해경 123정 승조원들 전체가 세월호 선원들을 선원인 줄 몰랐다고 하는 이야기는 믿기 힘들고, 그들이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뭔가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따라서 저는 이를 명백한 의혹으로 확정하고 싶은데 독자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오늘은 하나의 예를 든 것뿐입니다. 앞으로 본격적으로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드린 해경의 세월호 선원 신원 확인 문제는 연재 중 다시 한 번 본격적으로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어떤 선입견이나 편견도 배제하고 풍부한 자료와 건강한 상식에 기반해 정보를 분석해 나가려고 합니다. 최대한 많은 경우의 수를 검토하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의혹을 확정해 나가겠습니다. 

그렇게 명백한 의혹들을 정리해 나가다 보면 나중에는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일정한 큰 그림이 그려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쪼록 세월호 참사에 보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세월호, 의혹의 확정'은 '국민참여를 통한 세월호 진상규명' 후속 연재입니다. 박영대 위원은 세월호 연구팀장을 맡고 있습니다.) 



'가만히 있으라' 방송에 해경 "그렇게 해주세요"

2016.03.11 09:54:11


[세월호 의혹의 확정 ②] 목포서 상황실 1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52분 32초. 단원고 학생 최모 군은 침몰하는 세월호에서 119로 신고를 합니다. 당시 이 전화를 받은 사람은 전라남도 소방본부 119종합상황실의 조모 지방소방위. 그는 목포해양경찰서에 통화를 연결하였고, 그래서 8시 54분경부터 신고자, 119직원, 목포해경의 3자 통화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08:54:07


전남119 : 예 수고하십니다. 여기 119상황실인데요.
목포해경 : 네
전남119 : 지금 배가 침몰하고 있다고 배가 침몰하고 있다고 신고가 왔는데요.
(중략)
전남119 : 신고자분 지금 해양경찰 나왔습니다. 바로 지금 통화 좀 하세요.
목포해경 : 여보세요. 목포해양경찰입니다. 위치 말해주세요.
신고자 : 목포해양경찰. 잘 안들려요.
목포해경 : 위치! 경위도 말해주세요.
전남119 : 경위도는 아니고요 배 탑승하신 분. 탑승하신 분.
신고자 : 핸드폰이요?
목포해경: 여보세요. 여기 목포해경 상황실입니다. 지금 침몰 중이라는데 배 위치 말해주세요.배 위치. 지금 배가 어디 있습니까?
신고자 : 위치를 잘 모르겠어요.. 지금 이곳
목포해경 : 위치를 모르신다고요? 거기 GPS 경위도 안 나오나요. 경도하고 위도
신고자 : 여기 섬이 이렇게 보이긴 하는데.
목포해경 : 네?
신고자 : 그걸 잘 모르겠어요.
(하략)


목포해경 쪽에서 전화를 받은 사람은 목포서 상황실의 고모 경사였습니다. 그가 바로 학생에게 경도와 위도를 물어본 바로 그 사람입니다. 이는 언론에도 많이 보도되었습니다.

해경이 학생에게 경위도를 물어보니까 듣고 있던 119직원이 '배 탑승하신 분', 즉 승객이니까 경위도를 물어보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이야기를 했음에도 재차 경위도를 묻고 있습니다. 물론 이 정도의 일은 실수나 착각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후 고모 경사는 배 이름과 학생 이름, 승선원이 몇 명이나 되는지를 물어보았고, 주변에 있는 선원을 바꿔 달라고 하였는데 학생이 찾아봐도 없다고 하여 통화를 종료하였습니다. 학생은 같은 학교에서 350여 명 정도가 승선해 있다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2014년 4월 16일 당시 목포서 상황실, 정확하게는 목포해양경찰서 경비구난과 상황실은 상황담당관 1명과 그 밑으로 5명씩으로 편성된 3개조(A, B, C조), 총 16명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각 조의 5명은 상황실장, 상황부실장 겸 122접수요원(Ⅰ), 122접수 전담요원(Ⅱ), 그리고 상황요원 2명의 구성이었습니다. 


목포서 상황실 구성

상황담당관은 조모 경감
A조는 상황실장인 이모 경위, 부실장 김모 경사, 임모 경사, 오모 경장, 김모 경장
B조는 상황실장인 백모 경위, 부실장 박모 경사, 박모 경사, 유모 경장, 이모 경장
C조는 상황실장인 이모 경위, 부실장 고모 경사, 문모 경사, 김모 경장, 장모 순경


A, B, C조가 24시간씩 교대근무를 하였고, 근무, 휴무, 대기의 차례로 진행되었습니다. 2014년 4월 16일 오전 9시는 B조에서 C조로 교대가 이루어지는 시간이었는데, 8시 30분부터 C조가 근무를 시작하여 8시 30분부터 9시까지는 B조와 C조가 합동근무를 하면서 인수인계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8시 52분은 아직 B조 근무시간이지만 이미 근무를 시작했던 C조의 부실장 고모 경사가 단원고 학생의 전화를 받았던 것입니다. 

고모 경사가 학생과 통화하는 동안인 8시 57분에 C조 상황실장 이모 경위는 사고 지점과 가장 가까이에 있던 해경 123정에 출동 명령을 내립니다. 고모 경사가 신고 전화를 받으면서 주변 근무자들이 신고 내용을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복창하였고, 이모 경위는 그 소리를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9시 4분이 되면 중요한 전화가 걸려옵니다. 바로 세월호 승무원 강모 씨가 122로 전화를 걸어온 것입니다. (이 강모 씨가 바로 마지막까지 "가만히 있으라" 방송을 한 사람입니다.) 이 전화는 C조의 문모 경사가 받습니다. 


09:04:40


해양경찰 : 예, 목포 해양경찰입니다. 말씀하십시오.
(중략)
해양경찰 : 예, 그 혹시 사람 같은 거, 사람이 빠졌습니까? 지금 현재?
강** : 예, 지금 사람이 배가 기울어서 사람이 한 명 바다에 빠졌고요.
해양경찰 : 한 명이 바다에 빠졌어요? 지금 구명동의나 그런 거 빨리 다 그거 해서 여객선,
강** : 지금, 지금 저희가
해양경찰 : 예.
강** : 배가 40도, 45도 지금 기울어서 도무지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안돼요.
(중략)
해양경찰 : 예, 그 상황을 지금 최대한 빠진 사람을 그래도 좀 구조를 해야 되지 않습니까? 지금.
강** : 예.
해양경찰 : 예, 그거 좀 조치 좀 취해주십시오. 그.. 어떻게 파악을 하셔가지고.
강** : 지금, 지금 저희가 움직일 수 있으면 상황파악을 하겠는데,
해양경찰 : 예.
강** : 움직일 수가 지금 없어요, 지금 배가 45도 정도 기울어 있어서, 지금.
해양경찰 : 그런데 왜 지금 배 속력은 어떻습니까? 지금 속력은?
강** : 지금 엔진을 지금 다 끈 것 같아요. 지금 엔진 돌아가는 소리는 안 들리거든요?
해양경찰 : 아, 그래요? 그런데 속력이 지금 저희가 파악했을 때는 속력이 좀 많이 나오고 있거든요? 여보세요?
강** : 지금 가고 있지는 않아요, 엔진을 꺼서
해양경찰 : 예, 알겠습니다. 지금 저희, 저희 경비정 있는 데로 지금 다 이동하고 있거든요? 조금만 참으시고 다들 구명동의를 입으시라고 입으라고 다 지금 전파를 해주십시오.
강** : 지금 입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에요. 배 기울어서 움직일 수가 없어요.
해양경찰 : 움직일 수 없어요? 예, 알겠습니다. 그러면 최대한 안전할 수 있게 그쪽 그 언제든지 하선할 수 있게 바깥으로 좀 이동할 수 있게 그런 위치에 지금 좀 잡고 계세요, 일단은.
여보세요?
강** : 지금 선내에서 움직이지 마시라고 방송을 계속 하고 있고요.
해양경찰 : 예, 예. 그렇게 해주세요. 예, 예.
강** : 지금 밖으로 이동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안 돼요, 배가 지금 많이 기울어져 있어가지고.
(하략)


3분 1초 동안 이루어진 이 통화는 당시 세월호와 관련하여 중요한 내용을 모두 담고 있습니다. 배가 40도, 45도 기울어져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 사람이 한 명 바다에 빠졌다는 것, 배가 기울어 움직이기 힘들어서 구명동의를 입거나 하선하기 좋은 곳으로 이동하는 것조차 안 된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지금 선내에서 움직이지 마시라고 방송을 계속 하고 있"다는 것. 더욱이 이러한 정보가 세월호의 일반 승객이 아닌 선원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신뢰도도 높은 정보였습니다. 

이렇듯 중요한 정보들을 알게 된 문모 경사는 다음으로 어떤 행동을 취했을까요? 놀랍게도 이 중요한 정보들을 상황실장이나 누군가 다른 이에게 전파하지 않고 본인만이 홀로 고이 간직합니다. 이전과 같은 내용의 중복 신고라고 판단하였다고 합니다.

지금 선내에서 움직이지 말라는 방송을 하고 있다는 승무원의 말에 문모 경사는 "그렇게 해주세요"라고 답하였습니다. "예예 그렇게 해주세요"는 상대방의 말을 분명하게 들었을 때 하는 이야기 아닐까요? 그렇지 않다면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세요"가 나와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이에 대해 문모 경사는 신고 전화를 제대로 못 알아 들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선내 방송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재질문도 하고, 어떤 방식으로 선내 방송을 해 달라고 유도를 했을 것인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으로 봐서는 자신이 선내 방송이 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선내 대기 방송'은 세월호 참사 전체에 있어서 매우 결정적인 부분을 차지합니다. 매우 이른 시간인 9시 4분경에 목포해경은 세월호에서 '선내 대기 방송'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고 이를 전 세력에게 전파했어야 합니다. 

몇백 명이 타고 있는 배가 침몰하는 대형사고의 상황에서, 상황실에 근무하는 경찰이, 단지 잘 못 들었다고 해명하는 것은 뭔가 불충분하게 생각되지 않나요?

지난 회에 사람은 실수할 수도, 착각할 수도, 소리를 못 들을 수도, 잘 못 볼 수도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기에 문모 경사 역시 사람이기에 실수할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일단 넘어가겠습니다. 

문모 경사는 이후 두 번의 신고 전화를 더 받습니다. (목포서 상황실 2에서 계속)



해경, "물에 잠기기 직전"이라는데 "기다리라"?

2016.03.17 14:13:38

[세월호 의혹의 확정 ③] 목포서 상황실 2
             

지난 회에 이어 문모 경사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겠습니다. 문모 경사는 두 번의 신고전화를 더 받습니다. 우선 9시 14분경 시작된 37초 동안의 통화입니다.


2014년 4월 16일 오전 09:14:21


여자1 : 지금 저희 배 기울어져가지고 갇혔거든요?
해양경찰 : 예, 어디에 갇혔다고요?
여자1 : 세월호요, 세월호! 인천항
해양경찰 : 예, 예.
여자1 : 저희 단원고인데요.
해양경찰 : 예, 지금 저희 경비정이 다 가고 있습니다. 현재 세월호 쪽으로
여자1 : 예, 감사합니다. 빨리 와주세요!
해양경찰 : 예, 알겠습니다. 지금 전화주신 분 승객이신가요? 승객?
여자1 : 네?
해양경찰 : 승객이세요? 승객?
여자1 : 예, 저희 지금 고등학생이에요.


지난 회에서 이야기했던 9시 4분 승무원과의 통화 이후 10분이 지난 상황에 걸려온 전화입니다. 신고자는 배가 기울어져서 '갇혔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본적인 신고자의 인적사항부터 시작해서 배의 상태가 어떠한지, 신고자는 배의 어느 위치에 있는지, 지금 배에서 어떠한 조치가 취해지고 있는지 등등을 알아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여겨집니다만, 경비정이 가고 있다는 이야기만 합니다. 

문모 경사는 중복 신고라고 생각했고, 경황이 없었고, 이런 침몰 상황에 대한 경험이 없어 미처 생각을 못 했다고 해명합니다. 

다음으로 9시 22분경 시작된 53초 동안의 통화입니다. 

09:22:53


남자1 : 예, 배 지금 잘하면 넘어갑니다. 지금, 저기, 저..
해양경찰 : 예, 예. 알겠습니다. 지금, 전화.. 여보세요? 상황을 좀 말씀을 해주세요. 지금 현재 상황.
남자1 : 지금 배가 지금 50도 이상 저, 저..
해양경찰 : 50도 이상 기울었다고요? 예, 예. 여보세요? 예, 알겠습니다. 지금 귀선 상황 계속 신고를 받고 있거든요. 지금 이동 중이니까요,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남자1 : 예.
해양경찰 : 지금 뭐 좀 안전, 최대한 안전하게 어디 좀 잡고 계세요. 여보세요?


9시 4분경 승무원이 40도, 45도라고 이야기했고 20분도 지나지 않아 50도 이상 기울었다고 신고자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배가 빠른 속도로 침몰하고 있다는 것인데, 배의 상황을 더 알아보거나 하는 등의 이야기는 없이 이동 중이라는 것, 그리고 어디 좀 잡고 있으라는 이야기뿐입니다. 

이 통화에서는 신고자인 '남자1'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신고자는 선원이었는데, 당시 세월호 조타실에 있던 2등 항해사였습니다. (본 연재 1회에서 스즈키복을 입고 무전기를 들고 있던 그 사람입니다.) 2등 항해사 김모 씨가 조타수 조모 씨의 휴대전화로 해경에 전화를 했던 것입니다. 

당시 세월호 조타실의 상황은 이러했습니다. 유조선 둘라에이스호가 세월호 근방에 도착해서 세월호에서 승객들이 탈출시키면 구조하겠다고 반복적으로 이야기를 했음에도 세월호는 둘라에이스호와 교신해 구조 대책을 세우지는 않고 진도VTS에 해경이 언제 도착하는지만을 묻고 있었습니다. 그 즈음 2등 항해사 김모 씨는 122로 전화를 했던 것입니다.


▲세월호 특조위 1차 청문회 모습. ⓒ프레시안(최형락)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만약 이때 세월호 조타실에서 둘라에이스호와 교신하면서 승객들을 퇴선시켰다면 전원 구조가 가능했습니다. 당시 유조선인 둘라에이스호에는 기름이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해수면과 갑판 사이 높이도 높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둘라에이스호에는 당시 세월호에 탑승하고 있던 승객 모두를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습니다.



<선장‧선원재판 1심 10회 공판조서 둘라에이스호 문모 선장 증인신문조서>

문: 만약 증인의 유조선에 그렇게 구조한 사람이 있었다면 몇 명까지나 수용할 수 있었는가요.
답: 구명뗏목으로 탈출한다면 몇 명이 아니라 세월호 선박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구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략)
문: 증인의 배와 해수면 간 상당한 높이가 있는데, 라이프 래프트에 탄 승객들을 어떻게 증인의 배로 끌어올리는가요.
답: 사다리가 준비돼 있고, 그때 당시는 둘라에이스호가 적재상태여서 수면과의 높이가 1. 5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중략)
문: 세월호 침몰 당시의 기상상황, 조류, 수온에 비춰 봤을 때 승객들을 즉시 퇴선 시키면 위험하다고 판단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가요, 아니면 그런 상황에서는 승객들을 빨리 퇴선시켜도 전혀 무리가 없는 상황이라고 봤는가요.
답: 그 당시에는 주간이어서 시야도 좋고, 파고도 0.5m 이내로 잔잔했습니다. 한겨울도 아니어서 수온도 그렇고, 그래서 그 당시에는 퇴선 시키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둘라에이스호는 이후에도 계속 현장에 있다가 12시 30분에서 13시 사이에 떠났습니다. 꼭 이때가 아니더라도 세월호가 완전히 전복되기 전 언제라도 퇴선 명령만 내려졌다면 전원 구조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후에는 둘라에이스호 외에도 어업지도선, 어선 등이 속속 도착하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이렇듯 중요한 문제를 제쳐 두고 세월호 조타실에서 2등 항해사가 해경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신의 신분은 밝히지 않고 50도 이상 기울었다는 것, 배 넘어갈 것 같다는 것 등만을 전합니다. 더욱 이상한 것은 해경에게서 들은 경비정이 7~8마일 남았다는 사실을 통화 이후 다른 선원들에게 전달하지도 않습니다.


<선장‧선원재판 1심 25회 공판조서>

검사
문: 다른 선박은 필요 없고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던 해경 경비정이 7마일, 8마일 정도 남아 있어서 곧 도착한다고 하는데, 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는가요.
답: ....

재판장
문: 보통 사람 같으면 기다리던 해경이 7마일, 8마일 정도 왔다면 기뻐서라도 다른 선원들에게 이야기해 주었을 것 같은데, 아닌가요.
답: 당황해서 7마일, 8마일을 들은 기억이 없어서······.
문: 피고인은 단지 조난당한 사실을 전파하기 위해서 전화 통화한 것인가요.
답: 예.
문: 피고인은 해경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듣고서 상황을 전파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지요.
답: 물론 있습니다. 그런데 서 있기 힘들다 보니까 "어 어어. 저 저저"라고 하면서 상대방의 이야기는 듣지 못하고 제 이야기만 했던 것 같습니다.


서 있기 힘들어서 7마일, 8마일을 못 들었다고 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사람은 못 들을 수 있습니다. 

목포해경으로 걸려온 신고 전화 한 가지 더 소개하겠습니다. 이 전화는 9시 6분경 B조의 박모 경사가 받은 전화입니다. 

09;06:38


남자1 : 아니, 지금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데 빨리 좀 오셔야 될 것 같은데
해양경찰 : 지금 경비함정이랑 가고 있습니다. 지금 환자도 있는가요?
남자1 : 예, 예. 지금 현재 완전히 기울어서 물에 잠기기 일보 직전!
해양경찰 : 예, 알겠습니다. 지금 저희 경비함정 가고 있습니다.
남자1 : 여기 사람이 한두 명 탄 거 아니거든요, 지금요?
해양경찰 : 예, 알고 있어요. 알고 있어요, 저희가 조치하고 있습니다.
남자1 : 예, 예. 신고는 다 들어갔죠?
해양경찰 : 구명동의 입고 구명동의 입고 최대한 차분하게 선장 지시 따르고 계십시오.
남자1 : 구명동 입을 지금 상황도 못 돼요.


신고자는 '목숨이 왔다 갔다 한다', '물에 잠기기 일보 직전이다', '많은 사람이 타고 있다', '구명동의 입을 상황도 안 된다'는 등 매우 절박한 정보를 알려주고 있는데, 박모 경사는 알고 있으니 기다리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습니다. 

또한 실제 음성파일을 들어보면 박모 경사는 신고자가 말을 하는데 그 말을 중간에 자르기까지 하면서 이미 알고 있으니 기다리라는 취지의 말만 되풀이 하고 있다는 것이 검찰 진술조서를 통해 밝혀져 있습니다. 

문제는 신고자와의 통화 상황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목포서 상황실 직원들은 신고자들의 전화를 끊은 뒤 나중에 다시 한 번 연락해 신고자들의 안전을 확인하는 작업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나중에 보시겠지만 현장으로 출동한 123정은 세월호와 단 한 번도 교신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미 한번 통화를 했었던 세월호 승객들과 다시 통화해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너무도 중요한 일이었고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다음은 해양긴급전화 122 운영 규칙입니다. 

<해양긴급전화 122 운영 규칙>


제8조(임무) 122 접수요원은 다음 각 호의 업무를 수행한다.
1. 122 신고처리
2. 신고사건에 대한 추적‧종결‧수배 및 해제
3. 해양긴급전화 122에서 접수‧처리되는 모든 신고사항에 대한 기록유지
4. 해양긴급전화 122 관련 각종 통계의 작성 및 보고


여기서 추적은 신고접수를 받아 상황을 파악하고 전파하는 것, 종결은 인명이 안전하다고 확인되고 구조세력이 구조를 마친 것을 말합니다. 

추적과 관련해 목포서 상황실은 신고자들의 인적 사항이나 배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았습니다. 종결과 관련해 목포서 상황실은 신고자들의 안전을 확인하는 작업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의혹으로 확정해 버리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일어납니다만, 사람은 실수할 수 있으므로 그냥 석연치 않은 수준의 일이라 생각하겠습니다. 

목포서 상황실에서 아직 확정할만한 의혹은 등장하지 않은 듯합니다. 다음 주에는 한 가지 의혹이 확정될 것입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목포서 상황실 3에서 계속)



해경, "탈출하라 대공 방송" 거짓 보고…왜?

2016.03.25 08:00:35


[세월호 의혹의 확정 ④] 목포서 상황실 3

             

지난 회에 둘라에이스호 도착 이후 언제라도 퇴선 지시만 내려졌다면 전원 구조는 가능하였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이 중요한 퇴선 지시는 세월호 참사 전체에 있어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선장이나 선원들이 퇴선 방송을 한 적도 없고, 구조를 위해 도착한 해경 123정이 퇴선하라는 대공 방송을 한 적도 없고, 123정 승조원들이나 헬기 항공구조사들이 세월호에 올라타 메가폰을 활용하거나 아니면 육성으로라도 퇴선 지시를 한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다음 기록을 한 번 봐주세요. 


ⓒ검찰


10시 5분 목포상황실은 "탈출하라고 대공 방송 중"이라는 상황을 문자상황방에 입력하여 상황을 전파, 보고합니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상황을 보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세월호 참사 전체에 있어서 어떤 형태로든 퇴선 지시는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검찰 수사보고서에 따르면 세월호 침몰 신고 이후 목포해양경찰서(목포서) 상황실, 서해지방청찰청(서해청) 상황실, 본청 상황실 등은 해경 내부망인 문자상황보고시스템(코스넷)을 이용하여 서로 상황을 전파, 보고하고 지시사항을 전달하였습니다.

쉽게 말해 해경 채팅방을 만든 것입니다. 정보 전달을 위해 채팅방을 만들었는데, 바로 거기에서 10시 5분에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상황을 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숫자를 조금 다르게 입력한다거나 하는 수준이 아니라 현실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을, 해양경찰 공무원이, 그것도 정확성을 매우 중요시하는 상황실에 근무하는 경찰 공무원이, 굳이 키보드를 눌러서 입력을 한 것입니다. 세월호 참사에 있어 가장 결정적인 문제, 가장 안타까운 문제를. 

누구에게 정보를 받았을까요? 그 누구는 도대체 어디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상황을 전달받게 되었을까요?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이것은 실수나 착각의 범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는 명백한 의혹으로 확정하고자 합니다. 

2014년 4월 16일 당시 목포 상황실에서 문자상황방을 담당했던 해경은 확인이 가능합니다. 다수의 진술을 통해 당시 문자상황방 담당자는 목포서 상황실 B조의 이모 경장이었다는 것이 밝혀져 있습니다. 당장 조사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목포해경에 그치지 않습니다. 10시 조금 넘은 어느 시점부터 탈출 선내방송이 이루어진다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내용은 곳곳에서 등장하게 됩니다. 우선 경찰청입니다.



ⓒ박영대


위 상황보고서는 경찰청(해양 경찰 말고 육지 경찰을 말합니다) 112종합상황실의 상황보고서(3보)입니다. 우선 여기에서도 10시 18분에 세월호 선장이 "바다로 뛰어내리라고 선내 방송"을 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상황을 해경에 이어 경찰청도 전파하고 있습니다. 

또 목포서 상황실은 단지 "탈출하라고 대공 방송 중"이라고만 보고했지만, 경찰청은 '선장'을 구체적으로 지칭하면서 탈출 선내 방송의 주체를 밝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월호 선장은 이미 9시 46분경 세월호 조타실을 빠져나와 123정에 올라탔습니다.

그 외 이 상황보고서의 발송일자는 4월 16일 10시 13분인데. 10시 18분의 일을 적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오타로 이해해야 할까요? 

다음으로 언론입니다. 역시 10시 조금 넘은 시점부터 언론에서도 일제히 탈출 선내 방송이 나오고 있다고 보도하기 시작합니다.



ⓒ한국방송공사

ⓒ문화방송


세월호의 모든 갑판과 난간이 물에 잠겨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곳은 다 물에 잠긴 시간이 10시 17분경이고, 마지막 표류자가 구조되는 시간이 10시 21분경입니다. 즉 10시 조금 넘은 시간은 사실상 세월호가 전복되는 시간대입니다. 

해경의 123정과 헬기, 초계기(CN-235) 등은 이 과정을 뻔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다른 한편 언론은 이 과정을 취재할 수 있는 입장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해경, 경찰청, 언론이 한목소리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일을 전파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을까요? 독자 여러분의 의견은 어떠신지요? 

탈출 선내방송(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거짓 정보 전파)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의혹을 구성합니다. 한두 군데도 아니고 해경, 경찰청, 언론이 하나같이 거짓 상황을 전파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듭니다. 

오늘 하나의 의혹을 확정하였습니다. 앞으로도 이렇듯 납득하기 어려운 의혹들이 잔뜩 등장할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세월호 참사는 진상규명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진상규명을 위해 6백만 명 이상의 시민들의 서명을 통해 특별법이 만들어지고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가 꾸려져 현재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 28일과 29일, 서울시청 8층 다목적홀에서 세월호 특조위의 제2차 청문회가 개최됩니다. 침몰 원인이 주된 주제입니다. 구체적으로 △침몰 원인 및 선원 조치의 문제점, △선박 도입 및 운영 과정 문제점, △침몰 후 선체 관리 및 인양의 문제와 관련된 증인을 불러서 이야기를 듣게 될 것입니다. 

세월호 참사의 침몰원인으로 정부가 제시했던 것들이 과연 타당한지, 침몰 당시 선원들은 어떠한 행동을 하였는지, 세월호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도입되었고,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그리고 인양작업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묻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특히 인양과 관련해서는 사실상 시민분들이 처음으로 이야기를 듣게 되는 자리가 아닌가 합니다.

팩트TV, 416TV, 오마이TV, CBS 노컷뉴스, 고발뉴스, 국민TV, 주권방송 등이 청문회를 생중계한다고 합니다. 방청을 오셔도 좋고 중계를 시청해 주셔도 좋습니다. 청문회 이후라도 관심 있는 특정 주제 부분을 조금씩이라도 봐 주시기 바랍니다.

보다 많은 분들이 세월호에 관심을 가져 주실 때 진상규명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다음 주에 청문회 지나고 뵙겠습니다.


세월호 항해 기록은 왜 편집됐나?
2016.04.07 16:19:31

[세월호 의혹의 확정 ⑤] AIS, 진상규명의 출발점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제2차 청문회가 마무리되었습니다. 1차 청문회가 '구조'를 다루었다면 이번에는 '침몰'을 다루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미 많은 언론에서 청문회에서 나온 내용들을 다루었으므로 여기서는 기술적으로 다소 까다로운 부분과 언론에서 많이 주목하지 않았던 부분을 중심으로 조금 더 보충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AIS 항적 문제입니다.

선박은 어떻게 움직이는가?


AIS 항적도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선박 관련 지식이 필요합니다. 우선 '타'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타(rudder, 방향타)는 선박의 선미에 위치하여 선박의 방향을 바꾸는 데 사용하는 장치입니다. 


▲물 밖으로 나와 있는 세월호의 '타'.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위 사진은 '타'가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진입니다. 세월호가 90도 이상 기울어 물속에 있어야 할 타가 완전히 밖으로 나와 있는 것입니다. 세월호는 타가 가운데 있고 양쪽에 프로펠러가 있는 그런 구조입니다. 이 '타'를 좌우로 움직여 선박의 방향을 변경시키는데, 타는 좌우로 최대 35도까지 움직일 수 있으며 타를 최대치까지 움직이는 것을 '전타'라고 합니다.



▲세월호 조타기. ⓒ특조위

그리고 '타'를 '조종'하는 것이 '조타'입니다. '조타'를 하는 기계는 '조타기'입니다. 위 그림이 세월호의 조타기입니다. 조타기의 핸들을 돌리면 전기 신호를 통해 유압이 발생하여 실제 '타'가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조타를 하는 장소는 '조타실'입니다.



선박 항해에서 방향은 0도에서 359.9도까지로 표현하는데, 0도는 정북을 나타내고 90도는 정동, 180도는 정남, 270도는 정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만약 선박의 선수 방향(헤딩 값)이 180도에서 185도로 바뀌었다면 이는 남쪽으로 항해하던 선박이 선수 방향을 오른쪽으로 약간 틀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편 세월호는 조타실이 5층, 3·4층이 객실, 1·2층이 화물칸, 지하 1층이 기관실로 되어 있는 6층짜리 빌딩이라 할 수 있으며, 길이 146m, 폭 22m, 높이 24m, 총 6800톤급의 거대한 구조물입니다. 그리고 일부분은 물에 푹 잠겨있어, 물의 저항을 받으면서 이동하는 물체입니다. 이런 거대한 물체는 육지의 자동차처럼 빠르게 방향 전환을 할 수는 없습니다.

세월호가 일본에서 건조된 직후 진행되었던 시운전에서 짐을 싣지 않고 최고속력(23.23노트)으로 운항하면서 최대 조타각인 35도를 사용하였을 때 최대선회 각속도는 1.81도였습니다. 즉, 최고 속력으로 달리면서 조타를 최대치로 했을 때 선수 방향이 최대로 움직일 수 있는 각도가 1초에 1.81도였던 것입니다. 

건조된 직후에 비해 2014년 4월 16일의 세월호는 약 2000톤 이상의 짐을 실어 더 무거운 상태였고 건조한지 20년이 흘러 최고 속력도 더 느린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세월호가 1초에 1.81도 이상 자력으로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AIS란? 

AIS(Automatic Identification System)는 선박이 항해하면서 배 이름, 경도와 위도, 속력, 선수 방향 등의 정보를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발신하는 시스템입니다.


ⓒ특조위


각 선박에서 AIS 데이터를 발신하면, AIS 기지국에서 일단 수신을 하고, 기지국을 거쳐 관할 VTS(Vessel Traffic Service, 해상교통관제) 센터에서 암호화된 원문을 1차적으로 저장을 하며, 그 다음에 해양수산부의 해양안전종합정보시스템(GICOMS)에서 원문을 해석하고 2차적으로 저장이 됩니다. GICOMS에서는 관계기관(청와대, 해경 상황실 등)에 AIS 데이터를 보내 주는 역할도 합니다. 

정부는 세월호 참사 이후 AIS 항적을 네 차례에 걸쳐 발표하였습니다. 정부통합전산센터 AIS 데이터베이스에 2014년 4월 16일 03:37-09:30 동안 항적이 5%밖에 저장이 되지 않아 관할 VTS센터의 정보를 복원하는 과정이 필요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복원 작업은 GMT라는 업체에 해수부가 위탁용역하여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복원된 AIS 항적 역시 석연치 않은 부분들이 많이 있어 이번 청문회에서 여러 가지 문제들이 제기되었습니다. 

6800톤 세월호, 1초당 14도 움직였다? 

해수부가 복원한 AIS 항적 데이터 문제는 크게 두 종류입니다. 첫 번째는 원문 데이터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경우이고, 두 번째는 원문 데이터 내용을 그대로 제공하지 않고 수정을 해서 제공한 경우입니다. 

첫 번째 경우의 대표적인 예는 세월호의 선수 방향 문제라 할 수 있겠습니다.

둘라에이스호가 찍은 영상. 세월호의 선수 방향이 병풍도 반대편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둘라에이스호가 찍은 영상. 세월호의 선수 방향이 병풍도 반대편을 바라보고 있다. ⓒ특조위


9시 10분에서 20분 사이 세월호 뒤에 있던 둘라에이스호가 세월호를 찍은 영상에서 세월호의 선수 방향은 병풍도 반대편 쪽을 향해 있습니다. 이것이 실제 세계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그런데 해수부가 발표한 AIS 항적도에서는 이 시간대에 선수 방향이 190~210도 사이에 있어, 병풍도를 바라보는 것으로 나옵니다. 현실과 반대 방향인 것입니다.



▲정부 발표 AIS 항적에 따른 선수 방향. 병풍도를 바라보고 있다. ⓒ특조위


위의 사례는 실제와 '다른' 현상을 나타내고 있는 경우라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현상을 나타내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특조위


위 표를 보시면 세월호의 선수 방향이 8:49:44에 199도, 1초 뒤인 8:49:45에 213도, 그 2초 뒤인 8:49:47에 191도인 구간이 있습니다. 이 말은 세월호가 44초에서 45초로 가는 1초 동안 14도 우회전을 했고, 그 다음 2초 동안 갑자기 방향을 틀어 22도 좌회전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거대한 세월호가 1초에 1.81도 이상 자력으로 각도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세월호의 이동 방향을 변화시킬 정도로 커다란 외부적 충격이 가해진 분명한 증거가 제출된 적은 아직까지 없습니다.)

세월호의 선수 방향이 1초에 14도 움직이는 것도 불가능하지만, 그 다음에 순식간에 반대 방향으로 다시 초당 11도로 움직이는 것은 더욱 불가능합니다. 자연계에서 존재할 수 없는 움직임입니다. 

이에 대해 2014년 12월 29일 발표된 해양안전심판원(해심원) 특별 조사 보고서에서는 AIS 데이터의 송신 시간 기준으로 정렬하면 199->213->191의 순서이지만, 이를 수신 시간 기준으로 정렬하여 191->199->213으로 재정렬하면 이상 항적은 없다고 발표했습니다.

선박에서 먼저 송신한 데이터가 나중에 보낸 데이터보다 기지국에서 더 늦게 수신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해심원은 송신 시간 기준으로 정렬하면 199->213->191의 순서라서 우회전하던 배가 갑자기 좌회전하는 현상이 나타났지만, 수신 시간 기준으로 정렬하면 191->199->213의 순서가 되어 계속해서 우회전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문제없다는 입장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더라도 여전히 1초에 8도, 7도를 움직인 것이므로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현상입니다. 이에 대해 이번 청문회에서 참고인으로 나왔던 허용범 전문가 자문단 단장은 지난 선장 선원 공판에서와 마찬가지로 기계적인 오류로 설명하였습니다.

정리하면 해수부가 AIS 항적을 발표한 것은 2014년 4월이고, 논란 구간을 기계적 오류로 지적한 합동수사본부 전문가 자문단 보고서가 나온 것은 2014년 8월이며, 해심원 특별조사보고서가 나온 것은 2014년 12월입니다. 논란이 계속되었던 것이고 시간적으로 가장 늦은 해심원의 발표 역시 납득하기 힘든 내용입니다. 

다음으로 두 번째 경우, 즉 원문데이터를 수정한 경우의 대표적인 예는 속도 데이터(SOG, Speed Over Ground)입니다. 원문에는 102.3으로 되어있는데 해수부가 발표한 자료에서는 102.2로 바뀌어져 있습니다. 이에 대해 복원업체 연구소장은 프로그램 오류로 설명하였습니다. 

조기정 증인((주)GMT 연구소장) : "프로그램 상의 오류에 의해서 SOG가 소수점 단위의 오차가 포함된 자료들이 좀 있습니다." "20.2 같은 경우 20.1로 바뀝니다. 그리고 20.7 같은 경우 20.6, 20.9 같은 경우 20.8, 102.3이 102.2로 바뀌는 그런 현상이 있었습니다."
권영빈 위원(진상규명 소위원장) : "엑셀로 바꾸는 프로그램에 오류가 있다는 거죠?"
조기정 증인 : "예" 

GMT에서는 프로그램 오류로 인한 소수점 오차라고 해명하였지만 아직 다 해명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다른 숫자들은 몰라도 102.3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국제전기통신연합(ITU) 권고안 ITU-R M.1371-5. ⓒITU


위 ITU 권고안에서 보듯이 102.2는 실제 속도가 102.2노트거나 아니면 그보다 더 빠른 속력을 의미하지만, 102.3은 하나의 코드로서 정보가 없는 경우(not available)를 의미합니다. 단순한 숫자가 아닌 하나의 코드인데 이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고 프로그래밍을 했을까요?

지면 관계상 모든 예를 다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원문 데이터 누락 문제, 원문에는 있지만 삭제한 데이터 문제, 선회율(ROT) 데이터 문제, 같은 시간에 다른 속력과 위치를 나타내는 데이터 문제, 저장기능을 갖고 있지 않은 선박의 AIS 시스템이 과거 정보를 발신하는 문제 등 정부가 발표한 AIS 항적에는 무수히 많은 문제점들이 있습니다.

정부 발표 AIS 데이터를 어떻게 볼 것인가? 

"우리 특조위는 현재 AIS 항적을 조작했는지 이런 것에 대해서 판단할 수 없습니다. 다만 정부가 발표한 AIS 항적이 어떤 의도 하에 편집된 게 아닌가 하는 의문점이 있구요. 그다음에 AIS 항적 자체에도 믿기 어려운 점이 몇 가지 확인되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세월호 특조위는 세월호 참사 원인을 규명하는데 정부 발표 AIS 항적에만 의존하는 것은 진상규명을 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구요. 그래서 참사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이제 AIS 항적은 좀 참고자료로 옆에 두고 좀더 광범위한 자료를 수집해서 참사 원인을 밝혀야 하지 않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권영빈 상임위원 1일차 1세션 마무리 발언) 

AIS 항적은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의 첫 출발점이 되어야 했던 데이터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의혹 덩어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럼 AIS 데이터는 의혹으로 확정해야 하는 걸까요? '기계적 오류'라는 답이 존재하는 한 의혹으로 확정하기는 힘듭니다. 기계가 오류를 일으켰다는데 그게 아니라는 명백한 근거가 없는 한 반박할 도리가 없습니다.

다만 적어도 정부 발표 AIS 항적도를 가지고 침몰 원인을 밝히려고 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말씀은 드릴 수 있겠습니다. 오류 투성이의 자료를 가지고 사고 원인을 확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설령 정부 발표 AIS 항적이 맞다 하더라도 세월호가 급격한 우회전을 하는 것이 사고의 원인인지, 사고의 결과인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위 권영빈 상임위원의 이야기처럼 좀더 광범위한 자료를 통해 참사 원인은 밝혀져야 할 것입니다.


해경 헬기 3대는 왜 35명만 구조했나?
2016.04.21 14:18:05


[세월호 의혹의 확정 ⑥] 해경 헬기①

             

전원 구조할 수 있었던 두 번째 기회


9시 12분경 둘라에이스호 도착하였을 때가 전원 구조할 수 있었던 첫 번째 기회였다면, 9시 27분경부터 전원 구조할 수 있었던 두 번째 기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해경 헬기가 도착한 것입니다.


9시 27분경 B511호를 시작으로, 9시 32분경 B513호, 9시 45분경 B512호가 사고 현장에 도착하였습니다. (이하 B는 생략) 헬기에는 항공 구조사가 탑승하고 있었고, 헬기에서 줄을 타고 내려가는 것이므로 세월호 어디든 목표하는 지점으로 갈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박영대


따라서 헬기에서 내려온 항공 구조사가 세월호 조타실에 들어가 퇴선 방송을 하거나, 3층 안내데스크로 들어가 퇴선 방송을 하거나, 아니면 그냥 객실로 진입하여 육성으로라도 승객들의 퇴선을 유도하였다면 전원 구조는 가능하였습니다. 

하지만 해경 헬기는 이와 같은 조치는 취하지 않고, 밖으로 나와 있는 소수의 사람들만 한 명 한 명 바스켓에 담아서 끌어 올리는 극히 소극적인 구조 활동을 펼칩니다. 당시 세월호에 총 476명이 탑승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는 너무나도 부적합한 구조 방식이었습니다.

더구나 당시 현장에 출동한 해경 헬기는 소형 헬기라서 승객을 5~6명 구조하고 나서는 인근에 있는 섬, 서거차도에 승객들을 옮겨 놓고 다시 와서 구조작업을 계속해야 했습니다. 또한 충돌 위험으로 인해 헬기 3대가 동시에 작업을 할 수가 없어 서로 교대로 작업을 하였기에 구조작업은 더더욱 더딜 수밖에 없었습니다.



▲해경 헬기 512호가 바스켓을 내려 승객을 구조하고 있다. 헬기 오른편으로 저 멀리 보이는 배가 둘라에이스호이고, 헬기 왼쪽의 배가 해경 P-123정이다. ⓒ511호 채증 영상 갈무리 화면


그 결과 헬기 3대가 구조한 인원은 총 35명(511호: 12명, 513호: 13명, 512호: 10명)뿐입니다. 476명 중 35명을 구조한 것입니다. 그것도 알아서 밖으로 나와 있는 승객들만을 구조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해경 헬기 대원들은 한 목소리로 세월호 안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 줄 몰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안으로 들어갈 생각도 못 했고 밖으로 나오는 승객들만을 구조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요?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거대한 여객선이 침몰하는데 승객이 많은 줄 몰랐다고? 

세월호에 많은 승객들이 탑승하고 있다는 것을 모를 수 있으려면 다음 네 가지 관문을 모두 통과해야 합니다. 

첫 번째, 상황실에서 헬기에 출동 명령을 내릴 때 승객 수를 이야기해주지 않아야 합니다. 목포서 상황실의 경우 123정을 출동시킬 때는 당시까지 파악하고 있었던 수, 350명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헬기를 출동시킬 때만큼은 승객수를 이야기해 주지 않았어야 하고, 출동 이후에도 교신을 통해서 절대로 알려주지 않아야 합니다.

두 번째, 설령 출동할 때는 못 들었다 하더라도, 이후 수많은 교신들 속에서 승객수와 관련된 내용들이 나오는데 이 교신들을 헬기에서는 '전부' 못 들어야 합니다. 즉 "인원이 450명이니까 일사불란하게 구명벌"과 같이 직접적으로 숫자가 등장하는 교신 뿐만 아니라 "현재 승선객이 승객이 안에가 있는데 배가 기울어 가지고 현재 못 나오고 있답니다", "현재 승객이 절반 이상이 지금 안에 갇혀서 못 나온답니다. 빨리 원투투(122)구조대가 와서 빨리 구조해야 될 것 같습니다" 등 배 안에 많은 수의 승객들이 잔류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모든' 교신들을 다 못 들어야만 합니다. 

참고로 헬기에는 헤드셋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기장, 부기장뿐만 아니라 구조사, 정비사, 전탐사들까지도 모두 착용할 수 있는 헤드셋이 준비되어 있는데, 교신은 기장과 부기장이 담당하였으므로 헬기 3대의 기장, 부기장 총 6명이 모두 승객 수 관련 교신을 전부 못 들어야만 합니다. 거의 1시간 동안. 

세 번째, 길이 146미터, 폭 22미터, 높이 24미터의 거대한 '여객선'이 침몰하고 있는 현장을 뻔히 내려다보면서, 그 안에 많은 수의 '여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식적인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상황실을 통해서든, 다른 출동 세력을 통해서든 배 안의 상황을 알아보려는 시도를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헬기에서 바스켓으로 끌어올려 구조한 승객에게 배의 상황에 대해 절대로 질문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당시 출동한 해경 헬기는 하나같이 '여객선이 침몰한다는 것'과 '사고 현장의 위치', 두 가지 정보만을 받고 출동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구조된 승객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왜 침몰한 것인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물어보는 것은 상식적으로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이 당연한 행위를 절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이상 네 가지 관문을 '모두' 통과해야만 세월호 안에 많은 수의 승객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모를 수가 있습니다. 단 하나만 통과를 못 해도 세월호에 수백 명의 승객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버리게 됩니다. 

과연 이 네 가지 관문을 모두 통과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사실 이 중 단 하나의 관문만을 통과하더라도 의혹으로 확정할 수 있을 수준인데, 헬기 대원들은 네 가지를 모두 통과해 버렸습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위 네 가지를 모두 통과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지 않나요? 

상황실에서 설령 처음에는 승객수를 전달해 주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후 교신을 통해서도 전혀 이야기를 해 주지 않고, 또 헬기에서도 물어보지 않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요? 한 시간 가까운 시간 동안 승객수와 관련된 모든 교신을 헬기 3대의 기장, 부기장이 모두 못 듣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요? 거대한 여객선 안에 많은 수의 여객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요? 구조된 승객에게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요? 끝으로 이 모든 것들이 전부 다 이루어지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요?  

헬기에서 세월호 안에 많은 수의 승객이 있는줄 몰랐다는 것은 믿기 힘든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를 의혹으로 확정하고자 하는데, 독자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헬기에서 한 명의 예외가 있기는 합니다. 바로 513호 부기장인데, 그는 선박 안쪽에 사람들이 갇혀 있다고 생각했지만 선장이나 선원들이 승객들을 퇴선시키는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진술합니다. 몰랐다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렇게 남에게 떠넘기는 것이 더 솔직한 것일까요? (해경 헬기②에서 계속)


진도 앞 바다, 헬기가 123정보다 먼저 도착했는데...
2016.05.13 09:42:38

[세월호 의혹의 확정 ⑦] 해경 헬기2

             

교신하지 않는 구조 세력

선박 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당신은 구조 세력으로서 헬기를 이용하여 사고 현장으로 출동하였습니다. 현장에 도착할 때까지 약 15분 정도의 시간이 있습니다. 그 15분의 시간 동안 당신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또 현장에 도착한 즉시 당신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구조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황이 파악되어야 합니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사고 선박과 교신을 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 사고 선박에 여러 번 교신을 시도하였음에도 교신이 되지 않는다면 상황실에 상황을 물어보거나, 현재 사고 선박과 교신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를 알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그에 맞게 대처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교신 행위가 지극히 어려운 일일까요?

"기본입니다. 기본. 정보를 알아야 자신이 현장에 가서 무엇을 할 것인지 판단이 서게 됩니다. (···) 세월호 내에 무슨 상황이 발생하였는지 알지 못하면 도착해도 전혀 조치를 취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계속 교신을 유지하여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1차적 목표입니다"(진모 전 해군해난구조대 대장 검찰 참고인 진술) 

"그건 꼭 배라고 하는 상황이 아니어도 구조를 하면서 상대의 상황을 알려고 하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항해사의 상식으로서 구조하려고 현장에 갔으면, 현장에 있는 조난 선박과 교신하려고 시도를 하였을 것이고, 교신이 되지 않으면 휴대폰이든 가능한 방법을 찾았어야 할 것입니다."(이모 한국해양대 교수의 검찰 참고인 진술)

위 참고인 진술은 123정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헬기에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해경 헬기 3대는 모두 세월호와 단 한 번도 교신을 하지 않습니다. 현장지휘함의 역할을 맡았던 해경 123정 역시 세월호와 단 한 번도 교신을 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해경 123정과 해경 헬기도 서로 단 한 번도 교신을 하지 않습니다. 

당시 세월호, 해경 헬기, 해경 123정은 모두 공통적으로 통신 장비 둘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VHF(Very High Frequency, 초단파)는 상대적으로 근거리 통신에 사용되고, SSB(Single-Side Band, 단측파대 전송)는 VHF보다 더 낮은 주파수 대역을 사용하여 상대적으로 원거리 통신에 사용되는 통신기입니다. 


▲해경 국정조사 제출 자료. ⓒ정진후 의원실


위 표는 해경 항공기에 어떠한 통신장비들이 설치되어 있는지를 나타낸 것입니다. 헬기 중에서 '팬더'(panther)가 사고 해역에 도착한 511, 512, 513호의 기종입니다. 팬더에는 VHF와 SSB가 장착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세월호에는 VHF 2대와 SSB 1대가 설치되어 있었고, 해경 123정에도 VHF와 SSB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세월호, 헬기, 123정의 통신 장비는 모두 정상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충분한 통신 설비를 갖추고 있었고, 모두 정상 작동하고 있었음에도 이들은 교신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 문제는 많은 생각을 할 필요 없이 그냥 명백한 의혹 사항입니다. 현장으로 가는 도중에 세월호와 교신하여 상황을 파악하고 적절한 지시를 내리는 것, 그리고 현장에 도착해서 도착했다고 이야기하고 선원들과 상의하여 승객들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특별한 훈련을 필요로 하는 고도의 작업이라고 생각하기도 힘듭니다.

두 가지 경우의 수가 있습니다. 첫째, 정말 교신을 하지 않은 경우. 이 경우에는 해경의 무능을 넘어서는 어떤 이유, 즉 교신을 해서는 안 되거나 아니면 교신을 할 필요가 없거나 하는 등 어떤 이유가 존재했으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 실제로는 교신을 했는데 이를 은폐하고 있는 경우. 이 경우에는 밝혀져서는 안 되는 어떤 내용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둘 중 어떤 경우이든 진상 규명이 되어야 합니다.

상황실, 지휘부의 책임은? 

"세월호 사고 현장으로 이동하면서 초단파무선통신, 휴대전화 등 교신 수단을 통해 세월호의 선장 또는 선원과 교신하여 다치거나 사망한 승객이 있는지, 가장 구조가 시급한 승객이 누구이고 어디에 있는지, 나머지 승객들은 몇 명이고 현재 어떤 상황에 있는지, 승객들이 구명조끼를 제대로 착용하고 있는지, 퇴선 지시가 내려져 승객들이 갑판 등 비상 대피 장소에 나와 있거나 바다에 떠 있는 상태인지, 어디로 접근하여야 가장 신속하게 많은 승객을 구조할 수 있는지 등 세월호의 상황을 신속히 확인하고 필요한 정보를 전달받아야 했다."(123정장 재판 항소심 판결문) 

위 글은 123정장 항소심 판결문의 일부입니다. 김경일 정장이 업무상과실치사, 업무상과실치상 유죄를 받게 되는 근거 중 하나가 되는 부분입니다. 모두들 아시는 바와 같이 세월호 참사에서 '구조'와 관련하여 처벌받은 사람은 김경일 정장 단 한 사람뿐입니다.

하지만 위 판결문은 헬기 대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123정은 현장지휘함이라 책임이 더 크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헬기는 가장 먼저 도착한 구조 세력입니다. 가장 먼저 도착한 세력이 상황을 파악하여 이후에 속속 도착하는 세력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헬기는 하늘에서 상황을 내려다보는 것이기 때문에 바다에 있는 세력보다도 상황 파악에 더 유리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또 위 판결문은 상황실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세월호와의 교신은 꼭 현장에 출동한 세력들만이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현장 출동 세력이 다른 일로 바쁠 수가 있기 때문에 현장 세력들이 교신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상황실이 대신 교신을 해서 출동 세력에게 정보를 알려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상황실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끝으로 위 판결문은 해경 지휘부에게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지휘부는 상황실의 책임자이기도 하고, 구조활동 전체의 책임자이기도 합니다.



또 하나의 미스테리, 해경 초계기 CN-235(B703) 

▲09:34:01경 해경 123정 채증 동영상에 찍힌 B703호. ⓒ해경

위에서 헬기를 가장 먼저 도착한 '구조 세력'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런데 헬기보다 먼저 도착한 그냥 '세력'이 있기는 합니다. 바로 해경 초계기 CN-235, B703호입니다.

703호는 헬기 511호보다 1분 빠른 9시 26분경 세월호 사고 현장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구조와 관련된 행위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고 다만 현장 촬영과 헬기 통제만을 하였습니다. 703호는 저속 저공 비행이 가능한 항공기이고 구명벌을 5개 보유하고 있었지만, 이를 터트려 구조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려는 행위는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703호는 당시 헬기 3대가 작업 중이므로 헬기가 서로 충돌하지 않도록 통제하는 역할을 하였고, 그 과정에 헬기 511, 512호와 교신을 하였습니다. 앞의 표에서 보면 CN-235 역시 VHF와 SSB를 장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얼마든지 세월호나 123정과 교신이 가능함에도 교신을 하지 않고 헬기하고만 교신을 한 것입니다. 

이 703호의 활동과 교신에 대한 정보공개 요청에 대해, 국민안전처는 당시 활동 일지와 보고문서 등은 비공개 결정을 하였고, 교신 내역과 관련해서는 "당시 사용한 VHF 123.1MHz(항공 비상주파수) 및 SSB 2183.4kHz(선박 비상주파수) 교신내용을 따로 녹음하는 장비 및 기록하는 일지류가 없다"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703호의 문제는 단지 구조와 교신에 소극적이었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703호는 이후 언론과의 완전한 허위 인터뷰를 통해 언론의 오보에 커다란 공헌을 하는 역할도 합니다. 703호 부기장 이모 경위는 10시 38분경 KBS와의 인터뷰에서 "지금 대부분의 인원들은 현재 출동해 있는 함정, 그리고 지나가던 상선, 그리고 해군 함정(에 의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조가 된 상황입니다. 현재 수면 아래에 사람이 갇혀 있는지 파악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조되었다는 것도 거짓이고, 현재 수면 아래에 사람이 갇혀 있는지 파악을 하고 있다는 것도 거짓입니다. 세월호 참사는 탑승인원 476명 중에서 304명이 사망한 사건입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조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사실에 부합합니다.

또 구조 세력이 수면 아래를 파악하는 행위, 즉 잠수를 최초로 시도해 본 시각은 13시입니다. 그런데 이모 경위는 10시 38분경 저런 인터뷰를 하였던 것입니다.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했지만 아무런 구조행위를 하지 않았던 703호. 도대체 어디서 정보를 얻어서 저런 인터뷰를 하게 되었을까요?



해경 123정, 왜 세월호와 교신 안 했나?

2016.05.26 14:10:53


[세월호 의혹의 확정 ⑧] 해경 123정 1

             

"이건 구조를 하러 간 것이 아니라 거의 취재를 하러 가거나 구경을 하러 간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황모 소방안전본부 감찰조정관 검찰 참고인 진술)

"굉장히 소극적인 구조 활동입니다. 제가 봤을 때는 구조 시늉만 한 것 같습니다."(심모 전 해군 제독 검찰 참고인 진술)

세월호 참사 당시 현장지휘함의 역할을 맡았던 해경 P123정(이하 P생략)의 활동을 본 전문가들의 평가입니다. 앞으로 몇 회에 걸쳐 123정이 어떠한 활동을 하였는지 자세히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의혹들이 확정될 것입니다.

123정은 목포해경 상황실로부터 사고 당일 오전 8시 57분과 58분 두 차례에 걸쳐 출동 명령을 받고 사고 현장으로 출동하였고, 9시 35분경 사고 현장에 도착합니다. 당시 123정에는 총 13명의 승조원이 탑승하고 있었습니다. 


▲123정 승조원 명단


세월호와 교신하지 않는 123정 

123정은 사고 현장으로 이동하는 시간을 포함하여 세월호 참사 전 과정 동안 세월호와 단 한 번도 교신을 하지 않습니다. 정확하게는 9시 3분과 4분에 123정에서 VHF 채널 16번으로 세월호를 세 번 호출하였지만 세월호에서 응답이 없었고, 9시 26분과 28분에는 세월호에서 동일한 VHF 채널 16번으로 123정을 호출하였지만 이번에는 123정에서 응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상호 교신 시도의 전부입니다. 교신을 시도조차 안한 것이 아니라 출동 초반에 2분에 걸쳐 세 차례 호출해 보았으니까 할 만큼 한 것일까요?

"교신이 되지 않으면 본부, VHF 16번 채널을 통해 계속 교신을 시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조치는 매뉴얼의 기본이고, 해양 쪽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는 누구나 알고 있는 기본 상식입니다."(진모 전 해군 해난구조대 대장 검찰 참고인 진술)

"저는 당연히 123정에서 세월호에 교신을 시도했는데 안 되었다고만 알고 있었는데, 123정이 이렇게까지 교신 유지 노력을 하지 않은지는 처음 알았습니다."(이모 한국해양대 교수 검찰 참고인 진술) 

그런데 김경일 정장은 사고 선박과 교신해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 123정에는 파일철이 하나 있었는데, 그 파일철은 김경일 정장이 <함정훈련교범>이라는 매뉴얼의 중요 부분을 복사한 것이었고 김 정장은 거기에 일부 메모를 남겨두기도 했습니다. 

< 함정훈련교범>은 각 함정에 비치되어 있는 책인데, 지방청 주관으로 해경 경비정들이 모두 참가하는 연 2회의 훈련이 바로 이 교범에 근거하여 이루어지게 됩니다. 즉 김경일 정장은 이 파일철의 내용으로 연 2회의 훈련을 해 왔던 것입니다.



▲함정훈련교범 파일철 일부분. ⓒ검찰증거기록




위의 파일철 내용을 보면, 1번 항목 부분에 "SSB(2116.4), VHF(16번), 핸드폰 이용 교신 조난선 현실태 파악 보고"라는 문구가 보이고, 3번 항목에서는 "통신팀장은 조난선과 교신설정하여"라는 자필 메모가 있고 그 밑에 "위로 및 격려 전화", "선박 제원 선주, 선장 인적 사항 파악 등 파악하고", "구조선에서 최우선 조치 및 요구사항 확인"이라는 문구가 보입니다.


▲함정훈련교범 파일철 김경일 정장 자필 메모부분 ⓒ검찰증거기록



또 같은 페이지의 하단을 보면 김 정장이 직접 쓴 메모가 보입니다. 거기에는 "조타실: 조난선과 교신 설정하여 현상태 파악 보고하라", "통신팀장은 통신설정하여 위로 및 격려 전화, 선박 제원 등 파악하라"라는 문구가 보입니다. 김경일 정장은 누구보다도 사고 선박과의 교신 필요성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검사: 결국 피의자는 SSB(2116.4), VHF 16번, 핸드폰 무엇을 이용해서든 조난선인 세월호와 교신하여 현 실태를 파악 보고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인가요.
김경일: 네, 알고는 있었는데 그 당시 못했습니다. 
(김경일 정장 피의자신문조서 3회) 

구조 세력이 사고 선박과 교신하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당연한 일이고 동시에 훈련 매뉴얼을 통해서 숙지하고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123정은 세월호와 교신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123정은 사고 현장으로 가는 도중뿐만 아니라 현장에 도착해서도 세월호와 교신을 하지 않습니다. 설령 출동하는 과정에 교신이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도착해서는 다시 한 번 교신을 시도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구조 세력이 도착했음을 알리고 현재 선박의 상황이 어떠한지를 파악해야만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회 헬기 편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렇듯 123정이 세월호와 교신하지 않은 것은 명백한 의혹 사항입니다. 그리고 이는 123정 활동에 있어서 생겨난 모든 의혹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123정이 현장에 도착해서 했던 이후 행위들이 무슨 근거로, 어떠한 판단하에 이루어진 것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123정은 세월호 사고 현장에 도착해서도 세월호와 교신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세월호의 상황, 세월호 안에 있는 승객들의 상황을 알 수 없으므로 123정 승조원을 세월호 선내에 진입시켜 상황 파악을 하도록 해야 할 텐데 그러한 행위도 하지 않았습니다. 또 선원이든 승객이든 먼저 구조한 사람들에게 현재 세월호의 상황을 물어보아야 할 텐데 그러한 질문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123정은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던 고무단정 하나를 하강시켰는데, 이 고무단정은 세월호에 접안하여 기관실 선원을 전원 구조합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123정 자체를 조타실에 접안하여 조타실에 있는 선원들을 전원 구조합니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고무단정을 내린 것일까요? 도대체 왜 해경을 세월호 안에 진입시키지 않았을까요? 도대체 왜 선원만을 전원 구조한 것일까요? 도대체 왜 구조된 사람들에게 세월호의 상황을 물어보지 않은 것일까요? 이러한 행위들은 도대체 어떤 판단 하에 이루어진 것일까요? (계속) 



세월호 선원들, 골든타임에 왜 캔맥주만 홀짝였나?

2016.06.10 09:32:05


[세월호 의혹의 확정 ⑨] 해경 123정 2

             
9시 35분경 123정은 사고 현장에 도착합니다. 당시 세월호는 50도 정도 좌현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계속해서 침몰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가능성은 없었고 시급하게 승객들을 퇴선시켜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현장 지휘함인 123정은 세월호에 교신을 시도하지도 않았고, 세월호의 상황을 알아보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으며, 승객에 대한 퇴선 지시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123정은 현장에 도착하여 세월호를 향해 접근하다가 어느 순간 멈추어 서고,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던 8인승 고무 단정을 바다에 내립니다. 

지난 회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123정이 교신을 통해서든 사람을 보내서든 세월호의 상황을 파악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후에 123정이 행하는 모든 일들은 어떤 근거로, 어떤 판단 하에 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후의 123정의 행위들은 대부분 의혹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고무 단정을 내린 것도 이해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 만약 123정 승조원 일부가 고무 단정을 타고 세월호로 가서 선내에 진입하여 선원이나 승객들을 통해 세월호의 상황을 파악하였거나 승객의 퇴선을 유도하였다면 이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고무 단정에 탑승한 승조원은 세월호 안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애초에 단정을 내릴 때 단정을 내리는 목적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123정이 세월호 근처에 접근하였을 때 누군가 '단정을 내려라'는 말을 하여 저와 박○○ 경사가 함께 단정을 내리고, 단정을 내리라는 말은 당연히 단정을 내려서 세월호에 접근하라는 내용까지 포함한 말로 알아듣고 단정을 내리자마자 저와 경사 박○○ 2명이 단정에 올라타 세월호로 접근을 한 것입니다." (김모 경장 참고인 진술조서 3회)

당시 단정을 내리고 조정했던 김모 경장의 진술입니다. 경찰이라는 계급사회에서, 그리고 구조 활동을 펼치는 엄중한 상황에, 누가 말한 것인지도 모른 채 그냥 누군가 내리라니까 단정을 내렸고, 또 세월호로 접근을 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냥 '내리라는 말은 가라는 말까지 포함되어 있다'고 자체적으로 판단하여 세월호로 접근하였다고 합니다. 납득이 되시나요? 

당시 123정이 상식적으로 취해야 했던 조치는 다음과 같습니다.

"크게 3가지 조치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해군함정이든 해경 함정이든 선교 위 마스터에 고성능 대공 마이크가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외부로 방송이 나가고 있습니다. 대공 마이크를 통해서 (퇴선)방송을 하면 됩니다. 두 번째로는 123정이 세월호 선체로 접근하여 세월호 내로 구역을 나누어 123정 대원들을 선체로 진입시켜 퇴선을 유도하고, 세 번째로 조타실 쪽으로 1개 팀을 보내 그 곳에 있는 방송설비를 이용해 퇴선안내방송을 했어야 합니다." (심모 전 제독 참고인 진술) 

고무 단정을 내릴 것이 아니라 123정 자체를 세월호에 접안시키고 일부는 조타실로 보내 퇴선 방송을 하고 나머지는 분산하여 승객 퇴선을 유도하여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123정 자체적으로 퇴선 방송도 하여야 했던 것이고요. 설령 고무 단정을 내리더라도 위와 같은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서 내렸어야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배가 침몰하고 있으니까 배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오라고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고도의 훈련을 받은 자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거나, 특수한 능력을 가진 자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123정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고무 단정은 아무런 목적 없이 내려져 세월호를 향해 다가갑니다. 

고무 단정이 첫 번째로 출발한 시각은 9시 38분경입니다. 세월호를 향해 출발한 고무 단정은 세월호를 향해 곧장 직진하여 9시 39분경 세월호 3층 좌현 갑판에 있던 5명의 사람들을 태우고 123정으로 돌아옵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는 것처럼 이 사람들은 모두 세월호의 기관실 선원이었습니다. 

▲세월호 기관실 선원 명단

이 표는 세월호 기관실 선원 명단입니다. 이 명단에서 1번부터 5번까지의 5명이 처음으로 고무 단정에 의해 구조된 사람들입니다. 나머지 두 사람도 고무 단정이 두 번째 출발하였을 때마저 구조해 오게 됩니다.

여기서 이 기관실 선원들에 대해서 잠깐 짚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최초에 사고가 발생하는 순간, 기관실 선원 7명은 세 군데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기관장 박모 씨는 5층 조타실에 있었고, 1등 기관사 손모 씨, 조기장 전모 씨, 조기수 김모 씨 등 3명은 3층 기관실선원 선실에 있었으며,  3등 기관사 이모 씨와 조기수 박모 씨, 이모 씨 등 3명은 지하 1층 기관실에 있었습니다. 

사고 직후 기관장 박 씨가 기관실에 전화를 두 번 걸어서 기관실에 있던 3명에게 위로 올라오라고 지시하였고 자신은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이 기관실 선원 7명은 3층 기관실 선원 선실 앞 복도에 집결하게 됩니다.

▲세월호 기관실 계단 구조도. ⓒ선장 선원 재판 1심 제13회 공판조서


하 1층에 있던 3명이 3층까지 올라온 길을 나타낸 것입니다. 선미 쪽에서 선수 쪽을 바라본 그림이므로 왼쪽이 좌현, 오른쪽이 우현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초기에 세월호는 왼쪽으로 약 30도가량 기울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기관실에 있던 3명은 그림의 엔진컨트롤룸에서 나와서 아래로 조금 내려와 계단을 통해 1층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선미 쪽으로 조금 걸어가 또 다른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갑니다. 1층에서 3층까지 연결된 이 계단의 각도는 62도인데, 당시 세월호가 좌현으로 30도 정도 기울었으므로, 처음 올라가는 계단은 90도 정도의 각도가 되었을 것이고 그 다음 계단은 다소 평평한 수준의 각도였을 것입니다. 

아무튼 세월호가 기울어져 있는 상황에서도 지하 1층에서부터 3층까지의 이동이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특히 3등 기관사 이모 씨는 여성임에도 다른 선원들이 도와주어 이동이 가능하였습니다. 

그렇게 기관실 선원 7명이 3층 복도에 집결했던 시간은 9시 6분경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고무 단정에 의해 구조되는 시간은 9시 39분경입니다. 이 7명의 선원들은 30여 분의 시간동안 무엇을 하였을까요? 놀랍게도 이들은 3층 복도에서 무작정 대기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한 일은 자신의 방에 들어가 구명조끼를 가지고 나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기관장과 1등 기관사는 3등 기관사 방에서 가지고 나온 캔맥주를 한 캔씩 마십니다. 3등 기관사도 한 모금. 기관장 박모 씨가 담배를 피웠다고 진술하는 선원도 있습니다만, 박 씨는 맥주는 마셨지만 담배는 안 피웠다는 입장입니다. 그 입장을 존중하여 맥주만 마신 것으로 하겠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들이 했어야 하는 행위들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 선장이 있는 조타실에 연락하여 사고가 왜 발생하였는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물어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치 123정이 세월호에 교신을 시도하지 않는 것처럼 기관실 선원들은 조타실에 연락하지 않습니다. 

핸드폰을 가지고 있는 선원도 있었고, 각 선실에는 선내전화도 있었습니다. 구명조끼를 가지러 방에 들어갔다 나올 수 있었으므로 전화를 하러 들어가는 것도 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이들은 '기관실' 선원이므로 발전기나 엔진의 상태를 파악하고 문제가 있다면 일정한 조치를 취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발전기나 엔진과 관련한 일체의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층간 이동이 가능했음에도 이들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세 번째로 이들은 '선원'이므로 승객들의 안전을 위해 일정한 행동을 했었어야 합니다. 구명벌(구명뗏목)이나 슈터(팽창식 미끄럼틀) 등을 터트리거나 아니면 적어도 승객들의 상황이라도 파악하고자 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그냥 무작정 30여 분을 대기만 하고 있었습니다. 일부는 맥주 한 잔 하면서. 

이러한 기관실 선원들의 행태는 명백한 의혹 사항입니다. 자신이 구조되리라는 확신이 있지 않는한 침몰하는 배 안에서 연락 한 번 취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두 가지 경우의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기관실 선원들이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작정 대기만 한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실제로는 어떤 행위를 했는데 숨기고 있는 경우입니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이들은 자신이 구조되리라는 확신을 어딘가에서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확신은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인지 밝혀져야 합니다. 만약 이들이 어떠한 행위를 하였는데 숨기고 있는 경우라면 이 역시 숨겨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어느 경우든 진상규명이 필요합니다. (계속) 


세월호, 뱃사람들의 눈물 나는 동료애...승객은?
2016.06.24 09:40:07

[세월호 의혹의 확정 ⑩] 해경 123정 3
             

지난 회에 기관실 선원 7명은 9시 6분경 3층 기관실 선원 선실 앞 복도에 집결하여 9시 39분경 해경에 의해 구조될 때까지 30여 분 동안 조타실에 연락도 하지 않고, 엔진이나 발전기를 살펴보지도 않고, 승객들의 상황도 알아보지 않은 채 가만히 대기만 하고 있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세월호 3층 도면. ⓒ선장선원재판 1심 제13회 공판조서

위 그림은 세월호 3층 도면입니다. 오른쪽이 선수 방향, 왼쪽이 선미 방향, 위쪽이 좌현 방향, 아래쪽이 우현 방향입니다. 세월호는 좌현으로 기울어졌으므로 위 도면상으로는 위쪽 부분이 아래로 기운 상황입니다.



▲세월호 3층 도면 일부 확대. ⓒ선장선원재판 1심 제13회 공판조서


도면의 일부를 확대해 보았습니다. 기관실 선원 7명이 30여 분 동안 대기하고 있던 위치가 점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7개의 점을 왼쪽의 4개와 오른쪽의 3개로 나누었을 때, 왼쪽에 조기장 및 조기수 3명이 있었고 오른쪽에 기관장과 1등 기관사, 3등 기관사가 대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관실 선원들이 대기하고 있던 복도를 기준으로 5명은 자신의 방이 좌측에 있었고, 2명은 우측에 있었습니다. 세월호가 좌현으로 기울어진 상황에서 좌측에 있는 자신의 방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은 아래로 내려갔다 올라오는 것을 의미하고, 우측에 있는 방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은 위로 올라갔다 내려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관실 선원 7명은 모두 자신의 선실에 들어가서 구명동의를 입고 나왔으므로 밑으로 내려가는 것도, 위로 올라가는 것도 모두 가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이동이 가능한 상황이었지만 이들은 30여 분 동안 그냥 대기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배가 점점 더 기울어 물이 차오를 상황이 되어가자 왼쪽의 점 4개와 오른쪽의 점 3개 사이에 있는 통로를 통해 기관실 선원들은 갑판으로 나아갔고, 때마침 다가오던 해경 123정의 고무단정에 의해 세월호에서 가장 먼저 구조됩니다. 

이에 대해 한 희생자 학생의 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평가합니다.

"피고인들의 진술을 정확히 종합해 보면, 기관실에 있던 피고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운이 좋았던 사람들입니다. 물론 따뜻하게 끈끈한 뱃사람들만이 가지고 있는 동료애 때문이었겠지만, 사고가 발생하자마자 기관장 박○○는 즉시 전화를 걸어 기관실로부터 탈출을 지시했고, 제때에 구명조끼를 찾아 입었고, 뛰어내리지 않아도 될 시기를 정확히 맞추어 해경이 도착했고, 바로 눈앞에 외부로 나가는 출입문 앞에서, 말 그대로 구조되기를 기다리면서 여유 있게 캔맥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이 선물했기 때문입니다. 304명의 소중한 목숨이 별이 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피고인들에게만 아주 커다란 특권을 주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정말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었는지, 아니면 피고인들이 만든 기회인지 이 재판부에서 정확히 판단해 주실 것을 강력히 희망합니다."(선장 선원 재판 항소심 제4회 공판조서) 

문제는 해경이 선원들을 구조했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선원들'만' 구조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해경 고무단정에 기관실 선원들을 구조하는 바로 그 순간 세월호는 빠르게 침몰하고 있었습니다. 

▲고무단정이 처음 세월호에 접안하여 기관실 선원을 태우는 모습(09:39:16경). ⓒ 해경 123정 채증영상


"맨 처음 3층 객실에 있는 승객을 구조하면서 세월호 현측을 직접 손으로 잡았는데 손에 배가 기울고 있다는 느낌이 올 정도로 빠르게 기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해양경찰이라면 누구라도 50도 이상 기운 세월호를 보고 침몰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박모 경사 검찰 진술조서 1회) 

처음 123정에서 고무단정이 출발할 때 단정에는 타고 있던 해경 2명 중 한 명인 박모 경사의 진술입니다. 또 한 사람은 단정을 조종하였던 김모 경장입니다.

123정의 승조원 전원은 세월호 안에 승객이 약 450명 정도 탑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목포상황실에서 처음에 출동 명령을 내릴 때는 350명이라고 이야기해주었고, 나중에 450명으로 정정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123정이 처음 사고 현장에 도착했을 때 밖으로 나와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승객들은 안에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세월호는 50도 이상 기울어져 있고 빠르게 침몰하고 있는 중입니다. 한 승조원은 직접 손으로 세월호를 짚어서 이를 몸으로 확인하기도 하였고, 직접 짚어보지 않고 그냥 육안으로 확인만 하더라도 해경이라면 누구나 이 배가 곧 침몰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해경뿐 아니라 당시 탈출했던 기관실 선원 역시 이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검사: 피고인은 구명단정이 세월호에 접안했을 때 곧 세월호가 침몰할 것을 충분히 예상했지요. 
이모 3등 기관사: (울면서 고개를 끄덕이다) 
검사: '예'라고 고개를 끄덕인 것이지요. 
이모 3등 기관사: 예. 
(선장 선원 재판 1심 제14회 공판조서) 

해경도 선원도 모두 배가 곧 침몰한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너무나도 당연히 승객들을 퇴선시키기 위해 일정한 조치를 취해야 했지만 해경도 선원도 그러지 않았습니다. 지난 회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해경은 세월호에 진입하여 일부는 조타실로 가서 퇴선 방송을 하고 나머지는 흩어져서 승객들 퇴선 안내를 했어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세월호를 직접 손으로 짚었던 박모 경사는 경사가 너무 심해서 진입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고 합니다. 

검사: 진술인을 비롯한 123 승조원들은 아예 세월호 내부에 진입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 아닌가요. 
박모 경사: 제가 처음 단정으로 세월호 가까이 진입했을 때 세월호가 많이 기울어 더 이상 진입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진입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박모 경사 검찰 진술조서 1회) 

하지만 이는 거짓말입니다. 왜냐하면 잠시 후에 올라간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무단정이 처음 세월호에 접안한 9시 39분경보다 5분 정도 후인 9시 44분경 고무단정이 세 번째로 접안했을 때, 세월호가 5분 전보다 더 기울어진 상황임에도 한 해경은 세월호의 갑판으로 올라갔습니다. 

물론 주관적으로 올라가기 힘들겠다는 판단을 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랬다면 대신 어떤 다른 조치를 취했어야 합니다. 침몰 상황을 정장에게 보고하여 지시를 받는다거나, 123정에서 메가폰을 가지고 와서 세월호 바깥에서 퇴선 방송을 한다거나 하는 등의 행동이 있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 조치는 취하지 않고 그냥 알아서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만 고무단정에 태우는 행위만 반복했던 해경이 경사가 심해서 진입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진입할 의사가 없었다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경사가 가파른 상황이라서 진입하지 못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한 전문가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충분히 가능하다고 보입니다. 설사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도구 등을 이용해서 가능한 방법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시도조차 안 해보고 불가능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황모 소방안전본부 감찰조정관 검찰 참고인 진술) 


선원과 해경, 거짓말쟁이는 누구?
2016.07.08 14:45:11
[세월호 의혹의 확정 ⑪] 해경 123정 4
             

123정에서 내려진 고무단정이 세월호를 향해 첫 번째로 출발할 때에는 박모 경사와 김모 경장 두 사람이 타고 있었습니다. 이 고무단정은 세월호로 가서 3층 갑판에 있던 기관실 선원 5명을 구조해서 123정으로 돌아와 인계합니다.


▲9:39:51경 Ⓒ해경 123정 채증 영상


위 사진은 고무단정이 첫 번째로 세월호에 접안하여 기관실 선원 5명을 태우고 123정으로 돌아오고 있는 모습입니다. 위 사진에서 세월호 쪽을 보면 한 사람이 물에 빠져 있는 것이 보이는데, 이 사람은 기관실 선원인 조기수 박모 씨입니다.

고무단정은 123정에 기관실 선원 5명을 인계하고, 두 번째로 세월호를 향해 접근하여 우선 물 속에 빠져 있던 박 씨를 건져 올려 태우고 세월호 갑판쪽에 접안합니다.



▲9:41:36경 Ⓒ 해경 123정 채증 영상


위 사진은 고무단정이 세월호에 두 번째로 접안했을 때의 모습입니다. 노란 원 안에 있는 사람은 조기수 김모 씨입니다. 주황색의 상하일체형 작업복을 입고 마스크를 한 사람으로서 한때 인터넷상에서 '오렌지맨'으로 불렸던 인물입니다. 

고무단정이 세월호를 향해 두 번째로 출발했을 때는 박모 경사, 김모 경장 외에 이모 경사까지 탑승하여 출발하였습니다. 고무단정은 세월호로 가는 도중에 물에 빠져 있던 조기수 박 씨를 단정에 건져 올렸고, 세월호에 접안하여 4층 갑판에 있던 일반승객 3명과 3층 갑판에 있던 마지막 기관실 선원 조기수 김 씨까지 구조하여 123정에 인계하게 됩니다.

이로써 기관실 선원 7명은 전원 구조되었습니다. 이렇게 기관실 선원은 세월호에서 가장 먼저 구조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이들의 복장은 기름이 묻은 선원 작업복 차림이었고 이들은 해경에게 자신들이 선원임을 밝혔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문 : 진술인은 구명정을 타고 가면서 본인이 선원이라고 말을 하였나요.
답 : 네. 구조대원 2명에게 '이 여성은 3기사고, 저희들은 선원입니다.'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123정장 사건, 박모 기관장 참고인 진술조서) 

문 : 구조 당시 진술인이 해경에게 세월호 선원이라고 말했나요.
답 : (···) 제가 기관원 5명과 같이 위 보트에 타고 123정이 있는 곳으로 가자 경비함에 있던 경찰관 여러 명이 저희들을 위 경비함에 잡아주어 올라탔습니다. 그때 위 경비함에 있던 경찰관이 저의 옷을 보더니 "선원이십니까"라고 하여 그래서 저와 기관장님이 "다 기관부 직원이다"고 하였습니다. 당시 옷이 전부 기름때가 뭍고, 지저분해서 선원인지 당연히 알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마 선원이냐고 물어보셨을 것입니다.
(123정 정장 사건, 이모 3등 기관사 참고인 진술조서) 

기관실 선원들은 고무단정의 해경에게든, 123정 위의 해경에게든 모두 자신들이 선원임을 밝혔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해경은 이들이 선원인 줄 몰랐다고 한 목소리로 진술하고 있습니다. 우선 당시 단정에 탑승했던 두 해경, 박모 경사와 김모 경장 모두 선원들이 자신들의 신분을 밝히는 것을 듣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문 : 진술인이 고무보트를 타고 최초로 구한 세월호 선원인 박○○(기관장)는 고무보트를 타고 123정으로 가면서 구조대원 2명에게 "이 여성은 3기사고 저희들은 선원입니다"라고 이야기를 당시 구조하러 온 해경에게 말을 하였다고 진술을 하고 있는데도 선원인지 몰랐다는 말인가요. 
답 : 당시에는 정말 듣지 못하였습니다. 제가 구한 사람이 선원이었던 것을 발견하지 못한 점은 인정하지만 그 사람이 자신이 선원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지는 못하였습니다.
(박모 경사 검찰 진술조서 2회) 

문 : 진술인이 최초로 구한 선원들 중에 박○○(기관장)는 고무보트를 타고 123정으로 가면서 구조대원 2명에게 "이 여성은 3기사고 저희들은 선원입니다."라고 이야기를 하였다고 하는데 진술인은 들은 사실이 있는가요. 
: 듣지 못하였습니다. 
문 : 당시 진술인이 구조를 한 이○○(3기사)은 123정에 타는 순간 해경이 "선원이십니까"라고 해서 기관장과 내가 "기관부 직원"이라고 대답을 했다고 하는데 들은 사실이 있는가요.
답 : 듣지 못하였습니다. 
(김모 경장 검찰 진술조서 2회) 

선원과 해경, 둘 중 어느 한쪽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무단정의 해경뿐 아니라 123정에 탑승해 있던 해경들도 모두 당시 구조한 사람들이 선원인 줄 몰랐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123정의 책임자이고 당시 세월호 침몰 상황에서 현장지휘관의 역할을 맡고 있었던 김경일 정장마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문 : 당시 구조된 사람들은 기름이 묻은 선원 작업복을 입고 있었는데요. 이○○, 이○○, 박○○은 일체형 곤색 스즈끼 작업복을, 손○○는 분리형 황토색 작업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위 사람들이 선원인 사실을 몰랐다는 것인가요. 
답 : 선원들이 구명조끼를 입고 있어 선원복을 입은 것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조타실에 있었고 그 사람들이 고무단정을 타고 123정 쪽으로 오는 것만 봤는데 앉아 있어서 옷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김경일 정장 피의자신문조서 2회) 

이쯤에서 잠깐 정리를 하고 가겠습니다. 전체적인 상황을 다시 한 번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장지휘함의 역할을 맡은 해경 123정은 현장으로 오는 도중 세월호와 교신을 하지 않았고, 현장에 도착해서도 세월호와 교신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리고 교신을 통해서든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 세월호의 현재 상황을 파악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해경이 어떤 행위를 하였을 때 그 행위가 어떤 근거나 판단 하에 이루어진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 따라서 이후 123정이 행했던 대부분의 행위들은 의혹 사항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점도 말씀드렸습니다. 

세월호에 450명의 승객이 타고 있다는 정보를 가지고 있었는데 현장에 도착해 보니 밖으로 나와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리고 세월호는 좌현으로 약 50도 정도 기울어져 있고 계속 침몰하고 있는 중입니다. 

상식적으로 이 상황에서는 세월호와 교신하여 상황을 파악하여야 합니다. 만약 교신을 시도했음에도 세월호와 교신이 되지 않는다면 상황실에 문의도 하고, 해경을 세월호에 승선시켜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상황을 물어보는 등의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하지만 123정은 그런 조치는 취하지 않고 그냥 고무단정을 내렸습니다. 다시 말해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는 것을 뻔히 보면서 아무 말없이 고무단정을 하나 내린 것입니다. 고무단정을 내렸다는 사실만 보면 얼핏 '구조행위'로 보이기도 합니다만, 이런 전후 상황 속에서 바라본다면 애초에 고무단정을 내리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입니다.

그렇게 이상하게 내려진 고무단정은 세월호로 가서 갑판에 나와 있던 사람 5명을 데리고 돌아왔는데, 역시 이상하게도 그 5명은 모두 선원이었습니다. 만약 이때 123정 승조원 한 사람이 세월호에 올라가 선원이나 승객들을 만나서 상황을 파악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등의 행위를 하였다면 이는 상식적인 행위입니다. 

하지만 고무단정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로 세월호에 접안하였을 때도 그냥 갑판 쪽에 나와 있는 사람들만 5명 데리고 돌아옵니다. 그들은 기관실 선원 2명과 일반승객 3명이었습니다. 이렇게 기관실 선원들은 전원구조되었습니다. 

여기서 또 하나 이상한 점이 발생합니다. 최초로 구조해 온 사람이 선원이든 일반 승객이든 세월호에서 나온 최초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해경은 그들에게 세월호의 상황을 물어보았어야 합니다. 하지만 해경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문 : 위 기관실 선원들은 사고 현장에서 구조된 최초의 사람들로, 세월호 내 상황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이 선원인지 승객인지를 불문하고 선내 상황이 어떠한지, 어디에 승객들이 모여있는지, 승객들이 왜 나오지 않는 것인지, 선장이 퇴선 방송을 했는지, 선장이나 선원을 보지 못했는지 확인하여야 하는 것 아닌가요.
답 : 저는 조타실에 있었고 단정에서 그 사람들을 막 내려놓고 갔어요.
문 : 고무단정을 타고 승객을 구조하는 승조원들은 당연히 구조 업무를 하느라 그런 사실을 확인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OSC인 피의자는 당시까지도 승객들이 나오지 않고 있고, 선장이 퇴선 방송을 하지 않은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구요. 승객들이 빨리 나와야 구조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이상 피의자가 조타실에서 나와 배에서 나온 사람들에게 배 안 상황을 확인해 적합한 구조대책을 세워야 하는 것 아닌가요. 
답 : 밖에는 주로 부장이 있었으니까 부장이 해줬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조타실에서 보고 업무를 하고 있었구요. 
(김경일 피의자신문조서 2회) 

책임을 부장에게 떠넘기고 있습니다만 이런 한 마디 한 마디에 다 반응해 줄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정장이든 부장이든 일반 해경이든, 최초로 세월호에서 구조되어 온 사람에게 세월호 상황을 물어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정장, 부장을 포함해 123정 승조원 전원은 그들에게 세월호의 상황을 물어보지 않습니다. 123정에 타고 있던 해경 전원이 되풀이하는 말은 그들이 선원인 줄도 몰랐고, 선원이라고 말하는 것도 못 들었다는 것뿐입니다. 

이렇듯 상식에 어긋나는 행위들은 유능과 무능의 문제로 바라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명백한 의혹사항입니다. 세월호에서 최초로 구조되어 온 사람들에게 세월호 상황을 질문하는 데 특수훈련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듯 명백한 의혹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생겨납니다. (계속) 



해경의 세월호 진입, 승객 구조 목적 아니었다?

2016.07.23 07:26:05


[세월호 의혹의 확정 ⑫] 해경 123정 5

             

고무단정이 세 번째로 세월호에 접안하였을 때, 한 해경은 세월호 좌현 3층 난간을 넘어 세월호로 올라갑니다. 해경이 최초로 세월호로 진입한 것입니다. 당시 세월호가 좌현으로 기울어 1, 2층은 완전히 물에 잠기고 3층이 수면과 가까워져 넘어가기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세월호로 진입한 해경은 고무단정이 두 번째로 세월호를 향해 출발할 때 단정에 탑승했던 이모 경사입니다. 얼핏 생각할 때 해경이 세월호로 진입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행위입니다. 세월호로 올라가서 승객들을 질서 있게 퇴선시킬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후 이모 경사의 움직임은 우리의 예상과 많이 다릅니다.

이모 경사의 이야기를 듣기 전에 먼저 우리가 생각을 해 봅시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해경 123정이 현장에 도착하였을 때 세월호는 50도 이상 기울어져 계속 침몰하는 중이었습니다. 누가봐도 승객들의 퇴선이 시급한 상황이었습니다. 

또한 당시 123정은 세월호의 승객이 450여 명이라는 정보를 가지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갑판이나 해상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승객들은 '배 안'에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갑판에도 사람이 보이지 않으니 정확히 말해 객실, 복도, 라운지 등에 대기하고 있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선박의 문에 대해 간략하게 말씀드릴 필요가 있겠습니다. 선박에서 도선사 출입문을 제외한 모든 문은 안에서 밖으로 열리는 구조입니다. 이는 바깥의 물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고안된 것입니다. 즉 바깥에서 수압이 작용하면 문은 더욱 굳게 닫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조는 객실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배에 문제가 생겨 물이 객실 복도까지 들어왔는데 객실 안에 사람이 있다면 수압으로 인해 객실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사실상 갇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배가 침몰할 때 사람은 선실 안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 세월호가 침몰하던 시기 1시간가량 계속되었던 '대기 방송'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배가 침몰하는 상황에 선실에서 대기하는 것은 사실상 자살 행위입니다. 그리고 '대기'를 '지시'하는 것은 사실상 살인 행위입니다. 선원들은 이러한 선박 문의 구조를 알고 있었을 것이고 따라서 승객들을 대피 갑판으로 집결시켰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선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문: 만약 피의자가 브릿지 데크가 아닌 A, B데크 객실이나 드라이버 룸에 있는 상황이라면 선내 대기하라는 방송을 듣고 계속 선내에 대기하였겠는가요.
답: 세월호가 침몰하는 상황에서 외부 갑판으로 나오지 않고 선내에 대기하고 있으면 그대로 익사합니다. 저는 선내에 대기하라는 방송을 들었으면 외부 갑판으로 나왔을 것입니다.
(1등항해사 강○○ 검찰 피의자신문조서 3회) 

1등항해사 강모 씨의 진술입니다. 자신은 선내 대기 방송을 들었어도 외부 갑판으로 나왔을 것이라고 합니다. 선내에 대기하고 있으면 그대로 익사하니까. 선원들은 승객들이 이대로 대기하고 있으면 모두 익사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승객을 퇴선시키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다시 123정으로 돌아와서, 이러한 상황에 해경이 세월호에 진입을 한다면 그 목표는 승객 퇴선이어야 했습니다. 그럼 이모 경사는 어떤 목적을 갖고 세월호로 진입한 것일까요? 본인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문: 단정을 타고 갈 때 정장, 부장으로부터 어떤 지시를 받은 것이 있는가요.
답: 제가 단정을 타기 전에 조타실에 가서 정장님에게 "구명벌을 터뜨려서 선수 쪽 사람들을 구조해보겠다"고 했더니 정장님이 "가능하겠느냐"고 물어서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하였고 정장님이 "그럼 한 번 해 봐라"고 하여 바로 단정에 올라탔습니다.
문: 진술인이 구명벌을 터뜨리겠다는 생각을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답: 선수 쪽에 사람들이 구조 요청하는 것을 123정 갑판 상에서 봤기 때문에 선수 가까이에 있는 구명벌을 터뜨리면 선수 쪽 사람들을 구출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모 경사 참고인 진술조서 1회) 

문: 세월호 사고현장에 도착하여 어떤 조치를 하였는가요. 시간순서대로 진술하세요.
답: 고무단정이 출발하고 나서 123정이 고무단정 쪽으로 가다 선미 끝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 선수 쪽으로 방향을 돌려서 가고 있는데 선미 쪽으로부터 3분의1 지점쯤에서 고무단정이 사람을 태우고 왔습니다. 그 사람들이 기관부 선원들이었구요. 그때 제가 123정 조타실에 가서 김경일 정장에게 "지금 저 사람들 다 구하려면 구명벌이라도 떨어뜨려야겠습니다. 제가 한번 올라가 보겠습니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다 안에 있는데 안에서 나오면 구명벌이라도 있어야 구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랬더니 정장님이 그렇게 해 보라고 했습니다.
(이모 경사 참고인 진술조서 2회) 

1회 진술과 2회 진술 사이에 차이가 있습니다. 1회 진술 때에는 명백하게 "선수 쪽 사람들"을 지칭하면서 구명벌을 터트려 그들을 구출하려고 하였다고 진술한 반면, 2회 진술에서는 마치 세월호 승객 전원을 고려한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이후 실제 있었던 일들을 고려하면 1회 진술이 사실에 부합합니다. 만약 이모 경사가 세월호 승객 전체를 구조할 생각이 있었다면 구명벌을 펼치는 것 외에 '안에 있는 사람들'을 퇴선시키기 위한 어떤 행위를 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는 세월호 선수에 구명벌 하나를 펼쳤을 뿐 승객 퇴선을 위한 행위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로 접안한 고무단정(09:43:44경). 세월호 조타실쪽에는 한 선원이 줄을 잡고 내려와 있다. ⓒ 해경 123정 채증 영상


그림을 보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위 사진은 고무단정이 세 번째로 세월호에 접안하였을 때의 모습입니다. 세월호 조타실 쪽을 보면 한 사람이 줄을 타고 반쯤 내려와 있습니다. 이 사람을 이모 경사가 말한 '선수 쪽 사람'이라 할 수 있을 텐데 그는 세월호 조타수 박모 씨입니다. 

이상하게도 해경이 마음을 쓰면 그 사람은 선원입니다. 처음 고무단정이 세월호에 가서 그냥 보이는 사람을 5명 구조해 왔는데, 그 사람들이 전원 기관실 선원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선수 쪽에 사람이 있길래 그들의 탈출을 도우려고 하였는데, 그들은 조타실 선원입니다.

아무튼 이모 경사는 '선수 쪽 사람들'을 구하려고 세월호에 진입하였습니다. 지금 고무단정이 접안하고 있는 위치를 잘 봐 주시기 바랍니다. 그곳의 난간을 넘어 이모 경사는 세월호로 진입하는데 그 위치는 세월호 3층 안내데스크와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세월호 3층 모형. ⓒ 검찰 증거기록


위 사진은 세월호 3층 모형입니다. 오른쪽이 선수 방향, 왼쪽이 선미 방향입니다. 노란 화살표가 있는 방향으로 이모 경사가 진입하였습니다. 보시는 것처럼 안내데스크와 가까운 위치입니다. 심지어 당시 이모 경사가 진입한 갑판과 안내데스크 사이에 있었던 문은 열려 있었습니다. 

3층 안내데스크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곳에서 "현재 위치에서 절대 움직이지 마시고" 대기하라는 방송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모 경사가 이때 안내데스크로 진입하여 승객퇴선 방송을 지시하였다면 대부분의 승객들이 구조되었을 것입니다.

세월호가 기울어져 있는 상황이라 진입이 힘들었다면 적어도 소리라도 질러서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퇴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면 승객들이 연속적으로 전달하여 모두에게 퇴선 지시를 전달할 수도 있었습니다.



▲세월호 3층 내부모습(09:42:56경). ⓒ화물기사 촬영 동영상



위 사진은 당시 안내데스크가 있던 3층의 내부 모습입니다. 선수 쪽에서 선미 쪽으로 찍은 화면이므로 오른쪽이 세월호의 좌현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오른쪽에 있는 문이 열려 있어 환하게 빛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안내데스크 위에 엎드리고 있는 사람은 화물기사 최재영 씨이고, 사진 왼쪽에 일부 모습이 보이는 사람이 바로 그 '대기 방송'을 하였던 승무원 강모 씨입니다. 강모 씨는 법정에 나와서 이때 해경이 퇴선 방송을 명령했다면 자신은 방송을 하였을 것이라고 진술하였습니다.

문: 이○○ 경사가 이곳 갑판 위로 올라와서 증인이 있는 곳을 향해 "밖으로 나와라", 갑판으로 나오라고 소리를 쳤으면 들릴 수 있는 거리입니까. 
답: 정확히는 들리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들을 수는 있을 겁니다.
문: 당시 해경이 이곳 갑판 위로 올라와서 승객들을 향해 배 밖으로 나오라고 했다면 증인이 이를 듣고 선내에서 방송을 할 수 있었습니까. 
답: 예, 제가 들었다면 충분히 방송을 할 수 있었습니다. 
(승무원 강○○ 증인신문조서, 김경일 정장재판 1심 제2회 공판조서의 일부)

하지만 이러한 우리의 바람과는 달리 이모 경사는 승객들에게 퇴선을 지시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구명벌을 향해 성큼성큼 나아갔을 뿐입니다. 

문: 계단을 이용해서 올라갈 때 승객들을 못 보았나요. 
답: 네, 제가 막 성큼성큼 올라가는데 채 1분도 걸리지 않았고 그 사이 승객은 보지 못했습니다.  
문: 단정을 접안했을 때 창문이나 난간 안쪽으로 승객이 보이지 않았나요.
답: 못 봤습니다.  
문: 조금만 신경 써서 봤으면 승객의 모습을 보지 않았을까요.
답: 제 눈높이에 맞는 창문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목표한 것(구명벌)이 있었기 때문에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이모 경사 참고인 진술조서 1회) 

여기서 이모 경사의 진입 목적이 '선수 쪽 사람들'을 구조하는 것이었음이 다시 한 번 확인됩니다. 만약 진입 목적이 수백 명의 승객들을 퇴선시키는 데 있었다면 이동하는 과정에 승객들을 찾으려고 노력했을 것이고 육성으로든 방송으로든 퇴선 명령을 하려고 하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3층 갑판에 올라타서 계단을 이용해 5층으로 올라가고, 그리고 다시 선미 쪽에서 구명벌이 있는 선수 쪽까지 이동하는데 채 1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세월호가 기울었지만 아직까지는 이동에 큰 어려움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모 경사의 움직임을 본 한 전문가는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힌다고 하였습니다. 

문: 고무단정을 타고 세월호 좌현 3층 갑판 쪽으로 간 고무단정에 탑승한 해경 대원 중 한 명(경사 이○○)이 3층 난간을 넘어 갑판으로 진입한 뒤 계단을 통해 5충 갑판까지 갔고, 이어 난간을 따라 수평으로 이동하여 구명벌이 있는 곳까지 이동을 하였는데, 그렇다면 위 경찰관의 위와 같은 이동경로에 비추어 당연히 3층 출입문 정도는 열어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나요. 
답: 하 참 말이 안 나오네요 당연히 가능했습니다. 갑판을 걸어가면서 사람들에게 손짓으로 그 쪽으로 나오라고 했어야 합니다. 
(황모 소방안전본부 감찰조정관 검찰 참고인 진술) 

(계속) 


'퇴선 방송' 가능했던 해경은 왜 말을 뒤집었나?

2016.09.11 15:06:22

[세월호 의혹의 확정 ⑬] 해경 123정 6

             

9시 45분경 김경일 정장은 123정 자체를 세월호 윙브릿지에 접안시킵니다. 그리고 세월호 조타실에 있던 사람들을 구조합니다. 당시 조타실에는 선장을 포함한 선원 8명과 필리핀 가수 부부가 있었습니다. 전 국민이 아시는 것처럼 해경은 당시 조타실에서 나온 사람이 선원인 줄 몰랐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문 : 일반 사람들도 자동차 사고가 발생하면 운전석에서 나온 사람이 운전사라는 사실을 알 수 있고, 비행기 맨 앞에서 나온 사람이 비행기 조종사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는데, 조타실 출입문에 출입 통제가 씌어 있고, 조타실 내에 있었으며, 스즈키 복장에 무전기까지 소지하고 있었다면 누가 봐도 선원임을 당연히 알 수 있는 것 아닌가요. 

답 : 예 그렇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선원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김모 경위(123정 부장) 검찰 참고인 진술 조서) 


▲ 09:45:38경. ⓒ해경 123정 채증 영상


윙브릿지란 조타실 옆의 공간을 말하는데, 위 사진에서 노란색 테두리 내부의 영역입니다. 123정은 어떤 이유로 윙브릿지에 접안을 한 것일까요? 김경일 정장의 말을 들어 보겠습니다. 

문 : 최초 123정에서 내린 고무보트에 경사 박○○과 경장 김○○가 탑승하여 세월호에 접근하는 동안 진술인을 비롯한 나머지 대원들은 무엇을 하였는가요.

답 : 123정을 세월호 좌현 선미 쪽에 붙이려고 하였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 붙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좌현 선수 쪽에 붙이려고 하였는데 그것도 사정이 여의치 않아 붙이지 못하고 다시 방향을 틀어 이동하고 있는데 윙브릿지에 사람이 보여 그 사람들을 태우기 위하여 123정을 세월호 윙브릿지에 갖다 댄 것입니다. (김경일 정장 검찰 참고인 진술 조서)

윙브릿지에 사람이 보여서 거기에 접안을 했다고 합니다. 언제나처럼 해경의 눈에 띄는 존재는 알고 보면 선원입니다. 처음에 고무단정을 내려 3층에 그냥 보이는 사람을 구조해 왔더니 그들은 5명 모두 기관실 선원이었습니다. 이○○ 경사의 경우에도 선수 쪽에 사람들이 보여서 그들을 구조하려고 세월호 갑판에 올라탑니다. 선수 쪽 사람들은 조타실 선원이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선수 쪽에 사람들이 보여서 123정 자체를 윙브릿지에 갖다 댄 것입니다.

해경 눈에 선원들이 보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항상 바로 그 눈에 띈 선원들만 구조할 뿐 나머지 승객을 구조하기 위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선원인 줄 알았든 몰랐든 일단 세월호에서 나온 사람에게 세월호의 상황, 승객들의 상황을 물어보고 상황에 맞게 승객들을 퇴선시킬 조치를 취해야 마땅하였지만 해경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 09:49:46경. ⓒ해경 123정 채증 영상



그러다 9시 49분경, 한 해경이 고무호스를 잡고 세월호 조타실로 올라갑니다. 박모 경장인데, 그는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제1차 청문회에 출석해 "아이들이 철이 없어서"라는 유명한 발언을 한 인물이기도 합니다(물론 곧 사과를 하기는 했습니다). 그는 도대체 왜 조타실로 올라간 것일까요? 


: 진술인이 조타실 안으로 들어간 경위가 어떻게 되는가요.
: 조타실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구조하고 있는데, 뒤쪽에서 뭔가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말을 듣고 들어가 보라는 의미로 생각하고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문 : 어떤 소리를 들은 것인가요. 
답 : 무슨 말인지는 잘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문 : 사람의 목소리였는가요, 아니면 스피커 소리였는가요.
답 : 사람의 목소리였던 것 같습니다.  
문 : 멀리서 나는 목소리였는가요. 
답 : 123정의 선수 쪽에 모여 있던 사람들 중에 누군가가 한 소리였던 것 같습니다.
문 : 어떤 말을 들은 것인가요. 
답 : 잘 모르겠습니다.  
문 : 진술인에게 한 말인 것은 맞는가요. 
답 : 저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문 : 상대방이 진술인의 이름을 불렀는가요. 
답 : 이름을 부르는 소리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문 : 그럼 말을 하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는가요. 
답 : 아닙니다. 누가 말을 했는지는 보지 못했습니다.  
문 : 그런데 진술인에게 말을 한다고 느낀 이유는 무엇인가요.
답 : 제가 세월호에 있어서 저에게 말을 한다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박모 경장 검찰 참고인 진술 조서 1회, 2014.6.4.) 

어떤 소리가 들렸고, 본인은 그것을 조타실로 올라가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내용도 모르고, 본인에게 한 말인지도 불분명한 어떤 소리 때문에 올라갔다는 말이 납득이 되시나요? 위 1회 진술만 보아도 박모 경장은 뭔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그리고 이후의 진술을 보면 더더욱 그러한 생각은 굳어집니다.

문 : 진술인은 감사원 조사에서 세월호 조타실에 올라가면서 생각한 것이 세월호 조타실로 진입하면 비상탈출 스위치를 찾아 누르거나 선내 안내 방송으로 승객들이 퇴선하도록 방송하는 등 승객들에게 도움을 주는 가능한 조치를 취하기 위해 조타실에 올라갔다고 진술하였습니다. 오늘 진술에서는 방송 생각을 하지 않고 사람이 나오지 않아 웅성거리는 소리에 올라가서 확인하라는 의미로 알고 조타실에 올라갔으나 아무도 없어 홋줄을 풀고 나왔다고 진술하였는데, 진술이 변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답 : 올라갈 상황이 되었으면 올라갔을 것입니다. 방송을 봤다면 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문 : 감사원 조사에서는 진술인이 방송할 생각으로 올라갔다고 진술했는데, 오늘 진술과 배치된 것이 아닌가요. 
답 : (묵묵부답) (박모 경장 검찰 참고인 진술 조서 2회, 2014.7.16.)

박모 경장은 검찰 1회 진술 이전에 있었던 감사원 진술에서는 선내 방송을 위해 올라갔다고 주장을 하였다가, 이제 검찰 진술에서는 다르게 진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소리'라는 이상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러다 4회 진술에 이르러서는 사람의 목소리인지조차도 모른다고 진술합니다. 

문 : 진술인은 세월호 좌현 윙브릿지 아래에서 조타실에서 나오는 선원들을 받아 안전하게 123정에 옮겨 태우던 중 09:49경 조타실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답 : 누군가 하는 무슨 소리를 듣고 제가 올라가게 된 것입니다.
문 : '누군가'는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요. 
답 : 잘 모르겠습니다.  
문 : '무슨 소리'란 인근에서 들려오던 육성이던가요, 대공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소리던가요. 
답 :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뒤에서 나오는 소리였습니다. (박모 경장 검찰 참고인 진술 조서 4회, 2014.8.3.) 

시간적으로 가장 나중에 있었던 선장선원 재판 1심 공판에 출석하여 진술할 때는 내용이 또 달라집니다. 

문 : 누가 증인에게 조타실로 올라가라고 한 것인가요. 
답 : 예, 정확히 듣지 못했는데, 짤막짤막한 말을 듣고 올라갔는데, 홋줄이라는 말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문 : 짤막한 말이 대공 방송으로 나왔나요. 육성으로 소리치는 말이었나요.
답 : 마이크는 못 들었던 것 같고 육성으로 말했던 것 같습니다. 경황이 없어서. (선장선원 재판 1심 제8회 공판조서의 일부, 2014.8.13.) 

'홋줄'이라는 단어가 새롭게 등장하였습니다. 5월에 있었던 감사원 감사에서부터 6~8월에 걸친 검찰 진술에서 단 한 번도 거론되지 않았던 단어가 홀연히 등장한 것입니다. 심지어 검찰 조서 4회에서는 근처 사람의 목소리인지, 스피커 소리인지조차 모르겠다던 사람이 이제는 구체적인 단어를 들었다고 하는데 이를 과연 믿을 수 있을까요?

꼭 범죄 심리학 전문가가 아니라 하더라도 박모 경장은 뭔가 숨기고 있다는 것, 뭔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박모 경장은 세월호 조타실에서 소위 '검은 물체'를 가지고 나온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고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가 세월호 조타실로 진입한 이유는 현재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검은 물체가 무엇인지도 아직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당시 박모 경장이 조타실에 진입하여 퇴선 방송을 하였다면 수백 명의 귀중한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 세월호 조타실 사진. ⓒ검찰


위 사진은 세월호 조타실을 우현에서 좌현쪽으로 촬영한 것입니다. 당시 세월호가 50도 이상 좌현으로 기울었으므로 조타실 입구까지 줄을 잡고 올라왔다면 그 다음에는 입구 왼쪽 옆(사진상으로는 오른쪽) 공간에 올라탈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쭉 연결되어 있는 핸드레일을 잡고 이동이 가능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조타실 내에는 퇴선 방송을 할 수 있는 장비가 곳곳에 있었습니다. 

문 : 세월호 조타실은 특이한 점이 있나요 
답 : 제가 봤을 때는 특이점이 없고 일반 보통의 배와 동일합니다. 방송 장비가 마이크 누르면 소리가 나는 방송 장치, 전화기 0번 돌리고 말하면 전체 선내로 퍼지는 장치, 퇴선경보를 제끼면 되는 것(띠띠띠 소리가 남) 등 모두 동일합니다. 세월호 조타실 사진을 보면 동일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설치되어 있지 않으면 배에 인가가 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무전기로도 방송이 됩니다. 
(진모 전 해군 해난구조대 대장 검찰 참고인 진술) 

이러한 방송 장비는 일반적인 뱃사람이나 해양경찰은 모두 작동을 할 줄 아는 장비들입니다. 박모 경장이 조타실 내부로 진입하여 퇴선 방송을 하였다면 대부분의 승객들은 구조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조타실 입구에서 조타실 내부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라고만 이야기합니다. 

문 : 증인은 '당시에 조타실 내로 올라갈 수 없었다. 미끄러졌다'라는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는데 당시 올라가기 위해 어떤 시도를 했나요. 
답 : '뛰어야 되나'하는 생각을 한 번 했었습니다.  
문 : 위쪽으로 뛰어야겠다는 생각만 했을 뿐, 신체적인 움직임이 있었나요.
답 : 없었습니다. 
문 : 당시에 조타실 내에 집기들이 있었을텐데, 집기들을 밟고 올라가려고 시도는 해 보았나요. 
답 : 못했습니다. 
문 : 어린 여학생들도 사물함을 밟고 기어 올라가는 시도를 해서 실제 탈출한 학생들이 다수 있는데, 훈련 경험이 있는 증인은 그러한 생각조차 해 보지 않았으면서 개인적 역량이 부족해서 올라갈 수 없었다고 진술하는 것인가요. 
답 : .... (선장선원재판 1심 제8회 공판조서의 일부) 

이렇게 전원 구조할 수 있었던 또 한 번의 기회가 사라져버렸습니다.


'세월호, 의혹의 확정'은 '국민참여를 통한 세월호 진상규명' 후속 연재입니다. 박영대 위원은 세월호 연구팀장을 맡고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 당시 서해청장의 행적 물었더니...
2016.10.03 08:53:53
[세월호 의혹의 확정 ⑭] 서해지방해양경찰청1
             

세월호 참사 당시, 관련된 해양경찰의 단위에는 가장 말단의 목포해양경찰서(목포서), 그 상급단위로 서해지방해양경찰청(서해청, 목포 소재), 그리고 인천에 있었던 해양경찰청(본청) 등이 있었습니다.

해경은 현재 "고심 끝에" 해체돼 국민안전처 산하의 해양경비안전본부로 재편되었고, 위 단위들도 각각 목포해양경비안전서, 서해해양경비안전본부, 해양경비안전본부로 바뀌었습니다. 대통령이 해경을 "해체"한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바람에 해경이 공중분해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실제로는 명칭이 바뀌고 소관 사무가 일부 조정된 정도에 불과합니다. 

해양경찰청의 근거가 구 정부조직법 제43조 "해양에서의 경찰 및 오염방제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기 위하여 해양수산부장관 소속으로 해양경찰청을 둔다"였다면, 해양경비안전본부의 근거는 개정 정부조직법 제22조의2 "국민안전처에 소방사무를 담당하는 본부장을 두되 소방총감인 소방공무원으로 보하고, 해양에서의 경비·안전·오염방제 및 해상에서 발생한 사건의 수사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는 본부장을 두되 치안총감인 경찰공무원으로 보한다"입니다.

얼핏 봤을 때 '경찰'이라는 단어가 삭제되었기 때문에 기능이 크게 축소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개정 정부조직법의 부칙 제2조를 보면, 기존에 해경이 가지고 있던 육상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한 수사 및 정보에 관한 사무를 경찰청(육경)으로 넘기고, 해상교통관제센터에 관한 사무는 해양수산부로부터 이관받은 것이 변화의 전부입니다. 

현재 해양경비안전본부는 해양경찰청이 수행하던 업무를 대부분 승계하였고 경찰권 역시 행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세월호 참사 당시 제주VTS는 해수부 관할, 진도VTS는 해경 관할이라는 이원적 구조에 대한 비판에 직면하여 이를 일원화하면서 해상교통관제센터에 관한 사무도 해양경비안전본부가 담당하게 된 것입니다. 

아무튼 다시 2014년으로 돌아가서, 세월호 참사 당시 시행 중이던 '수난구호법'-현재는 '수상에서의 수색‧구조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해수면에서의 수난구호를 위해 해양경찰청에 중앙구조본부를, 지방해양경찰청에 광역구조본부를, 해양경찰서에 지역구조본부를 두게 되어 있었습니다. 

세월호 참사의 경우, 해양경찰청에 중앙구조본부, 서해지방해양경찰청에 광역구조본부, 목포해양경찰서에 지역구조본부가 설치되었던 것이고, 당시 해양경찰청장 김석균이 중앙구조본부장, 서해청장 김수현이 광역구조본부장, 목포서장 김문홍이 지역구조본부장의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오늘은 서해청과 서해청장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당시 시행 중이던 수난구호법 시행령에 따르면 광역구조본부의 장은 △광역구조본부 관할해역에서의 수난구호업무 총괄·조정·지휘 및 관계 기관, 외국기관과의 협력, △관할해역에서의 수난구호업무 수행, △소속 구조대의 편성·운영 및 구조활동에 관한 지휘·통제, △지역 소재 수난구호협력기관과 수난구호민간단체의 수난구호활동 역할 분담 및 지휘·통제, △법 제33조에 따른 선박위치통보제도의 시행에 관한 사항, △해상수난구호업무를 위한 지역 통신망의 관리·운용, △그 밖에 중앙구조본부의 장으로부터 위임받거나 지시받은 사항 등을 관장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법적으로 많은 일들을 해야 하는 막중한 자리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서해청장은 이러한 임무를 책임 있게 수행하였을까요? 이를 알아보기 위해 세월호 참사 당일 서해청 상황실에서 서해청장의 좌석과 거리상 매우 가까운 위치에 있었던 사람의 진술을 확인해보겠습니다.


▲서해청 상황실 배치도(김모 총경(서해청 경비안전과장) 검찰 참고인 진술조서(2014.7.4.) 첨부). ⓒ검찰


위 그림은 2014년 4월 16일 서해청 상황실의 배치도입니다. 서해청 상황실은 맨 앞에 다양한 정보를 보여주는 멀티큐브 화면이 있고 그 뒤로 각 담당자의 책상과 컴퓨터 등이 있는 그런 구조입니다. 

멀티큐브 화면을 정가운데에서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서해청장의 자리가 있고 그로부터 왼쪽 대각선 방향으로 2.5미터 떨어진 곳에 서해청 경비안전과장의 자리가 있었습니다. 당시 서해청 경비안전과장 김모 총경은 상황실 상황대책팀의 팀장으로서의 임무와 광역구조본부 구난조정관으로서 서해청장에게 상황을 보고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진술과 자료에 따르면 김모 총경은 9시 4분경 서해청 상황실에 임장하였고, 서해청장은 그 1분 뒤인 9시 5분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적어도 세월호가 완전히 전복될 때까지 상황실에 함께 있었던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럼 서해청장과 가까운 위치에 자리해 있고, 또 서해청장에게 상황을 보고하는 임무를 맡고 있는 사람에게 당시 서해청장은 어떠한 임무를 수행하였는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다음은 2014년 7월 4일 서해청 경비안전과장 김모 총경의 검찰 진술조서에서 서해청장에 대한 질문과 답변들을 모은 것입니다. 

문 : 서해청장은 어떠한 지휘를 하였는가요. 
답 : 잘 모르겠습니다.  
문 : 서해지방청장은 광역구조본부장으로서 세월호 사고 당시 통합 지휘를 하였는가요.
답 : (작은 목소리로) 잘 모르겠습니다.  
문 : 사고 접수부터 4.16. 24:00까지 서해청 시차별 주요조치사항 중 상황실 책임관이면서 광역구조본부장인 서해청장이 조치한 사항이 있는가요. 
답 : 답변드리기 곤란 합니다.  
문 : 진술인의 진술을 보면 사고 접수부터 4.16. 24:00까지 상황실 책임자인 서해청장은 세월호 사고와 관련하여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어떠한가요.
답 : (작은 목소리로) 잘 모르겠습니다.  
문 : 세월호 사고 당시 서해청장은 상황실에서 무엇을 하였는가요.
답 : 상황보고를 받으신 것은 알고 있는데 무엇을 하셨는지는 상세히는 모르겠습니다.

뭔가 좀 이상합니다. 가까운 거리에 있고 심지어 전개되는 상황에 대한 보고 임무를 맡은 사람이 서해청장이 무엇을 하였는지 대해 전혀 답변을 못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각자 자기 업무를 보는 그런 관계도 아닙니다. 

문 : 진술인은 구난조정관으로서 각 대책반에서 올라온 진행 상황을 어떠한 방법으로 지방청장에게 보고를 하는가요. 
답 : 상황실 서해청장님 자리 옆에 보드판이 설치되어 있는데 그 보드판에다 제가 각 대책반에서 올라온 진행 상황을 그대로 기재하여 청장님이 실시간으로 보실 수 있도록 보고를 합니다. 

경비안전과장 김모 총경은 서해청장 옆에 있는 보드판에 상황을 기재하는 방식으로 보고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일정한 내용을 기입하다 보면 서해청장이 어떤 질문을 할 수도 있고 어떤 지시를 할 수도 있을 텐데 김모 총경은 서해청장이 어떤 일을 하였는지 전혀 답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참사가 발생한 상황에 자신의 상사가 난처한 상황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지어내서라도 일정한 지시를 한 것으로 진술을 할 수도 있을 텐데 그렇게 하지도 않습니다.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던 그 시간, 서해청장은 도대체 무엇을 하였던 것일까요? (계속)


"승객 갇혀있다" 요청에 "안정시켜라. 이상"?
2016.10.29 07:31:09

[세월호 의혹의 확정 ⑮] 서해지방해양경찰청 2
             

지난 회에 서해청장 김수현과 2.5미터 떨어진 거리에 있었고, 서해청장에게 상황을 보고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던 서해청 경비안전과장 김모 총경이 서해청장의 참사 당일 행적을 알지 못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의 진술을 좀 더 살펴보면 이상한 점은 단순히 서해청장의 행적을 알지 못한다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다음은 서해청장의 TRS 교신과 관련된 김모 총경의 진술을 모은 것입니다.

문 : 서해청장은 TRS를 직접 교신하였는가요. 
답 : TRS는 서해청장님도 가지고 계신데 교신하는 것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문 : 서해청장이 상황실에 임장한 09:05경부터 11:30분까지 TRS로 교신한 사실이 있는가요.
답 : 보지 못해 정확히 말씀드리기 힘듭니다.  
문 : 서해청장이 상황실에 임장한 09:05경부터 11:30분까지 TRS로 교신하지 않고, 상황 조치도 하지 않았다면 서해청장은 상황실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다는 말인가요.
답 : 답변 드리기 곤란합니다.  
(2014년 7월 4일 서해청 경비안전과장 김모 총경의 검찰 진술조서.)

김모 총경은 서해청장이 TRS로 교신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TRS 교신을 실제로 들어보면 서해청장은 몇 차례 교신을 하였습니다. 서해청장은 9시 48분경 교신에서 처음 등장하여 몇 마디의 말을 하였고 그리고는 10시 8분경 다시 등장합니다.

분명 서해청장은 TRS로 교신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근거리에 있었던 사람이 이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물론 서해청장이 TRS를 할 때에만 마침 김모 총경이 화장실이나 어디 다른 곳에 갔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9시 48분에서 10시 8분 사이의 시간대는 세월호의 좌현이 거의 물에 잠겼을 뿐만 아니라 세월호가 계속해서 침몰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 결정적인 순간에 과연 상황실을 이탈했을까요? 또 설사 9시 48분에는 화장실을 갔다 하더라도 10시 8분에는 상황실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2014년 4월 16일 오전 9시 48분 8초경. ⓒ123정 채증영상


위는 세월호의 9시 48분 8초경의 상황입니다. 세월호 조타실에서 선원들이 탈출하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지만 세월호 자체를 보시면 조타실이 있는 5층을 제외하고는 좌현이 거의 물에 잠기고 있는 상황입니다.



▲ 0시 8분 17초경. ⓒCN-235 촬영영상


위는 CN-235(B703호)가 촬영한 영상의 10시 8분 17초경을 캡처한 화면입니다. 세월호가 좌현으로 더 기울어서 5층 좌현에 있던 구명벌도 물속에 잠겨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자, 이러한 상황에 서해청장은 몇 번의 TRS 교신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서해청장과 같은 공간에서 가까이 있었다고 하는 김모 총경이 참사 당일 서해청장의 활동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TRS로 교신을 한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몇 가지 경우의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김모 총경은 상황실에 있었지만 서해청장은 다른 곳에 있었고, 상황실 아닌 곳에 있으면서 TRS로 교신만 몇 번 한 경우입니다. 두 번째 서해청장은 상황실에 있었지만 김모 총경이 다른 곳에 있어서 서해청장이 TRS 교신하는 것을 보지 못한 경우입니다. 세 번째 두 사람 다 상황실이 아닌 다른 곳에 각각 따로 있었던 경우입니다. 

현재로써는 어느 경우의 수가 맞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서해청장과 김모 총경이 같은 장소에 있지 않았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다음으로 서해청장의 TRS 교신내용 자체를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서해청장이 TRS 교신을 통해 내린 조치가 과연 적절한 것이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김수현 서해청장이 등장하는 부분의 TRS 교신입니다. TRS 녹취록과 음성파일은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홈페이지에 공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 시간은 음성파일 파일명의 시간에 1분을 더하여야 합니다. 

김경일 : 목포타워, 여기는 123. 현재 본국이 좌현 선수를 접안해가지고 승객을 태우고 있는데, 경사가 너무 심해가지고 사람들이 지금 하선을 못하고 있습니다. 아마 잠시 후에 침몰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상. 
목포서 상황실장 : 완료. 수신 완료. 그리고 천천히 또박또박 말해 주기 바람.
김경일 : **  
김수현 : Pl23, Pl23. 단정 내려가지고, 단정 내려가지고 귀국 쪽으로 편승시키면 안 되는지? 정장! 
김경일 : 여기는 123. 현재 배가 잠시 후에 곧 침몰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일단 저희들이 해상에 지금 현재 사람이 ** 내리고 있습니다. 먼저 구하고 나서 다시 계류하려고 합니다. 이상.
김수현 : 123, 123. 여기는 명1 입니다. 
김경일 : 아, 여기는 123. 현재 배가 약 60도, 60도까지 기울어가지고 지금 함수 현측이, 좌현 현측이 완전히 다 지금 침수되고 있습니다. 이상. 
김수현 : 123, 123. 여기는 명1. 완료. 
김경일 : 여기 123. 이상. 
김수현 : 123, 123. 여기, 여기는 명 1. ** 
(TRS 9시 48분경.) 

위는 파일명이 'TRS_20140416_094736_24'인 5분짜리 파일의 교신내용입니다. 9시 47분 36초를 나타내고 있으므로 여기서 1분을 더하여 9시 48분경부터 시작된 교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위 교신에서 '타워'는 상황실을 말하는데, 따라서 '목포타워'는 목포서 상황실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김수현이 말한 명1은 서해청장을 가리키는 교신 용어입니다.

9시 48분경은 위의 사진에서 보신 것처럼 123정이 세월호 조타실에 접안하여 조타실 선원들이 탈출하고 있는 시간입니다. 그때 김경일 정장은 세월호가 "잠시 후에 침몰할 것"이라고 보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들은 서해청장은 "단정 내려가지고 귀국 쪽으로 편승시키면 안 되느냐"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승객을 구조하라는 지시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실제로 이 이야기는 당시 상황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세월호에는 400명이 넘는 승객이 탑승하고 있습니다. 123정은 100톤급의 소형 경비정이고 123정이 보유한 단정은 7-8인승입니다. 그리고 방금 123정장 김경일이 "잠시 후 침몰"할 것 같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이 급박한 상황에 단정을 내려가지고 세월호의 승객을 7-8명씩 태워서 123정 쪽으로 옮겨 태우라는 이야기는 말도 안 되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어이없는 교신은 계속됩니다. 위 교신의 뒷 부분을 계속 확인해 보겠습니다.

김경일 : 여기는 123. 현재 구조된 인원은 확인하지 못해가지고 ** 현재 인원 파악은 못 하고 약 한 50명 정도, 50명 정도 본함에 승선했는데, 현재 계속 단정을 이용해 가지고 구조 중에 있습니다. 이상. 
목포서 상황실장 : 123, 50명 편승했으면 거기서 가장 가까운 데, 가까운 데로다가 신속하게 내려주고 다시 구조를 더 할 수 있도록 하세요. 이상. 
김경일 : 인근에다 상선 그쪽에다가 ** 하선하겠습니다. 이상.
목포서 상황실장 : 가장 인근에 있는 가까운 곳에다 신속하게 하선조치 시키고 다시 또 편승시킬 수 있도록 그렇게 조치하세요. 이상. 
서해청 고모 경감 : 모든 국, 모든 국. 여기는 명인집, 명인집. ** 빨리 **
김경일 : 목포타워, 여기는 123. 현재 승객이 절반 이상이 지금 안에 갇혀서 못 나온답니다. 빨리 122구조대가 와서 빨리 구조해야 될 것 같습니다. 
서해청 고모 경감 : 123, 여기는 명인집타워. 본청 l번님하고 명인집타워 1번님 지시사항임 . 123 직원들이 안전장구 갖추고 여객선 올라가가지고 승객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안정시키기 바람. 이상. 수신 여부. 
김경일 : 여기는 123 수신 완료. 수신 완료. 

위에서 명인집은 서해청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명인집타워는 서해청 상황실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본청 1번님은 해양경찰청장을 말하고, 명인집타워 1번님은 서해청장을 말합니다.

앞에서 김경일 정장이 "잠시 후에 침몰"을 이야기했고 이제 "승객이 절반 이상이 안에 갇혀서 못 나오"고 있다고 했는데 그에 대한 해양경찰청장과 서해청장의 지시가 "123정 직원들이 안전장구 갖추고 여객선 올라가 가지고 승객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안정시키"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수백 명의 승객이 탑승한 거대한 여객선이 침몰, 그것도 잠시 후에 곧 침몰할 것 같다는 보고를 받고 내리는 지시가 '직원들이 올라가서 승객들을 안정시키라'는 것이어야 할까요? 

이 역시 말도 안 되는 지시입니다. "당장 승객들을 퇴선시켜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승객들을 퇴선시켜라!"가 당시 당연한 지시였습니다. 그게 아니면 승객들을 어떻게 퇴선시킬 계획인지 또는 어떻게 퇴선시키고 있는지, 현장조치 사항에 대한 질문을 했어야 합니다.

이렇듯 상황에 맞지 않는 교신은 10시 8분 TRS에서도 계속됩니다. (계속)

[Why뉴스] "세월호에 정말 철근 400톤이 실렸었나?"

노컷뉴스 | CBS노컷뉴스 권영철 선임기자 | 입력 2016.06.21. 09:51 | 수정 2016.06.21. 11:03               

뉴스의 속사정이 궁금하다. 뉴스의 행간을 속 시원히 짚어 줍니다. [Why뉴스]는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를 통해 들을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 방송 : 권영철의 Why뉴스
■ 채널 : 표준 FM 98.1 (07:30~09:00)
■ 진행 : 김현정 앵커
■ 대담 : 권영철 CBS 선임기자

세월호가 왜 침몰했는지 구조과정은 왜 그렇게 문제점 투성이인지 정부 컨트롤타워는 왜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는지 수많은 의혹이 풀리지 않고 있다. 물론 아직도 9명은 차디찬 바다속에서 가족들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세월호 침몰원인과 관련해서 새로운 의혹이 제기됐다. 세월호에 철근 400여톤이 실렸고 이 철근은 제주해군기지 건설용 자재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월호가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출항 할 수밖에 없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그래서 오늘 [Why뉴스]에서는 "세월호에 정말 철근 400톤이 실렸었나?"라는 주제로 그 속사정을 알아보고자 한다.

검찰은 세월호에 철근 286톤 H빔 37톤 등 화물 2142톤이 실렸다고 발표했다. (사진=자료사진)
검찰은 세월호에 철근 286톤 H빔 37톤 등 화물 2142톤이 실렸다고 발표했다. (사진=자료사진)
▶ 세월호에 철근 400톤이 실렸다는 게 사실인가?

= 철근이 실렸다는 건 사실이다. 그런데 그 철근이 400톤인지 아닌지는 세월호특조위가 확인중에 있다.

세월호 참사원인을 수사한 검찰은 철근 286톤 H빔 37톤 등 화물 2142톤이 실렸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뉴스타파가(지난 4월15일) CCTV와 손해사정인의 손해사정 결과 등을 토대로 확인한 바로는 철근이 124톤 더 많은 410톤이 실렸고 H빔은 15톤이 더 많은 52톤이 실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디어오늘이 지난주 금요일(6월 17일) 세월호에 실린 철근 400톤이 제주해군기지 건설용 자재라는 사실이 드러났다고 보도했다.

그렇지만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에서는 철근 400톤의 존재유무에 대해 "조사중인 사안"이라고만 확인할 뿐 부인도 시인도 하지 않고 있다. 세월호 특조위 고위관계자는 "세월호에 철근이 얼마나 실렸는지는 조사중인 사안"이라며 "조사가 마무리 돼야 확인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세월호 변호사로 불리는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은 "세월호에 철근이 실렸다는 사실은 검찰수사에서 밝혀졌지만 구체적으로 얼마나 실렸는지 그 철근이 해군기지 공사용이 맞는지 여부 등은 해군에서 확인을 해줘야 한다"면서 "그러나 해군기지에서 확인을 해주지 않고 있고 해군도 자료를 안 내놓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얘기들을 종합해보면 세월호에 철근이 400여톤 이상 실렸고 H빔도 50여톤이 실렸다는 게 사실로 보인다. 다만 철근과 H빔이 제주해군기지 건설용 자재인지 여부는 해군기지나 해군, 국방부에서 확인을 해야 할 사안이다.

▶ 400톤이면 사람으로 치면 몇명 정도 되는 거냐?

= 세월호 탑승했던 인원이 476명인데 42.8톤으로 추산됐으니까 410톤이면 거의 5천명에 가깝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미 세월호는 여객선이 아니라 화물선이라는 게 검찰수사에서 드러났었다. 인천에서 출항항 때는 건축자재를 실어나르고 제주에서 인천으로 올 때는 생수를 실어날랐다.

(사진=자료사진)
(사진=자료사진)
▶ 검찰수사에서는 어떻게 철근 400톤이 실렸다는 사실이 확인되지 않은거냐?

= 앞서 설명한 대로 검찰은 철근 286톤이 실린 것으로 조사했다. 차량으로 15대 분량인데 차량 한 대에 채 20톤이 채 안 된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실제로는 트럭 1대에 26톤이 넘게 실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수사에 참여했던 검찰관계자는 "(화물) 전수조사를 다 했다. 목록도 확인했고, 관계자들도 불러서 얼마나 실었는지 어디서 어디로 가는지도 조사했다"면서 "철근 400톤 이야기의 출처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더 과적이 됐다면 수사결과에 부합하는 것 아니겠나?"라고 반문했다.

구체적으로 400톤이 실렸는지 286톤이 실렸는지에 대해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과적이 원인이라는 건 밝혔다는 얘기다.

다만 이 검찰관계자는 "제주해군기지로 가는 철근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게 없다. 당시에 그런 이야기는 없었다"고 말했다. 당시 검찰의 수사지휘라인에 있었던 관계자도 "과적과 고박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건 알지만 철근이 해군기지 공사용이라는 사실은 들은 바가 없다"고 말했다.

제주해군기지 전경 (사진=해군본부 제공)
제주해군기지 전경 (사진=해군본부 제공)
▶ 철근 400톤이 해군기지 건설용 자재인지 아닌지가 왜 중요한가?

= 세월호의 상습적인 과적의 원인이 유병언 일가와 청해진 해운의 과욕 때문이라고 알려져 왔다. 그런데 제주해군기지 건설용 자재를 과적한 사실이 확인된다면 정부에도 과적의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박주민 의원은 "지금까지는 민간업체의 무리한 과적과 탐욕에 초점이 맞춰줬는데 400톤 철근 의혹이 사실이라면 민간업체의 욕심을 넘어서서 정부기관의 무리한 요구로 과적을 했을 가능성에 대해 조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 세월호가 악천후 속에서 무리하게 출항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해군기지 건설용 자재 때문이 아니겠느냐는 얘기다.

여기에 국정원이 세월호 실소유주라는 의문과 함께 세월호가 유일하게 국정원에 보고의무를 지고 있었던 것도 제주 해군기지건설용 자재 때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세월호 특조위의 한 고위관계자는 "세월호가 왜 무리하게 출항했는지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면서 "혹시라도 그런 철근을 실었기 때문에 운항을 뒤로 미루지 못하고 그날 악천후에 출발한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침몰하는 세월호 (사진=자료사진)
침몰하는 세월호 (사진=자료사진)
▶ 그동안 제기됐던 세월호 참사의혹들은 밝혀졌나?

= 해소되지 않은 의혹들이 많다. 그 중 최소한 다섯가지는 반드시 가려져야 한다.

첫 번째 가장 핵심 중 하나는 세월호 침몰원인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15년 11월 12일 세월호 선장 이준석씨의 살인죄를 전원일치로 확정했다. 그렇지만 세월호 참사의 원인이 조타 미숙에 의한 것이었다는 검찰의 기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법원은 검찰이 조타 미숙과 항해사의 지휘감독 잘못으로 세월호가 좌현으로 기울어지면서 전복됐다고 세월호를 몰았던 3등 항해사 박모(23·여)씨와 조타수 조모(56)씨의 업무상과실 선박매몰 혐의로 기소했지만 무죄를 판단한 원심을 확정했다. 대법원은 조타기나 프로펠러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았을 합리적 의심이 남아있어 이들의 잘못을 단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따라서 세월호의 침몰원인은 여전히 미궁인 셈이다.

더민주 우원식 의원 (사진=자료사진)
더민주 우원식 의원 (사진=자료사진)
더민주 우원식 의원은 "대법원의 판단은 세월호를 인양해 조사하지 않고서는 세월호가 4월 16일 침몰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을 알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두 번째는 그동안 세월호의 과적이 민간업자의 욕심 때문이라고 했지만 410톤의 철근이 제주 해군기지건설용 자재가 맞다면 정부도 과정에 책임이 있는지를 밝혀야 한다.

세 번째는 국정원의 관련의혹이다. 세월호 실소유주가 국정원이라는 의혹이 있고 유일하게 세월호만 국정원에 보고하도록 돼 있는 이유 등이 명쾌하게 밝혀져야 한다. 국정원 관련 의혹은 넘치고 있다. 그런 의혹들을 규명해야 세월호 문제가 풀리게 된다.

네 번째는 청와대의 대응이 적정했느냐 하는 점도 규명되어야 한다. 청와대 조사를 두고 청와대와 여당은 대통령의 사생활을 침해하거나 정치공세라고 일축하고 있지만 청와대가 제대로 대응했는지 여부는 재난컨트롤타워로서 적절하게 대응했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대통령은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사실 세월호 특조위 조사의 최대 걸림돌은 '대통령의 7시간'이다. 그런데 더민주 소속인 김영춘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장이 지난 14일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 대상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당일 행적을 제외하자고 제안했다.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 (사진=황진환 기자/자료사진)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 (사진=황진환 기자/자료사진)
박주민 의원은 "대통령의 7시간이나 사생활에 관심이 없다. 당시 청와대가 어떻게 보고를 받고 어떤 지시를 내렸는지 그 과정만 밝히면 된다"고 말했다. 특조위 한 고위관계자도 "대통령의 사생활에 관심없고 그걸 캘 의사도 없다"면서 "다만 조사대상에 성역이 있을 수는 없고, 사고 당시 대통령에 대한 보고와 지시 등 대통령의 재난 대응이 핵심"이라고 말했다.

다섯 번째는 해경이 세월호 선장과 선원을 먼저 구조함으로서 승객을 구조할 의무와 능력이 있는 선장과 선원들을 선박과 분리시켜 선박을 더 위태롭게 만든 이유가 밝혀져야 한다. 선장과 선원들이 퇴선하지 않고 선박에 있었다면 퇴선명령을 했을 수도 있고 승객구조에 적극나섰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특조위의 조사기간을 연장해야 하고 특조위의 조사가 제대로 이뤄질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 세월호의 침몰원인을 밝히고자 하는 특조위의 활동을 반대하는 이유를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 할 수가 없다.

박근혜 대통령 (사진=청와대 제공)
박근혜 대통령 (사진=청와대 제공)
▶ 그런데 문제는 특조위의 활동기간인데 연장이 가능한거냐?

= 정부와 여당은 특조위의 활동기간 연장에 부정적이다. 박주민 의원은 "정부·여당이 철벽 방어를 하고 있어서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4월, "세월호 특위 연장 여부는 세금이 많이 들어가는 문제"라고 말했다. 연장이 어렵다는 얘기다. 새누리당 정진석 원내대표도 세월호 특조가 저희는 상당 부분 이뤄졌고 특별법을 개정을 해서 조사 기간을 연장하는 것이 과연 필요할까? 과연 대다수 국민들도 여기에 동의할까? 라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일단 20대 국회의원 128명(더민주 122명과 정의당 6명 전원 참여)이 서명한 ‘4·16세월호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세월호 특별법) 개정안이 지난 7일 발의됐다. 국민의당 역시 세월호 특별법 개정에 공조하겠다는 방침이어서 여소야대 국면이므로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정부와 새누리당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 난항이 예상된다.

개정안은 세월호특조위의 활동기간을 '기재부로부터 예산을 배정받은 날(8월 7일)'부터 기산하도록 했고 정밀조사가 완료되지 않을 경우 선체가 인양돼 육상에 거치된 때로부터 1년간 조사기간을 연장하도록 했다.

현행 법안은 특조위의 활동 기간에 대해 '구성을 마친 날부터 1년 이내에 활동을 완료해야 한다'며 '이 기간 내에 활동을 완료하기 어려운 경우 6개월 이내에서 연장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정부는 이를 근거로 특조위가 공식 출범한 2015년 1월 1일을 기준으로 오는 6월까지만 예산을 편성한 상태다.

특히 정부는 해양수산부와 행정자치부, 기획재정부가 잇따라 특조위에 공문을 보내 6월 30일로 조사기간이 끝난다며 종합보고서와 백서 발간을 위한 필요한 정원안을 제출하라는 공문을 보냈다. 이는 정부가 지난해 1월 1일을 특조위 활동 개시일로 보고 이달 말로 특조위 조사활동이 종료되므로 앞으로 3개월 동안 종합보고서와 백서를 발간한 뒤 특조위를 해산시키겠다는 압박을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특조위 관계자는 "아무리 보수적으로 해석을 해도 임명장도 안 받은 1월과 2월 두 달은 설립준비단 시절로 특조위가 구성된 것으로 볼 수는 없다"고 말했다.

[CBS노컷뉴스 권영철 선임기자] bamboo4@cbs.co.kr



"밥벌이하려고 특조위에 남은 거 아닙니다"

2016.07.01 05:16:36


'강제 종료' 세월호 특조위 조사관들, 그간 못했던 그들의 이야기

             

짐을 싸는 파견 공무원들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정부는 4.16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에 6월 30일 자로 '사망 선고'를 내렸다. 그나마도 120명 정원에 한참 못 미치던 인원이 절반가량으로 대폭 줄어들었다. 남은 인원은 위원장, 상임위원, 비상임위원, 별정직 공무원 싹 다 끌어모아도 45명 안팎. 원래도 크지 않던 조직이 이제는 정말 '소수정예'가 됐다.

그러나 외부에서 오는 시련이 클수록 내부의 결속은 커지는 법. 정부로부터 사망 선고를 받은 30일, 이들은 더욱 똘똘 뭉쳐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밝히고야 말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특조위는 이날 서울 중구 특조위 대회의실에서 오후 7시부터 다음날 오전 7시까지 장장 12시간에 걸쳐 특조위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고민을 나누는 '세월호 참사의 총체적 진실 규명을 위한 이어말하기' 대회를 열었다. 


▲세월호 특조위 '세월호 참사의 총체적 진실 규명을 위한 이어말하기' 대회. 말하는 이는 이석태 위원장. ⓒ프레시안(서어리)


이번 밤샘 토론회는 조사관들이 자발적으로 준비한 것으로 전해졌다. 특조위 관계자는 "(정부의 뜻에) 물러서지 않겠다는 다짐에서 조사관들이 삼삼오오 뜻을 모은 것"이라고 말했다.

위원장이나 위원이 아닌 일선 조사관들이 취재진이 모인 공개석상에서 발언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공개 발언에 익숙지 않은 이들은 신중하게 말을 고르면서도 그간 국민을 향해, 정부를 향해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토해내듯 털어놓았다.

이들은 "밥벌이를 위해 이 위원회 앉아있는 게 아니라는 걸 간곡하고 억울한 심정으로 말하고 싶다"고 했다. "5살짜리 딸아이가 자신에게 왜 그 큰 배가 뒤집혔는지, 배가 뒤집힌 이유를 왜 조사할 수 없는지 묻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끝까지 가겠다"고 했다. 

제발 끝까지 세월호 진상조사를 하고 싶다는, 절규와도 같은 특조위 조사관들의 이야기를 지면에 그대로 옮긴다.



"고작 한 건'이 아닙니다" 


얼마 전에 위원회 첫 보고서가 나왔습니다. 세월호 선적된 모든 화물의 양을 조사했습니다. 조사를 통해서 기존에 있었던 것과 다른 사실을 정리해서 냈습니다. 모 언론에서는 '고작 한 건을 했다'고 보도한 걸 봤습니다. 고작 한 건이 그 한 건인 것 같은데, 그 한 건의 보고서를 제가 주도적으로 쓰게 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위원회가 공무원도 파견이 안 되고 부족하다 보니, 순수한 의도를 가지고 자원을 해준 분들의 힘을 많이 빌었습니다. '고작 한 건'을 하려고 저와 자원해서 봉사한 분 그렇게 두 명이서 2개월 꼬박 바쳐서 하나하나 검증을 다 해서 발표했습니다.


왜 이런 말씀드리냐면, 그 하나 발표하려고 두 명밖에 안 되는 인력, 그것도 한 명은 아무 대가도 없이 밥만 사주면서 애써 해야지 이런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알려드리려는 겁니다. '고작 한 건'이 아닙니다. 저희는 그렇게 사명감 갖고 애써서 일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한 건이라는 식으로 이야기 나올 게 아니고, 그 한 건을 시작해서 다른 게 나올 때까지 지지를 받고 싶습니다. 앞으로 성과로 드러나는 과정이 있었으면 좋겠고, 꼭 좀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다들 부족한 인력과 예산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허투루 내면 안 되기 때문에 더욱 신중한 겁니다. 비록 기간 문제에 부딪혀 지금 나오는 성과가 미미해 보일지 몰라도 그게 아니란 걸 꼭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중략)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국회를 통해 조직이 구성됐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방해들이 있었습니다. 특경대(반민특위 직속 특별 경찰대)는 사무실을 아예 빼고, 무기로 뺐습니다. 그래서 제가 농담조로 (특조위 사무실에) 쳐들어오는 거 말고 거의 비슷하지 않냐는 이야기를 할 정도로 흐름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반민특위는 이렇다 할 성과 없이 해산됐습니다. 저도 두렵습니다. 불안합니다. 반민특위처럼 끝날까 봐서요.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는다고 하지만 반복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간절히 바라는 건,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역사가 되었으면 합니다. 대형 참사를 조사하고 규명하기 위해서 첫 번째로 만들어진 위원회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역사가 되는 걸 알 겁니다. 반민특위가 실패라고 끝났던 것처럼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러 글들에는 당시 위원장, 부위원장, 위원들, 조사관들의 이름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결국엔 우리는 좋든 싫든 역사에 남습니다. 역사에 남을 때 부디 간절하게 바라는 것은 그래도 반민특위랑은 달랐으면 하는 것입니다. 이호중 위원이 말했듯, 결과물을 가지고 안산에 가서 아이들에게, 고인이 된 분들에게 '이랬더랍니다' 말할 정도까진 갈 수 있도록 위원장님, 위원님들, 과장님, 팀장님 믿고 끝까지 해보겠습니다.


(진상규명 소위원회 A 조사관)


ⓒ프레시안(최형락)



"저도 피해자들에게 '편해지라'는 말 하고 싶습니다" 


저에게는 세월호 진상 규명보단 세월호로 인해 피해를 입은 분들이 어떻게 하면 다시 일상생활에서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가 가장 큰 주제이고 그 관심 때문에 여기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영국 힐스버로우 사고 자료를 보니 이런 자료가 있습니다. "정부 차원의 공식 조사는 피해자들이 회복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죽음의 정치적 법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 돕는다. 재난의 죽음은 복잡한 인과관계가 존재하고 생존자와 피해자 가족은 답을 찾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제가 진상규명보다는 회복에 관심이 있음에도 지금 이 이야기를 하려는 이유는 하나, 정부의 공식 조사는 피해자들의 회복에 1순위입니다. 이것이 선행되지 않는데 피해자들에게 회복을 바란다고 하는 것 자체가 또 다른 폭력입니다. 그래서 특조위가 계속돼야 합니다.

상담하는 입장이다 보니, '힘들겠어요', '편해지세요'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런 얘기를 하는 건 폭력 같아서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상담사입니다. 일을 하고 싶습니다.


(지원 소위원회 B 조사관)


"이런 황당한 위원회가 어딨습니까" 


대통령이 특조위 기간 보장 요구에 대해 세금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이라는 취지로 이야기했습니다. 정치인의 정치적 언사라고 하더라도 그건 너무 실망스럽고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요즘 말로 뭐가 중한지를 모르는 것 같습니다.

저는 과거에 서너 개 정도의 국가폭력 조사한 기관에 있었습니다. 거기서 한 달 조사 기간은 아마 세월호 특조위의 석 달 기간에 맞먹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사사건건 과정 하나하나를 그냥 순순히 넘어가지 못하고 자료를 요청할 때 응하지 않은 적이 없던 적이 없습니다. 현재 권력을 조사하는 게 이렇게 힘든 것인지를 처음 경험했습니다. 조사 기간이 너무 짧습니다. 우리가 채용된 시점이 7월이고, 2차 채용이 11월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황당한 위원회가 어딨습니까. 이 위원회를 통해 뭘 얻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것입니까.

우리 위원회는 바깥에서만 힘든 게 아니다. 행정 부처와 지원 부서의 관리자와 상급자를 모시고 일하는 게 처음입니다. 지원 행정 부서는 조사 행위자들이 서비스를 제공하는 거라고 접근하고 그렇게 일이 이뤄져야 합니다. 다 파견된 분들입니다. 그런데 이 분들의 기준과 업무 편의성에 조사관들이 다 맞춰왔습니다. 이런 위원회는 처음 봅니다. 저는 9층에서 이상한 조사관이 되었습니다. 문제 제기하고, 그런 관행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이상한 조사관이 된 것입니다.

밥을 벌기 위해 하자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저희가 밥을 벌려는 목적으로 이 위원회 앉아있는 게 아니라는 걸 간곡하고 억울한 심정으로 말하고 싶습니다. '케이크 5만 원'이 대서특필된 적이 있습니다. 과거 모든 공무원 기관에서 다 했습니다. 하물며 체육대회도 있고 야유회도 있었습니다. 여기선 웃음 한 번 어려웠고 체육대회 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왜곡하는 것은 천인공노할 일입니다. 그런 데 대해 기자들이 제대로 써주셨으면 합니다.


(진상규명 소위원회 C 조사관)


ⓒ프레시안(최형락)



"다섯 살 딸아이에게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요?" 


제가 이 자리에서 일하게 만든 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다섯 살이 된 딸입니다. 2년 전 4월 16일 당일에 사고가 난지도 몰랐는데, 사나흘 지났을 때 딸이 사진을 봤는지 물어봤습니다. 배가 왜 넘어졌느냐고요. 배는 가야 하는데 넘어져 있으니 의문을 갖고 질문을 던진 겁니다.


누군가는 단순한 교통사고라고 표현하는데, 단순한 교통사고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이 참사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으로 대하게 됐고, 저는 아이의 물음에 대해 답을 주기 위해 노력을 해봤습니다.

네다섯 살짜리가 대한민국에 살면서 벌써 이런 질문을 어른에게 던져야 하는 상황이 답답합니다. 한 아이의 아빠로서 참담하고, 그에 대해 답을 찾으려고 돌아다니는 과정에서 보람도 느끼지만, 그런 상황 자체가 눈물도 나고 답답하고 그렇습니다. 아이가 또 물어보게 될 것 같습니다. 왜 조사를 제대로 못 했느냐고요. 그럼 그때는 뭐라고 대답할까요. 미래가 있는 사회라면 최소한 아이들에게 이런 답은 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적어도 네 살 다섯 살 학교도 가지 않은 아이들이 의문을 갖게 만드는 사회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진상규명 소위원회 D 조사관)


"박근혜, 반민특위 강제 폐업 따라하나"
2016.07.02 22:54:46
세월호 특조위 강제 해산 저지 마지막 국민 촛불 대회
             

"이 정부가 하는 짓을 보면 막장 드라마 같습니다. 예전 어떤 정부도 이런 국가 기구를 이렇게 강제로 종료시켜본 적이 없습니다. 딱 한 번 있습니다.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입니다. 이승만이 했던 그 짓을 이 정부가 그대로 따라하고 있습니다. 그땐 무력으로 사무실을 박살 냈지만, 이제는 예산 등으로 특조위(4.16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를 강제 폐업시키고 있습니다. 그걸 막겠다고 우리는 싸우고 있는 겁니다."

'세월호 특조위 강제 해산 저지' 농성 8일째인 2일, 세월호 유가족들이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 농성을 철수하기로 했다. 이들은 "농성은 중단하지만, 우리의 투쟁은 계속된다"고 밝혔다. 

단원고 2학년 1반 고(故) 김수진 학생의 아버지 김종기 씨는 이날 오후 열린 국민 촛불 대회에서 지난달 25일부터 이어진 8일간의 농성 활동을 보고했다. 김 씨는 "2년 전 청운동 농성장 철수하면서 제가 '다음엔 정부종합청사인가? 해수부인가?' 했다. 말이 씨가 됐다"며 "그런데 더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세월호 인양하고 미수습자 수습을 하려면 가야 한다"고 했다. 


▲2일 세월호 특조위 강제 해산 저지 국민 촛불 대회. ⓒ프레시안(최형락)


김 씨는 "저희들이 왜 농성을 해야 하나. 싸우기 싫다. 하지만 싸워야 하면 싸워야 한다. 걸어오는 싸움이라면 끝까지 싸우겠다"고 했다. 

박래군 4월16일의약속국민연대 상임위원은 해수부가 오는 11일 세월호 선수 들기 작업을 재개하는 데 대해 "해수부가 또 연기한다고 할지 모른다"며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경고했다. 

그는 계속된 인양 실패에 대해 "우리가 느낌으로는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속으로는 어떤 결론을 갖고 있다"며 "해수부가 인양을 안 하는 거라면, 새롭게 결심해야 한다. 투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정부의 특조위 종료 시도에 대해 "제주 해군기지 철근 적재, KBS 보도 개입 등 대통령이 석고대죄해도 모자랄 판이다. 특조위를 통해 하나하나 드러나고 있다"며 "국민의 힘으로 특조위를 지키는 운동을 해나가야 한다"고 했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최형락)


이들은 '리본 달기 운동'을 당부했다. 단원고 2학년 5반 고(故) 김민성 학생의 아버지 김홍열 씨는 "지난 화요일, 목요일, 경복궁과 청와대에 들어가는데 경찰이 막았다. 왜 막느냐 하니 노란 옷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하더라"고 했다. 김 씨는 "겨우 한다는 말이 일본의 욱일승천기, 독일 나치 문양하고 비교를 하더라. 경복궁 들어가면 외국인이 많기 때문에 그래서 막는다고 했다. 그게 이유가 되느냐"며 "이 정부가 우리 가족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 국민 여러분이 가족들과 함께 노란 리본을 달아주시라"고 했다. 

유경근 집행위원장은 마지막으로 20대 국회를 향해 세월호 특별법 개정을 촉구했다. 그는 특별법 개정안에 대해 "타협은 없다"며 못박았다. 

"여야가 지금 이 시간에도 협상을 하고 있습니다. 12월까지 보장하면 어떻겠느냐고 하는데, 까지 마십시오. 특조위의 조사 활동 기간은 내년 2월 7일까지입니다. 마치 6월 말 이미 끝난 것을 연장하는 것처럼 선심 쓰듯 거짓말하는 것,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제 특조위가 언제부터 시작됐나 하는 얘기는 의미 없습니다. 특조위를 만든 목적은 하나. 세월호 특별법과 특조위를 통해 침몰의 원인, 구조하지 않은 이유를 밝혀내고 책임자를 처벌하고 그를 통해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 이 대한민국을 대통령이 말한 대로 개조하는 것. 이것을 완수할 때까지 특조위는 계속돼야 합니다. 

무언가 타협을 시도하면, 그것을 가족들이 받아들이기를 원한다면 중요한 원칙을 다 그 협상 안에 담아내십시오. 특조위가 존재하는 목적을 다 이룰 때까지 활동할 수 있도록 조건을 관철시킨다면 여야 간 협상을 받겠습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어느 것 하나라도 물러서거나 후퇴해서 특별법을 만들던 2014년처럼 가족들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일이 또 일어난다면, 20대 국회는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무능한 국회로 낙인찍힐 것입니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최형락)


세월호와 최순실, 진실은 이렇다
[유종성 칼럼] 세월호와 최순실, 예고된 참사  
    
2016.11.14 12:33:28


세월호 참사에 대한 철저한 진상 규명은 물 건너가고 마는 것인가. 4.16 세월호 참사 특별 조사위원회(특조위)에 의해서 부당한 언론 보도 개입 혐의로 고발당한 사람이 버젓이 집권 여당의 대표를 맡고 있고, 특조위는 제대로 조사활동도 하지 못한 채 종료를 강요당했다.

참사의 직접적 원인과 책임 규명은 물론 이러한 사고를 유발한 구조적 원인에 대한 규명과 이를 토대로 한 재발 방지책 마련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국민안전처의 신설을 비롯한 정부의 후속 대책이 과연 제2의 세월호 참사를 예방하기에 충분할 것인지는 구조적 원인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규명 없이는 평가할 수 없다.

최근 경주 지역 지진 발생 이후 핵발전소(원전)의 안전성에 대한 국민의 불안감이 고조되고 있는 점을 생각할 때, 연안 여객선과 핵발전소의 안전을 포함한 각종 재난과 사고로부터 국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 마련은 차기 정부의 핵심적인 정책 과제가 될 것이다. 

한국은 연안 여객선 사고가 빈발하는 나라 중의 하나이다. 이웃 나라 일본을 비롯하여 해양 선진국에서는 거의 발생하지 않는 여객선 사고들이 어찌하여 한국에서는 계속 발생하는가? 대형 참사만 해도 1953년 창경호(300여 명 사망), 1970년 남영호(326명 사망), 1994년 서해 페리호(292명 사망), 2014년 세월호 등 대략 20년 주기로 반복돼 왔다.

공통점은 하나 같이 승선 인원 과다 또는 화물 과적이 원인이다. 최소한의 안전 규정만 지켰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사고로 수많은 인명이 억울하게 희생되는 후진국형 사고가 계속되어 온 것이다. 

후쿠시마 사고 후 가장 심층적인 분석은 국회가 구성한 독립조사위원회에서 이루어졌다. 독립조사위원회는 쓰나미 원인론을 넘어서 지진 자체로 인한 손상 가능성을 제기했고, 원자력 안전 규제 기관이 규제 대상 산업에 의해 좌지우지된 '규제 포획(regulatory capture)'이 핵심적인 문제였음을 밝혔다. 

나아가 규제 기관이 원자력 산업 진흥을 책임지는 부처 산하에 있어 독립적인 역할을 하기 어려운 태생적인 한계와 낙하산 인사의 만연으로 인한 유착 관계가 규제 포획의 원인이었음을 지적하였다. 이 보고서는 이후 원자력 안전 규제 기관의 독립성을 확보하고 규제를 강화하는 입법의 토대가 되었다. 

세월호 특조위가 재개되어 특조위 내 안전사회 소위원회의 제대로 된 보고서가 나오면, 세월호 사건 이후 그동안 이루어진 후속 조치들에 대해 전면적인 재검토와 함께 보다 근원적인 제도적 정책적 개혁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세월호 특조위 안전사회 소위원회가 지난 9월 말에 발표한 중간 보고서를 보면 여러 가지 중요한 문제들을 많이 제기하고 있으나, 조사 활동 기간과 예산 부족으로 인해 미완의 초고 상태에 머무르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부족하지만 이 칼럼에서는 세월호 참사를 야기한 구조적 원인을 놓고 연구한 결과를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이 칼럼에서 소개한 필자의 연구는 "The Legacies of State Corporatism in Korea: Regulatory Capture in the Sewol Ferry Tragedy"(with Y.M. Park)라는 제목으로 Journal of East Asian Studies에 실릴 예정이다.) 

세월호 사건의 구조적 원인을 놓고는 크게 두 가지 설명이 있었다. 첫째는 구조적 비리이다. 특히 해피아를 비롯한 관피아의 문제가 주요하게 거론되었다. 그러나 관피아 등을 통한 구조적 비리가 왜 그렇게 뿌리 깊게 넓게 형성되었는가에 대한 심층 진단과 이를 척결하기 위한 근본 대책에 대한 논의는 미흡했다. 

둘째는 안전 분야의 규제 완화와 민영화, 외주화(out-sourcing, contracting-out) 등의 문제다. 일각에서는 이를 신자유주의의 문제로 보았다. 그러나 필자가 나름대로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탐구를 한 결과 처음에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뜻밖의 사실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첫째, 관피아 등 구조적인 유착과 비리, 나아가 규제 포획의 연원은 박정희 시대의 국가조합주의적인 이익 집단 관리와 관치 경제에서 비롯되었다. 둘째, 일부 신자유주의에 편승한 안전 분야의 규제 완화가 세월호 사고의 중요한 원인이 된 것은 사실이나, 선박 안전 규제 관련 민영화, 외주화의 문제로 거론된 주요 사항들의 연원 또한 신자유주의가 아닌 박정희 시대의 국가조합주의적 규제 정책에 있었다. 

결국 신자유주의보다도 박정희 체제의 유산이 세월호 참사에 더 근원적인 책임이 있으며, 재발 방지를 위해서는 무분별한 신자유주의 정책의 배격 못지않게 국가조합주의적인 관치 경제 체제의 유산을 극복하는 것이 긴요하다는 것이다. 

국가 조합주의(state corporatism) 또는 권위주의적 조합주의(authoritarian corporatism)는 권위주의적인 국가 주도하에 각 부문별로 단 하나의 이익 단체만을 국가가 공인하며 이를 정보 수집 및 통제의 도구이자 보호 및 지원의 통로로 활용하는 이익 중재 체제를 말한다. 아래로부터 자율적으로 형성된 사회적 조합주의(societal corporatism) 또는 민주적 조합주의(democratic corporatism)와는 대비되는 개념이다. 

필립 슈미터(1979)는 국가 조합주의의 대표적 사례로 포르투갈, 스페인, 그리스, 브라질, 칠레, 멕시코, 전전의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국가 사회주의 독일 등을 들었고, 사회적 조합주의로는 스웨덴, 스위스, 네덜란드, 노르웨이, 덴마크 등을 꼽았다. (Schmitter, Philippe C. 1979. "Still the Century of Corporatism?" In Trends Toward Corporatist Intermediation, eds. P. C. Schmitter and G. Lehmbruch, pp. 7-52. London: Sage Publications Inc.)

박정희가 형성한 한국 발전 국가(developmental state)의 정치경제 체제가 권위주의적 국가조합주의에 기반하고 있었다는 점은 로버트 웨이드(1990) 등이 간략하게 언급하긴 했지만 대부분의 기존 연구에서 등한시된 측면이 있다. (Wade, Robert. 1990. Governing the Market: Economic Theory and the Role of Government in East Asian Industrialization.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전전 일본의 국가 조합주의와 재벌 위주의 관치경제 모델을 신봉한 박정희는 5.16 군사 쿠데타 이후 경제 사회 전반을 국가 조합주의 체제로 개편하였는데,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을 통해 국가적 차원의 핵심 산업 정책을 추진함과 아울러 각 산업별로 하나의 협회 또는 조합만을 공인하여 통제의 도구로 삼았다. 

가령 해운 선사의 이익 집단 한국해운조합도 1961년 제정된 한국해운조합법에 의해 기존의 여러 조직들을 하나의 단체로 통폐합하여 독점적인 법정 단체로 만든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산업별 협회나 조합의 임원 선임에 간섭하였으며, 점차 퇴직 관료를 낙하산으로 내려 보내는 관행을 만들었다. 

역대 정부 하에서 이런 관행은 고착화되어 왔고, 이는 퇴직 관료의 사기업체 취업이나 관련 이익 단체 취업을 제한하는 공직자 윤리법의 제정(1981년)과 개정(2001년)에도 불구하고 개선되지 않았다. 가령 2001년 개정법은 퇴직 관료가 영리 기업뿐만 아니라 비영리 조직 형태의 이익 단체에 취업하는 것도 금지했지만, 시행령에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위탁 사업을 하는 조직은 면제하는 예외 조항을 만들어 개정법의 취지가 유명무실해진 것이다.

한국해운조합에 40년 동안 계속된 낙하산 인사는 이런 맥락에서 나타난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 1962년부터 1977년까지는 해운 업체 대표자가 이사장을 맡았으나 1977년 해운조합에 회장직이 생긴 이후 회장은 해운 업체 대표가 맡고 이사장은 해양 수산 관련 고위 퇴직 공무원이 맡는 형태가 고착되었다. (세월호 특조위 안전사회 소위원회, <안전 사회 실현 과제 보고서(초안)>, 115쪽) 

2001년 개정 공직자 윤리법이 제대로 시행되었으면 이런 관행이 끊어졌을 것이지만, 국회가 제정한 법을 시행령 제정 과정에서 입법 취지를 왜곡, 변질, 무력화시킨 것이다(세월호 특조위를 무력화시킨 시행령은 이러한 관행을 정부가 악용한 사례이다). 세월호 사고 이후 후속 조치로 퇴직 공직자의 취업 제한 대상 기관 수를 확대하였다고 하나, 정부는 민간 경력자 5급 채용을 대폭 확대하고 이들이 공무원으로 일했다가 다시 자신이 일하는 분야로 복귀하는 경우는 취업 제한을 면제했다. 기존의 관피아보다도 폐해가 클 회전문 정경 유착을 합법화한 셈이다. (<안전 사회 실현 과제 보고서(초안)>, 130쪽) 

규제 기관이 규제 대상 업계에 포획되어 소비자와 시민을 위한 규제가 만들어지지 못하고, 있는 규제마저도 제대로 집행되지 않는 데에는 빈번한 향응 접대와 선물 제공(김영란법으로 이에 대해서는 획기적인 개선을 기대한다) 및 은밀한 뇌물 수수 못지않게 낙하산 또는 회전문 인사에 따른 구조적인 유착이 근원적인 문제이다. 

이러한 규제 포획의 문제가 세월호 참사의 원인이 되었음은 화물 과적과 고박(고정 결박) 불량 등 안전 규제 집행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은 물론 유명무실한 안전 규제를 개선할 수도 있었을 과거의 입법 시도가 번번이 좌절된 데에서도 잘 나타난다.

국제해사기구의 국제 안전 규정(International Safety Management Code, ISM Code)을 도입하여 각 선사별로 안전 관리 체계를 수립하여 선장은 물론 안전 관리 책임자와 최고 경영자가 안전 관리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하는 제도가 우리나라 연안 여객선에도 2003년 1월 1일부터 적용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1996년부터 수년간의 논의와 검토를 거쳐 1999년에 이루어졌던 입법이 발효 며칠 전에 업계의 로비에 이은 석연치 않은 정부의 입장 번복으로 재개정되어 이를 면제해 주었다. 

2011년에는 내항 여객선의 안전 규제를 담당하는 '운항 관리자'의 소속을 해운조합에서 독립시켜 해양 교통 안전 전문 기관으로 이관하는 해운법 개정안이 최규성 의원 등에 의해 발의되었으나 해수부의 반대로 법안소위에서 폐기되고 말았다. 세월호 특조위가 재개되면 이처럼 세월호 참사를 막을 수도 있었던 두 차례의 입법 시도가 좌절된 경위에 대해서도 철저한 진상 규명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정부가 내항 여객선에 대해 ISM Code를 면제해주기로 한 결정의 근거는 운항 관리자 제도가 이미 잘 운영되고 있으니 이중 규제가 불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업계는 초기 입법 단계에서는 영세 업체의 준비 시간이 필요하니 시행 시기를 늦춰달라고 했다가 막상 2003년부터 시행하기로 입법이 되고 나자 전략을 바꾸어 이중 규제 논리를 폈고, 정부도 이 논리를 받아들인 것이다. 

2011년에도 정부는 동일한 논리로 법 개정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세월호 사건에서 드러났듯이 운항 관리자 제도는 그야말로 유명무실한 제도였다. 운항 관리자가 해운조합에 의해 고용되어 봉급을 받고 감독을 받다 보니 안전 규제 점검을 성실히 하려는 운항 관리자는 오히려 질책을 받고 인사에 불이익을 받았다는 것이 조사 결과 밝혀졌다.

차라리 운항 관리자 제도가 없었다면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왜냐면 운항 관리자가 하는 일이라곤 멀리서 망원경으로 만재흘수선(안전 규정상 최대 적재량을 실었을 때 해수면과 맞닿는 선)이 수면 위에 보이는지 확인하고 승선 인원수나 화물 적재량 등은 출항 후 선장이 전화로 보고하면 대신 기입해주는 것이었다.

세월호는 과적에도 불구하고 만재흘수선이 수면 위로 보이도록 평형수를 절반 이상 바다에 쏟아 부었다. 결국 배의 무게중심이 올라가서 세월호의 안전성과 복원력을 심각하게 손상시켰다. 차라리 운항 관리자가 없었다면, 만재흘수선이 수면 밑으로 약간 내려가더라도 배가 순식간에 전복할 정도로까지 무게중심을 올리지 않았을 것 아닌가?

문제는 운항 관리자를 왜 해운조합 소속으로 했느냐는 것이다. 여러 논객들이 이를 성급하게 신자유주의 민영화 또는 외주화의 증거로 단정했으나, 필자가 추적해 본 결과 이 제도는 1970년 남영호 사고 이후 박정희 정권이 처음 도입한 것이었다. 또 선박 안전 검사를 한국선급이라는 민간 업체에 위임한 것에 대해서도 신자유주의로 단정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한국선급은 5.16 쿠데타 직후인 1961년부터 일정한 선박의 안전 검사와 분류 권한을 법적으로 부여받았고 이런 권한이 1982년 여객선으로 확장되었다. 

사업체의 등록, 검사 및 평가 작업, 회원사에 대한 감독과 제재 등 권한을 산업별 협회나 조합에 위임하는 조합주의적 규제 방식은 박정희-전두환의 국가 조합주의 체제 아래에서 폭넓게 행해졌다. 이러한 자율 규제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정부의 철저한 감독과 소비자 시민 단체 등의 감시가 제도화되고 위반 시나 사고 시에 기업 최고 경영자와 협회 임원에 대한 책임을 명확히 물어야 한다. 그러나 점차 정부의 통제력은 약해지고 기업의 힘은 강해지고 소비자 시민 단체의 참여와 감시는 배제되고 기업 경영자와 협회 임원들은 사고가 나도 기껏해야 벌금 몇 푼만 내면 더 책임지지 않는 체제가 굳어졌다. 

세월호 사고 후 관련 법 개정으로 운항 관리자 소속을 해운조합에서 선박안전관리공단으로 변경하고 ISM Code를 내항 여객선에도 형식적으로 적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여전히 선장과 선원 등에게만 무거운 책임을 지우고 최고 경영자와 안전 관리 책임자의 책임 체계가 불명확하고 처벌 규정이 미약해 실효가 있을 것 같지 않다. (<안전 사회 실현 과제 보고서(초안)>, 91~98쪽) 이같이 실효성이 떨어지는 제도 개선의 뒤에는 규제 포획이 여전히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다. 

한편, 청해진해운과 언딘과의 구난 계약을 주선한 채널로 드러난 해양구조협회가 구조, 구난의 민영화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 협회 설립으로 인해 해경의 구조 책임이 면제되거나 이양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사고 시 실제로 도움을 줄 수 있는 해군이나 민간 해양 구조대와의 협조 체계 강화와는 별 상관없이 구난 업체 경영자와 해경 간부들이 주축이 된 법정 민간 단체를 왜 만들었을까이다. 업계로서는 로비 채널을 확보하고 해경은 간부들 퇴직 후 일자리를 만드는 동기가 서로 결합한 것이 아닐까? 

다음으로 선박 연령 등 규제 완화의 문제이다. 신자유주의를 맹목적으로 신봉한 이명박 정부 하에서 선박 안전에 대한 보완 조치 없이 선박 연령이 기존의 최대 25년에서 30년까지 연장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며, 이것이 청해진해운이 일본에서 선령 18년으로 은퇴한 세월호를 구입하는 배경이 된 점에서 참사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김영삼 정부 이래 역대 정부가 계속해서 규제 완화를 강조해왔음에도 박정희 시대로부터 국가의 보호 아래 독과점 체제를 유지해온 내항 여객선 산업에 대한 일종의 국가 공인 카르텔 체제는 해체하지 않은 점이다. 연안 여객선 항로 99개 중 85개가 독점 항로인데, 이중 보조 항로 26개를 제외하고는 왜 항로별 면허제를 유지하며 독점 체제를 보호해 주었는지, 국내 여객선 업계에서 가장 많은 사고를 내어 온 청해진해운에 왜 20년간이나 인천-제주 간 황금 노선을 독점 운영하도록 했는지는 신자유주의는커녕 시장 논리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 (세월호 특조위 안전소위의 중간 보고서는 여러 가지 주제를 방대하게 다루었지만, 연안 여객선의 항로별 면허를 통한 진입 규제의 경제적 타당성 문제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고 있는데, 특조위 활동이 재개되면 이 문제도 다루어지길 기대한다.)

결국 진입 규제 철폐와 같이 기존 업계의 기득권을 해체하는 규제 완화는 하지 않고 선령 규제 완화처럼 업계의 이익을 위한 규제 완화만 선별적으로 해온 것은 역대 정부의 규제 완화가 경제 논리와 상관없이 업계에 포획되어 업계의 기득권 보호 논리를 대변하는 관료 집단에 의해 왜곡되어 온 것을 입증한 것이다. 정부의 세월호 후속 조치에서도 보조 항로의 공영화와 상업적 항로에 대한 자유 경쟁 체제 도입, 한국해운조합의 독점 체제 해체 등 근본적인 개혁에 관한 논의는 들리지 않는다. 

필자는 지난 칼럼에서 한국이 경이적인 경제 성장, 그것도 '공평한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데에는 농지 개혁이 그 기초를 닦은 점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박정희의 공도 전혀 없지는 않음을 인정한 바 있다. (☞관련 기사 : "경제 성장, 박정희의 공은 10%뿐이다") 

그러나 국가 조합주의에 기초한 재벌 중심, 산업별 이익 독점과 기득권 보호의 박정희 체제가 장기적으로 미친 폐해도 간과하면 안 된다. 재벌 중심 성장의 한계가 1997년 외환 위기에서 극명하게 드러났으나 이에 대한 개혁이 미완에 그쳐 재벌에 의한 국가 포획, 여러 산업 부문에 아직도 잔존하는 정경 유착의 기득권 보호와 규제 포획이 지속되고 있다. (☞관련 기사 : <동아시아 부패의 기원> 펴낸 유종성 교수) 

최근 삼성의 '갤럭시 노트 7' 사태에서 정부 당국의 대응을 보면 규제 기관이 피규제자에게 쩔쩔 매며 따라가는 모습에서 재벌에 의한 포획을 여실히 보여준다. 또, ISM Code 적용 무산이나 선령 규제 완화와 같은 조치가 있을 때마다 이를 뒷받침하는 데 동원된 연구 용역은 일부 전문가와 학자마저도 포획당하고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

관피아와 규제 포획의 제도화를 낳은 연원을 추적하다 보니 박정희 시대의 국가 조합주의와 관치 경제에서 유래하며, 그 유산이 민주화 이후 여러 정권을 거친 지금까지도 뿌리 깊게 남아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정부의 재분배 기능은 물론 시장 실패에 대한 교정 기능마저도 부인하거나 최소화할 것을 주장하는 신자유주의 또는 시장 만능주의의 폐해도 경계해야 하지만, 정경 유착의 상징인 전경련의 해체와 독점적 산업별 협회(조합)의 다원화, 경쟁 제한적 진입 규제의 철폐를 비롯해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 질서를 세우기 위한 자유주의적 개혁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신자유주의와 박정희식 관치 경제, 규제 포획과 국가 포획이 교묘하게 결합된 우리나라의 문제를 하나의 잣대만 가지고 단순 논리로 접근해서는 안 되며, 실증적 분석에 입각한 대안 마련이 중요함을 일깨워준다.

최근 온 국민을 분노하게 하는 박근혜-최태민 일가의 40년에 걸친 국정 농단과 권력형 부패를 가능하게 한 토대도 박정희식 관치 경제와 정경 유착의 제도화에 있다. 경제 민주화와 재벌 지원을 맞바꾼 다음에 국가 예산과 인사권 등 모든 권력을 동원하여 해먹을 대로 해먹을 수 있었던 것은 박정희 체제로부터 확립된 관치 경제 인프라가 아직도 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조속한 퇴진 못지않게 이러한 전근대적 제도와 관행을 끊는 철저한 개혁이 필요하다고 본다.       


세월호 참사 직후 통영함에 내린 두 번의 출동 명령은 왜 좌절됐을까

참사 당시 통영함 출동 명령 내린 황기철 전 해참총장 방산비리 무죄판결

조유빈 기자 ㅣ you@sisapress.com | 승인 2016.11.25(금) 18:13:00


최근 세월호 7시간에 대한 의혹을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있는 이재명 성남시장이 이번엔 자신의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황기철 전 해군참모총장을 거론했다. 이 시장은 “해군참모총장의 세월호 구조 위한 통영함 출동을 막을 수 있는 자는?”이라며 “그것도 두 차례나. 왜 턱도 없는 죄목으로 그를 구속하고 파면했을까”라며 의문을 제기했다. 황 전 총장은 2014년4월16일 세월호가 침몰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인근에 있던 통영함을 출동시키라고 명령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그해 12월 감사원은 ‘통영함 납품 비리’ 혐의로 황 전 총장을 인사조치하도록 국방부 장관에게 공식 통보했다. 보직 해임된 황 전 총장은 이듬해 3월 구속됐다. 박근혜 대통령이 ‘이적행위’라며 근절을 지시한 방산비리 혐의였다. 이를 두고 방산비리 정부 합동 수사단이 실적을 올리기 위한 강압수사를 한다는 비판과 통영함 출동 지시 때문에 방산비리에 엮이게 됐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 해양경찰청 제공

ⓒ 해양경찰청 제공

그렇다면 그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세월호 참사 직후, 국방부는 황 전 총장에게 구조현장지원본부장을 맡도록 하고 구조 작전을 지휘하게 했다. 해군본부와 방위사업청, 대우조선해양은 ‘통영함 출동 합의각서’를 작성했고, 황 전 총장은 당시 통영함의 출동명령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통영함은 출동하지 않았다. 상부가 그의 명령을 제지했기 때문이다. 상부의 제지를 당한 황 전 총장은 재차 통영함에 출동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결국 통영함은 세월호 구조 작업에 투입되지 못했다. 통영함은 2010년 천안함 침몰 사고 이후 좌초 함정의 구조나 침몰 함정의 인양 등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설계된 수상구조함이었다. 

 

상부에서 수상구조함의 투입을 제지했던 이유는 뭘까. 김민석 국방부 대변인은 세월호 참사 사고 이틀 뒤인 4월18일 “해군은 현재 대우조선해양에서 시운전 중인 통영함을 현 시점에서는 구조현장에 투입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며 “통영함에 탑재된 음파탐지 장비나 수중로봇 장비가 정상적으로 성능을 낼 수 있는지 해군이 확인하지 않은 상황이어서 투입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김광진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2014년5월21일 국회 긴급현안질의에서 “해군참모총장의 지시가 3시간 만에 번복됐다”며 “대한민국에서 해군참모총장의 명령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느냐”고 언급했다. 또 “장비보안의 이유로 통영함의 투입이 보류가 됐던 것으로 보고를 받았다”는 정홍원 총리의 답변에 대해 “해군 측이 통영함은 뜰 수 있다고 판단을 내려 오전 내내 준비를 했다. 장비문제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이후 황 전 총장을 둘러싼 상황은 다소 급작스럽게 전개됐다. 통영함을 투입하지 못한 이유로 ‘선체고정 음파탐지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문제가 제기됐다. 그리고 그것이 ‘수중음파탐지기 납품 비리’로 인한 것이라는 의혹도 뒤따랐다. 결국 2009년 방위사업청 함정사업부장 재직당시 통영함의 음파탐지기 기종을 선정했던 황 전 총장은 성능이 떨어지는 제품이 납품되도록 서류를 조작한 혐의로 지난해 4월 구속기소돼 재판에 넘겨졌다. 

 

신상철 전 천안함 조사위원은 황 전 총장의 기소와 관련된 정황을 의심한 바 있다. 그는 2015년4월 “당시 해군참모총장이 통영함 출동 명령을 두 번이나 내렸지만 누군가에 의해 저지당했다”며 “당시 통영함 출동을 명령했던 해군참모총장이 지금 방산비리 혐의를 받고 있는 황기철씨다. 이것이 뭘 말하는 것이겠냐”고 언급했다.​ 

 

이재명 성남시장이 황기철 전 해군참모총장을 언급한 페이스북 게시글 갈무리

이재명 성남시장이 황기철 전 해군참모총장을 언급한 페이스북 게시글 갈무리

 

9월 대법원은 황 전 총장에 대한 무죄 판결을 확정했다. 검찰은 황 전 총장이 진급할 욕심에 범행을 했다고 주장했으나 대법원 재판부는 “금품이나 향응 등을 제공받은 정황이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검사가 밝힌 범행 동기 등은 합리적 의심의 여지없이 충분히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이재명 시장은 8월 황 전 총장의 항소심 무죄 선고 이후에도 “결국 구조함은 출동하지 못했고, 두 번이나 구조함 출동을 지시한 해군참모총장은 부패혐의로 구속된 후 세월호 참사가 잠잠해진 후에야 무죄판결 받고 석방된다”며 “황 총장은 결국 추악한 부패누명을 쓰고 구속되고 말았다. 뒤늦게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이미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이 분의 삶과 피해는 세월호참사의 연장”이라고 비판했다.​



7시간의 의혹 특검은 풀어줄까?

세월호 참사 당일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 행적이 여전히 의문이다. ‘청와대 굿’이나 ‘성형시술’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었지만 청와대는 부정했다. 하지만 참사 당일 보고·지시 내용을 공개하지 못하고 있다.

전혜원 기자 woni@sisain.co.kr 2016년 11월 29일 화요일 제480호


“사실이 아니었으면 했어요. 너무 비참하잖아요. 정말 버려졌던 거구나…. 아이들이 ‘엄마, 정신 차려. 이런 나라야’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세월호 참사로 아들 건우군을 잃은 김미나씨는 ‘대통령의 7시간 의혹’을 고통스럽게 지켜보고 있다. 김씨는 11월16일 서울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에서 ‘박근혜 7시간의 행적, 꼭 밝혀야 한다’라는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었다. 이곳은 청와대와 200m 거리다. 김씨 뒤로 청와대 입구를 빈틈없이 막은 경찰의 모습이 보였다. 이날 경찰은 ‘7시간 문구는 대통령 경호상 위해 소지가 있다’며 청와대 앞 분수대로 향하던 유가족을 제지했다.

최순실 게이트로 세월호 참사 당일 박근혜 대통령 행적에 관한 ‘7시간 의혹’이 다시 확산되고 있다. 2014년 4월16일 오전 8시48분, 세월호가 기울기 시작했다. 청와대가 이 문제와 관련한 정보공개 청구 소송 과정에서 제출한 ‘4·16 세월호 사고 당일 시간대별 대통령 조치사항’에 따르면, 박근혜 대통령은 이로부터 1시간12분 뒤인 오전 10시 국가안보실로부터 첫 보고를 받았다. 서면 보고였다. 오전 10시15분 안보실이 두 번째 유선 보고를 할 때 박근혜 대통령은 첫 지시를 내린다. “단 한 명의 인명 피해도 발생하지 않도록 할 것” “여객선 내 객실 등을 철저히 확인하여 누락 인원이 없도록 할 것”. 이어 오전 10시30분 박 대통령은 해경청장에게 전화로 지시한다. “해경 특공대를 투입해서라도 인원 구조에 최선을 다할 것.” 1분 뒤 세월호는 완전히 전복됐다.

ⓒ시사IN 조남진
11월16일 한 세월호 유가족이 서울 종로구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에서 ‘세월호 참사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 행적을 밝히라’며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오전 10시30분 지시를 끝으로 오후 5시15분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 현장에 나타나기까지 7시간 가까이 박근혜 대통령은 구조와 관련한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안보실과 비서실로부터 총 15차례 보고가 올라갔는데, 모두 서면 혹은 유선 보고였다. 첫 보고를 받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15분까지 대통령 대면 보고나 대통령이 주재하는 회의는 단 한 차례도 이뤄지거나 열리지 않았다. 오후 5시15분 박근혜 대통령은 직접 중대본을 찾아 이렇게 말했다. “학생들이 구명조끼를 입었다고 하던데 그렇게 발견하기가 힘듭니까?”

‘상황을 제대로 보고받은 것인가’라는 의혹이 일었다. 세월호 참사 당일 대통령의 소재를 청와대 비서실장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게 드러나면서 논란은 더 커졌다. “위치에 대해서는 제가 알지 못합니다(김기춘 비서실장, 2014년 7월7일 국회 운영위원회).” 청와대는 대통령이 당일 경내에 있었다고 밝힐 뿐 집무실인지 관저인지는 경호상 밝힐 수 없다고만 했다. 최순실 게이트로 최근 검찰 조사를 받은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은 세월호 참사 당일 7시간 동안 “박 대통령은 (집무실이 아니라 생활공간인) 관저에 있었다”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발언이 알려지면서 논란은 더 커졌다(청와대는 11월19일 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당일 주로 '관저 집무실'을 이용했다고 참사 2년 7개월 만에 처음으로 밝혔지만, 청와대 근무 경험이 있는 인사들은 '관저 집무실'이라는 개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소재조차 불명확하니 소문이 난무했다. 가토 다쓰야 <산케이 신문> 전 서울지국장은 ‘세월호 참사 당일 박근혜 대통령이 정윤회씨와 함께 있었다’는 소문을 칼럼에 썼다가 박근혜 대통령과 정윤회씨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됐다. 2015년 12월 무죄판결을 받았다. 가토 전 지국장은 지난 11월16일 일본 도쿄 유라쿠초에 있는 일본외국특파원협회에서 연 기자회견을 통해 “정윤회씨와 박근혜 대통령이 함께 있지 않았다고 재판에서 증명됐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재판부가 해당 소문이 허위라고 재판 도중인 2015년 3월30일에 갑자기 판단했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정윤회씨와 역술인 이세민(본명 이상목)이 그날 이씨의 평창동 자택에서 점심을 먹었다는 것에 대해 당사자 두 사람과 동석자 원 아무개씨 간 진술이 크게 다르지 않은 점 △정윤회씨 통화내역 조회 결과 2시20분께 발신 장소가 이세민씨 집에서 직선거리로 1.4㎞ 떨어진 곳인 점 △대통령경호실이 작성한 ‘출입기록 확인요청 답변 공문’에 정윤회씨가 2014년 4월16일 청와대에 출입한 기록이 없다고 기재된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 하지만 정윤회씨 진술이 검찰과 법정에서 번복되었다. 정씨는 검찰 조사 때는 세월호 참사 당일 집에 있다가 저녁 약속에 갔다고 진술했다. 진술이 바뀌었지만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청와대
2014년 4월16일 박근혜 대통령이 정부서울청사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서 세월호 보고를 받고 있다.

이런 판단 자체가 이례적이라는 지적이다. 가토 전 지국장의 변호를 맡은 박영관 변호사는 “판결 선고도 아닌데 재판 중간에 판단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어서 의아했다. 판단 근거는 사실상 재판에 나온 세 명의 진술밖에 없다. 재판부가 부담이 컸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비선 실세’ 최순실씨 등이 기록 없이 청와대에 출입했다는 의혹도 제기된다. <시사IN>은 가토 전 지국장에게 관련 내용을 묻는 이메일을 보냈지만 그는 “언론 대응은 기자회견을 마지막으로 하고 싶다”라고 답해왔다.

청와대, 서면 보고 자료 공개 안 해

이 판결을 끝으로 잠잠하던 7시간 의혹이 최순실 게이트를 계기로 다시 불거지고 있다. ‘청와대 굿’설이나 ‘성형시술’설에 대해 박 대통령과 청와대가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해도 의혹은 더 커지는 모양새다. 보건복지부는 서울 강남 차움의원의 최순실·순득씨 진료기록부를 조사한 결과 “박 대표, 대표님, 안가, VIP, 청”이라는 단어가 2011년부터 2014년까지 총 29회 기재되는 등 박 대통령 주사제를 대리 처방받은 정황을 확인했다. 박근혜 대통령을 변호하는 유영하 변호사는 ‘여성으로서의 사생활’을 언급했다.

여야가 최순실 특검과 국정조사에 합의하면서 7시간 의혹이 특검에서 규명될지 관심이 모인다. 특검법은 세월호 7시간을 수사 대상으로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수사 과정에서 인지한 관련 사건까지 모두 수사하기로 했다. 권영빈 세월호특별조사위원회 진상규명위원장은 “특조위는 컨트롤타워로서 청와대가 구조 역할을 제대로 했는지 규명하려 했지만 정부·여당이 대통령 조사를 금기시했다. 7시간 의혹이 특검법 수사 대상에 정확하게 명시되지 않아 제대로 수사되기 어려울 것 같다”라고 우려했다.

세월호 참사 당일 보고·지시 내용 등을 공개하라는 녹색당 소송에서 청와대는 구두 보고·지시는 따로 녹음하지 않아 기록이 없다고 했다. 서면 보고 자료에 대해서는 공개될 경우 업무에 현저한 지장이 초래된다는 주장을 폈다. 1심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현재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세월호 유가족인 건우군 어머니 김미나씨는 “저희는 박근혜 대통령의 사적인 시간은 전혀 궁금하지 않아요. 공적인 시간을 알려달라는 거예요. 자기들이 진실이라면 당연히 반박을 할 텐데 하나도 제대로 해명을 못하고 있잖아요. 정말 보고를 받았다면 그렇게 할 수가 없는데…. 왜 구조하지 않았는지 명명백백하게 드러났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33차례 세월호 재판 기록에서 '박근혜'를 보다

[민미연 포럼] 세월호 참사, 박근혜 참사에서 무엇을 배웠나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 소장    
2016.12.21 08:20:56


세월호 참사와 대통령의 7시간이 화제가 될 때마다, 지난해 3월에 출간된 <세월호를 기록하다>(오준호 지음, 미지북스 펴냄) 일독을 권하는 친구가 있다. 변호사인 친구는 객관적 사실을 찬찬히 살피지 않고, 분노와 증오만 격하게 발산하는 이 나라의 지적, 정치적 풍토를 아쉬워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사건을 전후로 다시금 대통령의 7시간이 논란이 되는지라, 사놓고 1년 이상 책장에 꽂아만 두고 있던 책을 최근에야 읽었다. 저자 오준호는 '세월호 참사 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의 일원으로, 2014년 6월부터 5개월간 33차례 열린 세월호 재판을 빠짐없이 방청한 사람이다. 책을 넘기다 보면, 그 기가 막히던 4월의 기억과 슬픔과 분노가 솟구친다. 

▲ <세월호를 기록하다>(오준호 지음, 미디북스 펴냄) ⓒ미디북스

저자는 세월호 재판의 한계를 세 가지로 정리했다. 아마도 저자가 대한민국에 대해 가장 하고 싶은 말이 아닐까 한다. 물론 나도 크게 공감한다. 특히 셋째 대목에 대해!

세월호 재판의 한계는 첫째, 진실 규명을 형사 재판을 통해 하려고 한 것이다. 물론 검찰의 요청으로 여러 전문가들이 사고 원인 관련된 증언을 하고 연구 보고서를 제출하긴 했다. 하지만 저자의 말대로, 그 연구와 증언은 "검찰의 공소 사실 입증이 주된 목적"이기에 "검찰이 쳐 놓은 테두리 안에서만 진실 규명 작업"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선진국은 큰 사고가 일어나면, 민관합동조사기구가 충분한 시간과 예산을 보장받고 사고의 수많은 직간접적 원인을 낱낱이 밝히고, 재발 방지책을 정리하여 두꺼운 백서로 만든다.

둘째, 법적 책임을 묻는 일에 치중하다 보니 정치적 책임과 사회적 책임에 면죄부를 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형사재판은 현행법의 위법 행위만을 따진다. 검사는 애초에 위법성을 입증할 수 있는 행위만을 기소하고, 재판부는 검사의 기소가 적법한지를 판단할 뿐이다. (중략) 예컨대 운항관리실 직원이 해운사의 과적을 막지 못한 데는 해운업의 자율 규제를 용인하는 쪽으로 법 제도의 흐름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해운사와 하역업체의 갑을 관계, 해운사와 선원들의 주종관계가 세월호를 안전에 극히 취약한 지경으로 만들었는데, 이 역시 현행법 어디에도 위배되지 않는다. (중략) 위법하지는 않지만 사고가 일어날 전반적 조건을 숙성시켜 온 이 모든 행위들은 세월호 재판에서 관심조차 받지 못했다."(322쪽) 

셋째, 세월호 재판에서 이 사고는 정상 국가에서 잠시 일탈한 사례로 규정된다는 점이다. 그런데 세월호 참사가 과연 국가의 정상적인 상태로부터 일탈한 사고인가?

"상식을 초월하는 이 사고에는 당연히 상식을 초월하는 어떤 거대한 '일격'이 있을 것 같지만, 나는 재판 과정을 통해 참사의 배경에 있는 것은 촘촘하게 결합된 비겁하고 이기적이며 무책임하고 무능한 행동들이란 사실을 알았다. 애초 낡은 배가 도입되도록 이명박 정부가 선령 규제를 완화한 것도 문제이지만, 청해진 해운이 무리한 증개축을 하지 않았다면, 무리한 증개축에 한국선급이 제동을 걸었더라면, 적어도 증개축 이후 한국선급이 승인한 화물 적재 기준에 따라 화물을 실었다면, 위험한 출항을 거부할 수 있도록 선원들에게 발언권이 있었거나 그들에게 용기가 좀 더 있었더라면, 운항관리자가 규정대로 출항을 규제했더라면, 조타수가 대각도 조타를 했더라도 복원성이 그 정도로 악화된 상태가 아니었다면(평형수가 좀 더 채워지고 화물이 단단히 고박 되었다면) 배는 쓰러지지 않았다. 설령 배가 쓰러졌다 해도 선원들이 평소 안전 교육을 제대로 받아 비상사태에 현명히 대처했더라면, 비상시 선내 방송 매뉴얼이 갖춰져 있었다면, 진도 VTS가 퇴선 결정의 책임을 세월호에 맡길 게 아니라 과감하게 지시했더라면, 구조 세력들이 유기적으로 소통하며 협력하는 훈련이 되어 있었다면, 출동한 123정 해경이 더 적극적이고 판단력이 뛰어났더라면…. 이 많은 '였다면'이 결합되지 않았으면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거나 적어도 참사가 되지는 않았다. 요컨대, 이렇게 무수한 요인의 동시다발적인 진행을 '소수의 일탈'로 볼 수 없다. 지붕이 무너진 것은 마지막에 떨어진 눈송이 때문만은 아니다. 같은 이유로, 나는 이 사고를 '신자유주의 규제 완화'의 담론으로 단순화하는 것에도 한계를 느낀다(중략) 단지 규제가 없어서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있는 규제조차 관행, 부패, 권력관계, 개개인의 크고 작은 이익 앞에 무력화되었다."(324~325쪽) 

사실 세월호 참사 관련 재판에 대한 저자의 아쉬움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과 박근혜 대통령 탄핵 사태를 접하는 내 아쉬움과 완벽히 겹친다.  

선진국처럼, 한국도 선거 관련 정책 토론과 각본 없는 인터뷰 등을 통해 정치인의 정책적 내공과 주변 관계를 철저히 검증하는 시스템과 정치문화가 잘 갖춰져 있었다면, 전국적으로 양당 독과점에 특정 지역에서는 일당 독점을 초래하는 선거제도가 아니었다면 '혼이 비정상'이요, 인간관계와 소통 방식이 대중 정치인과 너무나 먼 정치인 박근혜가 5선 의원에, 당 대표에, 유력한 대통령 후보가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헌법 제7조는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 공무원의 신분과 정치적 중립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고 규정하여 공무원이 대통령과 측근들의 부당한 지시, 명령을 거부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총리와 국무위원(장관) 등을 임명하는 절차에는 국회 동의와 총리 제청 등도 명문화하여,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작동하는 것처럼 하였다.  

하지만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헌법 제78조는 '대통령은 헌법과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공무원을 임명한다'고 규정하여, 대통령이 법률을 통해 눈 밖에 나는 공무원을 별 어려움 없이 자를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대통령과 청와대 실세들은 공직자 임면권(면직권)을 지렛대로 하여 승진·보직·임지·예산 등에 목메는 검찰·국세청·감사원·행정부처 장차관·각국 실장과 대학을 움직여 최순실 일가와 그 일당의 인사 비리·예산 빼먹기·부정 청탁·입학 비리 등을 자행하거나, 방조하거나, 은폐하였다. 최순실 일당의 주된 근거지가 된 문화체육관광부 공무원들 입장에서는 부당한 지시명령을 거부·폭로하는 것은 목숨을 걸지 않으면 안 되는 거사(巨事)로 만들었다. 인간적으로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는 얘기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절대 군주의 일탈을 목숨 걸고 제지하는 충신은 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박근혜 최측근과 청와대와 새누리당에는 이런 사람이 거의 없었던 듯하다. 이 역시 자업자득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 박근혜 대통령은 2014년 4월 16일 오후 5시께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처음으로 주재했다. YTN 화면 갈무리.


세월호 참사는 몇몇 악당에 의한, 국가의 정상 상태로부터의 잠시 일탈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최순실-박근혜 참사'도 정상 국가, 정상 정치의 잠시 일탈이 아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국전쟁에도 건재했던 국보 1호 남대문이 2008년 2월에 거의 전소된 사건도, 세월호 참사도, 혼이 비정상인 것이 분명한 박근혜 대선후보의 당선과 탄핵 사태도 온통 동시 다발 만성 중증질환으로 죽어가는 대한민국이라는 몸에 불쑥 밀고 나온 흉측한 종기라고 봐야 한다. 종기는 중병의 원인이 아니라 증상이다. 근본 원인을 뜯어고치지 않으면, 앞으로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 망국, 분단과 전쟁, 외환위기, 북한의 대량 아사, 세계 최악의 출산율과 자살률 같은 민족사적 비극에 대해서도, 우리 사회는 제대로 된 성찰과 반성을 한 적이 없다. 단적으로 고종과 당시 핵심 권부 등 망국노가 아니라, 을사오적 등 매국노와 친일파와 일제에 대해서만 분개한다. 이런 식의 얕은 성찰과 편향된 반성이 계속된다면, 세월호와 박근혜 참사에 대해서도 몇몇 악당 혹은 이른바 부역자 좀 처벌하고 넘어가 버릴 것이다. 크고 심각한 문제를 작고 표피적 문제, 즉 사람과 권력(집단)의 문제로 축소·변질시켜 버리는 악습이 반복될 것이다. 한민족은 재주와 신명이 넘치는 민족은 분명한 것 같은데, 어떻게 이리도 아픈 역사로부터 배우는 능력이 떨어지는지! 내 느낌이 제발 거대한 오판이기를.


[단독] 세월호 외력충돌 흔적 나왔다

선수 좌현 쪽에 2800톤 작용한 변형 확인…변형 부위는 선체 스크래치 자국과 일치

이용우 시사저널e. 기자 ㅣ ywl@sisajournal-e.com | 승인 2018.04.11(수) 16:00:00



세월호에 외력의 흔적이 발견됐다. 세월호 사고 원인은 그동안 국내외의 다양한 실험들을 통해 선체에 다른 힘이 작용하지 않고선 사고 당시와 같은 급격한 선회와 기울기를 재현할 수 없는 것으로 밝혀져 왔다. 이번에 발견된 선체의 충격 흔적은 세월호의 급선회가 외부의 힘으로 발생했다는 것을 보여줄 결정적 단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외력의 흔적은 선수 좌측면에서 발견됐다. 선체조사위원회(이하 선조위)가 용역을 주고 조사한 결과, 선체에 변형을 줄 정도의 충격이 선수 좌현 쪽에 가해진 것이 발견됐다. 특히 충격 부분은 세월호 선수 좌현에 있는 심한 스크래치 자국과도 일치했다. 선체 외판에 충격의 흔적들이 나오게 되면서 세월호 참사의 진실이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세월호 침몰과 관련해 지금까지 다양한 가설과 의혹이 제기돼 왔다. 우선 검찰은 세월호 참사 직후 내놓은 원인으로 과적·복원성 불량·고박 불량·조타 실수 등 4가지를 주장했다. 하지만 이 내용은 최근 선조위의 네덜란드 해양연구소 마린 실험과 2014년 선박해양플랜트연구소의 자유항주 조종실험이 공개되면서 잘못됐다는 것으로 확인됐다. 세월호의 급변침과 변침 초기에 일어난 50도 이상의 급격한 기울기는 선체 자체의 문제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이 실험들의 핵심 내용이다. 

 

논란이 되는 부분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선체만으로 사고를 설명할 수 없고 외력에 의해 침몰했다면 외부 충돌로 인한 흔적이 선체에 남아야하기 때문이다. 세월호는 사고 당시 좌현으로 기울며 급변침 했다. 외부의 충격이 있는 곳은 배의 좌측 어딘가가 되어야 한다. 이는 선체 좌측에 세월호의 진실이 담겨 있다는 말과 같다. 시사저널e가 단독으로 입수한 선조위의 ‘세월호 선체 좌현 수선하부 외판 상태 해석’ 1차 중간 보고회에 따르면, 선수 좌측면에 외력 외에는 설명할 수 없는 큰 힘이 작용한 것이 발견됐다. 

 

목포신항에 거치된 세월호 © 시사저널e. 이용우

목포신항에 거치된 세월호 © 시사저널e. 이용우


 

세월호 선체 좌현 부분에 2800여 톤으로 밀어붙인 자국 나와

 

이 보고회는 3월14일에 발표됐다. 선조위가 세월호 선체 좌현 상태와 변형에 대해 조사하기 위해 1월25일부터 4월25일까지 인하대 조선해양공학과 이장현 교수에 용역을 주고 진행한 결과물이다. 세월호 선체 외판의 변형전과 후를 모델링하고 변형량을 분석하기 위한 것이 조사의 목표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세월호에 상당 부분 변형이 일어났다. 3년가량 바다 속에 있으면서 부식이 진행됐고 인양 과정에서 선체에 변형이 온 것일 가능성이 컸다. 보고서에는 세월호 좌현이 아래로 누워 있는 상태로 인양되면서 좌현 쪽에 수많은 눌림 현상이 생긴 점들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문제는 이 보고서의 결론 페이지 전에 넣은 57페이지 내용이다. 이 교수 팀은 결론을 내리기 전에 이 부분을 제시하며 ‘검토영역’이라고 지칭했다. 세월호의 좌현 선수 부분에 외력이 작용한 것으로 보이는 특이한 점이 발견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검토 영역은 세월호 A파트인 145번 프레임(FR)~162번 프레임이다. 좌현 선수 쪽이다. 이 부분을 본지 기자가 목포 신항에 놓여있는 세월호 선체를 직접 보며 조사한 결과, 해저 충돌이나 인양으로 발생할 수 없는 위치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부분이 선수 쪽에 위치할 뿐 아니라 배의 선수 중심부로 곡선을 이루며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해저 바닥과 충돌할 수 없고, 인양 중에도 건들 이유가 없는 부위라는 것이다. 

 

이 교수 팀에 따르면, 이 부분은 46.3cm(계측 변형량·해석변형량은 48.5cm) 가량 눌린 것으로 나타났다. 눌린 면적은 31.2m²이다. 가로를 10m로 잡았을 경우 세로는 약 3.1m에 달하는 크기다. 이 면적을 46cm로 누르기 위해선 2810톤의 힘이 작용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쉽게 말해 31.2m² 면적에 세월호가 사고 당시 실었던 2200여 톤의 화물을 다 올려놔도 이런 변형이 오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만큼 강한 힘이 이 부분에 작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월호 선체 모습 선수 좌현 쪽에 미상의 물체와 부딪혀 생긴 것으로 보이는 스크래치와 페인트가 벗겨진 흔적이 발견됐다. © 시사저널e. 이용우

세월호 선체 모습 선수 좌현 쪽에 미상의 물체와 부딪혀 생긴 것으로 보이는 스크래치와 페인트가 벗겨진 흔적이 발견됐다. © 시사저널e. 이용우


 

이 외에도 136번 프레임과 121번 프레임에서도 세월호 선체 내부 방향으로 휘어지는 변형이 발생했다. 무언가가 밀고 들어간 자국이다. 이 보고서에는 이를 ‘해저 충돌 또는 미상의 충돌에 의한 변형’이라고 설명했다. 

 

세월호가 외부 충돌이 있었다면 선체 외벽에 흔적이 남아야 했다. 본지 기자가 유가족과 세월호 선체를 확인한 결과, 이 보고서가 말하고 있는 부분에 심각한 스크래치가 발견됐다. 2810톤의 힘이 가해진 145번 프레임(FR)~162번 프레임에는 심한 녹슨 현상이 나타났다. 그 옆부분인 136번 프레임(눌려 들어간 부분) 하단 쪽에는 커다란 스크래치가 있었다. 해수면 충격이나 선체 인양으로 생겼다고 보기 힘든 곳이다. 어떤 강한 쇠끼리 부딪혀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상처다. 

 

지금까지 블랙박스와 네덜란드 마린의 실험, KRISO보고서를 보면 세월호는 과적이나 증축, 복원성 불량만으로는 급격한 선회와 변침 초기의 50도 이상 기울기를 설명하기 어렵다. 외력이 작용하지 않으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선회는 나올 수 없는 상황이다. 세월호 생존자와 조타수도 당시 외력이 있었다는 취지의 진술을 내놓은 바 있다. 세월호 생존자 다수는 침몰 직전 ‘쿵’ 소리를 들었다고 진술했다. 이 미상의 소리는 블랙박스 영상에도 고스란히 잡힌다. 선체의 화물이 움직이기 전에 나타난 소리다. 여객부 선원 B씨는 세월호 특조위 2차 청문회에서 “배가 기울기 전에 둔탁한 충격음이 있었다”고 말했다. 

 

또한 조타실에서도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오전 8시49분쯤 3등항해사는 조타수에게 좌현으로 5도 소(小)각도 변침을 지시했을 때 조타수는 “타(舵)가 이상하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이후 세월호는 좌현으로 50도 이상 급격히 기울었다. 세월호 변침 초기였다. 조타수는 법원에서도 “배 양 옆에 날개(스테빌라이저)가 있는데 거기 뭔가 걸리지 않았을까 생각한다”라는 진술도 했다. 세월호 생존자와 조타수 진술, 여러 정보와 데이터들은 모두 어떤 물체가 세월호 좌현 충격을 줬다는 것을 설명한다.

 

최근 논란이 됐던 KRISO 자유항주모형시험의 보고서에서도 세월호는 자력만으론 불가능한 급선회를 변침 초기부터 시작한 것으로 나온다. 실험에선 설령 좌현으로 25도 타를 돌리는 조타실수가 있었더라도 모든 실험은 사고 항적도를 구현할 수 없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세월호 합동수사본부가 내놓은 세월호 침몰사고 원인 분석 보고서에는 “자력으로는 불가능한 엄청난 급선회가 발생한 것처럼 보이는 이상현상이 발견된다”라는 설명이 나온다. 외력이 없이는 세월호 급선회가 불가능하다는 말과 같다. 

 

1번은 '세월호 외판해석 보고서'에서 나온 2810톤이 작용해 약 46cm가 들어간 곳이다. 2번은 그 옆으로 심한 스크래치 상처가 나타난 모습. 스크래치 위쪽으로 움푹 들어간 자국이 발견됐고 외판 조사 보고서에선 이를 ‘해저 충돌 또는 미상의 충돌에 의한 변형’이라고 설명했다. © 시사저널e. 이용우

1번은 '세월호 외판해석 보고서'에서 나온 2810톤이 작용해 약 46cm가 들어간 곳이다. 2번은 그 옆으로 심한 스크래치 상처가 나타난 모습. 스크래치 위쪽으로 움푹 들어간 자국이 발견됐고 외판 조사 보고서에선 이를 ‘해저 충돌 또는 미상의 충돌에 의한 변형’이라고 설명했다. © 시사저널e. 이용우


 

“이번 보고서는 세월호 사고의 진실이 외력에 있다는 증거”

 

김관묵 이화여대 나노과학부 교수는 “네덜란드 마린의 실험과 KRISO의 실험 결과, 블랙박스 영상 등 모든 데이터들은 세월호 사고 원인이 외력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며 “이번 보고서도 세월호 사고의 진실이 외력에 있다는 증거가 된다. AIS항적과 레이더 영상 등이 모두 동일한 급회전을 그려낸다. 블랙박스를 통해 사고 당시 급회전 초기 50도 이상 급격한 기울기를 보였고 의문의 충격음들까지 잡혔다. 복원력이 사고를 설명할 만큼 나쁘지 않은 배가 그렇게 기울었다는 것은 다른 힘이 작용했다는 것을 설명한다. 이번 자료로 그 힘이 선체 어디에 작용했는지도 알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동헌 전 창원대 조선해양공학과 교수는 “스크래치가 생긴 부분을 정밀 감식해서 묻어 있는 물질을 분석해야 한다. 그래야 외력으로 추측되는 객체를 추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세월호 외판끼리의 용접면은 약간 안쪽으로 들어가 있다. 무언가와 긁혔기 때문에 이 부분을 제외하고 스크래치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지금 세월호의 스크래치가 그런 모습이다”며 “이 부분을 정밀 분석하면 원래 페인팅 재료 외에 다른 물질이 나오는지 확인이 될 것이다. 외력이라면 그것이 무엇인지도 조사가 진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선조위는 조사가 더 진행돼야 한다고 전했다. 선조위 관계자는 “물리적으로 어떤 역할이 작용해야 (외판 손상이) 가능한지도 면밀한 조사가 진행돼야 한다. 그래야 손상 이유에 대해 말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지금 선체의 좌현에 여러 군데 손상이 발생했다. 그런 부분이 충돌로 발생했거나 다른 요인으로 발생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라며 “스크래치는 인양 과정에서 발생했을 수도 있다. (선조위가) 이 용역만 한 것이 아니다. 여러 구역을 보고 (선체에) 다른 페인트가 있는지 확인하고 있다. 지금까지 용역을 한 결과 다른 페인트는 나오지 않았다. 전후 관계를 파악해야 명확하게 결론이 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보고서에 나온 2810톤이 밀어서 발생한 충격 위치. 세월호 좌현의 D데크 바닥과 E데크 바닥 사이다. 31.2m² 크기의 변형이 발생됐다.​ © 시사저널e. 이용우

보고서에 나온 2810톤이 밀어서 발생한 충격 위치. 세월호 좌현의 D데크 바닥과 E데크 바닥 사이다. 31.2m² 크기의 변형이 발생됐다.​ © 시사저널e. 이용우



우리는 '세월호'와 헤어질 수 있을까?

[인권으로 읽는 세상] 세월호 참사 4주기의 다짐


세월호 참사 4주기가 다가온다. 벚꽃만 피어도 가슴 한편이 시큰거리고, 거짓말과 발뺌으로 일관하던 인물들이 떠오르면 울화가 치미는 것도 그대로인데, 올해는 정부가 주관하는 합동영결식이 치러질 예정이다. 합동영결식은 희생자와 그 가족들을 위한 의식이기도 하겠지만, 세월호 참사에 연루된 우리 모두를 위한 의식이기도 할 것이다. 영원히 헤어진다는 게 가능할까마는, 이별도 숙제라면 4주기의 다짐은 무엇이어야 할까?

4주기를 맞는 지금  

3주기에 우리는 '박근혜는 내려오고 세월호는 올라온' 모습을 확인했다. 참사의 진상규명에 대한 기대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의 거대한 전환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이어진 촛불대선에서 시민들은 문재인을 대통령으로 선택했는데, 그는 당선이 확실시된 순간 광화문으로 나와 세월호 유가족들을 만났다. 정부든 국회든 사법부든 생명과 안전을 강조하는 모습이 두드러지고, 헌법에 생명에 대한 권리와 안전하게 살 권리를 명문화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폭넓은 합의가 있다. 


그러나 안타까운 죽음들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지난 3월 30일 100일이 된 제천 화재 참사를 기억해보자. 당시 스포츠센터 건물 2층에 있던 사람은 모두 불이 아니라 연기 때문에 죽었다. "유리창만이라도 깨줬더라면"이라는 탄식은 "퇴선 명령만 있었더라면"이 아직도 진행 중임을 깨닫게 했다. 유가족의 처지도 다르지 않다. 모두가 함께 아파하던 시기가 지나면, 진상규명 과정에서는 배제되기 십상이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는데 끝났다 하고 주위에서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냐고 물어온다. 모든 것이 그대로다. 


세월호 참사는 각자의 삶을 짓는 터전이라 믿었던 지반이 흔들리고 무너지는 사건이었다. '모두가 지켜보는데도 내가 버려진 채 죽어갈 수 있다니….' 세월호 참사는 사회의 붕괴를 경험하게 했던 만큼 사회의 재건을 숙제로 남겼다. 지금까지로 본다면 한국사회가 생명과 안전을 재건의 기치로 올린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누군가 위험에 처했을 때 목숨을 구할 줄 아는 사회, 누구도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할 줄 아는 사회는 저절로 오지 않는다. 생명과 안전을 지킬 방법을 찾고 익혀야 한다. 


국가의 적극적 의무를 추궁해야 


방법을 찾는 데에 '인권'이 길잡이가 된다. 생명과 안전이 권리임을 확인하자는 의미는 아니다. 대한민국 헌법에 생명에 대한 권리가 명시되진 않았지만 누구도 생명이 기본적 인권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권리라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국가가 모를 뿐이다. 이제 방법을 알아야 할 때라면 국가의 의무에 대해서도 확장된 접근이 필요하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의 익숙한 방식은 형사법적 접근을 따른다. 규정을 지키지 않은 것이 '죄'로 구성되고 '벌'에 처해진다. 세월호 참사에서 해경123정장을 비롯하여 해경 지휘부 누구도 현장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거나 퇴선 안내 및 유도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해경123정장을 제외하고 아무도 벌을 받지 않았고 누구도 잘못을 빌지 않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심판에서 생명권 보호 의무 위반이 아니라는 결정 역시 같은 한계에 멈춰 있다. 정해진 것을 어기지 않으면 된다는, 소극적 의무만 판단하는 방식이다.


유럽인권재판소의 판례들은 생명과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국가의 적극적 의무를 모색하는 데에 참조가 된다. 몰타 국영 조선소 수리공들이 오래 동안 석면에 노출된 사건에 관해 재판소는, "최소한 1970년대 초부터는 석면에 노출된 환경에서 근무하는 조선소 수리공들의 위험에 대하여 알았거나 알았어야 했"다고 지적하며 그 이후 아무런 보호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은 의무 위반이라고 판단했다. 피해자가 위험에 처한 사실이 알려진 후에야 국가에 의무가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수준에서 알려졌어야 할 때 알지 못한 것부터 의무 위반이라는 것이다. 해경 지휘부의 '배 안에 그렇게 사람이 많은 줄 몰랐다'는 말은 변명이 될 수 없다. 책임져야 할 수많은 잘못 중의 하나다. 


2005년 터키에서는 미숙아로 태어나 호흡곤란을 겪는 신생아가 공립병원들이 서로 치료를 떠넘기던 중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병원은 그 부모에게 치료 장치가 없다, 치료센터에 자리가 없다는 등의 변명을 했다. 유럽인권재판소는 국가의 의무 위반이 아기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판단했다. "병원 상호간의 협력 부족, 신생아 센터 내에 장비의 불충분(인큐베이터 고장), 응급의료검사의 부재"라는 상황이 문제였고, 결국 아기는 "적절한 응급치료에 대한 접근을 박탈당한 점에서 병원 서비스 장애의 희생자"라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도 적절하고 유효한 긴급구조에 대한 접근을 박탈당한 사건이다. 국가가 생명과 안전을 보호할 의무를 위반했다는 점을 인식한다면 해경 지휘부를 비롯한 재난 컨트롤타워의 재수사는 필수적이다. 


유럽인권재판소는 위와 같은 실체적 의무뿐만 아니라 절차적 의무에 대해서도 판단을 내린다. 절차적 의무란 사건 발생 후 그 원인과 관련 기관의 책임을 묻는 조사가 제대로-즉각적으로/유의미하게/효율적으로 등- 이루어져야 함을 말한다. 생명과 안전이 권리라면 불충분한 조사, 서두른 종결, 지연된 배상 등도 의무 위반이라는 것이다. 억울한 죽음의 이유를 밝힐 줄 아는 사회가 생명과 안전을 보호할 줄도 알 것이므로, 절차적 의무는 본질적이다. 세월호 참사 관련 기록의 은폐, 진상규명 방해, 특조위 해산 시도 등을 끝까지 밝혀내는 것은 진상규명과 무관한 정치보복이 아니라 진상규명 그 자체의 요소다.


▲안산 단원고등학교 교정. ⓒ프레시안(최형락)


피해자는 권리의 주체  

국가의 의무를 더욱 적극적으로 밝히기 위해서라도 다시 한 번 환기되어야 할 것이 피해자의 권리다. 1기 특조위의 강제해산 경험을 딛고 다시 세워진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도 이 점을 인지하고 있는 듯하다. 첫 회의에서 장완익 위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피해자들은 민원인이 아닙니다. 우리가 다루는 참사의 당사자이자, 특별조사위원회의 또 다른 구성원입니다." 진실과 정의에 피해자가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인권의 중요한 원칙이다. 그러나 아직 한국사회는 피해자를 권리의 주체로 대하는 데에 익숙하지 않다.



'유가족'이 사회에 등장할 때 사람들은 동정을 보낸다. 유가족이 호소하는 피해를 함께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동정은 혐오의 이면이기 쉽다는 말은 여기에도 들어맞는다. 사회는 사건의 배경화면 정도에 유가족의 위치를 지정해준다. 너무 빨리 웃어도 안 되고 너무 오래 울어도 안 된다. 알려주는 만큼만 궁금해하고 쥐어주는 만큼만 감사히 받아야 한다. 팟캐스트 '세상 끝의 사랑'은 세월호 참사 유가족이 여러 사건의 유가족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방송이다. 그/녀들은 전혀 다른 사건을 겪었지만 마치 같은 일을 겪은 것처럼 서로의 마음을 헤아린다. 그만큼 한국사회가 한결같다는 증거다. 


"피해를 입은 사람이기 이전에 권리를 보유한 주체"로서 유가족을 만나는 연습이 필요하다. 유가족은 정해준 자리에 있어야 할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유가족은 생명과 안전에 대한 권리를 박탈당한 희생자를 대신해 권리의 회복을 요구하는 사람이자, 사랑하는 사람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라는 참사를 겪은 피해생존자다. 그리고 어떤 설명에도 앞서, 한 사람이다.


죽음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사회일수록 피해자를 권리의 보유자가 아니라 민원인으로 취급하게 된다. 피해자를 어떻게 대하는지는, 생명과 안전이 과연 권리로 자리 잡았는지, 국가는 의무를 깨달았는지 진단할 수 있는 지표가 된다. 피해자의 목소리를 피해에 대한 호소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인권 현실에 대한 고발로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그/녀들이 있는 곳이 진실과 정의의 자리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녀들이 모든 걸 알기 때문이 아니다. 한 사람을 애도하고 그리워하기 위해 진실과 정의를 경유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인권을 약속하자 


재난참사에서 인권에 기초한 접근은 매우 중요하다. 인권 무시나 차별의 관행과 법제도는 특정 집단의 사람들을 재난참사의 위험에 취약하게 만든다. 또한 재난참사가 발생했을 때 구조에서부터 회복에 이르기까지,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실현하는 전 과정에 영향을 미친다. 인권의 증진을 목표로 삼고 실현할 방법을 찾아내 익히는 만큼, 재난참사는 덜 발생하고 덜 지속된다. 생명과 안전을 강조하며 자칫 사람들을 보호나 통제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릴 가능성도 경계할 수 있다. 


4주기 합동영결식에는 대통령을 비롯한 공직자들의 다짐도 희생자들의 영전에 바쳐질 것이다. 그들은 다시금 생명과 안전을 강조하며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을 할 텐데, 시민으로서 우리는 어떤 다짐을 해야 할까? 당신들의 약속보다 더 오래 갈 인권의 토대를 세우겠다는 다짐을 해보면 어떨까? 우리 스스로 인권의 주체임을 잊지 않고, 국가의 적극적 의무를 밝히기 위한 진상규명 운동에 다시 신발끈을 묶어야 할 때다. 


*유럽인권재판소의 판례는 다음 자료를 참고하고 인용했습니다. 김성진, 국가의 국민 안전보장의무: 유럽인권재판소 판례를 중심으로, 공익세미나 <국가의 국민 안전보장의무:세월호 참사 이후 법적 논쟁>(2017.7.11)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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