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문화, 예술

청년, 하루 살고 하루 자기도 버겁다

일취월장7 2016. 5. 28. 09:01

청년, 하루 살고 하루 자기도 버겁다

2016.05.27 17:40:00


[건축신문] 청년 난민

             
난민[難民] : 인종, 종교 또는 정치적, 사상적 차이로 인한 박해를 피해 외국이나 다른 지방으로 탈출하는 사람들

삶의 터전을 잃은 시리아 난민들은 "우린 인간이다"를 외치며 프랑스, 독일, 캐나다로 인간답게 살기 위해 건너갔다. 프랑스 정부가 불도저로 칼레 난민촌을 밀어버려도, 같은 인간이지만 우리나라에서 살 인간은 아니라는 듯 마케도니아가 국경을 닫아도 그들의 이동은 계속됐다. 시리아 난민 사태가 일어난 지 몇 달이 지났을 때도 내전은 격화됐다. 터키 국경으로만 3만 명이 몰렸다. 60만 명의 난민이 추가로 발생할 거란 예측도 있다. 

정치적·사상적 차이로 인한 박해를 피하기 위해 탈출한 사람을 '난민'으로 일컫는다. 난민의 가장 큰 문제점은 어떤 제도도 그들을 지켜줄 수 없다는 사실이다. 국적은 있으나 본국을 피해 다른 곳으로 이주했고, 이주국에 살고 있으나 국적은 여전히 본국에 있다. 쉽게 말해 음영지대에 사는 사람들이다. 

난민을 음영지대에 사는, 사회 제도의 빛을 보지 못하는 사람으로 규정한다면 내가 발을 딛고 있는 한국도 난민 발생 국가다. 그리고 그 난민이 청년이라면, 미래세대의 기둥이 될 청년이 난민이라면, 그 나라는 곧 무너질 것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무너지고 있는 나라의 기둥, 그 난민들의 이름은 청년 노동 난민, 청년 주거 난민이다.

▲ <미스핏츠> '청춘의 집' 프로젝트 '당신에게 집은 어떤 의미입니까'에 사용된 이미지. ⓒ미스핏츠


9.5%. 지난달 통계청이 발표한 청년(15~29세) 실업률이다. 몇 번의 실패 끝에 구직을 포기한 사람들과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이 통계에 잡히지 않고 1주일에 1시간만 일해도 취업자로 분류되는 걸 고려하면 실질적인 청년 실업률은 훨씬 높을 것이다. 대학교 이상의 학력을 가진 청년들의 실업률은 무려 25.3%라는 조사도 있다. 고등학교 학생의 약 70%가량이 대학을 진학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최소 5분의 1가량의 청년이 대학을 나왔음에도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실업자인 신세다.  

일부는 요즘 젊은 사람들이 고생하기 싫어서, 눈이 높아서 취업을 못 한다고 이야기한다. 눈을 낮추면 취업될 가능성이 커지긴 한다. 하지만 그 현실은 어떠한가. 2015년 중소기업 직원 평균 월급이 대기업의 60%가량이었다. 이 정도 임금 격차는 조사 이후 처음이라고 한다. 독일과 일본은 임금 격차가 각각 74%, 82% 내외로 우리나라보다 덜하다. 청년들이 중소기업을 회피하는 이유는 일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삶이 힘들어서다. 눈을 낮추라고 할 게 아니라 중소기업의 위치를 올려야 하는 게 급선무다. 우리나라 굴지의 보수 일간지가 사설로 "청년들에게 어떻게 중소기업 취업을 권할 수 있는가"를 이야기하는 판국이다.

20.3%. 지난해 첫 직장을 잡은 청년들의 5분의 1가량이 1년 이하 계약직으로 일을 시작했다. 기업은 정규직 일자리를 비용문제를 들먹이며 줄이고 있고 정부 역시 정규직이 과보호 받고 있다면서 정규직 기득권 해체를 주장한다. 정부와 기업이 전폭적으로 실시한 임금피크제 역시 취업에 도움이 안 된다는 소식이 들린다. 정규직의 기득권이 없어지면 마치 청년의 일자리가 생길 것처럼 말했지만 청년의 일자리는 더욱 악화되고 있다. 국회예산정책처 역시 임금피크제와 청년 일자리의 연결고리가 약하다고 평가했다. 효과가 제한적이기 때문에 청년고용 의무제도를 적극적으로 시행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기업 절반가량이 신규채용을 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아버지 월급이 줄고, 자식 일자리가 생기는 게 아니라 아버지 월급은 줄고 자식 일자리는 여전히 없다. 생긴 일자리도 1년 이하 계약직이 20%다. 

78%. 부모가 비정규직일 때 자녀도 비정규직인 경우가 78%에 달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노동자 사이의 신분으로 굳어졌는데, 이 신분이 자식에게까지 이어진다. 비정규직인 부모는 충분한 자본을 쌓지 못하고, 자본이 부족해서 자녀에게 교육자본, 사회자본을 투자하지 못한다. 투자받지 못한 자녀는 노동 시장에서 약자일 수밖에 없으며 비정규직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비정규직이 될 확률이 더욱 높아진다. 수저 계급론은 일부 가지지 못한, 약해빠진 청년들의 투정이 아니라 통계적으로 증명된 엄중한 현실이다. 

프레카리아트(Precariat) : 불안정한(precarious)과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의 합성어

청년들은 불안정한 노동으로 몰렸다. 청년들이 약해서 헬조선을 말하는 게 아니고, 아무 근거 없이 탈조선을 소리치는 것도 아니다. 정치권에서 청년 담론이 몇 년 전부터 유행했지만 청년들의 상황은 갈수록 악화됐다. 불안정 노동, 불안정한 비정규직들을 뜻하는 '프레카리아트'는 유럽의 단어였다. 금융위기 이후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등 유럽 국가들이 취한 노동시장 개혁의 핵심은 노동시장 유연화였다. 기업이 노동자들에게 들이는 비용을 줄이면 그만큼 채용을 늘릴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에 의한 계획이었다. 결과는 어땠을까. 유로존 청년들 중 절반가량이 비정규직이다. 스페인 같은 경우, 청년 10명 중 7명이 비정규직이다. 장밋빛 전망은 전망으로만 끝났다. 2011년 유로 크라이시스의 해결책으로 꼽히던 노동시장 유연화를 동아시아의 한 국가가 도입했다. 노조 조직률이 10% 내외인 상황에서, 비정규직 627만 명 중 절반가량이 1년 미만 근속하는 세상에 노동시장을 유연화하겠다고 한다.

불안정한 비정규직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청년들을 아무도 보호하지 않는다. 정부는 노동시장 유연화를 소리치고, 국회 역시 노동시장 관련 4대 입법에 관해 뚜렷한 해답을 내놓지 못했다. 제도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청년 노동자들은 난민의 위치에 준한다. 제도의 부재로 인한 박해를 청년층은 피할 수 없다. 불안정한 노동자로 남지 않고, 탈출하고 싶은 노동자로 변하고 있다. 상황은 점점 악화될 것이다. 프레카리아트가 아닌 노동 난민으로의 변화다.

청년들이 일자리의 꿈과 동시에 버린 또 한 가지의 꿈이 있다. 바로 '집'이다. '집에서 오손도손 사는 행복한 가정'을 꿈꾸는 청년은 그리 많지 않다. 실버푸어, 에듀푸어 등 온갖 푸어(poor)들이 넘쳐나지만, 그 시작은 하우스푸어였다. 2016년 하우스푸어의 주인공은 '큰 집을 사기 위해 빚을 내 투자했다가 빚을 못 갚는' 중산층이 아니라, '하루 살고 하루 자기도 버거운' 청년층이다. 

▲ <청년, 난민 되다>(미스피츠 지음, 코난북스 펴냄). ⓒ코난북스

2013년 민달팽이 유니온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전국 청년의 14.7%가 주거빈곤 상태에 놓여 있었다. 주택법에 규정된 최저주거 기준(1인당 14제곱미터)에 미달하는 주택, 지하방, 고시원 등에서 거주하는 청년이 전국에 140만 명 정도 있다. 필자가 <청년, 난민 되다>(미스피츠 지음, 코난북스 펴냄)를 쓰면서 만나게 된 청년들 대부분이 이런 상태에 놓여 있었다. 수치로 가늠할 수 없는 주거의 현실은 꽤 암담했다. 벽간 소음이 너무 심해 잠을 잘 수 없던 사람, 소음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치료를 받은 사람, 너무나 비싼 월세를 충당하기 위해 위험한 아르바이트를 했던 사람 등 주거 난민의 현실은 통계치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였다.

단순히 안 좋은 집에 사는 게 청년주거 빈곤의 핵심은 아니다. 문제는 월세가 너무나 비싸다는 점이다. 2013년 기준 고시원의 평당 월세는 15만 2000원이었다. 타워팰리스의 평당 월세는 14만 8000원이었다. 고시원에서 매일 소음과 싸우며 잠을 이루는 친구들이 강남의 중심인 타워팰리스보다 높은 평당 월세를 내는 현실이다. 실제로 2012년 기준으로 소득의 30% 이상을 주거비로 쓰는 청년 1인 가구가 전체의 70%에 달했다. 절반 이상을 내는 경우도 23%가량이었다. 월급의 절반을 주거비로 내는, 월세로 내는 상황에서 청년들이 보다 나은 내일을 꿈꿀 수 있을까. 청년들은 으리으리한 궁궐 같은, 아방궁 같은 집을 꿈꾸지 않는다. 아프면 삼각김밥 대신에 죽을 끓일 수 있고, 햇볕을 쬐면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집을 꿈꾼다.

청년주거 빈곤은 청년 빈곤의 시작이다. 부모에게 주거비 지원을 받지 못하는 학생은 월세를 내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다. 한 달 내내 최저 시급으로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의 30%가량을 주거비에 쓴다. 많게는 절반가량을 쓴다. 아르바이트하다 보면 생활이 망가진다. 일을 끝내고 오면 축 늘어지고, 공부할 시간에 잠을 자고 쉬게 된다. 자기 계발은커녕 하루하루 재충전하기도 벅차다. 이 상태에서 좋은 일자리를 갖기는 힘들다. 결국 부모에게 주거비를 지원받을 수 있는 청년, 즉 수저가 있는 사람들만 그럴듯한 자기 계발과 취업을 도전할 수 있다. 정말 심플한 알고리즘이다. 너무 극단적으로 묘사한 것이 아니냐고 물을 수 있지만 필자가 만난 인터뷰이 모두가 공통적으로 짚은 문제점이다. 주거 빈곤에 이은 취업 실패, 취업을 하더라도 불안정한 취업이 되는 이 상황. 노동 난민과 주거 난민이 공존하는 이 나라가 난민 국가가 아닐 수 있을까. 

주거 난민과 노동 난민 등 난민 발생의 근본적인 문제는 사회 시스템을 붕괴시킨다는 점이다. 독일과 프랑스가 난민 유입으로 인해 갈등을 겪고 여러 문제가 발생하는 것처럼 한국도 여러 문제를 직면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국민연금이다. 노동 불안과 주거 불안에 시달리는 청년들은 자연스레 출산을 포기한다.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나라에서 국민연금이 제대로 작동될 리가 없다. 노후 대비가 취약한 한국의 노년층을 고려하면 국민연금의 붕괴는 노년 세대 전체의 붕괴다. 이를 막으려면 노동과 주거 두 개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카이스트 김우창 교수는 해결책으로 국민연금을 제시했다. 국민연금으로 어떻게 국민연금의 불안을 줄일 수 있을까. 바로 청년에게 투자하는 방식이다. 505조 원가량 되는 국민연금의 1%가량이라도 인구에 투자하면, 국민연금의 금융투자수익률을 웃돌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김 교수의 주장이다. 쉽게 말해, 국민연금을 청년에 투자해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면 자연스러운 선순환이 된다는 뜻이다. 김우창 교수가 이 아이디어를 냈을 때가 2014년이다. 그 후 2년이 지난 지금 국민의당과 더불어민주당 역시 국민연금을 주택에 투자하자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구체적인 대책을 언급하진 않았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을 줄이기 위해 청년의 주택문제와 일자리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했다. 

인간은 노동과 주거로 삶을 건축한다. 노동으로 돈을 모아 자신의 가족을 꾸리고, 생계를 이어가고 미래를 꿈꾼다. 주거는 가족과 생계 그리고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공간이다. 한국의 청년들은 노동 난민, 주거 난민으로 몰리고 있다. 제도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오히려 제도 바깥으로 밀려 나가고 있다. 청년난민들에게 그럴듯한 공간을 주자. 성실하게 노력하면 일자리를 얻을 수 있고, 번듯한 일자리가 아니어도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고, 그 돈으로 집에서 가족과 함께 생활할 수 있게 하자. 더 이상 한국의 청년들이 헬조선의 청년 난민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건강한 미래세대로 남을 수 있게….  



 '사적인' 죽음을 택하다

2016.05.27 17:47:07


[건축신문] 청년 자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불과 13년 전만 해도 나는 'P세대'라는 누명을 뒤집어썼다. 그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물론 월드컵 때문이기도 하다. 그냥 길바닥에서 빨간 옷 입고 소리 좀 질렀을 뿐이었다. 인터넷에서 이른바 '수꼴'들 좀 비웃고, 방 밖으로 기어나가 고작 투표나 했을 뿐이다. 헌데 그런 독박을 썼다. 연유는 이렇다. 난데없이 한 광고회사는 이런 일련의 사건을 보고는 열정(passion), 참여(participation), 잠재력(potential power)을 갖고 있는 P세대라고 나한테 그랬다. 민주주의를 걸쳐만 입었을 뿐 권위주의 꼰대이긴 매한가지였던 '386세대', 마냥 시니컬하기만 하고 자기 에고를 감당 못하는 철없는 'X세대'가 아니었다.  

P세대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시대를 열어갈 포텐 터지는 세대'라고 한다. 물론 그 기대를 광고회사한테만 받은 것은 아니었다. 어떤 양반들은 고답적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레드콤플렉스도 없이 '빨강'이라는 색깔로 광장을 새롭게 점유하는 열정적 청년/시민 주체로 호명하기도 했다. 정치도, 사회도, 문화도 우리가 참여해서 새롭게 바꿀 거라고 했다. 하지만 P세대는 지난 13년간 그들의 붉은 피만 제대로 빨을 뿐이다. 열정은 노동 착취의 명분이 되었고, 참여는 잠깐의 정부이름이었을 뿐이며, 잠재력이란 잠재를 시키는 능력 혹은 모든 것이 잠식된 채 은둔형 외톨이가 된다는 말이었을 뿐이다. 그동안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은 기대 이상으로 순조롭게 악화되었고, 그 사이 우리는 놀라울 정도로 무(기)력해졌다. 희망과 기대를 담아 P세대라고 호명한 게 2003년이었는데, 4년 만에 '88만원세대'로 전락했다. 그리고 그 몇 년 후, 우리는 서로를 혐오하며 찌질하게 잉여질이나 하고 있는 벌레들이 되었다. 물론 '살아 있다'라는 전제 조건하에서 말이다.  

ⓒ이말년월드


난민이 된 청년세대 

이곳에서 나는 난민이 된 청년을 얘기하고 있다. 냉전 시대의 분단 상황에서 피난민 국가로 시작해, 단군 이래 가장 부유하며 전 세계에서 방귀 좀 낀다는 나라가 됐다는 데도 불구하고, 청년들이 난민이 됐단다. 전쟁통에 피난을 가야 하는 상황도 아니다. 굶주림과 폭압에 못 견뎌 사선을 넘어 여러 나라를 떠돌다 들어온 탈북난민도 아니다. 맛집에 환장하고 쓸데없이 인터넷질이나 하고 앉아 있으며 SNS에 쿨내가 진동하는 사진으로 칠갑하는 인생들에게 '난민(難民)'이라는 거창한 말을 붙이는 것은 무도한 일일 수도 있다. 일찍이 이렇게 풍요로우면서도 나르시시즘으로 가득한 난민은 지구 역사상 딱히 본 적이 없을뿐더러, 우리가 난민에 대해서 갖고 있었던 범주에 딱히 맞아떨어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넘쳐나는 청년 담론들에서 사람들은 모두 청년의 위기와 그들의 암담한 현실과 미래에 대해서 알고 있지만, 개별적으로 만나는 청년들은 마냥 이기적이고 속물적이면서 빤한 데다 심지어 게으르고 무식하다. 게다가 '기생한다'는 말 빼고는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을 정도로, 그들에게서는 발전주의 한국의 도덕적 가치였던 근면/성실과 '노오력' 따위는 찾으려 해도 찾아볼 수 없다. 윗세대가 피땀으로 일궈온 이 땅의 풍요를 단물만 쪽쪽 빨아 먹고는, 미래가 없다며 어리광에 가까운 불평만 하고 있게 들릴지도 모른다. 이에 작금의 현실이 청년세대에 가혹하다는 것은 머릿속으로 이해해도 개별적으로 청년을 만나게 되면 복장이 터지고야 만다. 이런 그들에게 대한민국의 국가가 엄청난 폭력에서 도망쳐 한국으로 피난 온 이주민들에게도 부여하기를 극도로 꺼리는 난민이라는 지위를 청년들에게 주는 것은 정말이나 껄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 동안 한국 사회를 견뎌낸 청년들은 어떤 면에서 충분히 '난민'이 되었다. 물론 어느 정도는 은유적으로 말이다. 또한 주변에서 개별적으로 보게 되는 '한심한' 청년들 말고도, 고립무원 상태에서 피어나지도 못했는데 인생막장으로 치닫는 걸 매일 느끼면서 사는 청년들도 많다. 이들은 대게 '비가시적'인 곳에 놓여 있기 때문에 우리가 볼 수 없었을 뿐이다. 어쨌든 대부분의 청년들은 그동안 난민화되고 있고, 아직 난민은 '충분히' 되지 않았을지라도, 삶은 이미 완벽하게 '난민적'이다.  

전쟁과 같은 큰 사건이 있어서 누구에게나 동의할 수 있는 난민이 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대한민국 청년들은 '시나브로'라는 부사만이 적합할 정도로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난민이 되었다. 은유로서 난민이라는 증거들은 다들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청년실업률은 사상 최악을 기록했다. 일자리는 없지만 빚은 있다. 역사상 최초로 이 나라의 청춘들은 '빚'을 가진 채 성인이 됐다. 어마어마한 학자금 대출은 젖혀두고, 생활비로만 은행에서 꾼 돈이 2015년 기준으로 1조 원이 넘었다. 미래는커녕 지금 당장 버티기도 버겁다. 그렇다고 사회안전망이나 복지가 있는 것도 아니다. 결혼은 고사하고 연애도 버겁다. 게다가 그 둘은 '매우 비싸다'라는 것을 모두가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심리적으로 든든한 사회적 관계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수저'가 인생의 대부분을 결정한다는 진실, 노력은 보상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착취의 다른 이름이라는 진리, 사람은 키우는 것이 아니라 걸러내고 대체해버리는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간파해버렸다. 공정함이란 눈 씻고 찾아볼 순 없지만, 계속해서 무한 경쟁의 구도에 내몰린다.  

P세대라고 한참 떠들었던 그즈음, 2004년 노동석 감독의 독립영화 <마이제너레이션>은 빚으로 허덕이는 절망적 상황의 청춘을 기민하게 그렸다. 이 영화의 카피는 이러했다.

"행복은 자꾸만 비싸지는데… 우리도 꿈을 살 수 있을까? 청춘의 조난신호-마이제너레이션."

하지만 이 나라에서는 10년 넘게 청년이 보내는 조난신호를 철저히 무시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마션>에서는 화성에 홀로 던져진 우주비행사의 조난신호를 알아차리는 데도 2주가 걸리지 않았는데 말이다. 되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몹쓸 말로 모르핀이나 한 방 놓아주려고 했다. 그 사이 청년들은 알아버렸다. 우리는 꿈은커녕 현재도 살 수가 없다.

조난신호가 닿지 않고 구조는 꿈도 꿀 수 없는 '헬조선'의 상황에서 선택지는 '탈조선'밖에 없다. 사회의 약속과 개인의 전망이 부재한 곳에서 생존 자체의 불안을 느끼며 탈출만이 답이라면, 그곳이 바로 난민수용소이다. 물론 한국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신자유주의가 안정적인 삶의 구조를 파괴해버리고 모두를 불안정한 삶의 경쟁으로 몰아놓을 때 일상은 난민주의화되어 버린다고, 어떤 인류학자는 말한다. 하지만 한국은 경제 성장도 기적적인 속도로 했듯이 청년, 더 넓게는 일반 시민들을 난민으로 만드는 것도 경이로운 속도로 하고 있다. 샴페인을 일찍 터뜨렸다고 한 지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인제 보니 깨져버린 샴페인 병 위에서 발바닥에 피를 흘리고 있을 뿐이다. 

▲ 영화 <마이제너레이션> 중 한 장면. ⓒ노동석


되풀이되는 사적 죽음 

누구 하나 자신을 도와줄 사람 없는 고립무원의 사회적 난민 상태, 미래를 담보로 현재를 채무로 버텨내는 경제적 난민 상태만으로도 이 사회의 청년들은 충분히 난민의 조건을 갖춘 듯하다. 나는 여기에다 한 가지를 더 말하고 싶다. 바로 죽음이다. 난민의 삶이 사실 죽음이라는 것이 근접하게 있는 삶이라면, 우리 사회의 청년들도 정도는 다를지언정 굉장히 죽음과 근접한 삶을 살고 있다. 모두들 다 알고 있는 것처럼 한국의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매해 30명이 넘는 사람들이 스스로 삶을 마감하며 세계적으로도 13년째 1위를 기록하고 있다. 그 안을 좀 더 살펴보면 노인과 청년의 자살이 굉장히 높으며 청년들의 사망원인으로 1위가 자살이다.  

돌이켜 보니 그간 죽음이 참 흔해졌다. 자살로 떠난 사람들이 참 많다. 얼마 전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그동안의 안부를 묻던 중 대화는 어쩌다 보니 누구누구가 몇 년 사이에 저세상으로 떠났는지, 어떤 이유로 떠났는지, 어떤 방법으로 떠났는지로 흘렀다. 물론 대부분의 사인은 '우울증'이라고들 했다. 자살이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라고 한 게 120년 전인데, 여전히 사인(死因)은 개인적이고 사적이다.  

천성이 학교 교사였던 동창은 몇 년을 계속 임용고시에서 낙방한 후 고층 건물에 올랐다. 한 후배는 인터넷에서 조리돌림을 당한 후 우울증으로 고생하다 산에서 목을 맸다고 한다. 성 정체성으로 우울했던 어떤 이도 세상을 혼자 떠났다. 전 애인의 스토킹으로 고생하던 친구의 동생도 그렇게 떠났다.  

몇 년 전 나는 한 친구의 부탁을 받았다. 그 친구의 친구가 죽겠다며 집을 나갔는데, 온라인 행적을 찾아봐 달라고 한다. 본의 아니게 사이버상에서 신상을 털어야 했던 그때, 그가 한 자살 카페에 가입한 것을 찾아냈고, 얼마나 자살을 하고 싶은지 의지를 확실하게 보여야 하는 등업(커뮤니티 내 회원 등급 업그레이드)을 통과하여 동반 자살할 동료들을 모아서 지방의 한 도시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그 카페의 사람들이 차 안에서 번개탄을 피우고 함께 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처음 지인의 자살 소식을 들었을 때 마음의 황망함이 아주 오래갔지만, 지속적으로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내 또래 사람들의 자살 소식에 어느덧 마음에 굳은살이 생겨버린 것 같기도 하다. 무엇이 그들을 우울하고 삶의 극단으로 내몰았는지는 생략된 채, 대부분의 죽음은 우울이라는 개인의 심리적 차원으로만 귀결되어 버린다. 누구나 마음속에 상처 하나 즈음 있는 거라고 했지만, 그 상처가 일련의 자살들 때문에 죽음에 대한 굳은살이었을 줄은 미처 생각하지는 못했다.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굉장히 위태로우며 죽음이라는 것이 너무나 가까이 있는 삶을 난민이라고 말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이렇게 난민이 된 청년들은 연애와 결혼을 포기하거나 자기 삶을 스스로 끊으면서 이 사회의 재생산을 거부하고 있다. 어떤 이는 왜 화염병을 던지지 않느냐고 한다. 또 어떤 이는 왜 투표를 하지 않느냐고 한다. 시민은 미처 되지 못했지만 확고하게 '국민'이었던, 하지만 '난민'은 아니었던 이들이 난민이 된 지금의 청년들에게 던지는 질타다. 어디에다 화염병을 던져야 할지, 어디에다 투표해야 이 상황이 조금이라고 개선될지 전혀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자신이 투표권이나 있는지조차 의심이 드는 상태인데 말이다. 화염병과 투표 대신 이들이 선택한 것은 자신의 혹은 이 난민수용소의 조용한 '사적인' 죽음인 것 같은데 말이다.  

정림건축문화재단이 2012년 창간한 계간 <건축신문>은 건축의 내외부에서 발생하는 논의들을 균형 잡힌 눈으로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시작했습니다. 이를 위해 특정 이익 대변이나 건축 내부만의 닫힌 소통을 지양하고, 시각예술, 디자인, 공연예술 등 다양한 분야와의 교류로 건강한 담론을 만들어내는 소통의 창구로 역할을 하고자 합니다. (☞바로 가기 : 정림건축문화재단) 



"노오력!", 탈출구 없는 헬조선 청년의 비명

2016.04.18 11:37:39

[프레시안 books] <노오력의 배신 : 청년을 거부하는 국가 사회를 거부하는 청년>

극장에 간다. 애국심을 고취하는 정부 광고가 태극기를 배경으로 나온다. 거짓이다. '나라를 사랑하자'는 말은 세상 물정 모르는 꼰대나 하는 X소리다. 지난달 한 리서치 회사가 전국 만 19~59세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응답자 4명 중 3명 이상(76.9%)이 이민을 고려했다고 답했다. 다시 태어나도 한국에 살고 싶다고 응답한 이의 비율은 26.5%에 불과했다. 탈조선(이민)이 해답이다. 국민은 이미 한국을 버렸다.

주위를 돌아본다. 파렴치범이 국회의원이 된다. 돈 많은 집에 태어난 놈만 좋은 대학에 간다. 돈이 많아야 어학연수를 다녀올 수 있고, 좋은 직장에 갈 수 있다. 꿈을 꿀 수 있는 자는 한정되어 있다. 금수저(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다는 말에서 비롯됐다. '은수저'보다 더 나은 삶의 조건을 제공할 여력이 있는 선택받은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로 태어나지 않는 한, 한국은 지옥이다. 헬조선이다. 

물론 나보고도 노력하라고 한다. 너는 왜 공부하지 않고 남들만 비난하니? 남 부러워할 시간에 자기 계발에 더 매진해서 좋은 직장으로 옮기면 되지 않니? 이건 마치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에서 땀 흘리며 올라가려는 바보짓과 같다. 죽을 듯 노력해야 겨우 제자리를 지킨다. 그 사이, 금수저는 편안하게 상승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맡긴다. 그리고 말한다.

"열심히 노력해서 지금의 위치를 얻었어요." 

그러니 '노오력'('노력하라'는 꼰대의 말을 비웃는 조어)하는 건 바보다. 어차피 안 된다. 직장에 들어가 봐야 기다리는 건 직원을 부품 취급하는 군대 문화고, 죽을 듯 일하다 잘릴 미래다. 자영업 해봐야 망한다.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한다. 대학에 가봐야 남는 건 빚이고, 백수가 된 미래다. 그러니 헬조선이다. 탈조선(이민)만이 답이다.

그러니 비웃음으로 위안한다. '네가 잘 되면 안 된다'는 불안함과 '나 같은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절박함이 뒤섞였다. '~충'이라는 명사는 살려달라는 절규다. 이들은 어차피 안 된다는 걸 안다. 투표해도 안 되고, 시위해도 안 된다. 공부해도 안 되고, 일해봐야 안 된다. 결혼은 능력 있는 자의 사치고, 내 집 마련은 동화 속 이야기다. 그러니 모두가 나처럼 망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 사회에서 그나마 사람이 평등한 순간은 함께 망할 때뿐이다. 

이들에게 뭔가를 이룩한 산업화 세대, 민주화 세대는 모두 적이다. 저들은 절대 나를 이해 못하니까. 산업화 세대는 굶지 않는 미래라는 희망을 품었다. 똑똑한 민주화 세대는 민주주의 국가라는 신념을 지녔다. 지금은 절망밖엔 없다. 그러니 민주화 꼰대, '씹선비'는 '일베충'의 적이 된다. 혐오를 방어 기제로 삼은 버림받은 청춘이 비난할 수 있는 유일한 절대 악이 된다. 

"거 봐. 아까는 도전하라고 훈계하더니 내가 막상 도전하니까 안 받아주잖아."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민음사 펴냄)는 흔들리지 않는 전선을 요약한다.

"탈조선은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더 비참해지지 않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디씨위키의 '탈조선' 항목에 등장하는 문구다. 지금의 청년이 한국을 바라보는 시각을 압축했다. 이들이 기댈 희망은 한국에서 벗어나는 것밖에 없다. 탈조선이라는 단어에는 어떠한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탈조선에는 율도국을 찾자는 신념도, 체제 저항도 없다. 단지 내가 발을 디딘 한국이 죽도록 싫다는 절규밖에 없다. 그저 '여기서 살기 싫다'는 말이다. 일자리를 마련해준다고, 학자금 대출을 늘려준다고, 신혼부부 주택기금 제도를 개선한다고 이 말이 사라지지 않는다. 이 말이 보통명사화된 건, 오늘의 한국이 처절히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우리는 철저히 실패했다. 여기서 시작해야 한다. 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내놓는 처방은 모두 무용지물이다. 민주화 업적을 자랑하는 586 세대의 대안을 이른바 '보수화한' 청춘이 거부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넥타이 부대의 '노력하라'는 메시지를 희화화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들은 한국이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업적을 자랑한다. 그래선 헬조선에 떨어져버린 이들과 소통할 수 없다. 우리는 철저히 실패했다.

<노오력의 배신 : 청년을 거부하는 국가 사회를 거부하는 청년>(조한혜정·나일등·엄기호·이충한·이영롱·최은주·천주희·양기만·강정석·이규호 지음, 창비 펴냄)은 현실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노오력, 노답, ~충, 헬조선 등 지금 인터넷 공간을 뒤덮은 절망적 신조어를 키워드로 뽑아 청년 세대의 절규를 직접 듣고, 왜 그들이 이와 같은 태도를 보이게 되었는가를 파헤친다. 저자들의 이름에서 보듯, 사회학을 공부한 이들이 직접 인터뷰, 연구 등의 조사를 거쳐 공동 참여한 이 책은 우리는 철저히 실패했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데 집중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노동 시간은 가장 길고 수면 시간은 가장 짧은 나라, 아동과 노인 자살률이 가장 높고 출산율은 수직 낙하하는 나라에서 살아날 방법은 떠나거나, 벌레가 되는 삶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자고 강조한다. 

▲ <노오력의 배신 : 청년을 거부하는 국가 사회를 거부하는 청년>(조한혜정·나일등·엄기호·이충한·이영롱·최은주·천주희·양기만·강정석·이규호 지음, 창비 펴냄). ⓒ창비

그리고 책 후반부에 이르러 이 프로젝트를 묶은 조한혜정 연세대학교 명예교수는 말한다.

"생활을 유지할 직업이 급격히 사라지는 '무업사회', 모두를 고립시켜버린 '무연사회', 사람을 쓸모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무용사회'에서 탈존(脫存)의 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것을 감지한 청년들이 이제 대대적인 전환을 해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헬조선이라는 말은 곧 '저들'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과거 학생들의 선언문과 같다는 얘기다.

따라서 책은 청년이 만든 이들 조어로부터 '청년 문제' 해결을 넘어, 한국 사회 기본 설계를 바꿔야 함을 강조한다. 이 문제의식은 다음과 같이 연결된다. 이제 청년 담론을 대하는 태도도 바꿔야 한다. 나아가 우리 삶의 태도도 바꿔야 한다. 헬조선이라는 말은 한국의 A부터 Z까지 모든 게 지옥이라는 뜻이므로, 전체를 다 뒤집어야만 한다.  

책은 섣부른 해결책을 내놓지 않는다. 실은 그래야 맞다. 모든 게 잘못된 사회에서 '이것을 해결하면 된다'고 말하는 이는 거짓 선지자다. 그는 헬조선에 새로운 지옥을 더할 적그리스도다. 책은 새롭게 일어나는 청년의 작은 공동체적 대안을 부분 조명하며 '보호를 조직'하는 데서 진정한 탈조선을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진정한 학습을 시작해야 한다고 선언한다. 조한혜정 교수는 구체적으로 청년 국민/시민 배당제도, 청년 자치 공간 지원, 갭 이어 제도 등의 구체적 대안을 출발점으로 제시한다. 

이에 꼭 찬성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현실 인식이다. 왜 당신이 그토록 혐오하는 '~충'이라는 말을 저들이 쓰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왜 당신의 자식이 "이 나라에는 희망이 없다"며 거짓된 꿈을 갖기를 거부하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그래야 출발점이 보인다. 올해 초 소설가 손아람이 써 화제가 된 '망국 선언문'을 복기한다. 이 책에서도 인용했다.

"잠시 청년들에게 물어주십시오. 줄줄이 늘어선 초록색 빈 병으로 어지럽혀진 대학가의 술집 취객에게, 외로움을 둘 공간조차 없이 비좁은 고시원의 세입자에게, 자정의 어둠을 몇 달째 지켜온 무표정한 아르바이트생에게, 이 나라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주십시오. 그들은 서슴없이 멸망을 입에 담을 것입니다. 감히 멸망을 말하지만 악의조차 감지되지 않는 평온한 목소리에 당신들은 경악해야 합니다. (…) 청년들은 더 이상 꿈을 꾸지 않으며, 불공평한 생존보다는 공평한 파멸을 바라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국호를 망각한 백성들처럼 이 나라를 '헬조선'이라 부릅니다. () 이 나라는 꾸준히 성장하고 있지만, 대기업 매출액이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을 뿐 기업소득과 개인소득의 격차는 점점 벌어져 OECD 최하위권에 머뭅니다. 오로지 기업만이 암세포처럼 무한히 자라나는 나라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봅니다. 국민소득이 30만 달러를 돌파하고, 세계 100대 기업 명단이 모두 대한민국으로 채워진들, 우리 각각의 삶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아무도 살 수 없는 높다란 탑을 쌓아올린 뒤 먼발치에서 그 웅장한 풍채를 감상하는 게 이 나라 경제의 목표였습니까?" 


이 시대, 청년에게 복지란 뭘까? 

'박근혜 암초' 만난 박원순·이재명의 청년정책 대해부
2016.03.09 07:28:53

[청년, 청년 배당을 말하다 ⑦] 서울과 성남 청년정책 비교해보니…
             
"저 취업 포기한다구요!"

그 순간 부모는 입이 떡 벌어졌다. 사학을 전공하던 대학시절부터 아르바이트 뛰어 모은 돈으로 군대 다녀오자마자 배낭여행을 다녀온 막내 아들. 취직할 생각은 없고 편의점에 대리운전에 아르바이트로 전전하는 아들이 답답해 "이제 아르바이트 그만하고 취직 준비에 매진하라"고 닥달하던 중 나온 아들의 '취업 포기' 선언이었다. 

한창 방영 중인 김수현 작가의 새 드라마 <그래 그런거야>의 한 장면이다. 극중 이순재-강부자 부부의 막내 손자 역으로 나오는 유세준(정해인 분)의 얘기다. 27세의 세준은 취업 대신 자신의 꿈을 말한다. 알바 뛰어 번 돈으로 다시 세계여행을 가고 블로그에 쓴 여행기를 모아 책도 쓰고, 그 돈으로 다시 여행을 다니면서 쌓은 노하우로 작은 여행사를 차리겠다는 세준의 말에 부모는 그저 기만 막힐 뿐이다.  

▲드라마 <그래 그런 거야>에서 알바를 전전하는 유세준(정해인 분)의 모습. ⓒSBS



'꿈도 좋지만 먹고 사는 일의 엄중함과 비루함을 아느냐' 다그치는 부모에게 세준은 철없게 보일 뿐이다. 그런데 만약 세준이 그 꿈을 이룰 때까지, 최소한의 생계가 보장된다면 어떨까? 세준이 정말 여행사를 차려 안정된 수입을 얻을 때까지, 일정한 돈을 나라가 보장해 준다면?

그런 세상이 가능할까? 최근 몇몇 지방자치단체에서 도입되고 있는 이른바 '청년 배당'은 그런 세상의 시작이 될 수 있을까?  

이 시대 청년은 복지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전통적으로 복지는 약자를 위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아이와 노인, 장애우 등이 대표적이다. 한 인간의 생애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이 가능한 청년이 복지의 대상은 될 수 없었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었다.  

청년(15~29세) 실업률은 2013년 8.0%, 2014년 9.0%, 2015년 9.2%로 계속 오르고 있다. 지난 1월의 청년 실업률은 또 올라 9.5%였다. 1999년 통계 기준이 변경된 뒤 최고치를 매년 갱신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 수치는 구직 활동을 아직 시작하지 않은 사람이 제외된 통계다. 구직 활동을 하지 않는 등의 이유로 실업률 통계에서조차 제외된 인원은 지난 1월 60만 명을 넘겼다.  

설사 바늘 구멍을 뚫고 취업을 한다해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청년 취업자 5명 가운데 1명은 1년 이하 계약직으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다. 그렇다고 나머지 4명의 일자리가 '질 좋은 고임금'이냐면 물론 그것도 아니다. 8일 통계청이 내놓은 '가계동향'을 보면, 20~30대 가구의 소득 증가율이 관련 조사가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경제가 어려운 건 모든 세대에게 같은 조건이었지만, 소득이 줄어든 연령대는 20~30대 뿐이었다. 

이런 상황은 청년이 어느덧 '약자'의 대열에 포함됐음을 의미한다. 청년을 보호해야 할 복지의 대상으로 보는 시선이 자라기 시작한 배경이다. 성남시가 올해 시작한 청년 배당은 청년이 복지의 수혜자가 될 수 있는지 논란을 본격화하는 계기가 됐다. 

성남시의 청년 배당은 특정 연령(만24세) 청년에게 1년 간 100만 원을 지급하는 정책이다. 지난 1월, 처음으로 대상자에게 12만5000원을 지급했다. 서울시도 청년활동지원사업, 이른바 청년 수당이라는 이름의 청년 대상 지원금 정책이 곧 공식 탄생을 앞두고 있다. 논란은 이미 거세다. 주로 새누리당과 정부 여당의 집중 포화가 쏟아진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시민이 낸 세금을 시장이 개인적인 인기를 얻기 위해 남용하는 포퓰리즘은 악마의 속삭임이자 달콤한 독약"이라 했다. 박근혜 대통령까지 직접 나섰다. "선거를 앞두고 선심성 공약이 또 쏟아져 나오지 않을까 걱정이 많이 된다. (일부 지자체장이) '우리가 좋은 일 하려는데 왜 중앙정부가 훼방 놓고 있냐'는 식으로 매도하고 있는 것 자체가 포퓰리즘"이라고 전 국민 앞에서 말했다.  

"청년복지는 악마의 속삭임? 청년이 기성 세대보다 많은 가능성을 지닌 사회는 끝났다"

폭격은 이재명 성남시장과 박원순 서울시장에게 동시에 쏟아졌지만, 사실 두 정책은 출생지부터가 다르다. 지원 대상은 청년으로 동일하지만, 근본적으로 결이 다른 정책이다. 성남시의 청년 배당이 소득에 관계 없이, 취업 여부에도 관계 없이, 해당 연령층에게 같은 금액이 지급되는 부분적 '기본 소득'의 개념이라면, 서울시의 청년 수당은 일부의 청년에게 지급되는 선별적 복지의 성격이 더 강하다.  

보편 복지냐, 선별 복지냐를 둘러싼 논쟁은 2010년 오세훈 서울시장의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계기로 한국 사회에서 본격화됐다. 당시 한나라당(현재의 새누리당)은 선별 복지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런데 2015년 청년 정책을 둘러싼 논란에서, 정부여당이 서울시의 선별 복지마저 '포퓰리즘'이라며 맹비난하는 것은 재밌는 대목이다.  

이는 이들이 청년을 복지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눈 높이를 낮춰 어디서든 일하면 되지 않냐"는 논리다. 그러나 이재명 성남시장은 이런 시각에 대해 <프레시안> 인터뷰를 통해 강하게 반발했다. "기성 세대보다 새로운 세대가 더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사회는 끝났다"는 것이 이재명 시장이 말한 청년 복지의 필요성이다. (이재명 시장과의 인터뷰 전문 기사는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OECD 국가 가운데 청년에게 아무런 수당 안 주는 나라는 우리나라 뿐이다"

성남시의 청년배당 정책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지자체에서 추진한 보편적 청년 지원 정책이다. 이재명 시장의 선거 공약은 아니었다. 2014년 이 시장의 재선 이후 시장인수위 격이었던 시민행복위원회에서 나온 아이디어가 성남시의 두 차례의 연구용역으로 이어졌고, 현재의 모양새가 갖춰져 공론화된 것이 지난해 여름 즈음이다.

▲성남시는 지난 1월 만 24세 청년 대상으로 첫 번째 청년 배당금을 지급했다. ⓒ연합뉴스

  

성남시는 이 정책이 '부분적 기본 소득'의 출발임을 강조한다. 청년배당 실행방안 연구를 맡았던 강남훈 한신대 교수는 "OECD 국가 가운데 청년에게 아무런 수당을 지급하지 않는 국가는 사실상 우리나라가 유일하다"고 말한다. 외국에서는 이미 청년에 대한 다양한 복지 정책이 시행되고 있다.  

대표적인 나라가 독일이다. 독일은 최장 25세까지 모든 어린이와 청년에게 20만 원 안팎의 아동수당을 지급한다. 학생은 연 505만 원의 학생 수당을 받는다. 특정 연령에 한정된 성남시의 정책보다 훨씬 파격적이다. 강남훈 한신대 교수는 "청년에 대한 투자는 초고령화 사회로 접어든 독일 경제를 든든하게 지켜주는 파수꾼 역할을 하고 있고, 청년의 경제적 기반이 든든해지면서 노인연금의 재원이 확대되는 등 기성 세대도 그 투자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라고 말했다.  

독일 뿐 아니라 호주에서도 학생지원법에 근거해 모든 청년에게 생활비를 지원하는 보편적 학생 지원제도가 시행 중이다. 16세에서 24세의 모든 청년이 독립여부나 결혼여부, 자녀 유무 등에 따라 차등적인 수당을 받는다. 스웨덴은 16세 이상 20세 미만 학생들에게 학업수당을, 20세 이상 학생들에게도 학생지원금을 지급한다. 노르웨이와 핀란드도 일정 연령이 되면 학업수당을 받을 수 있다. 이들 나라에서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학업을 시도조차 못하거나 중간에 포기하는 일은 최소한 없다는 얘기다.  

강남훈 교수는 "청년배당은 지역의 공유자산으로부터 얻어지는 수익을 공동으로 향유할 권리가 청년들에게 있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며 "미래를 위한 투자이며 실질적인 기회 균등 보장 정책"이라고 주장했다.  

'기본 소득 보장'에 방점 찍힌 성남시 vs '비금전적 활동 지원' 강조하는 서울시 

성남시의 청년 배당이 '기본 소득'의 보장 차원이라면, 서울시의 청년 정책은 사실 소득 보장 그 자체보다 활동 지원에 촛점이 맞춰져 있다. 이재명 성남시장은 <프레시안>과 인터뷰에서 "서울시 청년 수당과 성남시 청년 배당이 비교 대상은 아니지만, 굳이 비슷한 예를 들자면 성남시는 노인 기초연금이고 서울시는 노인 일자리 사업"이라고 말했다. 

대상자에 비해 혜택을 받는 인원이 극소수이고, 금전적 지원보다 비금전적 지원에 공을 많이 들이고 있음은 서울시도 부인하지 않는다. 공개를 앞두고 있는 서울시의 최종 사업안을 보면, 서울에 거주하는 만 19세에서 29세 사이의 청년 가운데 3000명이 우선 대상이 된다. 서울시는 올해 7월 경 참가자 공모를 통해 청년활동지원신청서를 제출 받아, 사회·경제적 여건을 정량화 해 대상자를 선발할 계획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면접 등을 통한 상대평가보다는 청년 개인의 의지를 키워주는 방식으로 선발 과정을 만들려고 한다"고 말했다. 

대상자가 선정되면 서울시는 이들에게 최대 6개월 동안 월 50만 원씩을 지급할 계획이다. 1인당 받는 돈의 금액만 놓고 보면 300만 원으로 성남시의 청년 배당 액을 뛰어 넘는다. 여기에 더해 서울시는 단순히 돈이 아니라 선정된 청년들에게 강의, 포럼, 활동 현장 참여, 커뮤니티 지원, 멘토링 등의 다양한 비금전적 지원을 쏟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서울시의 청년수당 정책은 현재 있는 모든 청년 정책을 뛰어넘는 정책으로 단순히 활동비 지원이 아닌 희망의 마중물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성남시가 '성남사랑상품권'이라는 지역화폐로 배당금을 지급한 데 반해, 서울시는 청년미래카드로 지원금이 지급된다. 지원 사업에 참여하는 이들은 매달 개인별 활동결과를 등록해야 한다. 서울시 관계자는 "돈 50만 원을 주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6개월 프로젝트가 끝날 때, 해당 청년이 스스로 삶의 계획을 세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라고 강조했다. 그를 위해 서울시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인프라를 최대한으로 활동한다는 계획이다. 

그런 점에서 정확히 말하자면 서울시의 정책 비교 대상은 성남시의 '청년 배당'이라기 보다는 고용노동부가 시행하고 있는 '취업성공패키지'라 할 수 있다. 노동부의 '취업성공패키지'는 정부 지정 교육기관에서 직업훈련 혹은 자격증을 취득하도록 하고 있지만, 서울시의 정책은 '자기 주도적' 활동을 서울시가 돕는다는 점에서 차이점이 있다. 

거침 없는 이재명 vs 자율 선호하는 박원순…좌초 위기는 어떻게 넘을까?

재밌는 것은 서울시와 성남시의 청년 관련 정책이 묘하게도 해당 지방정부 수장의 스타일을 닮았다는 것이다. 화끈하고 돌파력이 강하며 거침 없는 이재명 시장의 스타일과 섬세하고 다양성을 강조하며 자율적 활동을 좋아하는 박원순 시장의 스타일이 두 지방정부의 청년 정책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는 자치 단체 정책 결정 과정의 특성이 반영된 자연스러운 결과일지도 모른다.  

▲이재명 성남시장과 박원순 서울시장. ⓒ프레시안



실제 최초 아이디어가 제기된 시점은 성남시가 2014년, 서울시가 2013년으로 서울시가 더 앞서지만, 서울시는 이제야 구체적인 추진안이 확정된 반면 성남시는 이미 1분기 지원금까지 다 줬다.  
  
서로 다른 성격과 모양새로 추진되는 정책이긴 하지만, 시작부터 좌초 위기에 놓여 있는 건 똑같다. 서울시의 정책은 보건복지부가 소송을 걸어 놓은 상태고, 성남시의 정책은 경기도가 소송을 제기했다. 각각 다른 소송이지만, 핵심은 같은 소송이다. 복지부와 경기도가 소를 제기한 표면적인 이유는 서울시와 성남시가 사전 협의 의무를 위반했다는 것이지만 속내는 해당 정책이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이다. 서울시와 성남시도 각각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한 상태다.  

본안 판결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예산안 집행에 대한 가처분 결정은 이르면 3월 중 나올 것이라는 예측이 많다. 4.13 총선 전에 나올 것인지 여부가 관심사다. 대법원이 복지부와 경기도의 요구를 받아들여, 가처분 신청이 인용될 경우 두 지방정부의 청년 정책은 일단 전면 중단이 불가피하다.  

심지어 정부는 지방정부가 중앙정부와 협의 없이 복지사업을 추진할 경우 지방교부세를 깎을 수 있도록 관련 시행령도 개정했다. 중앙정부가 법전과 돈줄로 청년 정책의 목을 죄고 있는 셈이다. 법원에서 어떤 판결이 나올 것 같냐는 질문에 서울시 관계자는 이런 대답을 내놓았다.  

"집권여당이 청년 정책을 중단시킬 수는 있어도 이미 심각해진 청년 문제를 중단시킬 수는 없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