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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재벌의 힘이 강화된 6가지 이유 - 샌더스 선택한 밀레니얼 세대, 한국 2030은?

일취월장7 2016. 3. 30. 10:26


한국 재벌의 힘이 강화된 6가지 이유

[백년포럼] 1997년 경제·외환 위기와 한국 경제의 진로


다음은 오는 31일 오후 7시 30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열리는 3월 백년포럼의 발제문이다.


발제자 이동걸 동국대 초빙교수는 "1979년 박정희 제거가 박정희의 경제적 실패에 기인했다면 박정희 제거 후의 체제는 '박정희 경제체제'를 바꾸는 새로운 체제로의 변화였어야 할 텐데, 불행하게도 바뀐 세상은 새로운 세상이 아니었다. 박정희를 제거한 주축세력도 없었을 뿐 아니라, 박정희 제거 후 정권을 떠맡아 개혁을 이룰 세력도 없었다. 박정희 제거는 박정희의 경제실패에 상당히 기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박정희 제거'로 끝나고 말았다"고 지적한다.  


특히 재벌 개혁의 절호의 기회였던 1997년 외환 위기가 오히려  재벌 강화의 결정적 계기가 돼버린 6가지 원인을 제시한다. 


나아가 현재의 한국경제에 대해 30~50개의 재벌 영주들이 지배하는 봉건적 자본주의 경제라고 비판하면서, 한국경제가 민주적 자본주의로 거듭 나기 위한 7가지 대안을 제시한다. 


3월 백년 포럼은 오는 31일(오후 7시 30분~9시 30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열리며 유철규 성공회대 교수가 토론을 맡는다.  


극심한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해소에 관심을 가진  시민들의 많은 참여를 바란다.


제6회 백년포럼


주제: 1997년 경제·외환 위기와 한국경제의 진로'

때: 3월 31일(목요일) 오후 7시 30분~9시 30분

곳: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 211호

발제: 이동걸(동국대학교 초빙교수)

토론: 유철규(성공회대학교 교수)

주최: 다른백년 창립준비모임


주관: 백년포럼 기획위원회


1. 서: 한국경제는 '아직도' 구체제의 틀을 벗지 못했다


1997년 경제·외환 위기라는 대변혁의 계기를 맞아 한국경제는 광범위한 변화를 경험했다. 수많은 법과 제도를 개혁함으로써 한국경제가 제도적으로 정비·개선되는 성과가 있었고 다수의 부실재벌이 정리되었다. 하지만, 경제체제의 틀을 바꾸고 경제운영 패러다임을 개혁하는 데는 실패했다. 한국경제는 박정희식 개발독재체제 아래서 중심축으로 성장·비대해진 재벌이 지금도 여전히 - 물론, 정권의 성향에 따라 그 정도는 달리 하겠지만 - 중심에 서 있는 구 체제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재벌 의존적 경제운영의 패러다임도 변하지 않았다. 

1997년 경제·외환 위기를 맞아 많은 외국 전문가들은 우리 정부에게 "부실 재벌의 질서 있는 파산처리(orderly bankruptcy of insolvent chaebols)"를 요구했다. 정권과 재벌의 유착을 끊고 경제적 합리성에 근거하여 부실구조조정을 하고 경제를 운영한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외국 투자가들에게 한국정부와 한국경제에 대한 신뢰를 주라는 것이었다. 동시에 국내적으로도 구조조정의 혼란을 조기에 벗어나 경제를 안정기조로 회복시키라는 것이었다. "재벌도 망할 수 있다", 그리고 "은행도 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시장규율을 강화하고 기업과 은행에게는 이제 정부가 도와주지 않을 것이니 합리적 경영을 하라는 강력한 시그널을 보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 이상이었어야 했다. 1997년 IMF구제금융 사태가 발생한 대증적 이유는 김영삼 정부의 과욕(1인당 국민소득 1만불 달성, 선진국클럽 가입)과 실정(무역적자 누적 및 환율 고평가 유지, 무분별한 시장개방 등), 그리고 외환사태를 촉발한 한보, 삼미, 기아 등 부실재벌의 연쇄 도산에 있었겠지만, 1997년 사태의 본질은 단순한 외환 위기가 아니라 '재벌'로 대변되는 우리 경제의 체제적인 문제, 즉 경제위기였다. 박정희 정권 이래 누적된 재벌경제 체제의 한계와 그로 인한 병증이 폭발한 것이 1997년 경제·외환 위기였다. 그로 인해 국가경제와 국민들이 엄청난 고통을 당한 국가적인 비극적 사태였지만 동시에 우리 경제의 고질병을 고치고 우리 경제 시스템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여 정상화할 수 있는 – 정상화의 의미는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겠지만 –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국내외의 개혁적 전문가들이 이를 두고 불행 중에도 "한국 역사에 다시 없을 재벌개혁의 절호의 기회(once-in-a-lifetime chance of chaebol reform in Korean history)"라고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국경제는 여전히 재벌중심 경제체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는 재벌의 확장을 억제하는 정도의 성과가 있기는 했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는 다시 재벌의 고삐가 풀리고 무제한 확장세를 보였다. 재벌은 위기 이후 힘을 더욱 키웠다. 재벌의 영향력은 국가·사회 전반으로 확대되었고 그 힘도 훨씬 더 강해졌다. 우리 경제의 재벌 의존도는 더욱 커졌다. 한국경제는 1997년의 재벌개혁 호기를 활용하지 못했다. 오히려 경제·외환 위기를 겪은 후, 특히 최근에 들어 더욱 더 재벌체제가 강화되었다.

우리 경제가 재벌체제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 경제가 재벌체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 경제가 가야 하는, 가고자 하는 바람직한 경제체제는 어떤 것인가. 그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2. 경제체제(재벌체제) 개혁을 이루지 못한 이유  

(1) 개혁의 구심점과 주축세력이 없었다(그리고 지금도 없다)

1970년대 후반 박정희 정권의 말기에 무리한 중화학공업화 정책이 실패하면서 한국경제는 도산의 위기에 직면했었다. 중화학공업은 과잉투자와 중복투자로 부실화되었고 외채는 누적되었다. 중소기업은 고사 지경에 내몰렸고 때마침 제2차 오일쇼크마저 겹치면서 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으며 민생은 점점 더 피폐해졌다. 1978년 12월의 10대 총선에서 여당이 패배한 것이나, 다음 해 박정희 말년 발생한 YH사건, 부마항쟁도 이러한 경제적 실패와 무관치 않다. 부마항쟁의 경우 대학생들의 민주화 투쟁에 부산·마산의 중소상공인과 시장상인이 가세하면서 폭발력이 더욱 커졌다. 부마항쟁은 군사력을 동원한 유혈 진압과 위수령 발동으로 진압되기는 했지만 10.26사태의 도화선이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박정희 사살로 귀결된 이러한 일련의 사태가 모두 박정희의 경제실패에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박정희 제거가 박정희의 경제적 실패에 기인했다면 박정희 제거 후의 체제는 '박정희 경제체제'를 바꾸는 새로운 체제로의 변화였어야 할 텐데, 불행하게도 바뀐 세상은 새로운 세상이 아니었다. 박정희를 제거한 주축세력도 없었을 뿐 아니라, 박정희 제거 후 정권을 떠맡아 개혁을 이룰 세력도 없었다. 박정희 제거는 박정희의 경제실패에 상당히 기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박정희 제거'로 끝나고 말았다. 

박정희를 승계한 전두환 정권은 구체제의 연속이었다. 변화가 있었다면 박정희의 중화학공업정책 실패를 목격한 전두환 정권이 정책기조를 안정화로 급히 바꾸었고 중화학공업 구조조정을 실시하였다는 것뿐이었다. 그 결과 우리 경제가 파국에 빠지지 않도록 일정 부분 기여한 공로는 인정되지만, 전두환 정권의 업적은 대부분 경제적인 행운의 결과였다. 때마침 불어온 3저(유가, 금리, 환율)로 우리 경제는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을 누리게 되었으며 물가가 안정되었고 외채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전두환이 "내가 경제 대통령이다", "내가 물가안정을 이룬 최초의 대통령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표면적인 성과는 나무랄 데 없었다.  

그러나 1980년대 초중반 전두환 정권 아래서 재벌은 더욱 비대해졌고 재벌이 우리 경제에 미치는 폐해는 점점 더 심각해졌다. 재벌이 문제가 되자 정부는 1986년말 공정거래법을 개정하여 '경제력집중 억제' 조항을 신설하는 등 재벌문제를 인식, 대처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대처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재벌문제가 심해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당시 재벌 문제가 우리 경제를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3저 호황 등으로 당시의 전반적인 경제상황이 대체로 좋은 편이어서 경제적 불만 또는 불안요인이 큰 정치적 변혁을 유발할 정도는 전혀 아니었다.

따라서 첫 번째 대변혁기인 1987년 체제에서 우리나라에 정치민주화 세력은 있었으나 경제민주화 세력이 없었다. 1987년 6월의 민주항쟁은 정치적 민주화 항쟁에 한정된 정치적 사건이었다. 경제적 이슈가 변화의 동인이 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경제민주화 의제도 없었고 노동자, 서민, 중소기업 등 경제적 약자층의 이익을 적극 수렴·대변할 구심점과 주축세력도 없었다. 

이후 1997년까지 노태우-김영삼 정권에서도 경제개혁을 주도적·지속적으로 추진할 세력(특히 정당을 형성한 정치세력)이 형성되지 못했다. 1987년 이후 정치적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민노총, 전교조 등 단체가 만들어져 적극 활동하기 시작했고, 경실련, 참여연대, 환경관련 단체 등 많은 NGO가 설립되어 각종 진보적 경제이슈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7년 민주화 이후 활동하기 시작한 단체들의 구심점이 될 만한 정치세력, 이들 단체들이 대변하는 경제적 이슈를 집약하여 정치의제화 하여 밀고 나갈 정당세력이 형성되지 못했다. 진보적 성격의 야당도 – 상대적인 의미이기는 하지만 - 이러한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지 못했다. 

1997년 경제·외환 위기가 발생하고 재벌 책임론이 대두되면서 한동안 재벌들은 개혁조치에 대한 반발도 못하면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김대중 정부 초기에 부분적으로 재벌개혁에 상당한 성과를 올렸고 제도적으로 정비·개선한 것도 많지만, 재벌개혁의 절호의 기회를 살려 체제를 개혁하는 데는 못 미쳤다. IMF·세계은행이 요구한 개혁 청사진에도 불구하고 많은 개혁조치들이 단편적으로 실시되었고 또 부분적으로 후퇴하는 경우도 많았다. 개혁을 조직적·체계적·정치적으로 꾸준히 밀어붙일 수 있는 세력, 정부와 정치권 내에 있는 재벌 비호세력을 압도할 만한 세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김대중 정부 내부에서, 그리고 노무현 정부 내부에서도 친재벌 관료·정치가들의 반발과 사보타지 등이 만연했다. 개혁파 대 친재벌파 사이의 다툼·알력이 심했고, 견제·우회·정책 번복·선수치기 등으로 정책이 엎치락뒤치락하며 개혁이 좌절되거나 빗나가는 경우도 많았다.

(2) 1987년 민주화 세력이 분열하면서 한국 사회의 보수화가 더욱 심해졌다

1987년 정치민주화를 쟁취한 이후 10년 동안 경제체제 개혁의 관점에서 보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다. 오히려 체제위험만 높여 우리 경제를 1997년 경제·외환 위기로 몰아넣은 '잃어버린 10년의 기회' 였다.  

6월 민주항쟁의 승리 이후 정치민주화 세력이 분열하면서, 그리고 그 이후 김영삼이 삼당 합당을 하고 집권에 성공하면서 우리나라의 정치·경제지형은 극도로 우편향 성격의 보수적 기득권 집단화하였다. 특히,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던 부산·경남지역을 보수지역화하고 소위 대구·경북(TK) 세력화함으로써 그 이후 – 오늘날까지 – 정치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문제에서도 재벌개혁을 포함한 진보적인 의제를 추진하기 더욱 어려워졌다. 우리나라의 정치에서 개혁을 추진할 진보적 성향의 정당, 또는 정치세력이 출현하기 어려운 환경이 조성된 것도 이러한 정치적 세력판도의 변화에 상당히 기인한다.


1987년 이후 집권한 보수적인 노태우-김영삼 정권은 재벌개혁에 관해 한 것이 없었다. 노태우 정권의 개혁은 주로 부동산 관련조치였고, 김영삼 정권의 개혁은 금융실명제와 금리자유화를 제외하면 대부분 OECD 가입을 위해 서둘러 실시한 시장개방과 규제완화였다. 재벌의 비업무용 부동산 매각처분을 명령한 노태우 정권의 1990년 '5.8 부동산조치'를 두고 당시에는 "역사상 가장 강도 높은 재벌 규제"라고 평가하기도 했지만 이 조치는 재벌체제와 경제체제 개혁을 위해 실시한 조치는 아니다.  

노태우-김영삼 정권에서는 재벌문제를 우리 경제의 핵심문제로 보지 않았다. 재벌로 인한 폐해 또는 부작용은 시정하면 되는 문제 정도로 가볍게 보았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쟁취한 새로운 개정 헌법에 경제민주화 조항(119조 2항)이 신설되었지만 이 조항은 그 이후 긴 동면에 들어가 2012년까지 역할을 한 게 하나도 없었다. 전두환 정권 때부터 본격적으로 누적되기 시작한 재벌문제를 보수적인 노태우-김영삼 정권 10년간 방치했고 재벌문제는 점점 더 심각해졌다.  

뿐만 아니라, 보수적인 정치가와 관료들은 재벌집단을 활용해야 하는 중요한 자산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했다. 그래서 오히려 부실화를 눈감아주고 방치했으며, 재벌문제를 체제적인 문제로 보기보다는 재벌이 부실해질 때 생기는 문제, 즉 부실재벌의 문제로 좁게 보는 경향이 강했다. 차이는 있지만 상대적으로 진보·개혁성향이 강한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도 그러한 경향을 보였다. 투자, 고용, 수출, 경제성장을 위해 재벌들을 이용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필요성으로 인해 재벌과 타협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물론 김대중 정부-노무현 정부에서 재벌의 경제력 집중이 억제된 반면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는 고삐가 풀려 다시 급팽창했다는 등 정권에 따라 재벌정책의 성과에 많은 차이를 보였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도 1997년 경제·외환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부실계열사 지원 물꼬를 터준다는 명분으로 출자총액제한제도를 폐지했고, 부실재벌의 처리를 신속하기 위해 다른 생존재벌을 활용했으며, 재벌 간에 빅딜을 했다. 그 결과 생존재벌은 더욱 비대해지고 강력해지는 부작용을 낳았다. 즉 김대중 정부조차 재벌개혁을 부실재벌 처리와 재발 방지를 위한 조치 정도로 이해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재벌개혁의 목적이 우리 경제의 체질 개선에 있다고 생각하지는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재벌을 보는 시각이 국가운영을 위해 현실적 필요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필요악'이라고 보았는지, 또는 재벌을 국정운영의 '파트너'로 보았는지, 또는 재벌이 필요로 하고 원하는 것을 정부가 솔선해서 다 해결해주는 '재벌 하수인' 역할을 자임하고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것은 정권의 속성에 따라 다르겠지만 모든 정부가 국정운영에 재벌을 적극 참여시켰다. 

(3) 관치의 문제(관에 의한 시장왜곡과 부정부패)가 문제의 핵심이라고 봤다

1980년대 들어 재벌의 힘이 빠르게 신장되기는 했지만 적어도 1987년까지는 재벌의 힘보다 관의 힘(정치, 독재 권력자의 힘)이 절대적으로 더 강했다. 그러나 1987년 민주화 이후 상황이 많이 변하기 시작했다. 경제가 점점 더 복잡·다양화해지면서 정부의 간섭이 역효과를 낳은 경우가 많아졌고, 재벌의 시장지배력이 강화되면서 자신감이 생긴 재벌들은 정부의 개입에 불편함을 느끼면서 정부개입의 축소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90년대 초중반 산업정책의 화두는 정부 개입의 근거인 '시장의 실패'에서 정부개입의 부작용을 지적하는 '정부의 실패'로 옮겨갔다. 한편, 민주화와 함께 정부도 노골적인 산업정책적 개입에 부담을 느끼고 자제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의 개입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은 아니다. 관의 산업정책적 개입은 완전히 없어지진 않았다 하더라도 상당히 약화되었지만, 관치금융은 여전히 강력했다. 각종 인허가권과 감독권, 그리고 인사권을 틀어쥔 관은 금융부문에 관의 명령을 하달했고, 오랜 기간 동안 독립성을 잃고 정부의 지시에 따라 순종적으로 움직여오던 금융부문, 특히 은행은 공식적·비공식적으로 하달된 관의 명령을 열심히 따랐다. 관이 금융자금의 조달과 배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재벌에게도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금융자금의 조달과 배분이 심각하게 왜곡되었음은 물론이려니와 부정부패와 연루된 부실화도 심각했다. 1997년 경제·외환 위기의 기폭제가 된 한보그룹의 부도 이후 정태수 회장의 '검은 돈 로비'가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이는 금융자금 배분을 둘러싼 정경유착과 관의 비호, 그리고 그로 인한 부정부패가 얼마나 심각한지 여실히 보여줬다. 


▲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 ⓒ연합뉴스


따라서 당시 우리 경제는 박정희 집권 이래 30여 년 지속된 관치경제(특히, 관치금융)와 그로 인한 정경유착과 부정부패, 그리고 시장왜곡의 '강력한 전통과 관습'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던 심각한 상황이었다. 재벌문제가 새로이 대두되고 있었지만 여전히 관치를 문제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경제가 한 단계 더 성숙되려면 관치를 해소하여 부정부패를 없애고 시장왜곡을 시정해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한 번도 시장경제가 정상적으로 작동한 경험이 없던 우리 경제에 시장경제의 원리를 도입하여 시장왜곡으로 인해 갈수록 커지는 비효율과 부작용을 해소해야 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1인 독재체제 아래서 강력한 관치로 재벌을 이끌어온 우리나라의 경제환경에 오랫동안 익숙해진 나머지 많은 사람들이 독재자 1인만 제거되고, 그 아래 관치만 해결하면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우리나라에 잘 정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쉽게 생각했고, 그리고 자본주의 시장경제만 충실히 정착되면 재벌문제도 상당부분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들을 하였다. 물론 시장경제가 정착되더라도 재벌에 대한 적절한 규제가 필요하고 또 적절한 규제를 통해 재벌을 통제할 수 있어야 시장경제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 그 점을 인식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관치를 해소함과 동시에 필요한 재벌규제를 도입하거나 유지하여 재벌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쉽게 생각했던 경향이 강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급속히 늘어나기 시작한 시장만능주의자들은 – 당시 신조류가 되기 시작한 신자유주의에 맹목적으로 매료된 친재벌적·보수적 관료와 학자들 – 시장의 능력을 맹신하여 관치철폐와 함께 완전한 재벌규제 철폐를 주장했다. 그리고 재벌의 반격도 예상보다 강력했다. 

(4) 국가권력의 공백과 재벌권력의 득세 

1997년 경제위기 이후 생존재벌 중심으로 경제·산업구조가 재편되면서 생존재벌, 특히 상위재벌들의 규모와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더욱 커졌으며, 그에 비례하여 영향력도 커졌다. 자산에는 내재하는 힘이 있어 재벌의 자산규모가 커질수록 영향력이 커지고 영향력 행사의 반경도 넓어진다. 뿐만 아니라 1997년 위기를 경험한 재벌들은 생존의 학습 효과를 통해 더욱 세련되고 조직적으로 행동했다. 즉, 재벌들은 재력뿐만 아니라 축적된 노하우와 세련된 관리능력(관료, 정치인, 언론, 지식인 등 우호세력), 조직력과 두뇌집단(재벌 싱크탱크) 등을 구비함으로써 더욱 강력한 집단이 되었다.

관치가 후퇴하면서 생긴 국가 권력의 공백, 규제의 공백을 재벌의 자본력이 차지했고, '돈의 힘'으로 관료집단·보수언론·보수지식인 등을 그에 복무하도록 하는 기득권 연합세력이 형성되었다. 거대재벌은 경제적인 위협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위협, 즉 민주주의에의 위협이 되었다.  

관료들이 퇴직 후의 잠재적 고용주인 재벌의 눈치를 보는 등 거대재벌이 관료를 압도하기 시작했고, 법·조세체계가 재벌에게 유리하게 만들어지는 규정 변용(rule-bending)으로 국가운영이 점점 더 재벌편익 위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5) 재벌에 대한 국민정서 

우리 사회에는 재벌에 대한 애증의 국민정서도 강했다. 재벌의 폐해를 우려하고 비난하면서, 동시에 그래도 재벌이 우리 경제를 성장시켰다는 재벌신화 맹신주의에 빠져있었다. 그래도 재벌이 우리를 먹여 살려준다는 재벌의존적 사고방식에 젖어있었다. 그래도 '오너(?)'가 있어야 기업이 돌아간다는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을 떨치지 못했다. 부실재벌 총수에 대한 온정주의적 동정심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정서가 재벌개혁에 대한 두려움 내지는 걸림돌이 되었다.  

재벌개혁이 일관되게 지속적으로 추진되어 성과를 보이기 위해서는 재벌개혁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공감대를 형성하기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유지하기도 쉽지 않다. 재벌개혁은 소수 개혁집단의 외로운 투쟁이 되는 경우가 다반사이고, 종합적·체계적으로 추진하기도 쉽지 않다.  

1997년 경제·외환 위기는 재벌개혁에 대한 광범위한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된 최초의 기회였다. 국가의 경제적 파산이라는 사건을 통해 재벌의 폐해를 국민 모두가 절절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재벌의 폐해가 극심하더라도 국민들이 광범위하게 직접 피부로 느끼지 못하면 재벌개혁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기 어렵다. 비록 이성적으로는 재벌개혁의 필요성에 동의하더라도 재벌개혁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불편과 비용을 감수하면서까지 강력하게 재벌개혁을 지지하지는 않는다.

1997년 위기를 경험한 후 1∼2년 동안 재벌개혁에 대한 지지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 개혁에 대한 피로감과 경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려면 재벌이 필요하다는 재벌의존적 사고가 되살아나 재벌개혁의 지지는 급속히 감퇴하였다. 물론 그 배후에는 재벌에 대한 '애'의 정서를 강조하는 재벌들의 언론 플레이, 보수 언론과 보수 학자·지식인들의 여론몰이가 크게 작용했다.  

(6) '잃을 게 많은 자, 얻을 게 많은 자'가 열심히 싸운다

'분산된 다수의 큰 이익(국민의 이익)'과 '집중된 소수의 작은 이익(재벌의 이익)'이 충돌할 때 후자가 승리하는 현실적인 인센티브 구조로 인해 대부분의 첨예한 재벌개혁 이슈에서 재벌들이 항상 매우 열심히 싸우고,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싸우고, 그리고 항상 이긴다. 게다가 재벌은 풍부한 자본력, 조직력, 인력(즉, 전담인력)을 갖고 있어 매우 유리한 입장이다. 장기적으로 소수 재벌집단의 이해가 관철되기 쉬운 여건이다.

아무리 개혁의 성과가 크더라도 국민 개개인에게 돌아가는 이익은 아주 작으며, 아무리 재벌의 폐해가 크더라도 국민 개개인이 나누어 부담하는 직접적인 손해는 매우 작으므로 대다수 국민들은 침묵한다. 침묵하는 다수는 항상 재벌 편이거나 재벌 편으로 간주되었고, 재벌개혁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와 지지를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렵다. 침묵하는 다수를 대신해서 싸우는 개혁파는 개인적 희생을 감수하며 대의를 위해서 싸우고, 재벌과 친재벌파는 이익을 위해서 싸운다. 후자가 항상 다수이고 유리하다.  

3. 우리 경제는 '민주적 자본주의'를 지향해야 한다 

1997년 경제·외환 위기를 겪으면서 재벌체제가 생존재벌들을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재벌들은 더욱 거대해지고 영향력도 커졌다. 개개 재벌의 조직력·영향력(정치적, 경제적)·관리능력이 강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재벌들이 전체 집단으로서 체계적·조직적으로 일사불란한 행동을 하는 등 집합 세력화가 강화되었고, 외부에 친재벌·보수 기득권 연합세력을 형성하고 재벌이익의 적극적 대변층을 형성하는 등 외곽 지원층도 구축하였다. 재벌문제는 개개 재벌들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재벌 전체의 문제 즉, 재벌집단의 문제가 되었고, 재벌체제가 우리 경제 내에 시스템으로 구조화된 재벌집단 시스템의 문제가 되었다.

재벌의 문제도 변하였다. 과거에는 방만한 문어발 확장과 무분별한 차입경영, 그로 인한 부실화 위험이 주로 문제였으나, 1997년 이후에는 경제력 집중과 지배구조, 그리고 세습구조가 주요 문제가 되었다. 세습자금 조달을 위한 일감몰아주기가 만연했고, 폐지-부활의 곡절을 겪던 출자총액제한제도가 이명박 정권 때 결국 폐지됨으로써 순환출자를 통한 총수일가의 지배권이 확장되고 오너 세습구조가 강화되었다.

과거 한국경제는 사장 박정희가 전권을 행사하는 '한국주식회사'라고 묘사될 정도로 강력한 형태의 '독재적' 족벌자본주의체제였다. 1997년 위기 이후 재벌개혁과 재벌구조조정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경제체제의 큰 틀은 변하지 않은 채 '오너세습' 족벌자본주의체제로 성격만 변했을 뿐이다. 재벌 패밀리(즉, 오너)들이 대를 이어 세습하며 집단적으로 한국경제에 대해 경영권을 행사는 과두적 지배체제가 되었다.

이렇게 구조화된 '오너세습' 족벌자본주의는 단순히 '전근대적' 자본주의가 아니라 다름 아닌 '봉건적' 자본주의다. 우리나라에는 재벌이라 불리는 30∼50명의 봉건영주가 있고 봉건영주들은 자본이라는 영토 안에서 절대적인 지배권력을 행사하면서 자신의 자본영토 안에 있는 수많은 하청 중소기업들을 다스리고 있다. 재벌 영주의 자본 영토에 종속된 중소기업들은 영주의 지배권을 벗어날 수 없다. 영주들은 집합적으로 국가경제의 운영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국가는 영주들의 말을 무시하거나 거스를 수 없으며 영주들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할 수도 없다. 영주들은 대를 이어 세습하고, 영주를 정점으로 '자본에 근거한' 신(新)신분사회를 형성한다. 

1997년 위기 이후 우리 경제에는 대기업에게 모든 혜택이 우선적으로 돌아가는 낙수경제(trickle-down economy) 구조와 중소 하청기업의 희생 위에 대기업이 성장하는 빨대경제(trickle-up) 구조가 고착되었다. 우리 산업생태계는 중소기업이 중견기업·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없는 불모지가 되었다. 우리 경제는 동력을 잃고 성장잠재력이 저하되었다. 양극화가 다방면에서 심해졌고, 계층이동이 어려워지면서 신분이 고착되었다. 이는 90년대 이래 세계적으로 퍼진 신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은 탓도 있지만 우리 경제의 경우는 시장만능주의 사고에 기초한 '봉건적' 자본주의가 낳은 결과다. 

재벌 하청에 길들여지고, 재벌 봉건주의에 구조적으로 예속된 하청 중소기업들은 원청-하청 간의 불평등, '갑질' 문제 등에 불평·불만을 간헐적으로 토해내기는 하지만 "대기업이 돌아가야 중소기업도 산다"고 하며 재벌들의 입노릇해주기 바쁘다. 일부 하청 중소기업들은 재벌 대기업에 예속되고 길들여져 '노예 근성'을 갖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중소기업들은 그들의 생존을 재벌 대기업에 볼모로 잡혀있기 때문이다. 우리 경제의 재벌 의존도가 커지면서 우리 경제는 다방면에서 재벌에게 볼모로 잡혀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을 위해 투표하고, 불평등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이 특혜를 받은 사람들을 위해 투표하는 '계급배반투표'가 심해 재벌문제, 경제적 불평등 문제 등이 정치를 통해 해결되지도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과 불평등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을 대변하는 마땅한 정당이 없는 것이 한 이유이고, 재벌을 중심축으로 하는 보수 기득권연합세력이 체계적·조직적으로 여론몰이와 세뇌 작업을 하는 것이 또 다른 이유다.

이와 같이 우리 경제는 많은 문제에 시달리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 경제체제를 바꿔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바람직한 체제는 어떤 것인가. 재벌체제의 비효율성을 제거하고 우리 경제에 구조화된 봉건적 요소를 척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민주적 자본주의(democratic capitalism)' 체제다. 자본주의의 역할(경제적 파이의 확대)과 민주주의의 역할(파이의 분배 등)이 잘 공존·조화하는 체제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민주적으로 통제·관리되어야 한다. 즉, 정치가 경제를 견제해야 한다. 다양한 국민들의 이익과 생각이 균형 있게 정치에 반영됨으로써 특정인이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한다거나 불공정하게 너무 많은 과실을 독점하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 그래야만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국민들에게 제대로 봉사하게 된다.

우리 경제의 대안적 체제로 케인즈적 복지국가모델, 사회민주주의, 공유경제, 조정시장경제, 이해당사자 자본주의, 포용적 성장, 공정한 경제 등 다양한 모델들이 거론되고 있다. 이 모델들은 지금 우리 경제가 필요로 하는 다양한 경제적 특성들을 반영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모델을 선택할 것인가, 그리고 그것들을 우리 실정에 맞게 어떻게 조합하고 조정할 것인가는 자본주의 시장체제 안에서 국민들의 다양한 필요와 요구를 균형 있게 반영하여 민주적으로 자연스럽게 결정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국민들의 욕구와 의사가 균형 있게 시장경제에 반영될 수 있게 정치가 역할을 하는 경제가 민주적 자본주의 경제다.

4. 한국경제의 진로 전환: 경제민주화 

경제민주화, 즉 한국경제의 진로를 '봉건적 자본주의'에서 '민주적 자본주의'로 전환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 핵심은 재벌 개혁이고, 재벌체제(즉, 재벌중심 경제체제)의 개혁인데 우리 경제의 지난 반세기 역사에서 재벌개혁을 할 수 있는 기회는 단 두 번밖에 없었고 두 번다 실패했음을 보면 한국경제의 진로를 바꾸는 일도 결코 성공을 보장할 수 없다.  

이미 민주주의에 위협이 될 정도로 거대한 정치적·경제적 힘을 축적한 거대재벌들이 우리 경제가 민주적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것을 막을 것이다. 그리고 재벌 패밀리들의 집단지배가 구조화된 경제체제는 과거 1인의 명령에 의해서 움직이던 경제체제보다 개혁하기 더 어렵다. 왜냐하면 1인만 제거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구조화된 시스템을 바꿔야하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의 진로를 바꾸는 지난한 과업을 성공적으로 이루려면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1997년 위기 이후 재벌개혁의 경험, 그리고 2012년 미완으로 끝난 경제민주화 시도 경험에서 얻은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준비 안 된 기회는 기회가 아니다. 재벌개혁의 호기가 왔을 때 개혁을 성공시키려면 미리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둘째, 개혁은 일관되게, 그리고 꾸준히 지속적으로 장기간 추진해야 한다. 재벌개혁은 재벌의 반격으로 종종 다시 후퇴하는 '재벌개혁 요요현상'이 심하고, 요요현상이 반복될수록 재벌개혁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셋째, 재벌 문제는 시스템화·네트워크화 했으므로 개혁은 체제적으로(즉, 다방면에서 제도적·체계적으로 동시에) 접근해야 한다. 단편적인 개혁정책은 성공 가능성이 거의 없다. 재벌문제와 직접 관련되지 않은 것이라도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경제 정의를 세우는 일, 그리고 공정한 사회 풍토를 조성하는 일들을 차근차근 해나가야 재벌개혁이 성공할 확률이 높아진다. 

넷째, 이를 위해서는 개혁의 구심점·추진주체가 될 주체세력을 키워야 한다. 개혁 주체세력이 정당에 베이스를 두거나 또는 정당으로 승화하여 정치 세력화하면 더욱 좋다. 사회경제적 약자층을 대변하는 단체 또는 정당이 활동적으로 약자층의 이익을 위해 일하면 '계급배반투표'가 줄어들어 개혁이 성공할 확률이 높아진다. 평시에도 재벌의 견제세력 역할을 할 수 있다. 

다섯째, 국가와 정치의 역할이 중요하다. 정치와 경제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정치와 국가운영에 다양한 계층, 다양한 집단의 이해와 의사가 균형 있게 반영되도록, 그리고 특정집단이 정치와 경제를 독점하지 못하도록 비례대표제 확대 등 정치개혁을 해야 한다.

여섯째, 진보적 개혁의 지원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돈의 힘'도 매우 중요하다. 개혁을 추진할 인재의 교육 및 육성, 연구 인력의 교육 및 양성, 연구 지원, 싱크탱크의 설립, 국민들에 대한 교육 및 홍보를 강화해야 한다. 재벌과 보수집단은 보수의제에 대한 연구, 홍보, 친재벌 사상의 교육·선전 등에 엄청난 돈과 인력을 투입하고 있다. 재벌만큼의 재력이 없는 진보세력이 재벌에 필적한 만한 투자를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진보주의 운동의 발전을 위해 최대한 투자하려 노력해야 한다. 

일곱째, 경제학이 다시 태어나야 한다. 경제학은 기술이 아니다. 순수과학인 척 행동하는 위선을 끝내고 정치경제학으로 부활해야 한다. 



샌더스 선택한 밀레니얼 세대, 한국 2030은?

[박영철-전희경의 국제 경제 읽기] 밀레니얼 세대


미국의 젊은 밀레니얼(Millennials=1980~2000년생) 세대가 자칭 민주적 사회주의자 민주당 버니 샌더스 후보의 '정치 혁명을 통한 소득 불평등 해소' 메시지에 열광하고 있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 젊은이들은 자신을 '4 공포' 세대로 규정하는데, 이 '4 공포'는 불완전 고용, 과도한 부채, 비싼 의료 보험료 그리고 삶의 꿈인 결혼과 내 집 마련의 장기간 연기와 관련된 '불안감'을 의미한다. 이들은 이런 암울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북유럽형의 민주 사회주의' 정부처럼 소득 양극화 해소와 무상 대학 교육과 같은 광범한 복지 정책을 주창하는 샌더스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밀레니얼 세대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샌더스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 대의원을 뽑는 경선 일정이 반 조금 넘은 현시점에서 힐러리 클린턴에게 크게 고전하고 있다. 샌더스가 민주당 전당 대회에 참가하는 '대의원 수의 덫'에 걸려 있다. 즉 샌더스가 확보한 대의원 수가 후보 지명에 필요한 2383명에 크게 못 미치고 있어, 앞으로 남은 모든 경선에서 평균 66.6%의 득표율로 압승해야만 승리할 수 있는 어려운 처지에 있다.

샌더스가 7월 말에 있을 민주당 전당 대회에서 후보 지명을 따낼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다음 세 가지 사항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밀레니얼 세대는 과연 누구인가? 이들은 지난 베이비부머(Baby Boomer) 세대와 X세대와 어떻게 다른가? 특히 경제와 정치 현안 문제에 대한 이들의 성향은 어떤가? 이들은 샌더스가 주장하는 '민주적 사회주의'가 자신이 추구하는 '미국의 꿈(The American Dream)'과 같다고 믿는가? 

샌더스의 '민주적 사회주의' 경제 모델의 핵심은 무엇인가? 최근 한국 정계와 재계에서 뜨겁게 논의되는 경제 민주화나 동반 성장과 비슷한 개념인가?

밀레니얼은 실제로 최근 경선에서 '투표'로 샌더스를 지지하고 있는가? 이들은 얼마나 열성적으로 현장 투표하고 있는가? 샌더스의 꺼져가는 불씨를 살려낼 것인가?

위 문제를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하여 박영철 전 원광대학교 교수와 인터뷰를 했다.

박영철 전 교수는 벨기에 루뱅 대학교 경제학과에서 국제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세계은행(World Bank)에서 경제 분석가(Country Economist and Project Analyst)로 15년(1974~1988년)간 근무했다. 그 이후 원광대학교 교수(경제학부 국제경제학)를 역임했고, 2010년 은퇴 후 미국에 거주하며 개인 컨설팅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전희경 :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최근까지의 미국은 1945~1964년에 태어난 베이비부머 세대, 1965~1979년 사이에 태어난 X세대, 그리고 1980~2000년 사이에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 세 세대가 각기 특유의 정치 및 경제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봅니다. 이들 세대별 특성을 간단히 설명해 주십시오. 

▲ 미국의 각 세대별 특성.



박영철 : 매우 적절한 질문입니다. 위 표와 차트를 보면서 주로 밀레니얼 세대를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우선 강조하고 싶은 점은 미국의 장래는 1980~2000년 출생자인 밀레니얼이 좌우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2015년 현재 이들은 9200만 명으로 미국 총인구의 29%를 차지합니다. 따라서 이 세대가 향후 미국 사회의 주역을 담당하게 되어, 미국의 정치 경제 사회의 진로를 결정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목할 사항은 밀레니얼의 인종 배분이 전과는 크게 바뀐다는 사실입니다. 백인의 비중이 현저히 낮아지고(57%), 소수 민족, 그 중에서도 히스패닉의 비중(21%)이 흑인 비중(13%) 보다 크게 높습니다. 

둘째, 밀레니얼 세대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이전 세대와 확연히 다른 특성이 있습니다. 이들은 소위 '미국의 황금(경제 성장률이 3.5%를 넘어선)' 시절을 체험하지 못하고, 오히려 2008년 세계 금융 위기와 대침체(Great Depression), 그에 따른 높은 실업률과 임금 정체 내지 감소라는 경제적 시련을 맛본 세대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소비 성향은 크게 절제되고, 개인 저축률은 2012년 12월에 유례없이 10.5%까지 치솟고(그 이후 평균 5%대에 머물고), 과도한 학자금 및 신용카드 빚에 쪼들립니다. 평균 임금 수준이 낮아 의료 보험료 지불에도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래서 장래 이들의 소비 형태가 이전 세대와 다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소비'가 GDP의 68% 이상을 차지하는 미국 경제의 장기적인 측면에서 보면 일종의 '빨간 불'인 셈입니다.

셋째, 정치 및 사회적인 이슈에 관하여 이들은 매우 진보적인 의식을 보입니다. 정당 가입보다는 '무당층'을 선호하고, 공화당(17%)보다는 민주당(29%)을 지지합니다. 특히 지난 세대와는 달리 경제 정책에 대한 정부의 강력한 개입과 광범한 복지 정책을 지지합니다. 동성애와 마리화나 합법화에 동조하고 약 30%가 무종교(None's)를 선언합니다.

전희경 : 오늘 인터뷰의 핵심은 밀레니얼 세대의 정치 성향 검토입니다. 구체적으로 이들이 왜 샌더스 후보의 '정치 혁명' 메시지에 열광하는지 그 이유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선 샌더스의 '민주적 사회주의'가 무엇인지를 자세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경제 민주화', '동반 성장' 그리고 '포괄적 성장'에 관한 논의가 활발합니다. 한국 언론에서는 샌더스의 '민주적 사회주의'를 이들에 비유하던데, 교수님 의견은 어떠신지요?

박영철 : 전혀 아니라고 봅니다. 현재 한국에서 논의되는 화두는 샌더스의 민주적 사회주의 경제의 근처에도 가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샌더스의 '민주적 사회주의'를 간략히 정의하면 '정부의 강력한 개입을 통하여 시장 경제의 실패(Market Failures)인 소득의 양극화를 해소하고 공정한 소득 분배를 성취한다'입니다. 즉 정부 경제 정책의 최종 목적은 경제적 공평성(Economic Equality)과 경제적 공정성(Economic Fairness)을 이룩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북유럽식 사회적 시장 경제'와 비슷한 경제 모델을 도입한다는 얘기입니다. 

전희경 : 많은 경제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북유럽식 사회적 시장 경제' 모델을 부러워하고 칭찬하는데, 일반 독자도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설명해 주십시오.

박영철 : 쉽게 말씀 드리면, 북유럽식 사회적 시장 경제 모델은 다음 세 가지의 요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 GDP 대비 정부의 세입(Tax Revenues) 비중이 매우 높아야 한다. 보통 40% 이상은 되어야 한다. 
- 정부의 예산 가운데 복지 지출 비중(연금, 국민건강보험, 교육 지원 등)이 매우 높아야 한다. 보통 45~50% 선이다. 적자 예산의 주범이다. 
- 원활한 노사 관계 설립으로 노동조합의 '단체 교섭권'의 강화와 '주주 총회의 참여'가 보장되어야 한다. 

위의 세 가지 요건이 건전한 수준으로 충족된 나라가 북유럽 국가와 프랑스, 독일 등입니다. 

전희경 : 첫 번째 요건 충족이 가장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무도 세금을 많이 내려 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국민의 공감대가 절대로 필요하구요. 구체적으로 어느 국가에서 이 요건이 충족되고 있나요? 그리고 미국과 일본, 한국의 경우는 어떤가요?

▲ GDP 대비 세수(Tax Revenues as % of GDP).

박영철 : 왼쪽 표와 아래 차트를 보면 스웨덴, 핀란드 그리고 프랑스의 비중이 40% 이상입니다. 평균적으로 말하면, 국민 각자가 자기가 번 돈의 40% 이상을 정부에 세금으로 바친다는 뜻입니다. 물론 개인과 기업 그리고 개인 간, 기업 간 세금 비중이 크게 다릅니다. 그 다음이 독일입니다. 반대로 GDP 대비 세금을 제일 적게 내는 나라가 한국입니다. 바로 그 뒤를 미국과 일본이 쫓고 있습니다.

전희경 : 어느 나라가 두 번째 요건을 가장 성실하게 충족시키는지요?

박영철 : 당연히 세금을 많이 걷는 나라가 복지 지출을 가장 많이 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정부 세입을 초과하는 복지 지출로 만성적인 예산 적자를 축적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균형 예산이 최선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미약합니다. 이 문제는 경제 정책의 패러다임과 직결됩니다. 정부와 국민의 선택 문제입니다.

전희경 : 원활한 노사 관계 설립 면에서는 어느 나라가 나은가요?

박영철 : 첫 번째와 두 번째 요건을 충실히 실천하는 나라는 일반적으로 원활한 노사 관계를 유지합니다. 그 중 노조의 주주 총회 참여를 허락하는 독일의 경우가 눈에 띕니다. 반대로 노조가 가장 무력한 나라는 미국입니다. 그 뒤를 한국이 쫓고 있다는 평입니다.


전희경 : 교수님 말씀을 들으면서 '북유럽식 민주적 사회주의' 경제 모델을 운영하기가 만만치 않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런데 샌더스가 바로 이 같은 민주적 사회주의 경제 모델을 주창하는데, 그의 경제 공약의 핵심을 간단히 말씀해주십시오.

(☞관련 기사 : 샌더스 경제 공약은 '거품'인가?, 2월 1일, 어쩌면 미국이 빨갛게 물든다)

박영철 : 샌더스 경제 공약의 핵심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 전 국민 건강 보험 제도를 도입한다. 
- 최저 임금을 시간당 $15로 인상한다. 
- 무상 등록금을 도입한다. 
- 낙후한 사회간접자본에 대대적인 투자를 단행하여 일자리를 창출한다.
- 금융 시장의 규제를 강화한다. 
- 대마불사의 대형 은행을 해체한다. 
- 부자 증세 제도를 도입한다. 
- 재벌의 탈세 방지법을 강화한다. 
- 노조 활동을 강화한다. 

전희경 : 위에서 교수님은 '4 공포'를 불완전 고용, 과도한 부채, 비싼 건강보험료 그리고 결혼과 내 집 마련 등 삶의 꿈을 오랜 동안 접어야 하는 불안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4 공포'에 시달리는 밀레니얼 세대가 위에 자세히 설명한 샌더스의 경제 공약에 열광하는 이유는 쉽게 이해가 가는군요. 이들은 자신의 '아메리칸 드림'의 성취를 샌더스의 메시지에 투영하는 셈이군요. 

박영철 : 그렇습니다. 따라서 강조할 점은 밀레니얼은 자신의 정치 신념을 경선 현장에서 투표로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샌더스가 승리한 경선에서는 18~29세 젊은 층의 샌더스 지지율은 80% 선입니다. 놀랍게도 이 80% 선은 8년 전 오마바가 얻은 지지율을 크게 웃도는 수치입니다.

또 샌더스 승리에 매우 중요한 변수는 이 젊은 층의 투표율이 과거보다 더 높아졌는지 여부입니다. 안타깝게도 이 통계가 아직 발표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샌더스 진영에서 현장 동원 자원봉사자 수가 크게 늘었다는 사실은 고무적입니다.


전희경 : 지난 3월 15일 '제2의 슈퍼 화요일' 경선에서 샌더스가 완패했습니다. (☞관련 기사 : 샌더스, '희망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주 화요일(3월 22일)과 토요일(3월 26일)에 있었던 미국 북서부 지역 5개주 경선에 샌더스가 70~82%대의 득표율을 얻어 압승을 했습니다. 샌더스가 다시 모멘텀을 찾았다고 보는지요?

박영철 : 오는 7월 필라델피아에서 열리는 민주당 전당 대회에 참가할 대의원을 현재 누가 더 많이 확보하고 있는가를 보면 샌더스가 힐러리에게 크게 뒤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샌더스가 후보 지명을 따내기 위해서는 지난 3월 22일부터 6월 중순까지 열리는 모든 경선에서 평균 66.6% 득표율을 확보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난 3월 22일과 26일에 열린 5개주 경선에서 놀랍게도 70~82%선의 높은 득표율을 얻어냈습니다. 크게 고무된 샌더스 진영은 이제 경선 완주는 말할 것도 없고 전당 대회 승리도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전희경 : 남은 경선 일정이 샌더스에게 유리하다는 평가도 있는데, 교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박영철 : 유리하다기보다 불리하지는 않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일단 남은 경선 일정은 힐러리를 열렬히 지지하는 보수 남부(Deep South) 지역을 벗어났습니다. 그리고 승부의 판가름을 할 수 있는 200명 이상의 대의원 수가 걸려있는 대형 경선이 몇 개 남아 있습니다. 

전희경 : 다음 주 화요일의 위스콘신 경선이 첫 관문이라고 하는데, 샌더스가 이길 승산이 높은가요? 

박영철 : 솔직히 모릅니다. 미국 언론도 반반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전희경 : 오늘 인터뷰를 끝내면서 남기고 싶은 말씀을 해주십시오.

박영철 : 미국 재벌 언론과 민주당 지도부가 최근 샌더스에게 '민주당의 본선 승리' 명분으로 경선을 포기하라는 압력을 암암리에 넣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보수 기득권 세력의 저항이라고 할까요? 샌더스 열풍의 한계인지 아닌지는 곧 판가름 날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 4월 총선에서 '헬조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7포' 세대인 젊은 층의 적극적인 투표 참여가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