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칼럼

재벌만 살찌우는 경제성장, 더는 안 된다

일취월장7 2016. 1. 29. 11:34



재벌만 살찌우는 경제성장, 더는 안 된다

[백년포럼 발제문] 한국 사회, 경로를 바꿔라 <상>


다음은 오는 28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에서 열리는 제4회 백년포럼 "한국 사회, 경로를 바꿔라: '국가 대 시장'에서 '자본 대 사회'로"의 발제문의 첫 부분이다. 발제자인 박형준 박사(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부소장)는 박정희 개발독재 이래 지금까지 계속돼온 한국의 사회경제 발전 방식은 국가-자본의 동맹 아래 사회-노동이 철저히 배제됨으로써 경제가 성장할수록 불평등이 심화되는 지속 불가능한 모델임을 밝히고, 자본독재에 대한 사회의 우위를 지향하는 한국 사회의 경로 변경이 필요함을 제안한다. 오늘(26일)부터 28일까지 세 차례로 나누어 게재한다.


위기의 공감대 

갈등과 충돌로 점철되어온 한국 현대사에 마침내 중요한 하나의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그런데 모처럼 이룬 사회적 합의란 것이 다름 아닌 위기의 공감대이다. 안으로는 추격성장 경제체제의 한계, 밖으로는 세계적 차원의 장기불황이 겹치면서 '이대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이 광범위하게 공유되고 있다.  

다음 몇 가지 사회경제적 현상들은 현 위기상황을 잘 드러내 주는 징표로서 많이 거론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첫째, 한국경제가 고투자-고성장 체제에서 저투자-저성장 체제로 전환했다. 둘째, 그나마 이루어지는 투자와 성장도 그에 따른 고용창출 효과를 낳지 못하고 있다. 이른바 '고용 없는 성장' 현상이 나타났다. 셋째, 새롭게 만들어지는 일자리 대부분은 저임금-비정규직-파트타임 일자리로, 고용의 질이 떨어짐과 동시에 고용의 불안정성도 크게 증대했다. 넷째, 이러한 경제적 변화로 인해 소득불평등과 분배의 양극화가 심화되었다. 노동소득의 불평등뿐만 아니라 자본소득의 불평등도 심화되었고, 가계와 기업의 자산가치가 집중되는 현상도 전보다 훨씬 심각해졌다.

1997년 위기 이후 불거져 온 이러한 국내적 차원의 사회경제적 문제들 위에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심화된 전세계적인 차원의 경기침체가 겹치면서, 보수 진영도 이른바 '중진국 함정', '샌드위치 경제론' 등을 부각시키며 그들 나름대로 개혁의 필연성을 설파하고 있다.1) 진정성은 없었던 것으로 이미 판정이 났지만, 그와 상관없이, 지난 대선 때 새누리당이 경제민주화와 보편적 복지라는 진보 진영의 화두를 대선공약에 포함시킬 수밖에 없었던 사실은 그만큼 위에 언급한 사회경제적 문제들이 심각한 수준에 도달했음을 보여준 것이다. 최근에는 최경환 기획재정부 장관이 이른바 '초이노믹스'를 내세우며 ― 내용은 부실하지만 ― 진보 진영의 소득주도성장 담론을 차용하기도 했다.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사회경제적 문제들에 접근하는 관점은 다르겠지만, 보수와 진보의 대립구도를 넘어, 일용직 노동자와 영세자영업자에서 시작해서 재계와 정계의 상층에 이르기까지 온 국민이 '이대로는 안 된다'는 사회적 인식의 컨센서스에 도달했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현재의 한국사회경제체제가 지속가능하지 못하다는 실정이 경제성장과 분배의 지표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사회안전망과 복지제도의 확립 과정을 거치지 않고 개발독재형 동원체제에서 약육강식적 신자유주의체제로 이어지는 성장만능주의 사회로 진화하면서, 우리국민들은 극도의 생존적 불안감과 삶의 피폐화를 느끼고 있다. 지금 서서히 가시화되고 있는 지속불가능성의 공감대는 극에 달한 삶의 황폐화에서 나오는 인간적 반발에 기반한 것으로 보인다. OECD 최상위에 속하는 장시간의 노동시간으로 삶을 돌볼 수 있는 여유가 없는데다가, 땀 흘린 시간과 보상이 비례하지 않고 돈이 돈을 벌거나 학연·혈연·지연 등 연줄과 줄서기가 출세와 치부를 결정하는 현실에서 심한 박탈감과 무기력감을 느끼고 있으며, '이태백', '삼팔선', '사오정' 등 자조 섞인 유행어에 배어 있듯이 상시적인 삶의 불안감을 안고 산다. 높아지는 GDP가 삶의 질을 개선하기는커녕, 우리 삶에 드리우는 그늘만 점점 짙어지고 있을 뿐이다. 청년들은 자신들을 '3포 세대, 5포 세대, 7포 세대'로 자조적인 정체성을 부여하며, 한국 사회를 인간관계, 꿈, 희망이 없는 '헬조선'이라 부르고 있다. 이러한 모순된 사회경제적 현실은 지난 40여 년 간 한국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OECD 국가 중 가장 높았지만, 아동·청소년의 삶의 만족도 꼴찌, 산재사망률 1위, 노인빈곤률 1위, 자살률 1위라는 통계로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지표들은 우리가 그동안 "자살 친화적 성장"이라 불리는 참혹한 경로를 따라왔음을 절감하게 해준다.2)  

위기의 공감대가 형성되었지만 해결책에 대한 합의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1997년 경제위기 이후 지금까지 우리가 겪은 급속한 사회적 변화의 성격과 바람직한 개혁의 방향에 관해 많은 논쟁들이 뜨겁게 펼쳐져 왔지만, 1997년 위기의 원인에 대해서조차도 합의된 설명을 도출하지 못하고 있다. 이른바 1987년 체제가 형성한 ― 보수와 진보, 좌우, 민주 대 반민주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 대립적 진영 사이에 존재하는 이견뿐만 아니라, 진보 진영 내에서도 현격한 인식의 차이를 노정해 왔다. 현 위기상황에서도 이러한 대립의 골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노동개혁이란 이름으로 국민들에게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며 재벌기업 위주의 밀어주기 정책을 지속하려는 보수 진영을 차치하더라도, 어느 방향으로 한국 사회경제체제의 진로를 전환할지에 대해 합의를 도출하기가 여전히 쉽지 않은 상황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그동안 진보 진영에서는 2003년에 있었던 대안연대와 참여연대 사이의 논쟁을 시작으로, '자유주의 경쟁시장 규율의 확립'과 '국가주도 성장기제의 복구'라는 두 가지 이분법적 담론이 중심을 이루며, 1997년 경제위기의 원인, 포스트-1997 개혁의 성격, 이후 바람직한 개혁의 진로 등에 관한 여러 논의들이 펼쳐져 왔다.3) 이 두 중심 담론은 아직도 평행선을 그리며 교점을 만들지 못하고 있고4), 진보 진영 전체적으로도 대중적인 개혁운동의 기반이 될 만한 공통분모를 형성해내지 못하고 있다.

진보 진영에서는 그동안 다양한 대안 담론을 제시하였다. 이른바 '자본주의 고쳐쓰기'라는 테두리 안으로 대안 담론을 제한한다면, 주요 논의들은 표1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동반성장론과 재벌활용 복지국가론 사이에 존재하는 재벌에 관한 대립적 입장을 제외한다면, 거의 모두가 사회연대와 분배정의 강화를 통한 복지와 성장의 선순환 구축, 지식기반과 혁신 강화를 통해 고진로 성장을 도모하자고 제안하고 있다. 또한 미국식 자유주의 시장경제체제의 강화를 주장하는 동반성장론을 빼면, 대부분 스웨덴과 독일로 대표되는 유럽 쪽의 '자본주의 다양성' 모델을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  

<표1> 진보 진영의 대안적 사회경제 담론들 

출처: 안현효·류동민(2010)과 주상영(2013)를 참조해 선택 정리5).


대안 담론들의 지향 자체는 대동소이 하지만 단일한 정치적·정책적 플랫폼을 구축하고 있지는 못한 실정이다. 의견그룹들이 공동의 조직적 틀을 만들지 못하고 있고, 담론을 온전히 받아 안는 정치세력도 없으며, 개혁의 동력이 될 사회세력도 아직 형성되어 있지 않다. 게다가 진보 진영의 대안 담론들을 현실화 하는 데는 매우 커다란 객관적 걸림돌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유럽의 사민주의적 사회경제 모델들이 만들어진 역사적 경로와 한국의 사회경제모델의 형성 경로 사이에 존재하는 현격한 거리이다. 그로인해 동경심이 유발되지만, 동시에 실현가능성이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다시 말해, 경로의존성 탈피가 쉽지 않다. 그래서 어느 방향으로 갈지를 정하는 것만큼 경로를 바꿀 수 있는 동학을 지금 우리 현실에서 찾아내야하는 과제도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서있는 위치가 어디쯤인지 정확한 좌표를 설정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시도의 일환으로, 이 글에서는 권력자본론이라는 정치경제학적 관점에서 1) 한국 사회경제의 역사적 궤적을 설명하는 분석의 틀을 제시해, 2) 그 동안 진보 진영 내에서 관련 논의를 주도했던 '국가 대 시장' 또는 '국내 자본 대 외국 자본'이라는 이분법적 접근방식을 넘어설 수 있는 대안을 찾고, 3) 그를 통해, 다른 '자본주의 다양성' 모델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현재의 한국 사회경제 체제의 역사적 궤적을 설명하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본주의 다양성 모델 측면에서 OECD 국가들과의 사회경제적 비교를 통해. 한국 모델과 우리가 지향할 잠재적 모델들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를 가시화하고, 한국 사회경제의 경로변경을 위해 우리가 넘어서야 할 주요 과제를 논의해 보겠다.

자본주의 다양성 모델 논의 

자본주의가 이상화된 자유시장의 원리에 따라 조직되는 하나의 발전경로를 밟는 것은 아니고, 다양성을 가질 수 있다는 주장은 찰머스 존슨(1981)의 일본 연구 이후 여러 학자들에 의해 동아시아 개발국가모델 이론으로 정립된 바 있다. 이후 신자유주의 지구화가 세를 떨치면서, 세계적으로 사회경제 제도가 하나의 모델로 수렴된다는 혹은 수렴되어야 한다는 이론이 확산되었다. 이에 맞서, 영미식 신자유주의 체제는 하나의 특수한 형태에 불과하며, 지역적으로 다양한 자본주의 모델이 존재하고, 나아가 그 제도적 다양성이 지속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이 세계 진보학계에서 활발히 논의되었다(Crouch & Streeck, 1997; Hall & Soskice, 2001; Amable, 2004; Pontusson, 2005). 학자들마다 자본주의 유형 분류의 핵심 기준이 조금씩 차이가 나고, 그에 따라 분류되는 국가 목록이 약간씩 달라지지만, 일반적으로 홀과 소스키스가 제시하는 노사관계, 직업훈련과 교육, 기업지배구조, 기업 간 관계, 조정형태 등을 중심으로 크게는 영미식 자유시장경제, 유럽형 조정시장경제, 동아시아 모델로 나누고, 좀 더 세분화 하여 유럽형 조정시장경제를 대륙형 부문별 조정시장경제, 북유럽형 전국적 조정시장경제, 남유럽형 조정시장경제 모델로 구분하면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김인춘, 2007; 임현진, 2006).  


<표2> 자본주의 다양성 모델 정리 

(*에스핑-안델센은 남유럽형과 동아시아형의 분류를 하고 있지 않지만, 이후 관련 논의들에서 더 세분화된 분류체계가 일반적으로 사용됨. 

**영국은 잔여적 복지국가가 아닌 보편적 복지국가에 속한다.)


유형 분류의 여러 기준들은 통합적으로 고려되어야 하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자본-노동(과 시민사회) 간 '협력' 관계의 수준과 성격,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경제발전에 관한 전략적 장치가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각 모델별로 상이한 형태와 수준으로 국가의 시장개입 기제와 노-사-정 협상기구 등의 제도로서 표현된다. 노-사-정 협력의 수준은 사회 계급·계층 간 힘의 균형관계를 반영한 것으로서, 사회적 조정기제는 시장에서의 소득분배와 연관관계를 가지는 것은 물론 재분배 제도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위에 나열한 자본주의 발전유형이 탈상품화를 기준으로 한 에스핑 안델센(Esping-Andersen, 1990)의 복지국가 유형 분류와 거의 비슷하게 나눠진다. 


표2는 자본주의 유형별 특징을 간단히 정리한 것이다. 영미식 자유시장경제 모델은 제도화된 노사 간 사회적 합의 기구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반면, 시장개입 최소화와 탈규제를 통한 국가-자본 간 정책공조의 경향이 강하다. 이는 경쟁시장을 통해 노동과 자본 모두가 효율적으로 관리된다는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에 따라, 노-사-정 협력을 통한 조정 전략 대신에, 독점에 대한 강한 규제와 더불어 기업 공개와 자본시장의 확대를 통한 기업정보의 투명성 제고, 자유로운 자본 이동 촉진, 그리고 신용평가 제도의 확립이라는 시장의 상호보완적 기제들을 바탕으로 경제의 위험성 관리와 발전을 추구한다. 유럽형 조정경제시장 모델은 나라별로 차이가 있지만, 국가의 시장규제가 영미형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하다.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시장개입을 한다고 말할 순 없다. 다만, 임금과 고용에 관한 사항들은 제도화된 노-사-정 합의 기구를 통해 조정하는 경향이 강하다. 


또한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지금까지 일정 정도 유지되어 온 노동-자본 간 힘의 균형관계는 높은 수준의 공적 사회복지제도를 운영하는 데 자본의 기여를 이끌어 낸 한편, 국가적 차원의 성장전략에 노동의 협력을 유도했다. 유럽형은 다시 스웨덴으로 대표되는 북유럽형, 독일로 대변되는 대륙형, 그리고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남유럽형으로 세분화 될 수 있다. 북유럽형은 사민당의 장기 집권 속에서 노-사-정 협력체제가 오랫동안 제도적으로 유지되면서, 전국적 차원의 사회적 조정과 보편적 복지체제가 만들어졌다. 대륙형은 상대적으로 산별협상 단위의 노-사-정 조정 경향이 강하고, 고용과 연계된 조합주의적 복지체제 성격이 짙다. 남유럽형은 상대적으로 불안정한 정치문화와 가부장적 전통과 결부되어 장기적인 복지 인프라와 국가적 성장전략의 연계 발전에 관한 사회적 조정 경향이 약하고, 복지체제도 가장의 일자리와 연금을 보장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일본과 한국으로 대표되는 동아시아 모델은 노동을 사회적 조정의 주체에서 배제하고 국가와 자본의 협력관계를 바탕으로 노동의 희생을 강요한 성장전략을 추구해 왔다. 정부의 시장개입 경향이 강하지만, 복지체제는 이른바 '선성장 후분배' 전략에 따라 잔여적인 성격이 강하다. 1990년대 이후에는 영미식 자유주의 시장경제 유형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졌지만, 온전히 한 유형으로 전환되었다고 보기 힘들고, 구체제와 신체제의 혼합형 성격을 지닌다. 국가의 개입주의적 성격이 약해지기는 했지만 전통은 여전히 남아있다. 최근 점점 강해지고 있는 아래로부터의 '후분배' 요구와 노령화의 급속한 진전 등 인구학적 변화로 인해, 자유주의 시장경제 유형으로의 정책적 전환과 '자연발생적' 복지제도의 강화가 교차하는 '모순된' 흐름이 형성되어 있다.  

권력자본론 

자본주의 다양성 이론은 모든 것을 자율조정시장에 맡기면 된다는 공격적인 신고전파-신자유주의 논의에 대한 비판 논리로서 세계적으로 진보 진영에서 널리 수용되었다. 자본주의 다양성 주창자들은 나라별 혹은 유형별로 발견되는 특유의 제도들과 제도들 간의 정합성이 경제발전과 위기에 대한 대응에 특성 있는 차이를 만들고, 그 특성들이 쉽게 바뀌지 않는, 이른바 경로의존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는 하나의 자유주의시장 모델로 세계가 수렴하고 있고, 수렴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에 대해 매우 효과적인 비판을 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본주의 다양성 논의는 자본-노동관계와 자본 간 관계를 포함해, 제도들 간의 정합성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자본주의 동학의 핵심인 권력의 문제는 간과한 측면이 있다.  

이 글에서 채택하고 있는 권력자본론은 넓은 의미에서 제도주의적 관점을 수용하면서도 생산 혹은 경제의 최적화를 위한 제도 간 정합성보다는 사회세력 간 권력관계에 초점을 맞춰 자본주의의 동학을 설명하는 정치경제학 관점이다. 권력자본론을 발전시킨 닛잔과 비클러(2009)는 시장경제가 유형별로 상이한 제도의 정합성을 가지고 있고, 그에 따라 특유한 생산방식과 소비방식을 보이지만, 그 핵심은 '효율적 생산' 그 자체가 아니라 사회적 생산의 결실을 특정한 사회 그룹이 차등적으로 더 많이 사유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변화의 동학을 파악할 때, 그 초점은 자본주의적 권력관계에 맞춰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제도적 정합성은 지배세력이 다른 사회세력과의 역관계를 반영해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사회경제적 양식이며, 그 양식을 분석하는 데 빠지지 말아야하는 핵심 요소는 권력의 상대적 크기가 상징적으로 표현되는 금전적 가치의 분배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상품의 가격, 노동의 가격, 이윤, 자본의 가치 등 자본주의 가치체계는 이른바 생산함수에서 말하듯 투입요소의 생산적 기여에 비례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권력의 함수에 의해 규정된다. 이제 권력자본론의 관점이 한국의 사회경제 발전의 궤적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닛잔과 비클러는 권력자본론의 가치론적 기초를 베블런(Veblen 1904; 1908; 1923)의 "산업(Industry)"과 "영리활동(business)"의 본성적 구분에서 찾는다. 베블런은 자본주의적 생산과 재생산 과정을 산업과 비즈니스라는 본성적으로 다른 두 가지 인간 활동의 모순적 결합으로 구분하면서, 산업 활동은 인간의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물품을 공동으로 생산하는 창의적이고 기술적인 과정으로 규정하고, 비즈니스는 그 과정을 사적으로 장악하고, 그 통제력을 금전적 가치로 전환하여 전유하는 과정이라고 정의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산업 활동은 항상 공동체의 역사적 유산인 지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독립된 개인의 활동으로 환원될 수 없다. 특히 산업혁명으로 기계화 시대가 열리면서, 산업은 국가적·국제적 차원의 사회적 생산으로서만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수학, 물리학, 화학, 공학, 예술, 다양한 사회과학 등 산업 과정에는 인류 공동의 지식과 창의성이 복합적으로 결합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투입되는 수많은 재료들과 부품들을 고려할 때 공동체 차원의 생산이라는 방식으로만 개념 지을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생산물은 "마치 홀로그램처럼 인류 지식의 전 역사를 담고 있기 때문에 생산과 생산성은 본성적으로 사회적이다" (Nitzan and Bichler 2002, 34). 

비즈니스는 이러한 사회적 차원의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원리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산업 활동과는 전혀 다른 원리에 의거해 작동할 뿐만 아니라 서로 모순되기까지 한다. 비즈니스의 목적은 영리 활동 혹은 이윤의 추구이며, 영리 활동은 공동체적 생산인 산업을 사적으로 전유함으로써 가능하다. 즉,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영역에 들어올 수 없게 만드는 권리를 바탕으로 사용료를 지불하게 만드는 힘이다. 마르크스도 주목했듯이, 이러한 영리활동의 본성은 이른바 '울타리치기(enclosure)'로 상징화되었다. 권력자본론에서는 인클로저가 자본의 본원적 축적기에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관통하는 핵심 기제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특정한 계급이 다른 사회구성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세계관에 따라 사회질서를 지속적으로 재구성해 나가는 힘을 권력이라고 정의한다면, 자본주의적 권력은 사회적 생산과정에서 타인을 배제할 수 있는 배타적 권리를 상품화하여 화폐적 가치로 전환하는 힘이라고 말할 수 있다(Nitzan and Bichler 2009, 325). 그래서 닛잔과 비클러(2004, 19)는 "사유재산 제도는 전적으로 그리고 오로지 배제(exclusion)의 법령이며 권력의 문제"라고 강조하며, 이런 본성을 가치론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화폐로 표현되는 자본주의적 가치가 유용한 사용가치를 사회적으로 만들어 내는 산업 활동이 아닌, 산업을 배타적으로 장악해 내는 자본가들의 권력에 기초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자본주의의 가치체계가 피지배계급인 노동자의 언어가 아니라, 지배계급인 자본가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가치체계가 산업 활동과 무관하지는 않지만, 생산 그 자체가 아니라 생산과정을 배타적으로 통제하는 데 기초하고 있다는 말이다. 권력자본론에서는 자본주의의 모든 지표들은 '생산함수'가 아닌 '권력함수'의 결과물들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자본주의적 가치의 원천을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 과정을 방해할 수 있는 자본가들의 능력, 즉 베블런이 말한 전략적 사보타주(strategic sabotage)에서 찾는다.  

베블런(Veblen 1923, 65-6)은 자본가들의 사보타주가 첫째, 산업 생산이 기계에 의존하게 되면서, 사회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기계적 과정(mechanical process)처럼 유기적으로 통합됨으로써 어느 한 부분에서의 생산 중지가 사회 전체에 파급효과를 낳을 수 있는 물질적 기초에 근거하고, 둘째, 산업 시설과 자연 자원에 대한 사적 소유권의 보장을 통해 소유자들에게 합법적으로 부여된 공동체의 생산 활동을 중지할 수 있는 권리에 근거한다고 말한다. 거시적 차원에서, 즉 자본 일반과 공동체와의 관계에서 전략적 사보타주는 사회적 생산을 일정 수준 이하로 제한하는 역할을 한다. '과도한' 생산이 이루어지면 자본가들의 통제력이 줄어들 위험이 있고, 가격 하락 압력이 동반되기 때문에, 자본가들은 공동체의 생산 능력을 일부러 낮잠 재워야 한다. 예를 들어, 특허권이나 지식소유권을 국내외에서 강제할 수 없다면, 이른바 지식경제로 불리는 산업은 이윤을 거의 내지 못할 것이다. 복제품이 넘쳐나, 사지 않고 이용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권력자본론의 입장에서 보면, 자본가들에게 이상적인 조건인 이른바 골디락스는 거시적으로 사회의 생산 잠재력에 '적절한' 수준의 제한을 가해 이루어진다(그림1 참조). 이는 미시적인 차원에서 한편으로 다른 자본가들이 자신의 사업영역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제약하고,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들을 생산과정에서 배제시켜 일하지 못하게 만드는 힘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식으로 사회적 생산 과정의 길목을 막고 받는 '통행세'가 이윤이다. 실제로 현대 자본주의에서 자본가들은 이윤을 위해 "약탈적 가격 책정, 공식적·비공식적 공모, 광고, 배타적 계약 체결 등의 직접 제한과 함께, 특허권·저작권법, 정부의 편파적인 산업 정책, 차별적인 조세 감면, 합법적 독점체, [반노동적] 노동 입법, 교역 및 투자 협정 혹은 장벽 등의 더 포괄적인 정치적 수단 (물론 폭력·군사력을 포함해) 등 개인 차원부터 전 지구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다종다기 한 방식들을 총동원해" 사보타주를 행사하고 있다(Nitzan and Bichler 2009, 247).  



이런 시각에서 접근하면, 설비투자의 조절, 실업, 유연 노동(비정규직화), 대기업에 의한 중소기업의 수탈 등 한국의 진보 진영에서 말하는 양극화 성장의 지표들이 가리키는 생산 활동에 대한 방해는 자본이 차등적 이윤을 얻기 위한 일상 활동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산업 활동에 대한 제한이라는 자본의 본성 측면에서 '영미식 주주자본주의'와 '동아시아 국가 주도 자본주의'의 차이는 전혀 없다. 사보타주는 타른 자본을 사회적 생산과정에서 배제하는 능력으로서, 한국의 지배적 자본인 재벌 그룹들은 사보타주의 대표적 산물이다. 권위주의적 정권하에서 정치인-관료와의 분배 연합을 형성하면서, 특정 생산 활동에 대한 배타적 투자 권리를 획득하고, 보호주의를 통해 외국자본의 시장 진입을 차단하며 성장했다. 또한, 특혜 대출, 특혜 환율과 이자율, 등 타 자본들과의 차별되는 권리를 향유하였다. 이를 장하준 같은 신제도주의자들은 국가 차원의 합리적 기획을 통한 국익의 극대화라고 미화하지만, 그 본성은 전면적 생산 활동에 대한 제한을 통해 지배적 자본이 차등적으로 축적할 수 있도록 국가권력이 지원을 제공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신자유주의적 개혁, 혹은 국가 주도 자본주의에서 시장 주도 자본주의로의 전환은 한국 자본주의의 구조적 단절(structural break)이라기보다는 기저에 깔린 자본주의 권력양식의 진화로 봐야 한다.

그렇다고 1997년 위기를 겪었지만 한국 사회가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위기 이후 지배적 자본의 사회적 사보타주가 노골화되고, 그리하여 사회 양극화가 심화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현상이 '생산적 실물자본'에서 '투기적 금융자본'으로 주도권이 넘어가서 생겨난 것은 아니다. 지배적 자본의 사회적 배제 행위가 위기 이후에 더 강하게 체감되는 이유는 차등적 축적 체제의 변화하는 본성 때문이다.


▲ ⓒ연합뉴스




1) 권태신 한국경제연구원 원장은 <한국경제 긴급 진단> 보고서를 통해 "한국경제에 울리는 4가지 경고음"으로 "잠재성장률의 하락의 장기화와 고착화", "중국 위험 현실화", "중국과 일본 사이에 낀 샌드위치 신세", "세계 최하위 수준의 노사협력" 등을 꼽으며, 규제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엔진이 덜덜거리는데 도로에서 차가 멈춰 서면 손쓸 방도가 없다. 수리를 맡기든가 새 차로 갈아타야 한다"라고 한국 경제 상황을 고장난 자동차에 비유하면서, "이대로 가면 한국의 잠재성장률이 2038년 0%대로 추락한다"고 위기론을 설파했다. <조선비즈>, "한국경제, 고장난 차 같아... 규제철폐 특단 대책 필요"(2014.11.17.) 참조. 


2) 김승원, 최상명, "경제성장·소득분배 사회지표 간의 관계분석을 통한 성장 중심 거시경제정책 평가", <동향과 전망> 제91호(2014년 여름호), 한국사회과학연구소, 286쪽. 


3) 장하준, 정승일, 이종태의 <쾌도난마 한국 경제>(2005)와 김상조, 유종일, 홍종학 등의 <한국 경제 새판짜기>(2007), 이병천(엮음)의 <세계화 시대 한국 자본주의: 진단과 대안>(2007) 참조. 


4) 최근 논의에 관해서는 유종일(엮음)의 <박정희의 맨얼굴>(2011), 김상조의 <종횡무진 한국 경제>(2012), 장하준·정승일·이종태의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2012), 이병천의 <한국 경제론의 충돌>(2012), 장하성의 <한국 자본주의>(2014) 참조.


5) 안현효·류동민, "한국에서 신자유주의의 전개와 이론적 대안에 관한 검토", <사회경제평론> 제35호(2010); 주상영, "진보적 성장 담론의 현황과 평가", <사회경제평론> 제41호(2013). 




"경제가 성장할수록 자살은 늘어난다"

[백년포럼 발제문] 한국 사회, 경로를 바꿔라 <중>



박형준 박사(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부소장)에 따르면 1960년부터 30년 간 삼성의 자산과 이윤은 국민경제의 발전 속도보다 20배 정도 빠르게 성장했다. 1987년부터 1996년까지 외환위기 이전 10년간 기업 전체 이윤 대비 재벌그룹들의 평균 이윤 비율은 30대 그룹이 14.7퍼센트, 4대 그룹이 10.7퍼센트, 그리고 삼성그룹이 4.4퍼센트였다. 위기의 수렁에서 빠져나온 이후 2001년부터 2010년까지 10년간 이 평균 비율은 각각 55퍼센트, 34.2퍼센트, 17.1퍼센트로 높아졌다. 1997년 위기 전후로 재벌들의 이윤 비중이 세 배에서 네 배 정도 더 높아진 것이다.

한편 1997년 위기 이전에는 GDP 성장률과 법인기업이윤의 비중이 나란히 움직였는데, 이후 반대로 움직이고 있다. GDP 성장률은 1987년부터 1996년까지 연 평균 8.7퍼센트였는데, 2001~2010년의 연 평균 GDP 성장률은 4.2퍼센트로 낮아졌다. 그렇지만 법인기업의 이윤이 국민처분가능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00년 4.2퍼센트에서 2010년 13.8퍼센트로 3배 규모가 되었다. 반면, 국민총소득에서 가계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은 73.6퍼센트에서 63퍼센트로 약 10퍼센트 포인트 낮아졌다.  

위의 사실들은 박정희 개발독재 이후 현재까지의 경제 성장이 생산은 온 국민의 땀으로, 그러나 그 과실은 재벌이 독차지해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지난 반세기동안 한국의 사회경제는 사회적 생산의 이윤을 재벌이 사유화해 온 과정이었다. 1월 백년포럼 "한국 사회, 경로를 바꿔라: '시장 대 국가'에서 '자본 대 사회'로"의 주요 내용이다. 포럼은 28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에서 열린다. 내일(28일)에는 발제문의 결론이 소개된다. 

1997 이전과 이후: 자본주의 권력양식의 압축성장 

권력자본론은 그 동안 한국 사회경제체제 발전과정에 관한 중심 화두였던 다음 두 가지 문제설정 방식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첫째는 이른바 박정희의 공과 과라는 문제설정 방식이다. 둘째는 포스트-1997 구조개혁과 관련해 '천민자본주의' 대 '시장만능주의'라는 이분법적 논의 구도이다. 이 두 가지 문제설정 방식을 비판적으로 다루면서, 한국 사회경제체제가 지나온 변화의 궤적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동안 박정희 체제가 민주주의를 억압한 과는 있지만, 고도성장을 이룬 공은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널리 받아들여져 왔다. 서두에서 언급했던 재벌활용 복지국가론은 매우 적극적으로 이 주장을 설파하고 있으며, 심지어 그 당시 성장모델을 복원해야 한다고 말한다(장하준 외, 2005; 2012). 이러한 접근방식은 성장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성장 그 자체를 목적으로 여기는 경향을 보인다. 성장은 국민의 후생과 복지, 행복을 증진시킬 때만 의미가 있다. 앞에서 자본주의 다양성 모델 간 비교를 통해 확인했듯이, 이 점에 있어서 북유럽형 모델이 가장 뛰어났다. 성장과 복지의 균형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가장 큰 동력은 사민주의적 코포라티즘이라 불리는 노-사-정 '협치'이다. 이는 민주주의를 바탕으로만 이룰 수 있는 일이었다. 독일로 대표되는 대륙형 모델도 북유럽형보다는 상대적으로 약하지만, 그 근간에는 민주주의적 협치가 자리 잡고 있다. 반대로 한국의 성장모델은 노동과 시민사회를 인정하지 않고, 국가-재벌 동맹의 권력 강화를 위해, 그리고 경제개발을 위해 국민들을 순전히 수단으로 동원함으로써 만들어졌다. 박정희 체제는 루이스 멈포드(Mumford, 1970)가 말한 노동자들로 조립된 노동기계(labor machine), 군인들로 조립된 군사기계(military machine), 그리고 컨트롤 타워에 해당하는 관료기계(bureaucratic machine)의 복합체로 구성된 거대기계(megamachine)을 건설한 것이다(박형준, 2013: 150). 이른바 캐치-업 성장은 그 거대한 권력기계의 특성 중 하나일 뿐 독립적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박정희 때 기본골격이 확립된 한국 사회경제모델은 발전국가론에서 흔히 국가자율성이라고 칭하는 군부독재의 '강한 국가'가 주도했다. "국가와 재벌의 지배 연합이 산업 발전을 위한 '관민 협력 파트너십'을 형성하고 재벌에 대한 성과 규율처럼 '발전 규율' 메커니즘이 작동하며, 다른 한편으로 세계 자본주의에 개방하는 방식과 국제 분업상의 위치가 잘 조절"해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었다는 의미에서 국가가 '자율성'을 가졌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이병천, 2014: 26). 하지만 국가의 자율성이 계급적 이해에서 자유로웠다는 것으로 해석되면 안 된다. 한국의 '강한 국가'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지만, 국가의 사회적 공공성은 전혀 강하지 못했다. 앞에서 확인했듯이 한국정부의 특성은 조금 거두고 조금 쓰는 매우 '작은 국가'이다. 국가의 힘은 국민들을 억압적으로 생산의 투입요소로 동원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고, 노동기본권, 정치기본권, 사회기본권, 공공복지제도는 철저히 무시되었다. 반면 '압축 성장'을 주도한 권위주의 국가는 재벌 기업들에게 직접 보조금 지급, 세금 감면, 특별 이자율과 환율 혜택, 다양한 형태의 국가 보증, 외국 차관 배분, 수탈적인 노동 정책 및 보호무역 정책 수립 등의 특혜를 제공했다. 재벌들이 외국으로 돈을 빼내가거나 사치스럽게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는 의미에서 '발전 규율'일 뿐, 철저하게 재벌의 이익에 복무하는 '강한 국가'였다. 권위주의 국가는 억압적 정치로 재벌 기업들에게 순종적인 저임금 노동력을 무제한 공급해 주는 한편, 여러 특혜를 통해 나라 안팎의 경쟁자들이 그들의 사업 영역에 들어오지 못하게 진입장벽을 설치함으로써, 재벌들에게 배타적으로 이윤의 흐름을 집중시켜 준 것이다.  

아래 그림2는 이러한 재벌 밀어주기의 역사적 궤적을 나타낸 것이다. 여기서는 가용한 데이터의 한계 때문에 삼성그룹만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차트는 삼성그룹의 자산총액과 이윤총액 변화를 각각 GDP와 국민처분가능소득의 증가에 대비해 표현한 것이다. 차트의 실선 그래프는 1960년의 삼성 총자산을 GDP로 나눈 값을 100으로 환산했을 때, 그 비율이 반세기 동안 얼마나 증가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며, 점선 그래프는 같은 방식으로 국민처분가능소득 대비 삼성그룹의 이윤변화를 나타낸 것이다. 군부독재가 끝나고, 이른바 신자유주의 체제로의 전환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기점인 1990년 두 값 모두 2100 정도로 커졌다. 이는 1960년부터 30년 간 삼성의 자산과 이윤이 국민경제의 발전 속도보다 20배 정도 빠르게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박정희 때 만들어진 "관민 협력"에 기초한 "집단적 조직자본주의"는 1980년대 중반 이후 변화의 물결에 휩싸이게 된다. 이 자본주의 모델을 지탱해 주던 두 개의 기둥에 균열이 간 것이다. 하나는 억압적 군부독재체제이고, 다른 하나는 냉전시대 반공의 보루로서 역할하며 받은 미국의 경제적 지원이다. 군사정권이 1987년 '전민항쟁'에 부딪혀 더 이상 독재를 지속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면서, 한국은 대통령 직선제를 계기로 민주화의 과정에 들어선다. 이후 대기업을 중심으로 민주노조 운동이 광범위하게 펼쳐졌고, 더 이상 재벌들은 순종적인 저임금 노동공급의 혜택을 이어갈 수 없게 된다. 이러한 국내적인 정치역관계의 변화와 함께 국제적 환경의 급속한 변화가 일어났다. 냉전의 종식과 더불어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이른바 신자유주의로 재편된 것이다. 재벌들은 냉전시대에 누렸던 보호주의라는 방패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미국과 일본을 위한 반공 진영의 보루를 역할을 하며 제공받았던 자금과 기술, 산업 시스템, 그리고 수출시장을 더 이상 보장받을 수 없었다. 민주화와 세계화라는 이중적인 변화의 압력 속에서, 재벌들은 생존하기 위해서는 이전의 축적 양식과는 사뭇 다른 축적 체제를 찾아내야만 했다. 

그림 2. 비용의 사회화 이익의 사유화 모델 

(*모든 데이터는 3년 이동 평균값.  
출처: 한국은행; 삼성, 1998; 삼성 (Online, http://www.samsung.co.kr);
박형준(2013: 230)의 그림 4.2 수정 인용.) 

1994년 김영삼의 시드니 구상(혹은 세계화 선언)은 국가-자본 동맹의 새로운 컨센서스를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김영삼 정부는 보수대연합의 산물로서 1987년 체제가 형성한 민주화 세력 주도의 정치적 역관계를 다시 뒤집었다. 이후 이루어진 세계화 선언에는 외부에서 밀려오는 개방화, 자유화, 규제완화의 압력에 수동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이용해 새로운 지배전략으로 삼겠다는 의지가 담겼다. 김영삼 정부는 '선진국 클럽'처럼 알려져 있는 OECD에 가입을 준비하며, '2부 리그'에서 '1부 리그'로 승격을 도모하는 한편, OECD 가입조건인 자유화, 개방화, 규제완화 등의 제도개혁을 추진했다. 그런 가운데, 구체제의 상징인 경제기획원도 문을 닫았다. 국가 스스로 시장 쪽으로 무게중심을 이동시키는 개조운동을 펼친 것이다.  

이런 변화의 도정에서 갑자기 1997년 금융경제위기가 터졌다. 1997년 위기를 계기로 정치경제적 개혁이 엄청나게 가속화되었다. 단계별로 서서히 실시하려던 '워싱턴 컨센서스'가 제시하는 정책들이 위기를 계기로 급격히 도입되었다. 그 결과, 한국 자본주의는 짧은 기간에 '거대한 전환'이란 이름을 붙이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매우 심대한 변화를 겪었다. 자본시장 개방으로 한국의 경제 체제는 세계시장에 깊숙이 통합돼 버렸고, 더불어 급격히 팽창한 금융시장은 변동성이 심해졌으며, 안정된 일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또한, 짧은 시간 동안 국가의 개입은 '죄악시' 하고, 시장은 '신성불가침'한 영역처럼 여기는 사고방식이 정치권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 심지어 진보 세력의 지지로 당선된 노무현 전 대통령마저도 "권력이 시장[자본]으로 넘어갔다"고 말할 정도로,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 기조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이러한 포스트-1997 구조조정과 관련해, 그동안 진보 진영 내에서는 열띤 논의가 펼쳐졌다. 1997년 위기는 물론 그 이후의 성장 동력 저하와 사회적 양극화가 영·미 주주자본주의 도입으로 진행된 '비생산적' 금융자본이 주도하는 금융화 혹은 금융 주도 축적 체제 때문이라고 보는 그룹과 모든 것이 국가 주도 개발주의에서 만들어진 정실주의 재벌 시스템의 존속 때문이라고 보는 그룹이 논의를 주도했다. 그밖에, 노동자 착취 강화를 통해 이윤율을 회복하려는 자본의 공세가 그 본성이라고 보는 정통 마르크스주의 견해를 비롯해 다양한 의견그룹들이 많이 있지만, 대중적인 논의는 앞의 두 그룹이 이끌었다. 장하준 교수로 대변되는 앞의 입장은 외국자본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는 한편, 재벌과의 대타협을 통해 스웨덴 식 복지국가로 나아가자는 주장을 펴고 있다. 반면, 김상조, 장하성 교수로 대표되는 후자의 입장은 반독점 규제 강화와 전근대적 재벌 총수 '독재체제'를 해소하면서, 미국식 자유주의 '주주자본주의'로 전환해 가자는 경향이 강하다.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한국 사회경제모델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어느 것이 맞고 틀리다로 단정지울 수 없지만, 시장과 국가, 재벌과 외국자본을 다소 이상주의적인 입장에서 이분법적으로 다루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이런 이분법적 접근방식이 정확히 무엇이 변했고, 무엇이 지속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작업을 방해한다. 이병천(2014: 173)는 두 관점 모두를 비판하면서, 구체제에서 신체제로 이행에서의 연속과 단절을 설명한다(그림3 참조).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노동과 시민사회를 사회적 협력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배타적 국가-자본 동맹이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변화한 것은 국가-자본 동맹의 구성과 위계이다. 다시 말해, 권위주의적 개발 국가-국유 은행-재벌 간의 "삼각 연계"를 주축으로, 대내적으로는 국민 기본권 억압, 대외적으로는 보호주의를 통해 국적 자본의 고도성장을 추구하던 지배블록이 '정글의 법칙'을 추구하는 재벌-외국자본-시장지향 국가의 "신자유주의 삼각 동맹"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구체제에서는 권위주의 국가가 지배블록 내에서 지휘봉을 잡았다면, 신체제에서는 재벌이 그 위치로 올라갔다고 본다. 권위주의 정부를 약화시킨 것은 학생운동이 주도한 민중항쟁이었지만, 독재 권력을 찬양하던 재벌들이 무임승차해 권력의 핵심으로 올라선 것이다.  

그림 3. 개발자본주의 삼각 연계와 신자유주의 삼각 동맹


지배적 자본의 입장에서 보면, 신자유주의 삼각 동맹은 매우 '성공적'인 결과를 낳았다. 2008년 세계금융공황 이후 구조적인 불황에 빠져, 현재는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1997년 위기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전보다 훨씬 자본 축적을 강화할 수 있었다. 그림4은 한국의 재벌기업들이 2000년대 들어,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나 전대미문의 수준으로 이윤을 집중시켰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차트는 3개의 그래프로 구성되어 있는데, 기업 전체의 소득에 대비해 삼성그룹, 상위 4대 재벌, 그리고 30대 재벌 그룹의 순이윤 비율을 표현한 것이다. 각각의 비율이 매년 크게 변화하기 때문에 10년 간 평균을 이야기하는 편이 나을 듯싶다. 1987년부터 1996년까지 위기 이전 10년간 기업 전체 이윤 대비 재벌그룹들의 평균 이윤 비율을 보면, 30대 그룹이 14.7퍼센트, 4대 그룹이 10.7퍼센트, 그리고 삼성그룹이 4.4퍼센트였다. 위기의 수렁에서 빠져나온 이후 2001년부터 2010년까지 10년간 이 평균 비율은 각각, 55퍼센트, 34.2퍼센트, 17.1퍼센트로 높아졌다. 1997년 위기 전후로 재벌들의 이윤 비중이 세 배에서 네 배 정도 더 높아진 것이다.  

그림 4. 기업이윤의 집중 

(*전체기업이윤은 국민처분가능소득 중 기업소득. 모든 데이터는 3년 이동평균 값.
출처: 한국은행, 공정거래위원회, 삼성 1998, 삼성(Onlind); 박형준(2013: 362) 그림 6.3 수정 인용.) 

재벌의 어마어마한 이윤 축적은 고용-임금-분배 없는 이른바 "3無 성장"을 낳았다. 대기업들의 기술개발과 생산성 향상이 수출호조와 이윤 급증에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정규직 노동자를 비정규직으로 전환하고, 정규직 일을 하청이나 파견노동으로 대체하고, 중소 하청기업에 대해 납품가 후려치기 등 이른바 갑을 관계를 강화함으로써 이윤의 집중을 이루었다. '구멍가게', 카페, 빵집, 심지어 떡볶이 집까지 대기업의 손길이 뻗치면서, 대부분의 자영업자들과 그들에 딸린 '알바생'들은 사실상 대기업의 저임금 하청근로자로 전환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림5는 신자유주의 삼각 동맹이 만들어낸 '양극화 저성장체제'의 일면을 포착한 것이다. 차트는 3개의 그래프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나는 실질 GDP성장률이고, 다른 하나는 국민처분가능소득 대비 법인기업이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국민총소득 대비 가계소득을 나타낸 것이다.  


특징적인 것은 1997년 위기 이전에는 GDP 성장률과 법인기업이윤의 비중이 나란히 움직였는데, 이후 반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다. GDP성장률은 1987년부터 1996년까지 연 평균 8.7퍼센트였는데, 2001-2010년의 연 평균 GDP성장률은 4.2퍼센트로 낮아졌다. 그렇지만 법인기업의 이윤이 국민처분가능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00년 4.2퍼센트에서 2010년 13.8퍼센트로 3배 규모가 되었다. 반면, 국민총소득에서 가계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은 73.6퍼센트에서 63퍼센트로 약 10퍼센트 포인트 낮아졌다.

그림 5. 양극화 저성장 체제 

(*모든 데이터는 3년 이동 평균값. 출처: 한국은행) 

가계소득 비중의 전반적 하락과 더불어 가계 내의 소득불평등은 더 심화되었다. 그림6은 대표적인 불평등 측정 지표인 지니계수와 5분위 배수를 나타낸 것이다. 1991년에 지니계수는 0.259였는데, 2010년 이 수치는 0.320으로 높아졌다. 같은 기간, 5분위 배수는 3.8에서 6.2로 증가했다. 이는 하위 20퍼센트에 속하는 가구의 평균소득에 비해 소득상위 20퍼센트에 속하는 가구의 평균소득이 60퍼센트 더 늘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만큼 소득불평등도가 증가한 것이다. 

그림 6. 불평등의 심화 


(*5분위 배수는 도시 2인 이상 가구. 출처: 통계청) 

그림 5와 6의 수치들은 왜 우리 서민들 모두가 '이대로는 못 살겠다'고 아우성치는지를 대략 보여주고 있다. 이런 와중에 재벌 총수일가들은 그야말로 떼돈을 벌었다. 10대 그룹 총수들이 보유한 주식가치의 변화를 보면, 2000년 9,370억 원에서 2011년에는 28조 3,560억으로 서른 배 규모로 성장했다. 게다가 그들이 받는 배당소득도 2001년 310억 원에서 2011년 17,80억 원으로 배당금 수령 규모가 여섯 배 수준으로 커졌다. 이런 사실들은 '투기적 외국자본'과 '생산적 국내자본'이란 이분법적 접근방식이 허구적임을 말해주고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자본주의 체제개편의 본성은 전 지구적 차원에서 펼쳐진 소유권과 축적공간의 통합이었고, 한국의 재벌들은 그 흐름에 편승해, "지역적 한계를 넘어 초국적인 부재소유자의 구조 속으로 스스로를 편입시켰다"(박형준, 2013: 351). 이는 국내적으로는 국가-자본 동맹체제에 외국자본을 한 주체로 끌어들이는 것을 의미했고, 이들 신자유주의 삼각 동맹은 양극화 성장전략을 통해 비용의 사회화, 이익의 사유화를 '효율적'으로 해내고 있다.  

김승원•최상명(2014)로부터 인용한 그림7은 한국의 지배세력이 일군 압축성장의 본성을 극명하게 잘 보여주고 있다. OECD 국가 전체를 대상으로 경제성장•소득분배•사회지표 간의 관계를 분석한 이 연구는 경제성장, 소득분배에 관련된 지표들이 경제성장 그 자체보다는 소득분배 수준과 더 많은 상관관계를 갖는다는 결과를 보여주었다. 또한 이 연구는 이른바 "자살 친화적 성장"이라는 한국에서만 발견되는 특별한 현상을 분석해 주목을 끌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1인당 GDP의 상승과 자살률 하락이 동반되는 반면, 한국은 두 지표가 나란히 움직였다는 것이다. 두 지표 간 피어슨 상관계수(Pearson Correlation Coefficient)를 구해보면, 0.9647이 나오는데, 이는 매우 강한 상관관계가 있음을 의미한다. 성장을 하면 할수록 국민들의 삶이 점점 더 불행해지는 모순된 자살 친화적 성장 모델은 한국 사회경제체제의 진로변경이 선택이 아니라 필수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림 7. 한국의 자살 친화적 성장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자살자 수를 나타냄. 출처: OECD Statistics)

지배구조의 성격을 드러내는 한국의 '자본주의 다양성' 모델

권력자본론 관점에서 접근하면, 자본주의 다양성 모델을 나라별 혹은 유형별로 사회세력 간 역관계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해 왔으며, 싸움과 타협 속에 어떤 사회경제 질서를 형성해 왔는가를 말해주는 유용한 수단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한국의 진보 진영은 북유럽형 혹은 대륙형으로의 전환을 추구해 왔다. 이런 움직임들은 지난 대선을 전후해 '복지국가', '경제민주화', '소득주도 성장론' 등으로 담론화 되었고, 보수 정치세력이 차용해야 할 정도로 당위성을 획득해 가고 있다. 하지만,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아직 통일된 사회세력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고, 우리와 유럽형 모델 간의 거리가 너무 멀어, 극복해야할 과제들이 만만치 않은 실정이다. 북유럽이나 대륙형 조정시장경제 쪽으로 경로를 변경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와의 격차를 정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지배세력이 형성한 '자살 친화적' 사회경제 체제의 특성을 더 구체적으로 파악함과 동시에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경로를 변경할 것인지, 그를 위해 어떤 점들을 극복해야 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위에서 소개한 자본주의 다양성 모델들 간 차이점들을 도해로 표현해 보겠다. 데이터 분석은 주로 OECD 통계를 이용했는데, 모델 별로 미국, 독일, 스웨덴, 스페인을 주된 비교국가로 삼았고, 일부 국가들은 차트를 단순화하기 위해 선별적으로 제외했다.

그림 8. 소득과 공공사회복지 지출 수준 비교 

(*모든 데이터는 최근 5년 평균값을 나타냄. 출처: OECD Statistics)

그림 8은 1인당 GDP와 GDP대비 공공사회복지지출 비율을 함께 나타낸 것으로, 예외는 있지만, 전반적으로 자본주의 다양성 모델 별로 비슷한 영역 분포를 보여주고 있다. OECD 평균을 기준으로 보면, 우리나라는 상대적으로 1인당 국민소득이 낮고 공공사회복지지출도 낮은 좌하단 그룹에 속해 있다. 한국의 공공사회복지지출 비중은 GDP의 10퍼센트 정도로 자유주의 시장경제 모델의 잔여적 복지국가를 대표하는 미국에 비해서도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한국 진보 진영에서 선호하는 유럽형 모델인 스웨덴이나 독일에 비하면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1인당 GDP도 예를 든 세 나라의 절반 수준이다. 이런 이유로 주류의 '선성장 후복지' 담론을 비판하며 복지증대를 요구하는 진보 진영에서도 성장담론 자체는 거부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주류가 주장하듯 현 국민소득 수준에서 복지증대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차트에서는 우리와 비슷한 유형인 일본의 수준이나 OECD 평균, 심지어 자유주의 시장경제 모델 수준으로만 끌어올려도 지금보다는 두 배 정도 공공복지비 지출을 늘릴 수 있음을 말해 준다. 다만 성장 없이 복지비만 늘릴 경우 차트의 좌상단에 위치한 남유럽형 국가들로 향하게 되는데, 이는 '복지 망국론'을 외치는 보수세력의 주요 공격 '루트'이다. PIIGS 재정 위기로 이 경로는 절대 가서는 안 되는 길로 낙인 찍혔다. 정리하면, 남유럽형을 제외한 유럽식 조정시장경제로 가든 영미식 자유주의 시장경제로 가든 우리 앞에는 크게 성장-복지(혹은 복지-성장)의 선순환 발전관계를 꾀해야 하는 과제가 놓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선순환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정부의 성격변화가 요구된다. 구체적으로 어떤 성장전략과 경제정책이 필요한가에 대해서는 잠시 접어둔다고 해도, 한국 정부는 지금보다는 훨씬 '큰 정부'로 전환될 필요가 있다. 그림9의 위쪽 그림은 GDP 대비 재정지출 규모와 국민부담률을 함께 나타낸 것으로 좌하단은 저부담-저지출 경향을 가진 '작은 정부' 국가군을, 우상단은 고부담-고지출 경향의 '큰 정부' 국가군을 의미한다. 한국은 국민부담률 26퍼센트, GDP대비 재정지출 규모는 32.5퍼센트로 미국, 호주, 캐나다 등 자유주의 시장경제형 국가들과 더불어 OECD국가 내에서 작은 정부 국가군에 속한다. 스웨덴은 국민부담률은 45퍼센트, GDP대비 재정규모는 52퍼센트로서, 한국보다 두 항목이 각각 20퍼센트 포인트 정도 높은 수준이다. 독일의 경우에는 두 항목이 각각 37퍼센트, 46퍼센트로서 스웨덴보다는 낮은 수준이지만, 한국이 따라가기에는 매우 벅찬 격차가 존재한다. 스페인은 국민부담률이 32퍼센트로 한국보다 6퍼센트 포인트 높지만, GDP대비 재정지출 규모는 46퍼센트로 14퍼센트 포인트 정도 높다. 차트를 보면, 이탈리아를 제외한 PIGS 국가들 모두 저부담-고지출 군에 속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 9. 정부의 성격 비교 

(*모든 데이터는 최근 5년 평균값을 나타냄. 출처: OECD Statistics)

저부담-고지출은 정부 재정적자와 국가부채 문제로 직결된다. 2008년 세계금융공황 이후 PIIGS의 재정위기-경제위기가 불거지면서, 저부담-고지출 국가군은 반복지 세력의 '복지 망국론'에 주된 논거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그림2의 두 번째 그림이 보여주듯이, 복지체제가 잘 확립되어 있는 북유럽형과 대륙형 조정시장경제 모델에 해당하는 나라들은 상대적으로 재정건전성이 뛰어나고, 국가부채도 낮은 수준에 속한다. 차트를 작성하면서, 편의상 노르웨이는 제외했는데, 노르웨이의 국가부채는 GDP의 40퍼센트 수준에 불과하고, 지난 5년 간 평균 재정수지는 GDP대비 12퍼센트 흑자를 기록했다. 복지지출을 많이 한다고 재정건전성이 악화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보다는 복지제도의 확대로 얻는 혜택만큼 사회적 차원에서 더 많은 세금을 내겠다는 연대와 책임성의 컨센서스가 요구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에 대한 신뢰가 높아야 하며, 사회적 성원들 상호간의 신뢰도 강해야 한다.  

그림 10. 사회적 신뢰도 



(*국가청렴도와 신뢰지수는 부패지수와 정부신뢰지수를 평균하는 방식으로 통합
출처: OECD Society at a Galance 2014; 2011.) 

그림 10은 갤럽의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OECD가 만든 부패지수-정부신뢰지수와 사회성원 간 신뢰지수를 함께 나타낸 것인데, 북유럽형 사민주의 복지국가들이 정부신뢰도와 사회 성원들 간 신뢰도 모두에서 최상위 층위를 구성했다. 이에 반해, 한국은 사회적 신뢰와 정부 신뢰 두 항목 모두 낮았고, 그리스, 포르투갈, 멕시코 등과 함께 최하위 그룹에 속했다. 복지가 잘 되어 있어 사회적 신뢰가 높은 것인지 사회적 신뢰를 잘 쌓아 복지체제를 확립할 수 있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유럽형 조정시장경제로 나아가려면 성장-분배의 선순환과 함께 사회적 신뢰-복지 증대의 선순환 구조도 확립해야 한다는 과제가 우리 앞에 있다는 사실이다. 매우 낮은 사회적 통합과 정치권•정부에 대한 신뢰 수준이 한국 사회경제체제의 경로변경 과정에서 극복해야 할 가장 큰 장애물일 것이다.

그림 11. 노조 조직률과 상대적 빈곤률 


(*노조조직률은 최근 5년 평균값; 상대적 빈곤률은 2010년부터 최근 값.
출처: OECD Statistics) 

경로변경을 추진할 사회적 주체를 찾는 것 또한 쉽지 않은 문제이다. 그림11은 OECD 각국의 노조 조직률과 상대적 빈곤률을 함께 나타낸 것으로, 사회적 조정의 한 축을 이루는 노동의 역량을 보여주는 대리지표로 표현해 보았다. 여기서 두 요소 간에 직접적인 상관관계를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빈곤률은 노조의 힘뿐만 아니라 복지체제 전반적 재분배 효과를 감안해야 한다. 다만 사회적 합의의 한 주체로서 노동의 역량을 노조 조직률로 살펴보고, 노-사-정 협력의 사회적 파급효과를 상대적 빈곤률 수준으로 파악해 보려는 것이다. 북유럽 국가들은 70% 전후의 압도적인 노조 조직률을 바탕으로 전국적 차원에서 단체협약을 체결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북유럽 국가들의 높은 노조 조직률은 노동 쪽의 주체적 역량을 매우 확연하게 드러내는 지표이다. 차트를 보면, 중위소득의 50퍼센트 미만 가구의 비율을 의미하는 상대적 빈곤률도 전반적으로 다른 자본주의 모델에 비해 낮은 편임을 알 수 있다. 대륙형 조정시장경제 국가들은 노조 조직률이 보통 20퍼센트 전후로, 북유럽형에 비해서 많이 낮지만 상대적 빈곤률의 차이는 크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대륙형 모델에 속한 국가들의 경우, 노조 조직률에 비해 단체협약 적용률이 매우 높은 데서 일차적인 설명을 찾을 수 있다.

표3. OECD 노조 조직률과 단체협약 적용률 

출처: OECD Statistics; OECD Employment Outlook 2012.

표3에는 OECD 국가들의 노조 조직률과 단체협약 적용률을 정리해 놓았다. 독일은 노조 조직률이 18퍼센트이지만 단체협약 적용률은 62퍼센트에 이른다. 오스트리아는 노조 조직률 28퍼센트에 단체협약 적용률은 99퍼센트, 프랑스는 노조 조직률은 8퍼센트에 불과하지만 단체협약 적용률은 90퍼센트이다. 그만큼 사회적 연대의식이 높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또한 낮은 노조 조직률 속에서도 노동이 사회적 조정의 한 주체로서 대표성을 가질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한국의 노조 조직률은 10퍼센트 내외로 매우 낮은 편인데다가, 최저임금 이외에는 노-사-정 협의가 거의 없고, 이마저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어, 노동이 사회적 조정의 주체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대기업 정규직 노조들 중심으로 기업별 협상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들과 다른 노동자들 사이에 임금의 격차가 심해, 대기업 정규직 노조의 단체행동이 대중적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노조 조직률, 단체협약 적용률, 상대적 빈곤률 지표를 중심으로 보면, 한국은 미국과 매우 유사한 특색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까지 1인당 GDP, 공공사회복지비 지출 규모, 국민부담률, 재정규모, 사회적 신뢰도, 노조 조직률, 단체협약 적용률, 상대적 빈곤률 등의 지표를 가지고 자본주의 다양성 모델 간 차이점들을 살펴보았다. 한국 사회경제체제는 OECD 국가들 중에서 상대적으로 저부담-저지출의 '작은 정부', 낮은 공공사회복지비 지출, 높은 부패지수-낮은 정부 신뢰도, 낮은 사회 성원 간 신뢰도, 낮은 노조 조직률 등의 특징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했다. 이 지표들은 노동시간, 삶의 만족도, 산재사망률, 자살률 등 삶의 질을 나타내는 지표들에서 최하위 그룹에 속하는 한국의 실정과 직접적인 연관관계를 갖는다(표4 참조). 이들 지표들 이외에도 더 많은 요소들 간 비교가 필요하겠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특색만으로도 현재의 한국 사회경제체제와 진보 진영이 추구하는 유럽형, 특히 북유럽형 사회경제모델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분석 결과는 그만큼 한국 사회경제체제를 전환해야 하는 과제의 절실함을 보여주는 것과 동시에 그 과제를 수행하는 일이 쉽지 않을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표4. 주요 사회지표 국가순위 비교  


(*데이터 별 최근 자료로, 기준년도는 상이함. 
출처: OECD; 김승원, 최상명(2014), 273쪽 <표1> 요약정리)


                            

문제는 민주주의다!

[백년포럼 발제문] 한국 사회, 경로를 바꿔라 <하>


다음은 제4회 백년포럼 "한국 사회, 경로를 바꿔라: '국가 대 시장'에서 '자본 대 사회'로"의 발제문의 결론 부분이다. 발제자인 박형준 박사(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부소장)는 박정희 개발독재 이래 지금까지 계속돼 온 한국의 사회경제 발전 방식은 국가-자본의 동맹 아래 사회-노동이 철저히 배제됨으로써 경제가 성장할수록 불평등이 심화되는 지속 불가능한 모델임을 밝히고, 자본독재에 대한 사회의 우위를 지향하는 한국 사회 경로 변경의 가능성을 점검한다. 포럼은 28일 오후 7시 30분~9시 30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열린다. 관심 있는 시민들의 많은 참여를 바란다.


나가며: 우리 앞에 놓인 난관들  


한국 사회경제체제가 가지고 있는 저부담-저지출의 '작은 정부', 낮은 공공사회복지비 지출, 높은 부패지수-낮은 정부 신뢰도, 낮은 사회 성원 간 신뢰도, 낮은 노조 조직률, 낮은 삶의 만족도, 높은 산재 사망률과 자살률 등의 특징들은 지난 반세기 동안 국가-자본 동맹이 추구한 재벌 중심 축적체제의 어두운 그늘이라고 볼 수 있다. 국가적 차원에서 자본의 축적을 위해 국민들을 억압적으로 동원해 놓고, 후생과 복지는 각자도생으로 해결하라는 식이었다. 국가-자본 동맹은 아직까지 노동과 시민사회를 사회적 협의 주체로서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는, 진보 진영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미래의 사회경제체제를 전환하든, 스스로의 힘으로 해내야할 중요한 과제이다. 주체적 역량 강화라는 난제를 잠시 제쳐 놓는다고 해도, 한국 사회경제체제의 경로변경을 위해 극복해야할 여러 객관적 어려움들이 있다. 마지막으로 몇 가지 객관적 난관들을 확인해 보고 글을 마무리 짓도록 하겠다.    


그림 12. 늙어가는 한국사회 


(*유소년 비율은 전체 인구 중 0~14세까지 인구 비중이고, 노인부양률은 65세 이상 인구수를 경제활동 가능 인구인 15~64세까지의 인구수로 나눈 비율이다. 출처: 통계청)


첫 번째 고려해야할 문제는 인구학적 변화이다. 우리나라의 총인구 증가율은 1970년대 정부정책으로 산아 제한 캠페인이 펼쳐지면서부터 서서히 감소하기 시작했고, 2030년을 기점으로 마이너스 증가율을 기록할 전망이다. 그 때부터는 인구가 줄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총인구의 감소전망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인구구성 비율의 변화이다. 출산율의 저하로 유소년 인구비중은 지속적으로 줄어들 전망인 반면, 경제활동 인구가 부양해야 할 65세 이상 인구의 비율은 점점 늘어날 전망이다. 1970년 노인부양률은 5.6퍼센트에 불과했지만, 이 비율은 2013년 현재 16.7퍼센트로 늘어나 있고, 앞으로는 증가속도가 더 빨라져, 2030년에는 38.7퍼센트, 2040년에는 57퍼센트까지 늘어날 전망이다(그림12 참조). 다시 말해, 현재는 경제활동 인구 6명이 노인 1명을 부양하고 있는 꼴이라면, 2040년에는 경제활동 인구 2명이 노인 1명을 부양해야 한다. 그만큼 경제 활력은 떨어지는 반면, 복지재원은 더 많이 요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표5. 주요 국가별 노인부양률 비교(1980~2040) 



출처: 통계청, 장례인구 추계 2006 


현시점에서 특히 고려해야할 점은 고령화의 속도이다. 표5는 주요국의 고령화 속도를 비교해 놓은 것인데, 한국의 고령화 속도가 매우 빠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인인구 비중이 총인구의 7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면 고령화 사회, 14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면 고령사회, 20퍼센트 이상이면 초고령(또는 후기고령)사회라고 한다. 지금까지 고령화에서 고령사회, 고령 사회에서 초고령 사회로의 전환 속도가 가장 빠른 나라는 일본이었다. 일본은 각각 24년, 12년이 걸렸다. 독일은 고령화에서 고령사회로 전환하는데 40년, 미국은 73년, 프랑스는 무려 115년이 걸린 것을 보면, 일본의 속도는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매우 빨랐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전환 속도는 일본을 능가해, 고령화에서 고령사회로의 전환이 18년밖에 걸리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며, 고령화에서 초고령 사회로의 전환도 일본보다 적게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그만큼 경제성장 동력이 급격히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두 번째 고려해야 할 난제는 고용 문제이다. '좋은 일자리야말로 가장 중요한 복지제도'라는 말이 있듯이, 고용은 우리의 후생과 관련해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할 지점이다. 그림13은 OECD 국가들의 고용률과 자영업 비율을 비교해 놓은 것이다. 우리나라의 고용률은 64퍼센트, 자영업 종사자 비율은 27퍼센트로, 상대적으로 자영업 비율이 높고 고용률이 낮은 편에 속한다.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 멕시코 등 남유럽형 모델들이 한국과 비슷한 그룹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스웨덴과 독일 등 북유럽과 대륙형 모델들은 대부분 고용률 74퍼센트, 자영업 비율은 10퍼센트 안팎에 분포해 있다. 


그림 13. 고용률과 자영업 비율 비교 


출처: OECD Statistics 


자영업 비율이 높다는 사실 그 자체를 놓고 좋은지 안 좋은지를 말할 수는 없지만, 높은 자영업 종사자 비율이 전통적인 문화로 인한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산업 위축의 결과물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우리나라의 경우 1997년 경제위기 이후 자영업 종사자 비율이 급속히 늘어났고, 최근에는 정규직 노동자들의 조기퇴직으로 인해 자영업 비율이 높아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게다가 높은 자영업 비율은 곧 지나친 경쟁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자영업의 채산성이 크게 떨어져 종사자들의 생계 문제로 이어진다. 실제로 대부분의 자영업이 카페, 빵집, '치맥', 편의점에 몰려있어, 자영업 종사자들의 낮은 수익률 문제와 프랜차이즈 본사와의 '갑을 관계'에서 더 취약한 입지를 가질 수밖에 없는 문제를 낳고 있다. 또한 이런 문제들은 저임금, 저질의 청년 '알바' 일자리 창출로 직결된다. 


▲ 한예슬 씨가 등장한 카페베네 광고. 대부분의 자영업이 카페 등 특정 업종에 몰려 있다. 자영업자들은 과도한 경쟁 및 프랜차이즈 본사의 횡포 등에 시달린다.



한국의 사회경제모델은 제조업 중심의 급속한 산업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크루그먼(Krugman, 1994)이 주장했듯이, 개발독재 시대의 고도성장은 생산성보다는 엄청난 요소투입, 즉 국가가 동원한 노동과 자본이 높은 GDP증가로 환산되어 나타난 것이다. 그림14는 대략 1990년까지 그 모델이 지속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림의 두 그래프는 GDP에서 총고정자본형성이 차지하는 비중과 제조업의 고용 비중을 각각 나타낸 것이다. 제조업 고용비중은 1970년 13퍼센트에서 1980년대 말 28퍼센트의 최고점에 이른 후 감소하기 시작해, 최근 17퍼센트까지 떨어졌다. 총고정자본형성도 1970년 GDP대비 26퍼센트에서 1991년 38퍼센트까지 증가한 뒤 감소하기 시작해, 최근 27퍼센트까지 하락했다. 


그림 14. 탈산업사회 진입 


출처: 통계청 


1997년 위기 이후 투자 감소에 관한 논쟁에서 금융화 혹은 주주자본주의가 원인이라는 주장이 많이 제기되었다. 그런 측면이 없지 않겠지만, 이 문제는 흔히 탈산업사회라고 일컫는 자본주의 발전과정의 '자연스런' 단계라고 볼 수 있다. 영미모델, 북유럽모델, 그리고 대륙모델 모두 GDP 대비 총고정자본형성이 우리보다 10퍼센트 포인트 낮은 수준에 분포하고 있다. 다소 허망하게 끝났지만, 노무현 정부 때 추진한 아시아 금융허브, 물류 허브 프로젝트는 이런 변화와 관련되어 있다. 제조업 고용비중으로 보면, 우리는 이미 과하게 탈산업화 되었다. 17퍼센트로 우리와 비슷한 미국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비교 대상 국가들이 20퍼센트 이상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독일과 일본은 26퍼센트 전후를 유지하고 있다. 반면 한국의 서비스업 고용비중은 ‘선진국’ 수준인 75퍼센트를 넘어섰다. 문제는 고용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서비스업 쪽 노동생산성이 매우 낮다는 사실이다. OECD 통계에 따르면, 1989~2009년에 한국 제조업의 노동생산성은 미국 대비 31퍼센트에서 66퍼센트로 증가했지만, 서비스업의 노동생산성은 42퍼센트에서 49퍼센트로 소폭 증가하는데 그쳤다. 이는 한국의 서비스업이 상대적으로 저임금 저부가가치 업종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림 15. 고진로 성장체제로 



복지-성장 선순환 관계를 원활하게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노동생산성을 훨씬 높여야 하는 과제가 있다. 그림15는 OECD 국가들의 1인당 국민순소득과 노동시간당 GDP를 함께 표현한 것인데, 이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국은 구매력 평가 기준, 1인당 국민순소득은 2만5000달러로 일본과 거의 비슷한 수준까지 따라왔지만, 노동생산성을 의미하는 노동시간당 GDP는 29달러로 최하위 수준이다. 일본의 70퍼센트 수준이고, 독일, 스웨덴, 미국의 50퍼센트 수준이다. 앞에서 확인한 것처럼, 경제활동 인구의 상대적 비중이 점점 줄어드는 추세로 들어가기 때문에 노동생산성의 증가는 더욱더 중요해진다. 노동생산성이 크게 증가하지 않으면, GDP성장이 일본처럼 정체할 가능성이 높다. 지식기반 경제, 창조 경제, 기술융복합 산업 등 여러 이름으로 이 문제를 돌파하려는 시도들이 회자되고는 있지만, 국민경제 차원에서 어떻게 이를 실현해야 할 수 있을지는 아직 구체적인 내용이 잡혀 있지 않다.  


지금까지 OECD 국가들과의 비교 속에서, 한국 사회경제모델의 현 위치를 파악하고, 지금까지 걸어온 궤적에서 벗어나 보다 나은 방향으로 경로를 변경하는 도정에 놓인 과제들을 확인해 보았다. 이 논문에서 다룬 사항들 이외에도 우리가 넘어서야할 무수히 많은 장애물들을 만날 것이다. 경제민주화, 복지국가, 소득주도 성장 등 우리가 나아갈 방향에 관한 담론들은 이미 다 나와 있다.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 노동과 시민사회가 한국사회의 지배블록을 형성하고 있는 초국적 국가-자본 동맹에 당당한 협상주체로 인정받을 수 있을 정도로 힘을 모으는 일이 필요하다. 우리가 모범으로 삼고 있는 독일이나 스웨덴 유형의 자본주의 다양성 모델들의 근간은 민주주의적인 사회적 조정기제였다. 사회적 통합과 신뢰 제고, 민주적 거버넌스를 이루지 못하면, 이 글에서 언급했던 한국 사회경제모델의 경로변경에 필요한 여러 과제들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