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국제정세 칼럼

가난한 사람이 왜 '보수 정당'을 찍을까?

일취월장7 2015. 12. 28. 12:58

가난한 사람이 왜 '보수 정당'을 찍을까?

[김윤태 칼럼] 복지 태도의 변화와 새로운 복지 정치

 

 

정치권이 급변하고 있다. 내년 총선 민심의 향배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과연 투표장에 나오는 사람을 움직이는 힘은 무엇일까? 유권자는 박근혜, 김무성, 문재인, 안철수에 의해 좌우되는가? 지도자에 대한 지지는 단지 개인적 신뢰감을 보여주는 것인가? 사회학자들은 유권자의 정치 성향과 투표 행위에 미치는 원인을 주도면밀하게 분석한다. 1940년대 이후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라자펠트 사회학 교수가 직업, 소득, 계층 등 사회학적 요인이 투표를 결정한다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1960년대 미시간대학의 서베이조사센터와 컨버스 교수는 투표 행위가 사회심리적 요인에 의해 좌우되며, 정당 일체감과 정치적 태도에 의해 좌우된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과 달리 한국에서는 계급이나 계층도 정당 일체감도 복지 태도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많은 연구를 보면, 한국 저소득층은 복지 확대에 큰 관심이 없는 데 비해, 오히려 고소득층이 복지를 지지하는 경향이 높다. 2007년 정부가 발표한 '복지인식 부가조사' 자료를 분석한 김영순과 여유진의 연구는 대중의 이해 관계가 복지 태도와 불일치하는 '비일관성'을 보인다고 평가했다('경제와사회' 91호, 2011년). 중산층과 노동자의 복지에 대한 태도가 크게 다르지 않으며, 직종이 미치는 영향도 적다. 다만 교육 수준에 따른 상이한 태도가 나타나는데, 고학력자가 상대적으로 친복지적 태도를 가진다는 연구도 있다.

가치와 태도

저명한 미국 정치사회학자 세이머 마틴 립셉은 자신의 저서 <미국의 예외주의>에서 사회의 구성원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가치(value)와 태도(attitude)를 구별했다. 사회학에서 '가치'는 역사적 과정과 사회적 제도를 통해 확고하게 형성되고 문화적으로 결정된 감성을 가리킨다. 이에 비해 '태도'는 훨씬 유동적이고, 우연적 경향을 가지며, 특정한 사건과 사회적 맥락에 따라 변화한다. 태도는 경제적 사건, 정치적 사건을 반영하며, 사람들이 오랫동안 유지한 가치와 다른 모순적인 성향을 나타낼 수 있다. 

유럽 복지국가의 역사적 경험에서 볼 수 있듯이 복지국가는 대중의 정치적 지지가 없으면 성공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복지국가에 대한 제도적 분석만큼 국민의 복지에 대한 태도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학계에서 '복지 태도(welfare attitude)'는 주로 '국가의 복지 제공 책임에 대한 지지의 정도'로 정의된다. 유럽과 미국 학자들의 연구는 복지 태도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계급과 계층 등의 사회경제적 변수 및 교육 수준, 성별, 연령 등의 변수를 꼽는다. 다른 한편, 정치 성향과 도덕관 등 가치 체계가 복지 태도에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도 있다. 

계급 배반 투표는 왜 발생했는가?

일반적으로 한국인의 복지 태도는 복지 확대를 바라면서도 조세 인상에는 미온적 태도를 보이고, 특히 저소득층의 복지 태도가 소극적인 경향을 보였다. 왜 복지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을 수 있는 저소득층이 복지에 소극적인가? 이는 자신의 계급 이익과 모순적인 투표 성향을 보이는 '계급 배반 투표'와 연관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서민층은 복지 확대와 조세 인상을 요구하는 진보 정당보다 정반대의 공약을 제시하는 보수 정당을 지지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러한 경향은 1980년대 영국의 노동 계급 가운데 보수당을 지지하는 투표 결과와 1990년대 이후 미국 남부 노동자들이 공화당을 지지하는 경향과 유사하다. 미국 역사학자 토마스 프랭크는 '왜 가난한 사람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라는 저서에서 캔자스 주 등 남부의 노동자들이 사회경제적 요구보다 낙태와 동성애 결혼 등 도덕적 이슈에 더 관심을 가지며 공화당을 지지하는 사례를 치밀하게 분석했다.

이와 같은 계급 배반 투표 성향이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유지되는 첫 번째 원인은 반공주의와 지역주의 정치 구도로 인해 유권자의 투표 성향이 조세와 복지 이슈보다 이념 논쟁, 지역 갈등에 좌우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한국의 정치적 대표 체계가 소선거구제와 다수제 민주주의를 유지하면서 주로 지역 개발 공약이 선거 이슈로 부각되었다. 또한 노동조합은 기업별 노조 체제를 유지하면서 전 계층적 복지 이슈보다 임금 인상을 노동 운동의 주요 목표로 삼았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복지 제도는 잔여적인 극빈층에 대한 시혜에 그쳤기 때문에 복지 정치가 제대로 발전하지 못했다. 민주주의는 선거권 획득에 머물고 사회 경제적 민주화는 뒤로 밀려났다. 복지는 언제나 정치권에서 '찬밥' 신세였다. 공약으로 제시해도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죽은 개'로 간주되었다. 

정치의 역동성

'정치는 살아있는 생물'이라는 말대로 최근 한국의 복지 정치에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특히 2010년 지방선거를 전후하여 한국인의 복지 태도에 주목할 만한 특성이 나타났다. 내가 다른 학자들과 발표한 논문에서 2007~2011년 한국사회여론조사연구소(KSOI)의 여론조사 자료를 활용하여 2010년 이후 소득 수준에 따른 복지태도의 차이가 커지고 있다고 분석했다('한국학연구' 45집, 2013년). 이는 2010년 지방선거 전후 복지 논쟁을 둘러싼 '정치적 기회(political opportunity)'의 구조적 변화가 대중의 복지태도에 영향을 주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대중의 복지 태도는 단순히 '복지 확대' 여부만 아니라 개별 제도에 대한 상이한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나와 서재욱은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른 사회보험과 공공부조 등 개별 복지 제도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분석했다('동향과 전망' 90호, 2014년). 이 결과를 보면, 빈곤층 생활 지원과 아동 가족 지원은 전반적으로 지출을 확대하자는 응답률이 높은 데 비해, 실업 대책 및 고용보험과 주거 지원은 상대적으로 지출을 확대하자는 응답률이 낮았다. 특히 저소득층과 불안정 근로자 근로자의 복지 확대 요구가 대체로 높게 나타나는 것은 복지 제도가 주로 대기업 정규직 근로자를 위하여 설계되어 저소득 근로자들을 사각지대로 내몰리게 되었다는 평가할 수 있다. 반면에 중산층 이상 인구의 경우, 대부분의 복지 제도에 대해 지출 확대에 대한 지지도가 낮았지만, 아동 가족 지원에 대한 지지도는 다소 높았다. 특히 중산층의 교육에 대한 공적 지출의 확대를 지지하는 경향이 강했는데, 이는 중산층의 공교육 강화에 대한 높은 관심과 함께 과중한 사교육비 부담에 대한 불만이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복지 태도의 변화가 발생했는가?

2012년 대선에서 '경제 민주화'와 '복지 국가'가 최대의 정책 이슈가 되었다.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는 모두 복지 확대를 지지하고 선거 경쟁에 뛰어들었다. 바야흐로 복지국가의 시대가 열릴 것으로 기대되었다. 이런 가운데 복지국가에 소극적 태도를 보였던 제3 후보의 지지는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이런 극적인 변화는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불평등'이 주요 국가의 최대 정치 쟁점이 된 현실과 깊은 관련이 있다. 비록 박근혜 정부가 집권 이후 '증세 없는 복지'를 주장하면 사실상 복지 공약을 휴짓조각으로 만들었지만, 여전히 복지는 정치적 폭발력을 가지고 있다. 최근 기초연금이 확대되고 아동보육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지는 가운데 국민들은 과거와 다른 '보편적 복지'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최근 다시 학계에서 한국인의 복지 태도가 어떻게 변화했는지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이런 점에서 2013년 정부가 출간한 '한국 복지패널 복지인식 부가조사'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2012년 대선의 복지국가 논쟁이 국민의 복지 태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이 자료를 분석한 김영순과 여유진은 2007년과 달리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른 복지 태도의 '일관성'이 분명해지고 있다고 주장했다(한겨레신문 2015년 4월 28일). 자기 이해에 따라 저소득층과 미숙련 블루칼라 노동자 등 낮은 계급에서 복지 확대에 적극적인 태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다만 중산층은 복지 확대와 조세 인상에 여전히 소극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다른 한편 최근 복지사회학연구회 토론회에서 발표한 나와 서재욱의 연구에 따르면, 소득 수준뿐 아니라 자산 수준과 직종의 위계가 낮을수록 복지 태도가 긍정적인 것으로 나타났다(2015년 11월 5일 한겨레신문). 

그러나 아직도 보수, 중도, 진보의 정치 성향이 복지태도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미미했다. 다른 한편 소득 수준, 자산 수준, 직종도 정치 성향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다만 여전히 연령이 정치 성향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노인층은 보수 성향이 강하고 청년층은 진보 성향이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정치에서는 여전히 지역과 연령만큼 계급과 계층의 변수가 부각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정치 성향의 특징은 계층 또는 계급을 대표하며 복지를 뚜렷한 정치 쟁점으로 부각시키는 정당과 정치 세력의 부재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정치적 기회를 창출하지 못하는 정치권의 한계가 대중의 관심을 복지 이슈로 이끌지 못하는 것이다.

정치권의 역할이 중요하다

'2013년 복지패널 복지인식 부가조사' 자료에 대한 분석 결과를 보면, 한국 복지국가의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복지 제도를 통해 계층 또는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 전략이 필요하다는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정당과 시민사회 운동은 대중이 원하는 복지 정책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둘째, 사회보험, 공공부조, 교육 등 개별 복지 제도에 대한 계층별 선호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선택과 집중을 통한 정책 우선순위를 고려해야 한다. 우선 국민의 지지도가 높은 교육, 보육, 훈련 등 사회 투자와 주거 복지를 강조하는 방향이 필요하다. 셋째, 재벌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 노동시장의 이중화를 해결하기 위해서 내부자/외부자 격차를 시정하는 동일노동-동일임금 제도의 시행과 차별금지법의 제정이 필요하다. 동시에 연금, 고용보험 등 사회보험의 사각지대를 없애고 시민권을 가진 전 국민을 위한 보편적 국민보험을 시급하게 확대해야 한다. 

한국 복지국가를 발전시키는 동력은 바로 대중의 정치적 지지이다. 한마디로 복지는 정치다. 정치권이 적극적으로 복지 정책과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대중을 설득하지 않으면 복지정치가 발전할 가능성은 없다. 복지 태도는 인구 사회학적 요인에 의해 저절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정치적 역학 관계와 정치적 기회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이다. 노동조합과 진보정당이 강한 나라에서 복지 제도가 더욱 발전했지만, 사회의 다양한 정치 세력의 광범위한 지지를 획득하는 일도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다양한 정치 세력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비례대표제, 다당제, 합의민주주의 등 선거 제도, 정치 제도의 개혁이 필요하다. 둘째, 정치권에서 전 국민적 지지를 이끌 수 있는 광범위한 '복지 연합'의 구축이 시급하다. 셋째, 비정규직, 청년실업, 최저임금, 교육훈련, 주거복지, 기초연금, 일하는 여성 지원, 조세 개혁을 위한 구체적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최근 야당의 분열은 단순히 선거 공학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의 삶의 수준을 높일 수 있는 기회를 위협하고 있다. 공천 갈등이 사회경제적 민주화 공약을 몰아낸다면 야권 지지자는 투표장에 나오지 않을 것이다. 야당은 선거 연대를 통해 정부의 복지 공약 취소를 비판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복지 논쟁을 주도해야 한다. 다른 나라의 경험에서 볼 수 있듯이 헌신적이고 강력한 정치 지도자 집단이 엄청난 차이를 만들 수 있다.

 

 "내년 총선, '그라운드 제로'를 준비하자"

[주간 프레시안 뷰] "새 정치는 박정희-DJ-노무현과의 결별서 시작"

인터레그넘 혹은 비동시성의 동시성

"위기는 정확히 말하면, 낡은 것이 소멸해가고 있는데 새로운 것이 태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이러한 인터레그넘에서는 극히 다양한 병리적 증상들이 출현하게 된다." (안토니오 그람시)

인터레그넘(interregnum)은 로마법에서 최고 권력의 공백상태 또는 헌정의 중단을 가리키는 말로, 통치하던 왕이 죽었으나 아직 새로운 왕이 즉위하기 전의 상태를 말합니다. 영국 사회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를 불러내, 하나의 시대(regnum)와 다른 시대 사이의 시대라는 뜻으로 활용합니다.

바우만은 이 용어를 통해 영토, 국민, 주권을 가진 국민국가들이 세계시장과 초국적 자본의 영향력에 무너지고 있는 세계화 현상을 설명합니다. 국민국가의 시대, 인민주권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있는데, 이를 대체할 세계체제는 아직 수립되지 않은 상태인 것입니다.

하지만 2015년 한국을 돌아볼 때는, 권력의 공백이라는 로마법의 원래 뜻, 그리고 그람시가 말한 낡은 것의 소멸과 새로운 것의 탄생 사이의 병리적 증상들이 출현하는 상황이라는 설명이 더욱 적절해 보입니다.

지금 우리는 대통령제라는 왕정을 닮은 체제에서, 왕들이 죽은 이후 아직 새로운 왕을 발견하지 못해 안달이 난 시대를 살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민주화 이후 30년 동안, 낡은 정치를 대체할 새로운 정치를 수립하지 못한 상황에서 합리적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병리적 현상들이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2015년의 한국을 설명할 수 있는 또 다른 개념으로 '비동시성의 동시성'도 들 수 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는 '모든 사람이 동일한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뜻으로 이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블로흐는 1930년대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을 연구하면서, 19세기의 권위주의적 전근대의 유산과 20세기의 근대적 이념인 민주주의와 헌정 체제가 동시에 존재하다가 결국 히틀러의 나치즘으로 귀결된 비극적 상황을 이 개념을 통해 설명해냈습니다.

국내에서는 강정인, 임혁백 교수가 이 용어를 통해 한국의 20세기를 설명한 바 있습니다만, 그 설명은 오히려 21세기에 더욱 적절해 보입니다. 올해 우리 대통령과 여당 정치인들은 1970년대를, 야당의 정치인들은 1980년대를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우리 국민들이 모두 같은 시대에 살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압축적 근대화를 경험한 우리 국민들의 삶은 지극히 다양합니다. 어떤 분들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시작한 삶을 살았는가 하면, 지금의 중고생들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에 태어났으니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우리는 한 시대를 살고 있는 것 같지만 모두 각자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시대와 시대의 사이를 가리키는 '인터레그넘', 시대와 시대의 중첩을 의미하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이야말로 2015년의 한국사회를 그나마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민주화 이후 30년의 역사 자체가 인터레그눔,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는 2015년의 현실을 가장 잘 설명하는 압축적 과거입니다. 민주화 이후 첫 번째 정부는 군부정권의 연속이었고, 두 번째 정부는 그 세력과의 연합으로 탄생했습니다. 세 번째 정부 역시 과거 쿠데타 세력과 손을 잡고서야 집권할 수 있었고, 이로써 왕들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왕들의 시대 이후 고졸 출신의 대통령은 권위주의를 허물었지만 스스로의 권위를 만들지는 못했고, 뒤 이은 대선에서는 정치가 아니라 경제라는 화두가 처음으로 대선을 지배했지만 결과는 성공적이지 않았습니다. 이 때까지 현재를 살고 있던 사람들이 대선을 좌우했다면, 지난 대선은 과거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주도권을 발휘했습니다.

왕 같지 않은 왕에 실망한 과거의 사람들이 왕을 부활시킨 것입니다. 이들은 왕이 죽은 지 30년 만에 그 딸을 다시 권좌에 앉혔습니다. 1970년대의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중용되고, 중용되고 싶은 사람들은 그 시대로 자기 시간을 맞췄습니다.


 

▲ 2011년 8월 27일 경북 청도에서 열린 새마을운동 성역화 사업 준공식에 참석한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이 이날 공개된 박 전 대통령 동상에 손을 대며 활짝 웃는 모습. ⓒ연합뉴스


 


'그라운드 제로'를 준비할 때

인터레그넘의 시대에 중요한 것은 새로운 비전을 가진 정치 질서의 창출일 것입니다. 비동시성의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대립과 갈등이 아니라 화해와 조화를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역할을 할 정치 세력은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년 총선에 대한 걱정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과거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진실한 사람'이라고 대통령이 선언했기 때문에, 여당에서는 '친박'을 넘어서 '진박' 경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야당은 분열하고 있습니다. 분열은 때로 새로운 변화의 시작일 수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 나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분열의 내용입니다.

올 한해 소위 주류와 비주류는 1년 내내 싸웠습니다. 만약 그 싸움의 내용이 박근혜 정부의 실정에 대한 고민과 정책적 대안의 모색을 둘러싼 것이었다면 이 싸움을 나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야당의 입장을 정하기 위해 그러한 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져서 매일 신문의 머리기사를 장식했다면 사실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러나 이 두 세력이 1년 내내 싸운 것은 '공천권'이었습니다. 안철수가 나가니 문재인이 진보 성향을 강화한다는 평가가 있습니다만, 이것은 다소 뜬금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 차이를 두고 제대로 된 논쟁이 벌어진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박준영, 박주선 같은 사람들이 주도하는 신당은 아무런 내용 없이 권력만을 목표로 하는 것이니 언급할 가치가 없습니다. 천정배 의원이 주도하는 신당은 처음에는 진보적 가치를 내세웠습니다만, 뉴DJ와 '국민회의'를 표방하면서 사실상 새로운 가치를 담아내는 데에는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제대 병사의 천만 원 퇴직금을 주장한 엊그제의 포퓰리즘적 공약은 그것을 확신시켜주었습니다.

가치와 정책이 사라진 이러한 분열에서는 그것이 계속되든 아니면 얼기설기 연대나 통합으로 해결되든 별로 기대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분열이 권력만을 탐한 것이라면, 연대와 통합도 권력만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섣불리 예단해보자면, 호남에서는 서로 각축을 벌일 것이고, 수도권에서는 출마한 후보들의 개인적 판단에 따른 후보단일화 가능성을 열어놓은 채로 총선에 임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문제는 그런 통합, 그렇게 해서 얻은 결과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를 준비해야 합니다. 이 용어는 핵무기가 떨어진 피폭지점을 일컫는 것으로, '대재앙의 현장'이면서 동시에 '급격한 변화의 출발점'이나 '새로운 변화의 근본적인 중심'을 의미합니다.

현재의 상황으로 보아서는 2016년 총선은 그 결과에 관계없이 이미 그라운드 제로 상황에 돌입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으로는 대재앙이 될 수도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대변화의 전환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박정희 신성화를 비판하려면 김대중, 노무현 신성화 넘어서야

2016년 총선은 한국정치에서 지난 30년 동안 끌어왔던 인터레그눔의 시대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전환점에서 태어나야할 새로운 정치세력의 조건은 무엇일까요? 우선 과거의 지도자들과 결별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현재의 야당은 김대중과 노무현의 철학을 이어받은 당이라고 자부합니다. 두 전직 대통령의 이름이 거론되면 물불 가리지 않고 싸웁니다. 당 밖이든 당 안이든 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박정희의 신성화와 얼마나 다른가요?

두 전직 대통령이 아무리 잘 했다 한들, 어떻게 모든 일을 잘 했겠습니까? 김대중의 경제정책 중에서 비판받을 것이 적지 않습니다. 노무현이 한 강정해군기지와 한미FTA는 문제가 없고, 이명박이 한 것은 나쁘다는 식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 후예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합리적 비판조차 절대 용납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자신들이 가진 정치적 자산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새로운 정치를 하겠다는 사람이 김대중, 노무현을 입에 자주 올리면 의심하라고 합니다. 자기 콘텐츠가 없다는 뜻이고, 말로만 새로운 정치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박지원 의원은 스스로 김대중 정부의 정통을 자부합니다. 그래서 김대중을 한 마디도 비판할 수 없습니다. 태생적 한계입니다. 그는 야당에서 보기 드물게 능수능란하고 노련한 정치인입니다. 그런데 그가 잘하는 것은 과거의 정치에서 잘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그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그가 정치를 잘 할 수 없는 시스템을 원한다면, 아쉽지만 그와 함께 갈 수 없습니다. 김대중을 비판할 수 있는 당이 필요하다면 그는 함께 하지 않을 것입니다.

소위 친노 세력이 야권 세력 내에서 진정한 신뢰를 얻고 싶다면 노무현 정부에 대해 먼저 말해야 합니다. 예를들어, 김만복 전 국정원장은 임기 중에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자질이 의심스러운 사람입니다. 국가 정보기관의 수장을 저런 사람이 맡았다는 것만으로도 국정의 실패를 능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하나 이 문제를 해명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또한 2007년 대선의 패배는 정동영과 민주당의 실패라기보다는 노무현의 실패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참여정부는 사실상 고의적으로 정권재창출에 실패했는데, 지금도 그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누구 하나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김대중과 노무현을 추모하고 기념하는 것을 넘어서 냉정하기 평가하기를 주저한다면, 아버지를 비판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현 대통령과 정치 행태에서 다를 것이 없습니다. 민주화 이후 스스로의 정치 행태를 성찰하지 못하는 86정치인들까지, 그들은 모두 인터레그눔의 이전 시대, 비동시성의 과거 시대에 살고 있을 뿐입니다.

팬덤정치를 넘어 가치의 정치로

지금 우리시대의 정치 현상에서 가장 적극적인 시민참여 형태는 아이러니하게도 팬덤정치입니다. 사실 이것처럼 인터레그눔 시대의 병리적 현상을 잘 보여주는 것이 없습니다.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박근혜 등 대부분의 대통령이 사실 팬덤 현상과 유사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SNS 시대에 와서도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팬덤정치를 넘어, 인터레그눔의 다음 시대에 걸 맞는 정치의 비전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선거를 위해서 대립과 갈등을 이용할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대의 사람들을 화해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권력에 대해 이해해야 하고, 동시에 정치에 대한 희망을 적극적으로 말해야 합니다.

그 정치는 내용과 가치를 담아야 합니다. 이길 수 있는 프레임을 던지는 방식이 아니라 실제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답을 내놓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아래로부터는 세상사는 사람들의 어려움을 민감하게 느끼면서 위로는 아젠다 세팅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되어서야 날갯짓을 한다고 합니다. 2016년 총선 이후 그라운드 제로에서 새로운 정치적 변화를 준비하는 부엉이들이 여야의 정치권, 시민사회와 학계를 넘어서 함께 고민하는 장을 만들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인터레그넘에 대한 설명은 진태원의 "몫 없는 이들의 몫-을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황해문화> 89호(2015년 겨울호)를 참조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