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을 정조준한 11월14일의 물대포
시민을 정조준한 11월14일의 물대포
11월14일 집회에 나선 60대 농민 백남기씨가 물대포에 머리를 맞고 의식불명에 빠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날의 과정을 되짚어보면 헌법 위에 올라서서 차벽을 치고 폭력을 연출하는 국가의 민낯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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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8호] 승인 2015.11.26 02:16:47 |
파란색 조끼를 입은 남성이 경찰 버스에 다가간다. 버스에 묶인 밧줄을 맨손으로 잡아당긴다. 물줄기가 움직인다. 남성의 머리에 45° 각도로 내리꽂힌다. 남성이 바닥에 쓰러진다. 쓰러지는 중에도 물줄기는 얼굴을 향해 멈추지 않고 퍼붓는다. 주변에 있던 이들이 남성을 구하기 위해 다가가자, 물줄기는 이들 등 뒤로 한동안 더 내리꽂힌다. 11월14일 오후 6시56분. 20여 초 동안 서울 종로구청 입구 사거리에서 일어난 일이다.
도심 한가운데서 헌법이 보장한 집회·시위의 자유를 행사하던 시민이 생명의 위험에 빠졌다. 경찰 살수차의 물대포는 백남기씨(68)의 머리를 정조준했다. 구조하러 나선 이들에게까지 살수를 계속했다. 그날 코와 입에서 피를 흘리며 구급차에 실려간 백씨는 11월20일 현재까지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구은수 서울지방경찰청장의 말처럼 “우연히 불상사가 생긴 것”일까. 이 장면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을 짚어보면, 2015년 서울 한복판에서 ‘토끼몰이’를 가능하게 한 정교한 제도 설계가 읽힌다.
봉쇄-‘불법 집회’를 만드는 손쉬운 방법
백남기씨는 전남 보성에 거주하는 가톨릭농민회 소속 농민이다. 이날 오후 3시 서울 남대문에 도착한 백씨는 오후 5시쯤 종로구청 입구 사거리에 도착했다. 민중총궐기 사전 대회 중 하나인 농민대회에 참석한 뒤 오후 4시부터 광화문에서 열리는 민중총궐기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백씨는 2시간 가까이 지난 뒤 종로구청 입구 사거리에서 경찰 버스에 묶인 밧줄을 당기다 물대포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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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11월14일 농민 백남기씨가 물대포를 맞고 서울 종로구청 입구 사거리에 쓰러져 있다. | ||
백씨가 그날 종로구청 입구 사거리에 있었던 것은 경찰이 민중총궐기 참여자의 광화문 진입을 봉쇄했기 때문이다. 민주노총은 11월14일 오후 4시부터 8시까지 서울광장-광화문-경복궁역-청운동사무소를 인도를 이용해 행진하겠다고 11월12일 서울지방경찰청에 신고했다. 다음 날 서울지방경찰청은 금지 통보를 했다. 주요 도로인 세종대로와 자하문로의 인도를 이용해 3만명이 행진하면 심각한 교통 불편을 초래할 것이 명백하다는 이유에서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이하 집시법) 제12조는 교통 소통을 위해 대통령령으로 정한 주요 도로에서의 집회 시위를 제한 또는 금지할 수 있게 했다. 경찰은 이 조항을 들어 전국농민총연합회 등 민중총궐기 참가 단체가 낸 다른 행진도 금지했다. 장소가 미국 대사관 근처여서 행진을 금지했다거나, 서울시 조례에 따라 광화문광장 집회가 금지됐다는 일부 보도가 있었으나 사실과 다르다.
헌법 제21조 2항에 따르면 집회·결사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않는다. 2014년 헌법재판소는 집시법에 따른 ‘신고’제가 원칙적으로 집회 시위를 보장하고 있는 만큼 위헌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신고제가 사실상 허가제처럼 운영돼 헌법이 보장한 집회·시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지적은 국내외에서 꾸준히 나온다. “집회의 금지와 해산은 시위 참가자 수 제한 등 조건을 붙여 집회를 허용하는 가능성을 모두 소진한 후에 비로소 고려될 수 있는 최종적인 수단”이라는 대법원 판례(2011년)가 있지만, 현실에선 휴지조각이 된 지 한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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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윤무영 11월14일 ‘민중총궐기 투쟁대회’에서 참가자들이 행진 도중에 경찰과 대치했다. | ||
민주노총 문병호 조직부장은 “행진에 대해 경찰로부터 공식 요청이나 연락은 없었다. 그냥 금지 통보를 받았다”라고 말했다. 경찰은 협의는커녕 공중전을 폈다. 서울지방경찰청은 민주노총이 광화문 일대 행진을 신고하기도 전인 11월10일 “수험생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가급적 서울광장 주변에 집결, 집회를 개최”하라고 보도자료를 냈다. 신고 당일인 11월12일에는 “가용 경찰력과 장비를 총동원해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 대처할 방침”이라고 했다.
집회 전날인 11월13일 5개 정부부처 장관은 합동으로 담화문을 발표해 “불법 시위를 조장·선동한 자나 극렬 폭력행위자는 끝까지 추적·검거해 사법 조치하겠다”라고 강조했다. 집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당국은 ‘불법 시위’라는 용어를 썼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박주민 변호사는 “합법·불법 시위가 아니라 평화·폭력 시위로 구분해야 한다. 평화롭다면 불법이라도 보장하는 것이 유엔 등 국제적인 기준이다. 폭력이 발생하지도 않았는데 교통 상황을 미루어 짐작해 집회 자체를 금지하는 것은 과도하다”라고 말했다.
고립-차벽에 막혀 헌법이 길을 잃다
일단 행진이 금지되면, 이후는 정확히 매뉴얼에 가깝게 진행된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이 차벽이다. 민중총궐기 인권침해감시단은 경찰이 11월14일 오후 1시부터 차벽을 준비해 3시께 이미 광화문 일대에 차벽을 설치했다고 밝혔다. 감시단 소속으로 이날 종로구청 입구 사거리에서 상황을 지켜본 활동가 미류씨에 따르면, 종로구청 입구 사거리에 차벽이 설치된 것도 시위대가 도착하기 전인 오후 4시30분이다. 백씨가 이곳에 도착한 것이 5시이니, 도착하자마자 이미 세워진 차벽을 맞닥뜨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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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수차 운용과 관련한 법은 없다. 경찰 내부 지침인 ‘살수차 운용지침’ 정도가 전부고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 ||
그날의 차벽은 위헌일까. 차벽이 합헌이 되기 위한 기준을 제시한 곳이 있다. 헌법재판소다. 2011년 헌법재판소는 경찰이 2009년 6월3일부터 4일간 서울광장을 경찰 버스로 둘러싼 행위가 일반적 행동자유권을 침해해 위헌이라고 하면서, 차벽이 합헌이 되기 위한 기준을 제시했다. 하나, 차벽 설치는 “집회의 조건부 허용, 개별적 집회 금지나 해산으로는 방지할 수 없는 급박하고 명백하며 중대한 위험이 있는 경우에 한해 비로소 취할 수 있는 거의 마지막 수단에 해당한다.” 둘, 부득이하게 차벽을 설치할 경우에도 몇 군데라도 통로를 개설하는 등 기본권 침해를 최소화해야 한다. 즉 ‘급박하고 명백하며 중대한 위험’이 없는데도 집회 장소를 원천 봉쇄했다면 위헌 소지가 있다.
차벽 자체의 법적 근거도 논쟁거리다. ‘차벽’의 정의와 사용 기준은 법률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경찰 내부 지침에만 나온다. 구은수 서울지방경찰청장은 세월호 1주기 때인 지난 4월 “차벽은 질서유지선의 일종”이라 말했다. 집시법상 질서유지선이란 ‘집회 장소나 행진 구간을 표시한 경계 표지’를 뜻한다. 집회 현장에서 차벽은 단순 표지를 넘어 시민을 물리적으로 격리시키므로 질서유지선으로 볼 수 없다는 견해가 법학자들 사이에 많다.
경찰은 11월14일 오후 8시부터 2시간여 동안 경복궁역에서 광화문광장으로 가려는 세월호 유가족 20여 명을 대통령 경호 등을 이유로 막아서거나(박주민 변호사 증언), 오후 7시께 광화문역 9번 출구로 나가려는 시민들을 막은 뒤 시민들이 이에 항의하자 얼굴에 캡사이신을 뿌리는 등(시민 박현주씨 증언) 광범위하게 통행을 제한해 시위대를 차벽 속에 고립시켰다. 시위대는 저항 방법으로 밧줄을 택했다.
직격-60대 농민의 머리에 물대포가 꽂히다
“버스에 줄을 걸어 당기고 있던 상황이었다. 갑자기 물대포가 백 선생님을 정조준했다. 구하러 들어가자마자 최루액이 매워서 눈을 못 떴다. 몇 발짝 옮기다가 왼쪽으로 빠졌다. 그 뒤로 서너 분이 더 왔다.” 백남기씨가 물대포를 맞는 걸 보고 구조에 뛰어들었던 농민은 <시사IN>과의 통화에서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카메라가 작고 상황이 잘 보이지 않아 백씨가 쓰러진 사실을 몰랐다는 경찰의 해명에 대해, 이 목격자는 “나한테도 계속 쏘았고, 움직이면서 내 등 뒤로 계속 따라다니며 쏘았다. 안 보였다는 경찰 해명은 말이 안 된다”라고 말했다. 백씨의 가족은 11월18일 강신명 경찰청장을 포함해 경찰 7명을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미수 등 혐의로 고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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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편은 경찰 버스 주변 장면을 중계해 시위대의 폭력성을 부각했다(왼쪽). 11월15일 김현웅 법무부 장관은 11월14일 집회에 대한 담화문을 발표했다. | ||
공개된 영상들을 보면, 백씨 외에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시민이 최소 한 명은 더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부상자를 구급차에 싣는데도 물대포가 쏟아지는 영상도 있다. 악의적 진압은 헐거운 제도 설계가 부른 예견된 참사다. 차벽과 달리 물대포는 ‘살수차’라는 이름으로 법에 규정돼 있긴 하다(경찰관 직무집행법 제10조). 대통령령인 ‘위해성 경찰장비의 사용 기준 등에 관한 규정’은 살수차를 사람의 생명이나 신체에 위해를 끼칠 수 있는 위해성 경찰장비의 하나로 명시한다. 경찰관 직무집행법에 따르면 위해성 경찰장비는 필요한 최소한도에서 사용해야 한다(제10조 4항).
그런데 이 위해성 장비를 언제 어떻게 써야 한다는 내용은 법에 없다. 이 법을 위임받은 대통령령은 ‘부득이한 경우 현장 책임자의 판단에 의해 필요한 최소한의 범위 안에서’라고 규정한다. ‘경찰장비 관리규칙’(경찰청 훈령)은 살수차 사용 전 경고방송과 경고살수로 자진 해산을 유도해야 한다고 할 뿐, 거리나 수압 등에 대해선 ‘필요한 최소한도’라고 포괄적으로 해놓았다. 경찰 내부 지침인 ‘살수차 운용지침’에서야 구체적인 사용 요건과 각도, 수압, 거리가 등장한다.
생명에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장비의 사용 기준을 내부 지침에 맡겼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백씨의 사례가 보여주었다. 지침에 적힌 ‘살수차 사용 시 주의사항’에는 ‘직사살수를 할 때는 안전을 고려해 가슴 이하 부위를 겨냥해 사용한다’고 되어 있지만 물대포는 백씨의 머리에 내리꽂혔다. ‘살수차 사용 중 부상자가 발생한 경우, 즉시 구호조치하고 지휘관에게 보고한다’고 되어 있지만 백씨가 쓰러진 뒤에도 물대포는 10여 초 더 조준 발사되었다.
지침에 있는 거리 예시도 통상 시위보다 폭력적이었다는 이유로 무시됐다. 경찰은 이날 오후 4시50분쯤부터 물대포를 쏘기 시작했는데, 참가자·관찰자들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지침상의 순서(해산명령-경고방송-경고살수-분산살수-곡사살수-직사살수-최루액·염료 혼합살수) 역시 짧은 시간 내에 형식적으로만 지키거나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물대포 역시 헌재의 심판대에 오른 적이 있다. 2011년 물대포 직사살수로 외상성 고막천공 및 뇌진탕을 입었다며 시민 2명이 헌법 소원을 냈다. 2014년 헌법재판소는 각하 결정을 내렸다. “근거리에서의 물포 직사살수라는 기본권 침해가 반복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라는 이유로 위헌 여부를 판단하지 않았다.
당시 이정미·김이수·서기석 재판관은 다수 의견과 다른 판단을 했다. 물대포의 반복 사용이 예상돼 위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며, 해당 물대포 발사 행위는 위헌이라고 했다. “물대포는 국민의 생명이나 신체에 중대한 위해를 가할 수 있는 경찰장비이므로, 구체적 사용 근거와 기준이 경찰청 훈령 같은 내부 지침이 아니라 법률 자체에 규정돼야 한다”라는 이유다. 국가인권위원회도 2008년과 2012년에 같은 이유로 ‘물대포의 구체적 사용 기준을 부령 이상의 법령에 규정하라’고 경찰청장에게 권고한 바 있는데, 반대 의견은 이를 인용했다.
특히 반대 의견은 직사살수에 주목했다. “근거리 직사살수의 경우에는 발사자의 의도이든 조작 실수에 의한 것이든 생명과 신체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따라서 직접적인 위험이 명백하게 초래된 경우, 다른 대안이 없는 경우에 한해 보충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과거 경찰의 물대포 운용 지침에는 ‘20m 이내 근거리에서 물포를 직접살수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있었다. 경찰은 2008년 촛불 이후 근거리 직접살수가 가능하도록 내부 지침을 개정했다. 지침은 정보공개 청구 등이 없으면 일반에 공개되지 않는다.
백씨와 그를 구조하려던 이들이 맞았던 것은 이른바 ‘캡사이신 물대포’다. ‘최루액 혼합살수’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것도 내부 지침인 ‘살수차 운용지침’이 유일하다. 지침의 내용도 ‘최루액 등 작용제를 불법행위자 제압에 필요한 적정 농도로 혼합하여 살수’한다며 종류와 농도를 구체적으로 제한하지 않고 있다. 경찰이 물대포에 섞는다고 밝힌 ‘파바’(PAVA)라는 합성 캡사이신 물질은 안전성이 충분히 입증되지 않았다. 지난 5월 시민 3명은 캡사이신 물대포가 헌법이 보장한 생명권 등을 침해한다며 헌법 소원을 냈다. 민변은 이번 총궐기에서 일어난 물대포 직사살수에 대해서도 행위와 지침 모두 헌법 소원을 낼 것을 고려하고 있다.
토끼몰이-국가가 폭력을 연출하다
보수 성향의 종합편성채널들은 이날 내내 경찰 버스 주변 장면을 중계해 시위대의 폭력성을 부각했다. 집회 이튿날부터 공안 정국이 시작됐다. 김현웅 법무부 장관은 11월15일 담화문에서 “이석기를 석방하라는 구호까지 등장했다”라고 집회 전체에 색깔론을 씌웠다. 서울지방경찰청 보안수사대 소속 김 아무개 경위는 백씨를 구조한 농민의 정보를 방송사에 요구했다. 안산상록경찰서는 집회 참가자 색출을 위해 민주노총 조합원 명단과 CCTV 자료를 요구하는 공문을 마트와 공기업에 보냈다.
그날 일부 시위대가 폭력 성향을 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시위대의 맞은편에는 2008년 촛불집회 이후 집회 금지와 차벽, 물대포로 시위대를 고립시키는 전략을 구사해온 경찰이 있었다. 체계적인 ‘토끼몰이’를 당한 집회 참가자는 흥분 상태로 빠져들기 쉽다. 종편은 자극적인 장면을 영상으로 퍼뜨린다. ‘준법’을 내세우는 정부는 공안 정국을 조성한다. 2015년 11월14일이 보여준 건 일부 시위대의 폭력만이 아니었다. 헌법 위에 올라서서 차벽을 치고 폭력을 연출하는 국가의 민낯이었다.
차벽 공방전 말고 다른 방식 없나
2008년 촛불집회 이후 차벽을 치는 경찰의 시위 대응 방식이 정석처럼 자리 잡았다. 매번 차벽 앞에서 공방전이 벌어지고, 이는 시위가 과격하다는 인상을 강화시킨다. 집회·시위 방식에 변화를 꾀할 수는 없을까.
집회를 불허하고 차벽으로 고립시키는 경찰의 ‘토끼몰이’ 전략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2008년 촛불집회 이후 사실상 ‘정석’으로 자리 잡았다. 불법과 폭력이 연출되고, 보수 미디어를 통해 증폭되고, 엄단하겠다며 정부가 나서는 공식도 판박이다. 그 때문에 집회 현장은 특별한 변수가 발생하지 않는 한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흘러가는 경향이 있다. 집회시위감시단으로 민중총궐기를 지켜본 서울지방변호사회 변환봉 변호사는 “시나리오대로 흘러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집회가 게임의 룰에 따라 진행이 됐다. 오후 6시부터 공방전을 시작해, 밤 11시쯤 되면 정리한다”라고 말했다.
11월20일 발표된 갤럽 조사에 따르면 민중총궐기 대회의 시위 방식이 과격했다는 의견이 67%로 그렇지 않다는 의견(19%)을 크게 앞질렀다. 경찰 대응에 대해서는 ‘과잉진압’과 ‘아니다’는 의견이 각각 49% 대 41%로 갈렸다. 여론조사 결과로만 보면 경찰은 의도했던 바를 달성했다. 그렇다면 왜 경찰의 ‘폭력 연출’에 집회 지도부는 같은 방식으로 대응해서 경찰이 ‘원하는 그림’을 만들어준 것일까. 여론전에서 고립될 여지를 주는 이유는 뭘까. 직접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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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11월14일 민중총궐기 투쟁대회를 앞두고 기자회견을 하는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 | ||
지도부는 경찰이 그어놓은 선 자체를 부당하다고 여긴다. 민중총궐기 대회 투쟁본부 관계자는 “한 달 전부터 세종로 소공원과 광화문 KT 사옥 앞으로 집회 신고를 했지만 불허됐다”라고 말했다. “경찰이 집회를 금지한 게 불법이다. 신고제인 집회를 허가제로 운영한 것 아닌가. 우리는 광화문광장 집회와 행진을 신고했기 때문에 계획대로 한 거다”라고 말했다.
“의사표현 방식에 대한 고민이 있지만…”
경찰이 집회 신고를 허용해준 서울광장에서 집회를 마무리할 수는 없었을까? 민주노총 간부는 집회의 목적과 취지를 언급했다. “이번 집회는 청와대의 전반적인 정책에 항의하는 대회였다. 그 때문에 청와대에서 가까운 광화문광장에 모이려 했던 것이다.” 민주노총 박성식 대변인은 “경찰 당국이 집회의 자유를 제한하고, 시위대는 저항하는 상황이 펼쳐진다. 이걸 빌미로 정부는 폭력을 가하고 대응하면 구속시키겠다며 공안 정국으로 몰아간다”라고 말했다. 경찰의 전략을 인식하고는 있다.
그러나 인식만 있을 뿐 대응 전략은 없다. 지도부는 “정부가 잘못했다”라는 답변으로 일관한다. 민주노총 간부는 “(경찰 당국이 강경 진압을 하니) 대응해서 시위대의 항의 수위가 높아졌다”라고 말했다. 박성식 대변인은 “내부에서도 의사표현 방식에 대한 고민이 있다. 그런 고민이 제대로 실현되려면 사회적 정세가 받쳐줘야 한다. 지금은 박근혜 정부가 노동개혁을 밀어붙이고 시민들은 위기감을 느끼는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집회에서 물대포를 맞고 중태에 빠진 농민 백남기씨(68) 사고와 관련해서는 “우리도 우발적인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 하지만 1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하면 통제가 어렵다. 그러니 경찰 쪽의 침착하고 합리적인 관리가 필요하다”라고 답했다.
진보 진영 내에서도 집회 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지만, 민주노총의 진단은 다르다. 민주노총 대변인은 이번 집회 이후 여론에 대해 “(불리한 여론보다) 정부의 살인 진압을 보면서 조성된 대중적인 분노가 더 크다”라고 평가했다. 민주노총의 한 간부는 “집회에서 민주노총이 주도성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그러니 자꾸 경찰이 제시한 틀에 갇히게 된다”라고 말했다.
민중총궐기 투쟁본부는 12월5일에 2차 대회를 예고했다. 1차 같은 사태를 막기 위한 대응책을 묻자 투쟁본부 관계자는 “경찰이 광화문을 막지 않으면 된다”라고 답했다. 민주노총 대변인은 “경찰에 차벽 없고 물대포 없는 날을 요청하자는 논의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집회 지도부가 “경찰이 나쁘다”라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경찰의 전략은 고정된 조건이다. 이에 맞서 지도부는 어떤 전략적 대안을 갖고 있을까. 지금까지는 “경찰이 나쁘니까 우리는 옳다”라는 항변만 되풀이하고 있다.
‘검은 사제’가 몸으로 쓴 역사‘
가장 위험한 곳으로 갈 준비가 되었습니다.’ 영화 <검은 사제들>의 포스터에 적힌 꼭 그대로다. 정의구현사제단을 꾸려온 지난 41년은 함세웅 신부가 위험을 무릅쓰며 통과해온 한국 현대사 그 자체였다.
함세웅 신부(73)는 한국 민주화와 인권의 상징이다. 1974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창립된 이래 41년간 ‘정의 구현’이 하느님의 근원적 뜻임을 설파하고 있다. 최근에는 국정원 댓글 공작 사건, 국정교과서 추진 등을 비판하며 정부의 잘못에 가차 없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이기도 한 그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고문,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이사장, 민주주의 국민행동 상임대표를 맡고 있다.
11월13일 금요일, 서울 명동성당 꼬스트홀에서 함세웅 신부와 주진우 <시사IN> 기자가 진행하는 ‘현대사 콘서트’가 열렸다. 400여 명이 모여 현대사를 논한 뜨거운 현장을 지면에 옮긴다. 부산(11월27일), 대구(11월28일), 대전(12월11일), 광주(12월12일)에서도 ‘거리의 신부’와 ‘탐사보도 전문기자’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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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신선영 11월13일 서울 명동성당 꼬스트홀에서 함세웅 신부(왼쪽)와 주진우 기자의 ‘현대사 콘서트’가 열렸다. 이날 400여 명의 청중이 모였다. | ||
주진우(주):기자가 된 게 후회스럽다. 그래도 딱 하나 좋은 점이 있다면 좋은 사람들을 만난 거였다. 그중에서도 함세웅 신부님을 만난 게 가장 큰 축복이었다. 함 신부님이 걸어온 길을 되짚으면서 우리 역사가 어떻게 흘러왔는지 나누고 싶다.
함세웅(함):명동성당은 1987년 6월항쟁 당시 5박6일 동안 전두환 독재정권 타도를 위해 1만명 이상의 시민이 항쟁한 장소다. 오늘 11월13일은 인권을 위해 자기 몸을 불사른 전태일 열사의 45주기다. 이런 아름다운 역사의 물줄기를 뒤로 돌리려는 이들을 꾸짖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주:함세웅 신부의 학창 시절은 어땠나?
함:모범생이었다. 용산중학교 3학년 때 성당에서 복사(가톨릭 미사 때 사제를 돕는 사람)를 맡아 했다. 이후 사제 후보 양성 기숙학교인 성신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새벽 5시에 기상해 밤 9시 반에 자는 엄격한 기숙사 생활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 딱 한 번, 고2 때 지독한 감기에 걸려 고민하다가 서울대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다. 하느님은 내 마음을 아실 거라고 판단했다. 법과 제도를 넘어선 신학적 판단을 고2 때 했다(웃음).
주:1965년 이탈리아 유학길에 오르셨다.
함:우리나라의 교회와 사회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유학 중인 1972년 12월 유신헌법이 공포돼 박정희의 영구 집권 발판이 마련되었다. 김대중 선생이 납치되고 최종길 교수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고 민청학련·인혁당 사건이 터지는 소용돌이 속에서 1973년 6월 귀국했다.
주:사제로서 사회활동에 나선 계기가 있었나?
함:1974년 긴급조치 1∼4호가 발동됐다. 나는 당시 어린 사제였기 때문에 감히 나서지 못했다. 안타깝게 생각하던 중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해 지학순 주교가 김포공항에서 중앙정보부에 납치돼 구속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서울·원주·인천 지역의 또래 사제 30여 명이 앞장서서 명동성당으로 김수환 추기경을 찾아가 석방을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 주교 사건이 발단이 되어 석 달 뒤 순교자의 달인 9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만들어졌다. 유신체제가 신학적·성서적·인간학적 측면에서 하느님의 뜻에 반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사제의 이름으로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주: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한국 민주화운동의 역사에서 큰 역할을 수행했다.
함:사제단은 회원도, 회칙도, 정관도 없지만 ‘모여라’ 하면 모이는 공동체다. 전두환 정권 당시, 안기부에서 정의구현사제단의 해체를 요구했다. 그게 안 되면 이름만 바꿔달라고 하더라. 그래서 되물었다. “‘천주교’를 뭘로 바꿉니까?”(웃음) “‘정의 구현’은 하느님의 가장 대표적인 뜻이고, ‘사제단’은 제가 만든 이름이 아니잖아요. 바티칸에 가서 요청하세요.”(웃음)
주:고문은 안 받았나?(웃음)
함:한국에서는 이 정도는 고문 축에도 안 낀다. 물고문, 전기고문, 통닭구이 정도 돼야지. 폭행 고문은 당하지 않았는데, 들어가자마자 욕하고, 사제 복장 떼고, 옷 벗기고 그랬다.
주:무섭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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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제공 1987년 6월12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정의구현사제단 시위. | ||
함:무서운데, 그럴 때는 화살기도를 드린다. 기도 화살을 하늘에 슝 쏘면 하느님께 바로 전달된다(웃음). 주 기자는 그런 기도를 못 바쳐서 고생을 많이 한다(웃음).
주:저는 끌려가면 ‘화살욕’을 합니다(웃음). 1976년 명동 3·1 민주구국선언에 참여해 처음으로 투옥되셨는데.
함:3월1일 오후 6시 명동성당에서 사제단 신부가 공동 집전하고 신자 2000여 명이 참석한 3·1절 기념미사가 열렸다. 김승훈 신부가 강론하고 개신교 문동환 목사가 설교를 맡았다. 문정현 신부가 김지하 어머니의 호소문을 낭독하고 마무리 기도 형식으로 서울여대 이우정 교수가 ‘민주구국선언’을 낭독했다. 기념미사는 조용히 끝났는데, 일주일 뒤 느닷없이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11명을 구속했다. 나중에 검거한 자들에게 들었는데, 선언이 있은 날, 박정희가 편안하게 술 마시고 있다가 김대중이 선언에 참여했다는 보고를 받고 흥분하면서 전부 다 구속하라고 명령했다는 거다. 재야 민주 진영에 정치 보복을 감행한 셈이었다.
주:감옥 생활은 어땠나?
함:정보부에서 밤을 지새우고 서대문구치소에 갔다. 가진 거라곤 성경 한 권밖에 없었다. 마침 김대중 선생이 있어서 칫솔을 사려고 1000원을 빌렸다. 그랬더니 5000원 주시더라. 대신 성경을 달라고 하셨다. 감옥살이 2년은 성서와 신학을 직접 체험하는 시간이었다. 감옥은 내게 공부방이자 수련소였다.
주: 감옥 다녀오고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추위를 많이 타시더라. 여름에도 옷을 많이 껴입는다. 여름에 신부님과 차로 이동하면 “주 기자, 에어컨 켜도 돼”라고 하고는 “29℃까지 낮춰도 돼”라고 하신다(웃음).
함:나이가 든 만큼 때가 묻는데, 나는 주 기자를 만나면서 내 어린 시절을 생각한다. 정직·꿈·지혜 같은 배움이 떠오른다. 자신의 이익에 따라 역사를 뒤로 돌리려는 이들은 불쌍한 사람들이다. 인간이 좀 덜됐다. 제대로 된 인간이 되도록 우리가 기도를 하자. 흥분하면 내 건강이 나빠지니까, 그저 잘 관찰하고 일기를 쓰는 게 좋다. 그게 역사다. 역사를 쓰고 있는 거다. ‘미래에 국정교과서 이야기를 이렇게 들려줘야지’ 하면서 새누리당의 나쁜 짓을 잘 관찰하시라. 미래와 이야기하는 이들은 현실을 잘 극복할 수 있다.(박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