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비판이 사라진 대학 교육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차별을 찬성하게 만든 주요 원인이다. 대학이 경영학만 떠받드는 사이 세상은 어떻게 바뀌었나. 대학이 무엇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당장 내 아이가 읽는 책이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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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2호] 승인 2015.10.16 21:56:29 |
2015 등대지기학교가 중반에 접어들면서 수강생들의 고민도 깊어진 모습이다. 교육 문제가 얼마나 복잡다단하게 얽혀 있는지, 그 속에서 부모가 중심을 잡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깨닫기 때문이다. 4강에 나선 이는 무한경쟁 시대 대학과 대학생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저작들로 사회적 반향을 일으킨 바 있는 오찬호씨다. 9월22일 사교육걱정없는세상(noworry.or.kr)에서 진행된 강좌를 지상 중계한다.
어쩌다 보니 <진격의 대학교>와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라는 책을 잇달아 썼는데, 한 가지는 확실히 해야 할 것 같다. 책이 사회적 반향은 일으켰을지 몰라도 부는 따라오지 않았다(웃음). 읽다 보면 마음이 무거워지는 책이어서인가 보다. 이 책들은 ‘대한민국 멘토들이 가장 싫어하는 책’ ‘대한민국 CEO들이 결코 권하지 않는 책’이기도 하다. 실제로 기업 합숙면접에서 내 책을 논리적으로 비판하라는 조별 토론 주제가 주어졌다는 얘기를 제자에게 들은 일도 있다. 왜 세상은 이런 얘기를 드러내는 걸 싫어할까? 그 이면에 대체 무엇을 감추고 있기에?
내가 책 두 권을 집필하게 된 강력한 동기가 있다. 지난 세월 동안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는 어떤 식으로든 꾸물꾸물 발전해왔다. 그런데 지난 정권부터 국정원 댓글 조작, 민간인 사찰처럼 민주주의가 퇴행하는 듯한 객관적 증거가 하나둘 드러나기 시작했다. 대학교 수업 시간에 이를 가지고 학생들과 얘기를 나눠보니 ‘민주주의가 명백히 훼손됐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듯했다. 문제는 이로 인해 심장을 칼로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끼지는 않더라는 것이다. 어느 날 체중계에 올랐더니 몸무게가 5㎏ 늘어났다? 그랬다면 이렇게 반응하지는 않을 것이다. “말도 안 돼” 하면서 다음 날부터 운동을 시작하고, 다이어트 식단 짜고 난리가 났겠지. 여덟 살짜리 우리 딸도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르면 메뉴판 옆에 표시된 칼로리부터 계산한다. 따지고 보면 민주주의가 훼손된 게 살찐 것보다 백배는 중요한 사건 아닌가. 그런데 외모까지 경쟁력인 사회에 노출돼 있다 보니 사람들의 감정 촉수가 그 방향으로만 뻗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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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육걱정없는세상 제공 <진격의 대학교>와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의 저자 오찬호 박사는 대학이 무엇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교육 전반도 달라진다고 말한다. |
내가 그날 만난 대학생들이 특별했던 것일까? 그 뒤 몇 년간 다른 대학생들을 만나며 경험한 바로는 그렇지 않다. 사회학자는 본시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다”라고 얘기하지 않는다. 불과 몇십 년 사이에 아이들의 유전자가 달라졌을 리 없지 않나. 그보다는 어떤 시대적 변화가, 어떤 사회적 환경이 젊은 친구들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게 사회학자가 해야 할 일이다. “사회가 병이 들면 개인도 병이 들게 마련이다”(노명우, <세상물정의 사회학>)라고 했다. 그러니 병든 개인보다는 사회에 초점을 맞춰 이 사회가 왜 병들었는지 원인을 알아내고, 어떻게 하면 이 사회를 바꿀 수 있을지 궁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생들은 왜 차별에 찬성하게 된 것일까? 나는 그 첫 번째 원인을 능력주의에서 찾는다. 자본주의는 사람들을 경쟁시켜 줄을 세운 다음 이에 걸맞은 보상을 해주는(‘성과에 따른 차등적 보상’) 능력주의 모델에 기반해 발전해왔다. 누군가 잠을 줄여가며 열심히 자기개발을 하면 그 자신도 성공하고 사회 전반도 발전할 것이라는 믿음이 자본주의를 작동시켜왔다. 그런 만큼 비정규직이 정규직화를 요구하는 것은 이 같은 능력주의에 위배된다. 사실일까? 능력주의를 한 사회에 적용할 때는 전제가 있다. 기회·과정·결과가 공정해야 한다.
‘어쩔 수 없지’라는 체념이 주는 면죄부
한국 사회에서 기회의 공정성이 깨졌다는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누군가 이 자리에서 “강남 3구 출신의 서울대 진학률이 더 높답니다”라고 말해봐야 아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과정의 공정성도 마찬가지다. 심판이 언제나 공정한 룰을 바탕으로 평가를 해줘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결과의 공정성은 가장 많이 오해받는 개념 중 하나다. 이로 인해 무임승차론이 대두되기도 한다. 그러나 결과의 평등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보상을 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경쟁에 패배한 선수라 해도 생활이 가능한 개런티는 지급받을 수 있어야 한다. 사회적 경쟁에서 뒤처졌다 해도 인간으로서 삶의 존엄성이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오늘날 비정규직의 가장 큰 문제는 미래를 계획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내가 얼마를 버니까 언제 결혼하고 애를 낳고 집은 언제 사겠다는 기획을 할 수가 있어야 하는데, 당장 2년 앞을 내다볼 수 없으니 인생이 시궁창이다. 최저임금도 너무 낮고 오르는 속도 또한 느리기 짝이 없다. 이를 문제 삼으면 “그래도 먹고사는 데는 문제없잖아?” 하는 사람들이 있다. 2015년을 살아가면서 때로 영화 보고 ‘치맥’하고, 1년에 한두 번 여행 가는 게 굉장한 사치인가? 한국의 자본주의는 그런 의미에서 유달리 악질적이다. 자본주의라고 다 같은 자본주의가 아니다. 복지로 대변되는 사회안전망을 통해 누구든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게끔 결과의 공정성을 보완하는 나라들도 있다. 그런데 한국은 외환위기를 계기로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없이 신자유주의를 활짝 받아들인 뒤 개인의 경쟁력만 문제 삼았다. 자기개발에 힘쓰는 사람은 살아남고, 능력 없는 사람은 해고당해도 마땅하다는 식이었다.
자기개발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권장하는 자기개발은 다르다. 지금 취업하기 힘든 대학생들은 과연 자기개발이 부족해서 그런 것일까?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영어학원에 다니겠다니까 아버지가 무슨 초등학생이 영어학원이냐며 펄쩍 뛰셨던 게 생각난다. 그것이 1990년의 일이다. 그런데 지금은 초등학교 1학년이 영어학원에 안 다닌다고 하면 “어쩌려고?” 되물으면서 그 부모를 탓하는 세상이 됐다. 이렇게 일찍부터 영어를 배우고, 스펙 쌓기 3종 세트(학벌·학점·토익 점수)가 9종 세트(학벌·학점·토익 점수·어학연수·자격증·봉사활동·인턴·수상 경력·성형수술)로 확장됐는데도 취업의 바늘구멍은 왜 더 좁아지기만 하는가? 이런 현상에 의문을 품지 않는 사람은 어른 자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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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윤무영 이화여대 포스코관(위)처럼 기업이 지어준 건물을 대학이 운영한다. 전국의 일반 4년제 대학 189곳 가운데 경영학 계열 학과 수는 686개에 이른다. 전체 재학생 중 경영학 전공자는 9.8%나 된다. |
2004년 한 재벌 기업인이 “대학이 학문의 장이라는 헛소리는 이미 옛이야기다. 이제는 ‘직업교육소’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대학은 기업이 원하는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로부터 10년. 대학은 급속도로 변했다. 대표적인 예로 전국의 일반 4년제 대학 189곳 중 경영학 계열 학과 수가 686개다. 글로벌경영학과, 디지털기술경영학과, 지식경영학과 등 이름도 다양하다. 2014년 현재 4년제 대학 재학생 중 경영학 전공자는 9.8%에 이른다. 10%에 육박하는 엄청난 숫자가 경영학이라는 단일 전공을 하고 있는 셈이다.
대학 또한 모든 가치판단을 경영학적으로 하게 됐다. 비용 절감과 이윤 증가라는 잣대에 맞지 않는 학과는 없애도 무방하다. ‘이미지 메이킹’ ‘비즈니스 예절’ 과목을 개설해 웃는 법이나 나비넥타이 매는 법 같은 것은 개설하면서 철학·역사 과목은 뒷전이다. 포스코관·삼성학술정보관·SK경영관 등등 기업이 지어준 건물을 대학이 운영한다. 효율성으로 보자면 탁월한 선택이다. 그러나 이렇게 자본의 논리를 받아들일수록 대학은 자연히 자기검열에 들어간다. 심지어 누가 기업 비판이라도 할라치면 “당신 때문에 기업이 건물 안 지어주면 책임질 거냐” 하고 윽박지른다. 그러고 보면 기득권 세력은 완벽한 승리를 거둔 셈이다. 말 안 듣는 놈이 있으면 어디론가 끌고 가서 두들겨 패서 길들여야 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그저 대학에 보내놓는 것만으로 균질화·획일화된 사고방식을 개인 스스로 갖추게 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권하는 능력주의나 자기개발을 개인은 생각 없이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대학조차 그래서는 안 된다. “대학은 시장의 편협한 명령에 항복하도록 내버려두기에는 너무나도 중요한 공적 기관”이라고 제니퍼 워시번은 말한다(<대학주식회사>). 대학이 경영학만 떠받들고 인문학은 찬밥 대접을 받게 됐다고 해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 결과 어떤 세상이 도래했는지 우리 스스로 성찰해보자는 것이다. 대학이 자본의 논리를 충실히 받아들였건만 청년들의 삶은 더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스펙 쌓기 9종 세트는 곧 10종 세트가 될 판이다.
대학이 어찌되든 나랑은 상관없는 문제라고? 결코 그렇지 않다. 여덟 살짜리 딸아이가 역사책만 파고드는 걸 보면 당장 나부터 그 책들을 불질러버리고 싶어진다(웃음). 역사 공부라는 게 대학, 나아가 이 사회가 요구하는 효율성과는 동떨어져 있음을 부모로서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대학이 무엇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당장 내 아이가 읽는 책이 달라지고, 사교육 시장이 달라진다. 나와 멀리 떨어진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든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회가 병들면 개인도 병이 든다.
대안이 뭐냐고? 대안이 없어도 비판할 수 있다
이런 사회에서 비판적 시민으로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개인적으로는 일단 “한번 사는 인생, 인간답게 살자”라는 생각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얼마 전 광화문 교보문고 빌딩에 “우주가 내게 준 것은 서로 사랑하는 힘과 질문하는 능력”이라고 쓰인 현수막이 걸려 있던데, 바로 그것이다. 이타심, 그리고 의심하고 비판하는 능력은 인간만의 것이다. 예수가 죽은 것도 율법주의자들에 대해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반기를 들었기 때문 아닌가.
“그런다고 세상이 변하냐” 하는 태도도 버릴 일이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더 나쁘게 변해왔다. “편향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말라”는 말에 흔들릴 필요도 없다. 우리 사회 자체의 균형추가 압도적으로 기울어져 있는 만큼 기존 가치에 의문을 품는 것이 결코 편향된 일은 아니다. “그래서 대안이 뭔데?” “스타벅스 커피 마시면서 자본주의는 왜 비판해?” 따위 말에 주눅 들지도 말자. 대안이 없어도 비판할 수 있다. 내 몸은 현실에 순응해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이 잘못돼 있기에 화가 나는 게 인간이기 때문이다. 대안이 없더라도, 언행이 다소 불일치하더라도 뭔가 잘못됐다는 걸 끊임없이 비판하다 보면 그것 자체가 정치를 압박하고 법적·제도적 개선을 이끌어내는 수단이 된다. 부당함에 대한 여론이 형성되면 대안이 마련되는 결정적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 나 자신도 누군가를 차별하는 데 찬성하며 일그러진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해온 것은 아닌지 늘 돌아보며 공부하고, 더 좋은 사회를 만들려 노력할 일이다.
심성이 고운 우리 반의 ‘요즘 아이들’
‘요즘 아이들’이라고 하면 으레 제멋대로이고 버릇 없다는 말이 따라 붙는다. 하지만 2학기 담임을 맡으면서 만난 아이들은 그 말을 무색하게 한다.
2학기 개학을 하자마자 묵직한 것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동료 교사가 교통사고로 입원하는 바람에 대신 담임 업무를 맡게 된 것이다. 학교에서는 담임과 비담임의 차이가 크다. 하루에도 수차례 교무실과 교실을 오가다 보면 날씨가 선선한데도 이마에 땀이 맺혀 있을 때가 많다. 하루는 손에 뭔가를 들고 바삐 걸어가는 나에게 한 후배 교사가 말을 걸었다.
“말년에 담임 하시느라 고생 많으시네요.”
“고생은 무슨? 우리 반 애들이 너무 좋아!”
그 말은 사실이었다. 남녀 혼합반인 우리 반은 ‘요즘 아이들’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심성이 곱고 사려 깊은 아이가 많다. 생각이 짧거나 이기적인 아이도 더러 있지만 편견을 버리고 비난보다는 도움을 주는 방법을 찾다 보면 생각보다 빨리 마음을 열기도 한다. ‘요즘 아이들 같지 않은 아이들이 많다’라는 말은 일종의 형용모순이다. 우린 혹시 ‘요즘 아이들’이라는 말의 함정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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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성 그림 |
B는 선거운동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조용하고 얌전한 학생이다. 선거운동 마지막 날, 피곤한 얼굴로 교실에 앉아 있는 B에게 어떻게 선거운동을 하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경험 삼아 한번 해보고 싶었노라고 했다. 그런 대화 중에도 나는 B가 지지하는 후보가 누구인지 별 관심이 없었다. 그것은 우리 반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선거가 끝난 뒤에 이 문제가 터져 나왔다. 그 진원지는 교무실이었다. 몇몇 교사가 B에게 농담 삼아 던진 ‘배신자’라는 말이 화근이었다. 그 말에 상처를 받아 눈이 벌게지도록 울고 있는 B를 뒤늦게야 발견했다. 그날 수업시간에 나는 B에게 다가가 이번 선거운동을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고 말해주었다. 같은 반이 아니더라도 선거운동을 하는 것은 당연하고, 그런 너를 비난하지 않은 A와 반 아이들도 훌륭하다고 말해주었다.
그날 종례시간이었다. 나는 B에게 해준 말을 전체 학생들 앞에서 다시 해주었다. 그런데 아이들 표정이 의외로 덤덤했다. 그거야 당연하지 않으냐는 반응이었다. 다만, 몇몇 아이가 내 말을 들으며 동공이 커지는 현상을 보이거나 의미 있는 미소를 지어 보였을 뿐.
사진 찍히길 무척이나 싫어하던 그 아이가…
D도 그중 하나였다. D는 사진 찍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지난봄 소풍 때에도 학급 단체 사진을 찍지 않겠다고 해서 적이 당황했다(나는 부담임으로 따라갔다). 내가 담임을 맡은 뒤에도 사진 찍는 것(찍히는 것)을 단호히 거부했다. 하지만 내가 주말 같은 때 단체 문자를 날리면 꼭 답장을 보내왔다. 짧지만 단정하고 진한 마음을 담아서. 얼마 전 학생회 봉사부원으로 활동하고 싶다고 해서 기쁜 마음으로 추천해주었다.
D가 학생회 리더십 일박 캠프를 떠나던 날이었다. 나를 일부러 찾아와 잘 다녀오겠노라고 인사를 했다. 그날 밤 반 아이들에게 단체 문자를 보냈다. “리더십 캠프 간 친구들은 멋지고 유익한 시간 보내거라. 일요일에 연극 공연하는 은 맡은 엄마 역 멋지게 잘하기 바란다. 참, 소풍 장소 정하면서 사진 찍는 거 좋아하는 담임 생각해서 조금 걷더라도 바다에 가서 사진 모델도 해주자고 그랬다는 말을 듣고 눈물이 핑 돌았다. 모두 고맙고 사랑한다.”
문자를 보내기가 무섭게 휴대전화에서 신호음이 연달아 울렸다. E는 멋진 포즈로 사진까지 찍어 보냈다. 리더십 캠프에 간 학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쌤에게 보여드리려고 찍은 사진이에요”라는 문구를 읽는 순간 감동이 확 밀려오는데 더 큰 것이 남아 있었다. 사진에서 D를 발견한 것이었다. 평소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었지만 대신 눈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마치 내게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선생님, 저도 사진 찍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