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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싸움, 박근혜에게 배워라" - 박정희 정권의 ‘교과서 파동’

일취월장7 2015. 10. 17. 12:25

"교과서 싸움, 박근혜에게 배워라"

[주간 프레시안 뷰] 대통령이 맞고 틀린 것
 
적과 싸우면 닮아간다고 하던가요, 박근혜 대통령이 마침내 종북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국가가 하나이듯 국사도 하나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입니다.

대통령이 맞습니다.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니, 국론이 분열되고 국민이 갈라섰습니다. 대통령이 틀렸습니다. 그 이유는 국정교과서가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대통령의 논리라면 국정화는 수학부터

우리 대통령께서는 공대를 나오셨으니 수학을 예로 드는 것이 좋겠습니다. 수학은 계산하는 방법을 배우는 학문인가요? 아닙니다. 그건 보통 산수라고 하지요. 수학은 자연의 과학적 이치를 수를 통해서 이해할 뿐만 아니라, 집합과 논리명제 등을 통해서 합리적 사고를 할 수 있게 하는 학문입니다.

수학이 계산하는 방법을 배우는 학문이 아니듯이, 역사는 기술된 사실을 암기하는 학문이 아닙니다. 외우는 대로 답을 쓰는 것도 아니지요. E. H. 카가 역사란 대화라고 한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역사에는 정답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역사에 정답이 없다면, 아이들 수능시험은 어떻게 보란 말이냐?'는 질문을 던지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대통령께서는 분명 그렇게 이해하실 겁니다. 대통령이 또 틀리셨습니다. 역사에는 정답이 없지만, 수능시험에서는 정답이 있습니다. 

학계에서 논란의 여지가 거의 없이 합의한 사실들이 그런 정답에 속합니다. 수학에서 기본적인 명제에 속하는 부분들이 그렇듯, 역사에서도 그런 사실들이 있습니다. 그런 문제들에 대해서 우리는 배운 것을 측정하는 수단으로 시험에서 정답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기준을 국가가 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이지요. 물리학과 천문학의 예를 들어볼까요?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은 오랫동안 사실이자 진리였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 이론'으로 그 사실을 뒤집었습니다. 또 얼마 전까지 화성에는 물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는 한 대학원생이 화성에 강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런 것을 국가가 정할 수 있을까요? 

역사보다 객관성, 명료성이 뛰어나다는 과학도 이론과 해석의 정확성을 국가가 정할 수 없습니다. '1+1=2'가 수학적 사실과 진리로 이해되는 것은 국가가 그것을 정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수의 학자들이 그것을 이견 없이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수학과 역사가 다르다고요? 맞습니다. 다릅니다. 무언가 기준과 표준을 정하기에 가장 가까운 학문이 과학이라면, 역사는 가장 먼 쪽에 있습니다. 하물며 수학과 과학이 학문으로서 후세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이라면, 그것에 대한 해석이 고정적이고 단일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더 이상 학문이 아니니까요.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역사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독재정권이나 전체주의 정권에서 그런 것들은 가능합니다. 단일한 역사를 국가가 정해서 가르치는 것 말입니다. 하지만, 민주국가가 그렇게 하려면, 일단 수학과 과학 교과서의 국정화부터 시작해보면 어떨까요?

역사 과목에서 분명한 정답이 하나 있습니다. 역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단 하나의 방법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야당은 국가보안법과 사학법에서 배우십시오

그럼 야당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가장 좋은 것은 상대에게서 교훈을 얻는 것입니다. 저는 비근한 사례로 국가보안법과 사학법 개정안을 들고 싶습니다.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이 시도한 이 두 법안의 개정에서 하나는 실패했고, 하나는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정권재창출에 실패하고, 국회를 상대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에, 결국은 둘 다 실패했습니다. 모든 것은 원점으로 돌아왔습니다.

배울 것이 있습니다. 당시 열린우리당은 국가보안법을 폐지할만한 정치적, 사회적 힘이 모두 부족한 상황에서 무리하게 시도했습니다. 안됐습니다. 역풍을 맞았습니다. 이것이 이번 국정교과서 논란에서 야당이 배울 점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은 야당이 해볼 만한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사학법 개정에는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이를 기점으로 정치적 고립을 벗고, 시민사회, 종교계, 학계, 경제계를 아우르는 거대한 연대를 구성할 수 있었습니다. 사학법과 연계된 개별적 이해관계들이 결국은 정치와 정당을 통해서만 결집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습니다.

한겨울 매서운 추위에서도 흔들리지 않은 대오를 통해 선거에 진 당을 추슬렀습니다. 당시 사진을 보면 박근혜 대통령이 강추위로 벌게진 얼굴을 하고 신촌 거리를 누비는 장면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동지적 연대감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한나라당이 선거에서 승리하고, 사학법은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상지대 등 전국의 비리사학들은 이제 모두 되살아났습니다. 법과 정책이란 그렇습니다. 정권을 잃고, 국회를 잃으면 다시 돌아갑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내가 모든 것을 다 하는 것이 아니라, 정권의 지속성을 갖고, 선거에서 꾸준히 승리하는 것입니다. 충분한 시간 동안 그 효과를 국민들이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정치는 지속되니까요.

▲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006년 한나라당 대표 시절 서울시청 광장에서 열었던 사학법 반대 집회. ⓒ연합뉴스



지금이 전력으로 싸울 때입니다

분명합니다. 정부 여당에게 유리한 싸움은 아닙니다. 국정교과서에 대한 여론은 팽팽한 것으로 나옵니다. 예전 국가보안법 개폐 때에도 그랬습니다. 영남에서는 지지가 압도적으로 많지만, 호남과 충청은 다릅니다. 결정적으로 수도권에서는 반대가 많습니다. 

법률적, 행정적으로 국정화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되돌리면 됩니다. 바로 내년에 선거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 사실을 국민들에게 주지시켜야 합니다. 수도권에서 야당의 압승이야말로 국정교과서를 중단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점을 국민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국정교과서는 이념적, 정치적 사안이고, 보수/진보 대립구도를 강화시키기 때문에 불리하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민생사안이 아니니 말려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이것은 과거 NLL 포기 합의 논란이나, 고영주 방문진 이사장의 문재인 공산주의자 발언 사건과는 다릅니다.

그 사건들은 당이 총력을 집중해서는 안 되는 사안이었습니다. 당에서는 이것을 정치적인 사안이라고 보았겠지만, 국민들이 보기에 그것은 노무현과 문재인의 사건입니다. 고영주 씨가 왜곡된 세계관을 갖고 있어서 야당이 저렇게 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문재인을 욕했기 때문에 야당이 저렇게 펄펄 뛴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시각은 국민들이 잘 몰라서 그런 게 아니라 맞는 생각입니다. 왜 야당은 고영주 씨가 방문진 이사장이 될 때는 가만있다가, 이제와서 문재인이 공산주의자냐 아니냐를 물으면서 국정감사를 파행시킵니까?

중요한 것은 국민들이 그 사안에 관심이 있느냐 없느냐, 그 사안의 당사자가 국민이냐 정치인이냐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문재인을 공산주의자라고 했더니, 다수 국민들이 분개하고 학자들이 나서고 거리로 학생들이 나섰습니까? 아닙니다. 그런 사안에 야당이 총력을 기울인다면 당연히 민생을 외면하는 정당이 되는 것입니다. 새누리당은 그 기회를 포착해서 노동개혁을 들고 나오면서 민생정당을 외칠 것입니다.

싸우되 민생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국정교과서는 다릅니다. 다수의 국민들이 관심이 있습니다. 어쩌면 이명박 정부 이래 민생이 아닌 문제로 거의 처음 정치적 쟁점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중요한 것은 외연을 확대하고 연대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한나라당이 사학법 재개정에 목을 매 성공한 이유는, 다양한 보수 세력이 이 사건을 계기로 한데 뭉쳤기 때문입니다. 2007년 대선에서 패배한 뒤에 소위 민주, 진보, 개혁 세력은 정치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분열되어 있습니다. 시민사회는 황폐화되다시피 했습니다. 국민들의 시선도 따갑습니다.

외부적으로 연대가 형성되지 않으면, 내부적으로 싸우게 마련입니다. 누군가에게 그 책임을 돌려야 하니까요. 그 결과는 진보세력의 분열과 제1야당의 계파정치화입니다. 이 모든 것을 뒤집을 수 있는 때가 왔습니다. 

중요한 것은, 국정교과서 문제에 집중하면서 동시에 어떠한 민생 이슈도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외연을 확장하고 사회적 연대를 강화하는 방법입니다. 국정교과서에 투쟁하듯이 민생 문제에 대해서도 전심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그렇게 전선을 확장해야 합니다.

이 전선은 반드시 민생법안과 정책을 향해야지, 다른 정치적 사안으로 번져서는 곤란합니다. 강동원 의원의 대선불복 주장 같은 것이 그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연대가 떨어져나가고 본질이 흐트러집니다. 무엇보다 국정교과서가 정쟁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국민에게 심어주게 됩니다.

태도는 악착같이, 전술은 유연하게, 전략은 계산적으로

바둑이 그렇든가요. 내가 잘해서 이기기보다는 상대가 실수를 하느냐, 그 때를 얼마나 잘 포착하느냐, 그리고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달려있다고요. 선거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국정교과서 문제와 이를 통해 엮어진 사회적 연대가 선거 승리의 수단이자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당 내부의 결속을 강화하고, 해당 행위는 엄벌해야 합니다. 선거가 코 앞입니다. 당 지도부가 한참 전력을 기울이는 판에 지역구에 올인하는 의원들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읍참마속은 이럴 때 필요합니다.

여론이 불리하지 않은 싸움에서 지는 경로는 하나입니다. 내부반란, 외부단절, 갈팡질팡, 유야무야, 선거패배의 길이 그것입니다. 태도는 악착같이, 전술은 유연하게, 전략은 계산적으로, 국회의 절차를 지키면서 싸우십시오. 국민과 우리의 다음 세대를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들을 위해서 그렇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박정희가 죽었을 때, 교실에서 울었던 이유

[인권오름] 진실에 대한 권리의 침해는 기록에 대한 권리 침해
 

나는 국정 교과서 세대다. 박정희 독재자가 죽었을 때 나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교실에서 펑펑 울었다. 왜냐면 나는 그가 독재자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주말마다 학교 운동장에서 틀어주는 영상을 보며 퍼스트레이디였던 육영수 여사의 선행 소식만을 접했던 나로서는 당연한 태도였다. 나의 사회인식과 감수성은 학교에서 배운 대로였다.

그가 독재자인 걸 안 것은 중학교 들어가서였다. 집안에 떠돌던 잡지 <신동아>에 나온 신군부의 등장에 대한 심층 취재 기사를 보며 어렴풋이 알기도 했지만, 주변 사람들을 통해 알게 됐다. 대학생들이 시위하다 쫓겨 동네로 들어오는 소리를 통해, 사회 선생님이 해주신 교과서에 없는 얘기를 통해, 박정희가 좋은 대통령이 아니었고 전두환 대통령도 입 뻥긋 못하게 하는 사람이라는, 여전히 무서운 시대라는 걸 알게 됐다. 교과서에 없는 것들을 알려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고 독재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니 국정 교과서가 된다고 해도 역사적 진실을 완전히 덮지는 못할 것이라는 낙관적 태도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건 우연히 진실을 말해줄 사람을 만나길 기대하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탄탄하게 권력이 구조화된 시대에 우연을 기대하는 것은 로또를 기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아니 더 중요한 것은 한국사 국정화 조치가 '과거로의 회귀', '후퇴적 조치'이기에 가만히 손 놓고 있어서는 안 된다.

1972년 유신 독재로 장기 독재를 꿈꾸던 정부는 1973년 문교부 발표 이후 검·인정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를 8개월 만인 1974년부터 국정 교과서로 바꿨다. 그러다 민주화가 되면서 서서히 검·인정으로 바뀌었다.


 

ⓒ프레시안(서어리)


진실을 기록하고 전달할 권리

특히나 한국 교육이 입시 위주의 암기형 교육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국정 교과서가 차지하는 위력은 대단할 수밖에 없다. 교과서가 참고 자료만 되고 토론식으로 역사적 사건을 평가하는 교육이 아닌 현실에서 '국정 교과서'로 바뀐다는 것은 중요한 변화다. 독재 정권을 독재라 말할 수 없고 친일파를 친일파로 일컬을 수 없게 만든다. 아니 알기 어렵게 된다. 결국 이는 우리 사회의 '진실에 대한 권리'를 침해하는 일이다.

국제사회에서 진실에 대한 권리는 독재자들에 의해 사라진 실종자 가족들의 '사건의 진실'을 알 권리로부터 시작됐다. 그러다 극악한 범죄가 재발하지 않도록 과거 사건에 대한 진실을 알 권리는 사회적 차원에도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과거 사건의 진실을 알아야 할 양도 불가능한 권리를 갖는다"고 선언했다. 진실에 대한 권리는 진실을 기록하고 전달하는 것도 포함한다. 진실에 대한 권리의 침해는 기록에 대한 권리 침해를 동반한다.

국정 교과서로 바뀌면서 독재정권이 저질렀던 만행은 지워지고 친일파의 행적도 종적을 감출 것이다. 다시 독재는 부활하고 민주주의는 뒷걸음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될 것이다.

검정제냐 아니냐가 핵심이 아니다

따라서 '검·인정 교과서냐, 아니냐라'는 교과서를 정하는 제도에만 주목해서는 안 된다. 형식이 아닌 그 형식을 통해 달성하려는 내용에 주목해야 한다. 교과서는 교육부가 편찬하는 국정 교과서, 국가의 검정을 받아 민간에서 편찬하는 검정 교과서, 관련 부처 장관의 인정을 받아 민간에서 편찬하는 인정 교과서가 있다. 국정 교과서는 획일적이고 검정 교과서는 좀 자유롭고 인정 교과서는 완전 자유롭다는 식의 사고는 지금의 사태를 제대로 읽지 못하게 한다.

 


이미 경험했던 교학사 역사 교과서 왜곡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검정 교과서도 사실 왜곡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게다가 정부는 집필 기준, 수정 명령, 검정 기준 등으로 개입한다. 즉 검정 교과서가 자동적으로 다원성과 창의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검정 교과서도 국가가 정한 집필 기준에 의해 사실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왜곡될 수 있다. 따라서 검정 교과서나 인정 교과서가 자동적으로 사실을 전달하는 것인 양 바라봐서는 안 된다. 지금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다원적 해석이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과거사, 과거의 인권침해-에 대한 부정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는 2011년 당시 교육과학기술부가 배포한 '2009 개정 교육 과정'에 따른 교과 교육 과정 적용을 위한 역사·국어·도덕·경제 등 4개 과목의 중학 교과서 집필 기준에 잘 드러난다. 집필 기준에는 이승만·박정희의 '독재' 부분을 "자유민주주의가 장기 집권 등에 따른 독재화로 시련을 겪기도 했으나 이를 극복했으며 (…) 역대 정부의 공과를 서술할 경우에는 균형 있게 다루도록 유의한다"고 돼 있다. 독재정권이라 평가하지 말라는 소리다.

세계인권선언의 바탕이 되는 역사적 사실인 제2차 세계 대전의 참상을 성찰했기에 우리는 인권의 가치를 공동의 가치로 만들 수 있었다. 이처럼 '인권 침해의 역사'를 알고 우리 사회의 인권을 세워가야 한다. 그것은 해석의 영역이 아니다. '검정 교과서가 더 자유민주주의에 맞다'는 자유주의적 논리가 자칫 보수 집권 세력의 근간인 친일 독재 세력의 역사 왜곡마저도 '균형적'이라는 말로 수용될 여지를 주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국정화 전환의 본질, 보수세력의 정통성 수립 의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전환의 본질은 색깔논쟁을 부추겨 보수 세력을 집결시키는 단기적 효과만이 아니다. 장기적으로 친일 독재 세력의 역사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식민지에서 해방, 그리고 분단, 군사 독재정권이 이끈 개발 독재 시기까지의 민중의 삶을 짓밟았던 그 세력들이 자신의 역사적 정당성을 확고히 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친일과 독재가 문제'라고 보는 정당한 평가를 소수의 흐름으로 만들 것이다. 보수 세력 집권 이후 친일 독재가 기여한 것이 있다며 공론의 장을 흩뜨려 놓더니 이제는 공론의 장을 국정화로 장악하겠다는 것이다. 사실 왜곡을 바탕으로 해 역사 담론을 장악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 박근혜 정부의 국정화 시도는 대통령이 아버지에 대한 찬양을 마음대로 하고 싶어 하는 '대통령의 개인적 욕망'이 아니다. 역사 담론마저도 자신의 손아귀에 넣겠다는 의지의 천명이며, 이는 '보수 세력의 집단적 의지'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밀어붙이는 것은 보수 세력이 집권한 지 8년째이지만 여전히 지지 기반이 굳건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버젓한 대항 세력조차 없는 현실의 역관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더욱 무서운 것이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다. 원래 불가능해 보여도 인간적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싸워서 얻어진 것이 인권이 아니던가. 진실을 기록하고 전달할 권리를 우리는 놓을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영화 <암살>에서 친일 행위를 했던 염석진이 반민특위 재판을 받으며 사실을 왜곡할 수 있었던 것처럼, 친일 독재 세력이 과거를 반성하기보다는 나라를 위해 헌신한 양 떠드는 뻔뻔한 일이 지속되지 않겠는가. 성공한 쿠데타가 혁명으로 둔갑하지 않도록 막아야 할 의무와 권리가 우리에게 있다.

 

 

박정희 정권의 ‘교과서 파동’

  조회수 : 1,556  |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  |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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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2호] 승인 2015.10.16  20:52:14

자본주의는 돈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들도 상품으로 만드는데, 자본주의 체제에서 ‘사람이 돈이 되는’ 이른바 사람 장사의 대표 분야 두 군데가 바로 화류계와 출판계다. 화류계와 출판계의 또 다른 공통점은 은퇴가 빠르다는 것이다. 사오정(45세 정년)과 오륙도(56세까지 남아 있으면 도둑놈)란 말이 우리 사회에 일반화되기 전부터 출판계는 이미 사오정과 오륙도의 시대였다. 책이 좋아서, 책을 만들고 싶어 출판계로 뛰어들었지만, 머리에 서리가 내릴 무렵이 되면 제아무리 실력과 식견이 뛰어난 편집자라 하더라도 이제는 독립을 해야 할지, 계속 머물러야 할지 고심하게 된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적은 월급에 내일을 보장받을 수 없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정말 만들고 싶은 책이 있어도 현재의 조건에서는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일반 직장인들이 퇴직하고 제일 많이 뛰어드는 분야가 음식업계라서 한국의 닭튀김집이 전 세계의 맥도날드 매장보다 많다는 우습지 않은 통계도 있지만, 출판편집자와 영업자들은 그나마 배운 ‘도둑질(?)’이라고 1인 출판의 길로 나서고 있다. 단군 이래 최대의 불황이라는 출판계 불황이 어느덧 30여 년째인데도 1인 출판사 창업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이처럼 출판계의 고질적인 구조와 무관하지 않다.

대다수 중견 출판사가 그때 그 시절 탄생한 배경

한국 출판의 역사를 살피다 보면 해방 이후 창업해 현재에 이르는, 역사가 오래된 출판사도 있지만, 오늘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다수 중견 출판사가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에 생겨났다는 걸 알 수 있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전후한 1950년대 출판의 중심은 누가 뭐래도 ‘교과서’였다. 종이도, 인쇄기도 부족한 상황에서 출판계는 전쟁 중 부산에서 정부의 지원을 받아 1952년 11월 한국검인정도서공급주식회사를 창립했다. 이후 교과서 출판이 출판사를 기업화하는 견인차 구실을 하면서 교과서 출판업자들이 승승장구하게 되었다. 이들 1세대 출판사가 교과서를 펴내며 축적한 자본을 바탕으로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중반까지 전집 붐을 일으킬 수 있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1977년 3월 ‘교과서 파동’으로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는 출판인들.  
ⓒ연합뉴스
1977년 3월 ‘교과서 파동’으로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는 출판인들.

그러나 1972년 10월 유신 이후 계속되는 집회와 대학생들의 시위로 골머리를 앓던 박정희 대통령은 1977년 3월 이른바 ‘교과서 파동’이라는 사건을 일으켰다. 교과서 출판업자들이 세금을 탈루했다는 것인데, 대통령의 관심이 쏠린 사건이었던 만큼 국세청이 매우 강도 높게 세무조사를 진행했고, 특수수사대가 구성되어 1개월 동안 37명 이상의 출판인을 구금해 조사했다. 구금된 상태에서 강박으로 작성한 자인서를 근거로 세금을 추징했는데, 그 액수가 127억원에 이르렀다. 이 사건과 관련된 117개 출판사 가운데 96개가 교과서 업계를 떠났고, 출판업 자체를 접었다. 오늘날 사조참치로 유명한 ‘사조산업’도 그렇게 출판업을 접고 업종을 전환한 업체 중 하나다. 이들은 사건 발생 12년 만인 1989년 5월, 대법원 판결로 일부나마 명예가 회복되고, 당시 추징당했던 세금도 환불받았다

유신정권이 검인정교과서를 국정교과서로 바꾸기 위해 벌였던 검인정교과서 파동으로 공동화(空洞化)된 출판계의 빈자리를 채운 것은 언론 자유를 주장하다 해직된 언론인과 강제 해직된 교수, 민주화를 외치다 제적당한 청년 지식인이었다. 블랙리스트에 올라 취업도 할 수 없었던 이들을 먹여 살린 것이 출판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사상 통제를 위해 추진한 일련의 정치 탄압으로 인해 오히려 의도하지 않은 새로운 출판 주류가 탄생하고, 그 속에서 저항담론이 창출된 것이다. 이처럼 출판계의 변동과 지식 생산 과정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오늘날 1인 출판사들이 이처럼 많아진 까닭은 일차적으로 출판계의 구조적 문제가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더 이상 대학과 사회가 수용할 수 없는 저자이자 독자로서의 청년 지식인, 다른 말로 청년 백수들을 양산하는 시대상과 결코 무관하다 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