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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공로자 찾아내 보조금 주는 중국…한국은?

일취월장7 2015. 8. 20. 10:43

 

 항일 공로자 찾아내 보조금 주는 중국…한국은?

[원광대 '한중관계 브리핑'] 독립운동하면 3대 망하는 한국의 현실
 

지난 8월 15일 광복 70주년을 맞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라를 되찾은 지 70년이 되었는데도 나라 안팎은 여전히 화해와 평화를 찾을 수 없는 긴장과 갈등의 연속이다. 한중일 간 과거사 문제는 여전히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한반도 내부 사정은 또 어떠한가. 목함지뢰 사건과 북한의 일방적인 표준시 변경으로 남북한 관계는 더욱 경색되어가고 있다. 전쟁을 일으킨 국가와 피해국 간의 화해를 통해 종전의 기쁨을 누리고 국가를 위해 희생된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추모하는 평화의 날이 돼야하지만, 올해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항일전쟁에 대한 재조명

한국처럼 국공합작으로 일본과 싸워 국가를 지켜낸 중국도 대일 전승일을 기념한다. 다만 한국은 일본이 라디오를 통해 항복을 선언한 날, 즉 8월 15일을 국가를 되찾은 날로 기념하는 반면, 중국은 일본이 항복문서에 서명한 다음날인 9월 3일을 전승기념일로 지정하고 있다. 올해 항일전쟁 70주년을 맞이하는 중국은 조금은 특별한 기념식인 9.3 열병식을 준비하고 있다. 세계 각국 대표를 초청하여 진행되는 열병식에 항일전쟁에 참전했던 노병들과 그 자손들을 참가하도록 한 것이다. 이들의 열병식 참석은 단순히 참석 이상의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중국은 지난해 대일 전승일을 법정 국가기념일로 격상시켰다. 또한 항일전쟁에 참여하여 국가와 민족을 위해 피를 흘린 병사들의 공로를 인정하고 치하하기 위한 일련의 정책을 발표하였다. 지난 8월 11일 민정부(民政部), 재정부(财政部), 국가위생·계획생육위원회(国家卫生计划生育委员会)가 공동으로 항일전쟁 참전 노병사(老兵士) 위문 계획에 관한 통지(通知)를 각 급(级) 정부에 하달하였다.

통지의 내용은 크게 7가지 사항을 담고 있다. 본 통지는 △일회성 생활보조금 5000위안(한화 약 90만 원) 지급, △항일전쟁 참전 생존 노병에 대한 위문 방문, △생계가 어려운 노병사에 대한 구호, △편리하고 우수한 의료보건 서비스의 제공, △항일전쟁 참전 노병사의 열병식 참석, △항일전쟁 70주년 기념 훈장 수여, △항일 열사 및 영웅단체 명단 공개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사실 중국 각지에서 모여든 항일전쟁 병사들은 해방군의 그늘에 가려져 그들의 업적과 공로를 인정받지 못 했다. 특히 전쟁 후 고향으로 돌아간 재향(在乡) 병사의 경우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항일전쟁 70주년을 맞아 그들의 업적이 재조명되고 있다. 이는 중국정부가 과거에 비해 항일전쟁과 대일 전승일에 보다 큰 의미를 두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 및 영토분쟁 등으로 인한 갈등에서 비롯된 역사인식의 변화일 것이다.

중국, 노병에게 건네는 5000위안(元)의 의미

중국 정부가 발표한 통지에 눈여겨 볼만한 사항이 있다. 5000위안의 생계보조금이다. 중국이 항일전쟁 참전병사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한 것이 처음은 아니다. 2010년 항일전쟁 승리 기념 65주년에 생존해 있는 재향 항일전쟁 참전 병사에게 생계보조금 3000위안을 지급한 적이 있다. 65주년과 70주년의 차이는 보조금이 2000위안 많아진 것뿐만 아니라, 보조금 지급대상이 확대됐다는 점도 있다. 65주년 당시 보조금 지급대상은 1937년 7월 7일~1945년 9월 2일 기간에 입대한 병사 중, 생존해 있는 재향 항일참전 병사만 포함되었다. 하지만 올해 그 범위가 대폭 확대되었다.

보조금 지급대상은 총 4종류로 나뉜다. 우선 항일전쟁 시기 제대한 재향군인과 장애군인, 그리고 항일전쟁 시기 퇴역한 군인 간부 및 군적이 없는 노동자가 포함됐다. 다음으로 항일전쟁 시기 국민당(国民党)군대에 복역하다가 해방전쟁 중 무장혁명이 일어나자 해방군에 투항하고 제대한 재향군인 및 항일전쟁에 참전한 적이 있고 이후 농민으로 귀향한 국민당 항일전쟁 참전 병사도 추가로 포함됏다.

중국 정부가 군적이 없는 노동자를 포함시키면서, 꼭 군인이 아니어도 항일전쟁에 참전하여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이들의 공로를 폭넓게 인정한 것이다. 또한 국민당 항일전쟁 참전 병사가 보조금 지급대상에 포함된 것이 매우 이례적이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항일전쟁에서 이들에 대한 공로를 인정하지 않던 중국 정부가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국공합작으로 이뤄낸 승리이니만큼 공산당 병사인지 국민당 병사인지 여하를 불문하고 그 공헌을 국가가 인정하고 기념하겠다는 것이다. 다만, 항일전쟁에 참전하였지만, 해방전쟁 전(全) 시기에 농민으로서 농사를 짓지 않았거나, 해방군에 투항하지 않고 계속 국민당 군대 소속을 유지한 국민당 병사는 여전히 보조금 지급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 민정부의 설명이다.

2010년 중국이 최초 보조금을 지급할 때만 해도 지급대상이 되던 노병들은 12만 3000명이었다. 5년이 지난 지금은 그 지급대상을 확대하였는데도 불구하고 5만여 명 정도다. 생존해 있는 항일전쟁 참전 노병사들은 이미 아흔의 나이에 가까운 고령자들이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그들의 젊음을 전쟁터에서 보내고도 국가로부터 변변한 대우도 받지 못했는데, 더 늦기 전에 국가가 이를 바로잡기 위해 나선 것이다.

한국,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

광복 70주년을 맞는 한국도 올해는 무언가 특별한 움직임이 있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여성독립 운동가들에 대한 발굴이 시작된 것이다. 남성중심의 역사인식 속에 묻혀 빛을 보지 못했던 여성 순국선열들의 희생과 애민·애국정신이 후대에 알려지게 되어 다행스럽고 또 기쁘다.

하지만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속설이 우리 사회에 여전히 떠돌아다닌다. 이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이나 애국지사의 공로가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인정 못 받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것을 국가가 인정해주지 않고, 후대가 그 정신을 이어받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국가가 위기에 빠졌을 때, 그 누가 독립운동가가 했던 것처럼 자신을 희생하여 나라를 구하려 하겠는가.

광복 70주년을 기념하여 사회의 혼란을 야기한 범죄자들의 죄를 사할 것인가가 아니라 고귀한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했지만, 그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많은 순국선열들을 한 명이라도 더 찾는 데 힘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윤성혜 교수는 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 법률연구소의 연구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경성은 일본의 '게이죠'다"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경성이냐, 게이죠냐?
 
디벨로퍼. 땅 매입부터 기획, 설계, 마케팅, 사후 관리까지 총괄하는 부동산 시행사, 혹은 개발자를 말합니다. 이름 그대로 부동산을 새로운 용도로 개발하는 이를 가리킵니다. 해외와는 달리 한국에서는 디벨로퍼의 이미지가 좋지 않습니다. 제대로 된 디벨로퍼가 부재하기 때문입니다.

근대의 디벨로퍼들, 정확히 일제 시대 때 활동했던 디벨로퍼들에 대한 평가도 비슷합니다. 집 장사꾼으로 치부됩니다. 하지만 다른 관점도 제기됩니다. 일본인으로부터 '조선인의 경성'을 지켜낸 사람들이라는 평가입니다. 

김경민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교수가 현재의 북촌, 인사동을 포함해 서울 전역에 근대 한옥 단지를 개발한 정세권에 관한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이를 통해 근대의 디벨로퍼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920년대 조선인들은 경성이 일본인에 의해 점령될지 모른다는 심각한 두려움에 휩싸였다. 1910년 일제의 조선강점을 시점으로 일본인들이 경성을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경제마저도 장악하리라 확신했다. 그렇기에 조선인들이 일본인들에게 종속되고 궁극에는 조선인의 경성이 아닌 일본인의 경성으로 바뀔 것을 염려하였다.

"대경성을 계획하고 대도시를 설계하는 도다. 나날이 발전하고 나날이 융성하는 도다. 그러나 그 융성하는 경성이 어찌 조선 사람의 경성인가, 조선 사람은 (자본이 없기에) 집을 팔아먹고 땅을 팔아먹고 도망하되, 일본 사람은 그 반대로 사고 얻고 하여 일일이 물밀듯이 경성에서 발전 팽창하여 가는 도다. 이와 같이 조선인의 경성은 망하여가고 일본인의 경성은 흥하여 가는 도다!"1)

"이와 같이 일면 일본 사람이 왕성하는 동시에 조선 사람은 멸망하여 가는 도다. 조선 사람은 먹을거리가 없는지라. 어찌 망하지 아니하기를 바라며, 수입의 길이 없는지라 어찌 그 집과 땅을 지키고 이 경성을 자기가 살고 있는 도시로 삼을 수 있을 것인가. 조선 사람으로서는 멸망하여 가는 경성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원한의 피가 끊는 도다."2)

당시 이순탁 연희전문 교수는 <동아일보> 기고에서 비참한 심정을 드러냈다. 

"경성은 이조 오백 년 동안 조선 경제의 중심이었으며, 정치의 중심이었으며 문화의 중심이었으며 인물의 중심이었으며 외교의 중심임과 동시에 소비의 중심이었으며 사치의 중심이었으며 착취의 중심이었으며 협잡의 중심이었으며 죄악의 중심이었다. 요컨대 조선의 모든 중심이었다. 이리하여 금일까지도 조선 사람에게는 경성은 조선의 중심과 같이 생각될 뿐 아니라, 외국인에게도 그렇게 생각되는 것 같다.

그러나 경성은 벌써 조선의 중심이 아니다. 조선인의 중심이 아니다. 즉 경성은 조선의 중심이 아니라, 게이조(경성의 일본식 발음)의 중심이며, 조선인의 경성이 아니라 일본인의 경성이다. 경제 방면으로 보아서 그러한즉, 다른 방면이야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3)

▲ "경성이냐? 게이죠냐?". ⓒ동아일보


그는 특히 일본인들이 조선인들보다 더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상황을 심각하게 우려하였다. 당시 경성부 토지 면적은 대략 1000만 평에 이르렀는데 이 중 국공유지를 제외한 사유지(조선인, 일본인 및 기타 외국인 보유 토지)는 대략 440만 평으로 전체의 44%에 이르렀다. 이 중 조선인 소유는 159만 평인데 비해 일본인 소유 토지는 164만 평에 달한다. 기타 외국인 토지가 113만 평이었다고 하니, 조선인 소유 토지 비중은 전체의 16%가 안 되는 상황이었다. 특히 국가 체제를 일제에 강압적으로 빼앗긴 상황에 국공유지와 (민간) 일본인 소유 토지를 모두 합하면 일제 혹은 일본인에 의해 확보된 토지는 무려 경성 전체의 72%에 이른다.4)

조선인 보유의 토지 면적이 일본인에 비해 적다는 것은 토지 양적인 측면에서 조선인들이 일본인에 비해 토지 시장에서 수세에 몰린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토지의 질적인 측면이었다. 토지의 질적인 측면이라 함은 토지가 도시의 어느 지역에 위치하느냐와 관련된다. 예를 들어, 명동과 같이 유동 인구가 많은 지역 토지와 서울 변두리 지역 토지를 비교할 때, 비록 면적이 같다 하더라도 두 토지 간 가격 차이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따라서 토지 시장에서 기실 더 중요한 부분은 토지의 규모(토지의 양)보다는 토지 가격(토지의 질)이다.

토지 가격을 보면 조선인과 일본인 간 불평등은 더욱 심화된다. 조선인 보유 토지 가격은 879만 원인데 반해, 일본인들의 보유 토지 가격은 60% 이상 높은 1566만 원에 이르렀다. 조선인과 (민간) 일본인 보유 토지 규모 차이가 그리 크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인 보유 토지 가격이 조선인보다 훨씬 높다는 것은 매우 요지의 토지들을 일본인들이 소유하고 있었던 것을 뜻한다.

또한 당시 조선인 인구수는 일본인보다 3배가 많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1인당 보유 토지 규모와 보유 토지 가격을 계산한다면 그 불평등성은 매우 심각하다.

"큰 집과 좋은 땅은 전부 일본인 소유 : 해마다 조선 사람의 소유 토지나 가옥은 (…) 조선 사람의 손을 떠나 다른 사람의 손으로 건너가고 (있기에…) 멀지 않은 장래에 조선 사람은 다소 시기의 장단이 있을 뿐, 전부가 걸인이 될 것을 추측할 수가 있다. () 인종별로 보면, 값이 높은 중앙 번영 지대는 전부가 일본 사람과 외국인이요. 조선 사람은 모두 산밑 움막살이 초가집이 대부분"5)

토지를 보유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바, 1923년 조선총독부 자료(<통계 연보>)에 의하면 호별세(1년 소득 1000원 이상인 사람이 내는 일종의 소득세)를 내는 경성 거주 조선인은 20만 명 중 불과 2000명으로 전체 경성 소재 조선인의 1%에 불과하였으나, 일본인은 7만6000명 중 9500명이 냈다. 통계상으로 경제력을 갖춘 조선인은 일본인의 4분의 1수준밖에 되지 않은 것이었다.6)

따라서 조선인이 일본계와 경쟁하여 토지를 확보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따라서 경성의 조선인들은 경제적 힘이 미약했기에 그들의 미래를 두려워했고 조선인의 경성이 아닌 일본인의 게이죠로 바뀔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경성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비록 3배가량 많이 있다고 하더라도 경성이라는 곳의 소유자가 되지 못하고 오직 그 집의 고용인사역자(일본인 토지주 또는 기업주의 공용된 조선인) 밖에 되지 못하면, 벌써 그 집의 주인은 아니다. 경성은 벌써 '경성'이 아니다. 경성은 '게이죠'다."7)

1) "멸망하여 가는 경성 (상) 경성이 다 이렇다", <동아일보> 1923년 3월 6일.
2) "멸망하여 가는 경성 (중) 경성이 다 이렇다", <동아일보> 1923년 3월 6일.
3) "경성이냐? 게이죠냐?", <동아일보> 1927년 1월 5일.
4) <동아일보>, 앞의 기사.
5) "조선인 토지 가옥, 일인의 사분의 일–오백원 이상 납세자는 일본인, 오원 미만에는 전부가 조선인", <조선일보> 1927년 12월 11일.
6) 강병식, "일제하 서울(경성부) 토지 소유 실태와 사회상에 대한 연구", <역사와실학> 3집, 1992년.
7) "경성이냐? 게이죠냐?", <동아일보> 1927년 1월 5일.

 

 식민 도시로 전락한 경성, 인구는 늘지만…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1920년대 급변의 경성
 

 

 

 

디벨로퍼. 땅 매입부터 기획, 설계, 마케팅, 사후 관리까지 총괄하는 부동산 시행사, 혹은 개발자를 말합니다. 이름 그대로 부동산을 새로운 용도로 개발하는 이를 가리킵니다. 해외와는 달리 한국에서는 디벨로퍼의 이미지가 좋지 않습니다. 제대로 된 디벨로퍼가 부재하기 때문입니다.

근대의 디벨로퍼들, 정확히 일제 시대 때 활동했던 디벨로퍼들에 대한 평가도 비슷합니다. 집 장사꾼으로 치부됩니다. 하지만 다른 관점도 제기됩니다. 일본인으로부터 '조선인의 경성'을 지켜낸 사람들이라는 평가입니다. 

김경민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교수가 현재의 북촌, 인사동을 포함해 서울 전역에 근대 한옥 단지를 개발한 정세권에 관한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이를 통해 근대의 디벨로퍼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1) 
"경성은 일본의 '게이죠'다"
일제 강제 합병의 결과, 경성이 식민 도시로 전락하면서 수도로써의 지위를 상실하게 된다. 더 나아가 일제는 조선의 수도였던 경성의 지위를 깎아 내리고자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였는데, 이 조치로 말미암아 경성의 범역은 크게 축소된다.1)
경성이 식민 도시로 전락하면서 정치 행정 업무에 종사하던 조선인들은 생활 근거를 상실하였고, 이들 다수는 경성을 떠났다.2)  또한 1910년대 일제의 강압적 무단 통치를 피해 만주와 중국으로 이주한 조선인들도 많았다.

경성에 거주했던 조선인들이 경성을 떠났음에도, 경성의 총 인구수는 1910년 강제 합병부터 1910년대 말까지 대략 25만 명선을 유지하면서 큰 변화가 없었다. 조선인들이 경성을 빠진 자리를 일본인들이 채웠기 때문이다. 1914년부터 1920년 불과 6년 사이 일본인의 수는 5만9000명에서 6만5000명으로 10% 이상 늘어난다. 

하지만, 인구가 정체되었던 1910년대가 지나고 1920년이 되면서 경성은 새로운 변화를 겪게 된다. 경성은 이전과 다른 차원의 산업화와 도시화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경성, 10년간 4.5배의 성장

1920년 회사령이 철폐되어 회사 설립이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뀌면서, 경성에 각종 회사와 공장들이 설립되기 시작하였는데, 일본인들이 건설한 회사와 공장이 압도적으로 많았음은 물론이다. 1920년 불과 200여 개에 불과했던 회사의 수는 1930년 900여 개에 이르게 되어 10년간 무려 4.5배의 성장이 이루어졌다.3) 
이러한 성장의 기류 속에 나타난 가장 큰 특징은 소비 도시 경성이 생산 도시로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1928년 <조선일보> 기사는 경성이 "소비 도시로부터 생산 도시로 일변"하고 있고, "십사 년 전과 비교하면 6배가 늘었다"고 밝히고 있다.4) 

"일본사람이 경영하는 공장은 대활기를 띄어 작금량년에는 대자본이 들어와서 시내 공업 지대를 엿보는 중이며 널리 시외까지 공장터를 엿보는 중으로 공업 지대로 변한다는 게 경성의 장래는 우리에게 관계없는 생산적 도시가 되리라 한다."

사업체의 증가는 자연적으로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였는데, 이는 지방에서 토지를 일제에 빼앗긴 계층이 공장들이 들어선 도시로 이주하면서 충당되었다. 1918년 토지 조사 사업이 완료되고 산미 증산 계획이 시작되면서 조선의 농민층은 토지를 빼앗기며 경제적으로 몰락하였는데, 이들은 그나마 자신들의 노동력으로 일할 수 있는 공장이 있는 도시로 이주하였다.5) 

경성이 산업 도시라는 특징을 띠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었고, 농촌의 빈농들이 경성으로 몰려들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경성으로 모여든 빈농들 모두가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기에, 도시 내 주거 빈민(걸인)은 큰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근일 서울 시내에는 걸인이 많이 증가되었으며, 앞으로도 더욱 증가될 형세로 농촌 형편이 곤란하여 시골서 살 수 없는 사람이 상경한 까닭이다."6)

비단 몰락한 저소득 농민층만 경성으로 몰려든 게 아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실력 양성에 대한 사회의식이 높아진 가운데, 1924년 경성제국대학의 설립으로 대변되는 고급 교육 제공 기회는 지방 부유층에게는 경성을 매력적인 주거지로 만들었다. 여기에 보건의료 체계 개선으로 사망률이 감소하고 출생률이 증가하면서 자연 증가율도 상승하였다.7) 

이로 인해 경성의 인구는 25만 명(1920년)에서 35만 명(1930년)으로 10년 사이에 40% 폭증하였고, 불과 15년 후인 1935년 인구는 1920년 대비 60% 증가한 40만 명에 이르게 된다.

경성, 유럽과 동일한 문제 발생했지만 피해는 조선인에 집중

1920년대 경성이 산업 도시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19세기 유럽 도시들이 산업 도시로 변화하는 과정과 매우 흡사하다. 산업 혁명을 겪으면서 유럽 도시 내부에는 수많은 공장이 설립되었고, 이 공장들은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였다. 그리고 이 노동력은 대개 농촌 지역의 몰락한 빈농들의 이주로 충당되었다.

이로 인해 중세 시대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던 이 도시들(지리적으로 매우 작은 면적의 도시들)은 엄청난 인구(노동력) 유입으로 새로운 문제점에 직면한다. 지나치게 사람들이 과밀해졌으며, 도시 내부 위생상 문제점이 나타나게 되었고, 과밀한 인구로 인한 심각한 주택 부족 문제가 발생하였고, 도시 빈민이 양산되었다. 

1920년대 산업 도시 경성은 유럽 도시들의 산업화 과정상 나타난 동일한 문제점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 문제는 피식민계층인 조선인에 집중되었다.

"현재 경성의 가장 절박한 중대 문제 중의 하나는 경성부민의 주택 문제이다. (…) 경성을 찾아오는 사람으로 놀래는 것은 경성부민의 태반이 제 집을 가지지 못하고 () 일본인은 21,034호(거주 가구수)에 개인 소유 14,222가(가옥)와 관사 2,299가(가옥)를 합하면, 16,521가(가옥)로 약 5,200집이 부족한 셈인데 반해, 조선인 측은 49,259호(거주 가구수)의 230,732인이 24,044가(가옥)에 들어 살고 있으니, … 현재의 배 이상의 집이 필요한 것으로 되어 있어, 조선인 측의 주택 문제는 일본인에 비하여 일층 심각한 형편이다."8) 

▲ ‘대경성 면목이 안재 3만호가 월세 세민, 총 호수 4만9천호 속에: 주택난 중의 경성’ (<중외일보> 1929.11.8)


1) 김영근 「일제하 경성 지역의 사회∙공간구조의 변화와 도시경험 : 중심-주변의 지역분화를 중심으로」, 『서울학연구』 제20호, 2003.
2) 김영근, 위의 글.
3) 中村資良, 朝鮮銀行會社要錄 I~X, 1921~1942 (양승우∙최상근, 「일제시대 서울 도심부 회사 입지 및 가로망 변화의 특성에 관한 연구」, 『도시설계 : 한국도시설계학회지』 제5권 제1호, 2001 재인용).
4)「京城에 工場激增 昨今엔 九百十四處, 소비도시로부터 생산도시로 일변」,『조선일보』1928년10월 17일.
5) 형기주 「일제하 경성의 공업과 공업입지: 1910년대」, 『서울학연구』, 제10호, 1998.
6)「乞人의 激增과 이에 대한 대책은 엇던가」, 『동아일보』 1924년 08월 29일.
7)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육백년사』,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81(「일제하 경성 지역의 사회∙공간구조의 변화와 도시경험: 중심-주변의 지역분화를 중심으로」, 『서울학연구』 제20호, 2003에서 재인용)
8)「대경성 面目이 安在 3만호가 월세 세민, 총 호수 4만9천호 속에, 주택난중의 경성(1)」 『중외일보』 1929년 11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