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모자 쓴 북한의 기업가 - 북한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붉은 모자 쓴 북한의 기업가
3차 핵실험 이후 중국도 경제원조를 삭감하는 등 국제사회가 제재에 나섰지만 북한은 ‘플러스 성장’을 했다. 이 같은 경제성장의 물주 구실을 해온 세력이 있으니 시장화의 물결 속에서 북한 전역에 확산된 ‘돈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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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호] 승인 2015.08.11 08:54:09 |
3차 핵실험(2013년 2월) 이후 북한은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나라가 되었다. 외부 세계는 북한이 중국의 경제원조 덕분에 버티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이 때문에 미국은 중국을 북한으로부터 떼어놓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동안 중국이 주창해온 ‘신형 대국관계(미·중 양국이 대립 대신 협력을 강화·견지해야 한다)’를 수용할 것 같은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중국은 미국 주도의 대북 제재에 동참해서 북한에 대한 경제원조를 삭감했다. 이쯤 되면 북한이 경제적으로 더 큰 어려움에 처할 것이 기대되었다. 그러나 북한 경제는 위축되기는커녕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 이후 대단한 ‘플러스 성장’을 기록해왔다. 한국은행 추계에 따르면, 2013년 북한 GDP는 1.1%로 2012년(1.2%)에 이어 성장세를 유지했다.
어떻게 된 일일까. 북한 경제에 자원을 공급할 수 있는, 중국 이외의 또 다른 ‘물주’가 있다는 얘기인가? 러시아를 떠올릴 수 있지만, 북·러 관계는 아직 실질적 궤도에 오르지 못했다. 그럼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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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조선중앙통신 북한은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장을 허용했다. 왼쪽은 2004년 9월 평양시 통일거리시장의 내부 모습. |
최근 몇 년간 한국의 북한학계는 이 돈주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어떤 이는 돈주를 북한판 고리대금업자 또는 사금융업자로 해석했다. 다른 이는 ‘사기업 경영자의 출현’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돈주가 북한 경제에서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해석이 분분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누구도 그 실체를 부인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지난 7월15일, 전경련은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열린 남북경제교류 세미나에서 이른바 ‘5대 경협 원칙(1995년 발표)’을 20년 만에 수정 발표했다. 과거의 경협 원칙은 사실상 ‘(남한의 북한에 대한) 일방적 지원과 압박’이었다. 반면 새로운 원칙은 ‘북한의 시장경제화에 입각한 자기주도적 경제개발’ 및 ‘남북한 산업의 장점 보완·발전’을 핵심으로 한다. 이날 주제 발표에 나선 최수영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김정은 정권 출범 후 북한에서는 시장화와 사경제가 확산되고 있다”라며 원칙을 바꾼 이유를 설명했다. 최근 발표된 미국 의회조사국 보고서 역시 ‘북한 경제가 올해 초 약간의 성장을 보이고 있다’며 ‘김정은 정권이 비공인 소기업 및 노점상 등 지하경제를 허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전경련과 미국 의회가 같은 시기에 북한의 사기업과 돈주를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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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의약품지원본부 휴대전화도 많이 보급돼 가입자가 300만명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
지난해 10월 평화문제연구소(이사장 신영석) 주최 한·중 교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만난 중국 훈춘시 고위 당국자한테서 귀가 번쩍 뜨이는 얘기를 들었다. 그는 함경북도 나진시의 최근 변화에 대해 언급하면서 ‘붉은 모자를 쓴 기업가’들이 많이 보인다고 했다.
중국에서 ‘붉은 모자를 쓴 기업가’란, 개혁·개방 초기인 1980년대 농촌에서 확산된 소규모 업체(7인 이하 고용) ‘향진기업’의 경영자를 가리킨다. 당시 향진기업은 명목상으로 사기업이 아니라 농촌 마을 주민들이 공동 출자해서 운영하는 ‘집체(集體)기업’이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사기업이었다. 사회주의 원칙상 당시의 중국에서는 공식적으로 ‘개인의 기업 소유’를 인정할 수 없었다. 국가(국유기업)나 마을 주민 같은 집단(집체기업)만이 기업을 소유·운영할 수 있었다. 이런 집체기업의 여러 종류 중 하나가 향진기업이었던 셈이다. 다만 중국의 평범한 마을 주민들에게는 투자할 만한 돈이 있을 턱이 없다. 어떤 방법으로든 돈을 축적하고 있었던 중국판 ‘돈주’들이 그 자금으로 사업체를 설립하고 운영하면서 형식상 집체기업으로 등록했다. 이처럼 ‘집체기업으로 위장한 민간 사기업’의 소유·경영자들을 일컬어 ‘붉은 모자를 쓴 기업가’라고 했다. 결국 위에서 나온 중국 고위 당국자의 이야기는, 북한에서도 ‘사실상의 사기업’이 확산되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
감회가 새로웠다. 20여 년 전 ‘북한의 붉은 자본가’를 기사화한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1996년 6월, 북한의 김정우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 위원장이 일본 도쿄에서 ‘나진선봉 경제특구 투자’ 관련 기자회견을 연 바 있다. 당시 기자회견을 취재하며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대한 북한의 높은 관심을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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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신선영 북·중 접경지역인 신의주에 거주하던 북한 내 화교들은 도강증만 있으면 수시로 중국에 드나들 수 있었다. 위는 중국 단둥에서 신의주로 들어갈 수 있는 ‘중국과 북한의 우의교’. |
당초의 북한 사회주의 경제 시스템에서는 원칙적으로 ‘돈주’라는 집단이 성립할 수 없었다. 기본적으로 국가가 식량 등 각종 생필품의 종목과 양 등을 결정해서 국영기업(공산품)과 협동농장(농산품)에 생산을 ‘명령’한다. 생산에 필요한 원자재와 에너지도 국가가 책임지고 공급해준다. 생산자들(국영기업과 협동농장)은 국가의 명령대로 만든 제품을 국유 상점에 보낸다. 국유 상점들은 정해진 가격으로 인민들에게 ‘판매’한다. 이 같은 사회주의 국가 특유의 생산·분배 시스템에서는, 돈을 좀 가졌다고 해서 투자하고 여기서 수익을 얻을 만한 여지 자체가 없다.
그런데 북한 사회주의 시스템이 서서히 삐걱거리다 1990년대 들어 사실상 멈추고 만다. 국유기업들은 국가로부터 원자재와 에너지를 공급받지 못하게 되면서 생산을 중단했다. 노동자들은 출근해봤자 할 일이 없었다. 배급이 중단되고, 국영상점에서도 살 수 있는 물건이 없었다. 이 같은 국가 부문의 쇠퇴와 더불어 ‘돈주’는 점차 강력한 경제 집단으로 등장하게 된다. ‘돈주’ 집단의 발전은 대략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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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조선중앙통신 남포시에 있는 천리마제강연합기업소. 천리마 구역은 의류 가공, 담배 생산으로도 유명하다. |
‘돈주’의 기본 조건은 북한 돈, 즉 ‘조선 원화’를 많이 가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돈을 축적할 수 있었을까? 바로 북송 재일동포다.
북한은 1949년 공업 국유화를 마친다(제조업체 국유화). 1958년에는 유통업체의 국유화가 완료된다(국영상점). 같은 해, 한국전쟁 때 투입되어 북한 경제 재건을 지원해온 중국 인민해방지원군이 철수하면서 노동력 공백이 발생했다. 북한 당국은 이를 메우기 위해 재일동포 북송사업을 시작한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재일동포들이, 생산·유통을 국유화한 사회주의 북한에 시장경제의 숨구멍을 뚫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들이 들여온 일본제 옷과 시계, 전자제품 등을 사고팔 암시장이 형성된 것이다. 더욱이 재일동포들은 일본의 부모·친척 등으로부터 송금받은 외화를 상당히 유리한 조건으로 조선 원화와 바꿀 수 있었다. 북한 당국이 설립한 ‘외화 상점’의 고급 상품들은 외화로만 살 수 있었기 때문에 외화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재일동포들은 북한의 노동자로서 공식적으로 받는 임금 이외에 별도로 대량의 조선 원화를 보유할 수 있었던 셈이다. 다만 돈이 있어봤자 쓸 데가 없기 때문에 재일동포들의 조선 원화는 장롱에 차곡차곡 쌓일 뿐이었다.
한편 중국의 문화혁명(홍위병들은 김일성 일가 역시 ‘반동’으로 몰아붙였다)으로 소원해졌던 북·중 관계가 1982년 재개되면서 두 번째 돈주 집단이 등장한다. 바로 중국에 친척을 둔 북한 화교들이다. 특히 이들은 1984년 중국 국무원이 친척 방문을 허용하면서 양국 간 교역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북·중 접경지역인 신의주에 주로 거주하던 북한 내 화교들은 도강증만 있으면 수시로 중국에 드나들 수 있었다. 이들은 북송 재일동포들이 들여온 일본산 상품을 중국으로 가져가 판매하는, 일종의 중개 무역상 노릇으로 큰 이익을 남기기도 했다. 이처럼 일본·중국과 연(緣)을 맺을 수 있었던 재일동포·화교 등이 그 특수 지위를 활용해서 상당한 규모의 조선 원화를 축적한 것이 이 시기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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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니치신문 1959년 12월 재일동포 북송선이 일본 니가타 항을 떠나고 있다. |
두 번째 단계(1990년~2000년대 초반)
그러나 첫 번째 단계의 돈주들은 문자 그대로 ‘돈을 가진 사람’들에 불과하다. ‘돈주’가 ‘붉은 자본가’로 불리려면, 그 돈을 어딘가 투자해서 더 늘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회주의 시스템이 작동되던 1980년대까지의 북한에서는 돈을 투자할 곳이 없었다.
그런데 1990년대 중반 대규모의 아사 사태가 발생했던 ‘고난의 행군’ 시기와 더불어 ‘천지개벽’이 일어난다. 북한 당국이 배급을 중단하는 대신 시장을 허용한 것이다. 1993년 3월에는 농민시장을 상시로 열 수 있게 했다. ‘국가가 인민들의 생존을 책임질 수 없으니, 시장 거래를 통해 알아서 먹고살라’는 이야기다. 살길이 막막해진 주민들은 너도나도 시장으로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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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ickr 평성 시내의 거리 풍경. 평양 인근의 평성은 철도 도로망이 발달해 유통의 거점이 되었다. |
일반적으로 ‘시장주의 개혁’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중국처럼 국가가 계획적으로 추진하는 ‘위로부터의 시장화’이고, 다른 하나는 인민들이 일상적으로 시장을 활용하고 이를 국가가 제도적으로 수용해나가는 ‘아래로부터의 변화’다. 북한이 두 번째 경우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북한에는 생필품을 제조해서 장마당 등에 판매하는 작은 개인 기업들이 수없이 나타났다. 일거리가 없어 국영기업에서 이탈한 노동자들이 여러 명씩 짝지어 수공업 형식으로 상품을 제작한다. 이렇게 번 돈 중 일부를 자신이 등록된 공장에 내면 출근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이런 작은 개인 기업에서 생산되는 제품들이 질적으로도 꽤 우수하다는 평가다. 지난 6월30일 ㈔NK지식인연대(대표 김흥광) 등 탈북자 단체들이 주선해서 이뤄진 ‘북한 실상 설명회’에서 지난해 탈북한 인민군 외화벌이 부원 출신 조순선씨(가명)(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는 “최근 북한에서 품질이 나쁜 중국산 대신 평성(평안남도의 공업도시) 등에서 만든 국산을 많이 사용하기 시작했다”라고 증언했다.
돈주들은 이런 소기업에 원자재 조달 등에 필요한 돈을 빌려준다. 초기 단계의 금융자본 역할이다. 돈주들은 빌려주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생산을 조직하기도 한다. 의류의 경우라면, 돈주가 옷감 생산자, 의류 제작자 등에게 주문을 하고 국영기업에서 빌린 차량으로 재료와 완성품을 날라서 소매상에게 도매가격으로 판매하는 방식이다. 심지어 돈주가 국영기업에서 빌린 공장에 생산자들을 모아놓고 정해진 공정에 따라 상품을 제작토록 하는 ‘매뉴팩처 단계’까지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나아가 돈주들은 기존 국영기업에 운영자금을 빌려주고 그 대가를 현물로 받거나 아예 국영기업 명의로 제품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야말로 ‘붉은 모자를 쓴 기업가’다.
이런 산업 생산은 기존의 국유 기계공장(돈주들이 공장과 설비를 빌릴 수 있다)이나 원료 산지 근처인 내륙 도시들이 주로 담당한다. 함흥·평성·순천 지역은 의약품 생산으로 유명하고 평남 남포시의 천리마 구역은 의류 가공 및 담배 생산에서 전국 1위다.
돈주들은 북한의 외화벌이에서도 존재감을 뚜렷이 나타냈다. 재정난에 처한 북한 당국은 1991년 말 새로운 무역체계를 수립한다. 대외경제위원회가 독점해온 무역 권한을 북한 내각의 각 성과 위원회, 지방자치단체인 도에 이르기까지 분산시킨 것이다. 한마디로 각자 무역회사를 만들게 해줄 테니 알아서 교역 이익을 챙기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만들어진 무역회사들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수출하려면 먼저 국내에서 상품을 매입해야 하는데 돈이 없었다. 그래서 돈주로부터 자금을 빌려 무역사업에 나섰다.
그런데 돈주들은 무역 밑천을 빌려주는 정도로 자신들의 역할을 제한하지 않았다. 오히려 국가 측의 무역회사에서 ‘와크(무역 허가증)’를 빌려 직접 무역에 나서는 형태로 나아갔다. 국영 무역회사에는 이익의 일부분을 ‘와크 대여료’로 내면 된다. 개인 사업가인 돈주가 국가기관 산하 무역회사 소속이라는 ‘붉은 모자’를 쓰게 된 셈이다. 이렇게 해서 이른바 ‘외화벌이 돈주’가 등장한 것이다.
돈주들에게 무역은 떼돈을 만질 수 있는 부문이다. 국내의 완성품을 사서 수출하는 정도가 아니라 직접 생산해서 국경 밖으로 내보내면 훨씬 많은 돈을 벌 수 있다. 예를 들어 조개양식으로 유명한 평안남도에서 씨조개 1t은 350달러다. 씨조개 1t을 잘 기르면 큰 조개 10~15t을 얻을 수 있다. 큰 조개를 수출하면 1t당 900달러 정도를 받는다. 즉, 수익을 수십 배 얻을 수 있는 사업인 셈이다.
더욱이 이 돈주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사업가들처럼 위험도 직접 부담한다. 조개가 떼를 지어 이웃 갯벌로 이주해버리거나 악천후로 깡통을 차기도 한다. 게다가 북한의 현재 법률하에서는 일상적으로 불법 행위를 저질러야 하기 때문에 호위총국, 인민무력부 등의 ‘호랑이 외피’를 써야 한다. 이처럼 외화벌이는 투기성이 강하고, ‘교화벌이(투옥될 수 있는 돈벌이)’라 불릴 정도로 위험한 일이다. 그럼에도 최근 황해남도의 전체 외화벌이 사업 가운데, 개인 사업가인 돈주의 투자 비중이 무려 80%에 달한다고 한다. 국가의 직접 투자분이 20%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다(김직수 <돈주의 형성 과정에 대한 연구> 북한대학원대학교, 2012. 12).
돈주의 영향력은 유통산업 부문에서도 강력하다. ‘외화벌이 돈주’가 국경까지 물건을 들여오면, 이를 차떼기로 국내에 유통시키는 그룹이 있다. 이 대상(大商)들 역시 국영기업이 아니라 돈주다. 1인의 대상 아래 약 20명의 중간상인이 있고, 중간상인별로 또다시 20여 명씩의 소매상인이 있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북한 전역의 시장에 수입품이 조달되는 것이다.
정은이 경상대 교수가 추산한 바에 따르면, 북한의 시장은 평양에 22개 이상, 전국의 시급 도시에 48개 이상, 군급 도시에 138개 이상 등 모두 250개가 넘는다(이석기·양문수·정은이 <북한 시장 실태 분석> 산업연구원). 임을출 경남대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구글 사진으로 확인된 시장만 해도 400군데 이상이라고 했다.
더욱이 현재 북한의 시장은 생필품만 거래되는 곳이 아니다. 먹고 입는 것에서 가구, 가전제품, 자동차, 주택의 순서로 수요가 고도화되고 있다. 시장 활동을 통해 소득을 크게 높인 계층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최근 가뭄으로 식량난이 우려되지만 시장에 육류 등 대체 식품이 얼마든지 있어 과거처럼 먹을거리를 구하지 못해 굶어죽을 걱정은 사라졌다고 한다.
세 번째 단계(2000년대 초반~)
돈주들의 입지는 2002년의 ‘7·1 경제관리개선조치’ 이후 대체로 더욱 강화되어온 것으로 보인다. 특히 중요한 사건은 2003년의 ‘종합시장 개혁’이다. 농산품 위주의 생필품이 반(半)합법 상태로 거래되던 농민시장(장마당)을 상설화·합법화하면서 공산품을 포함한 모든 소비재를 거래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더욱이 국영기업(실질적 소유·운영자는 돈주인 경우도 많다)의 제품은 물론 무역회사의 수입품(종합시장 이전에는 외화상점에서만 구입 가능)까지 종합시장에서 거래할 수 있도록 했다. 이를 계기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국가가 운영해온 외화상점의 독점체계가 무너지면서 그중 80%의 경영권이 ‘명의상 소유’만 국가에 남긴 채 개인 돈주로 넘어갔다.
국영 무역회사들(돈주들이 대출이나 실질적 경영을 통해 큰 영향을 미치는)이 화교를 제치고 북한 시장에 제1의 수입품 공급자로 등장하게 된 것도 큰 변화다. 이전까지 북한 화교들은 국경을 합법적으로 넘나들 수 있는 지위 덕분에 북·중 무역을 사실상 주도했다. 이로 인해 한동안 국경 도시인 신의주의 ‘채하시장’이 북한 최대의 도매시장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화교들은 기껏해야 단둥의 도매시장에서 물건을 떼어와 뇌물을 써가며 국경을 통과하다 보니 상품의 양이 적고 부가비용 부담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명목상의 국영 무역회사들은 중국의 현지 공장에서 대량으로 물건을 구매해 합법적으로 국경을 통과한 뒤 교통망이 잘 갖춰진 국경 대도시의 물류창고에 쌓아놓을 수 있다.
이에 따라 화교와 조선족들이 형성해놓은 신의주 채하시장 등의 무역 주도권이 평안남도 평성과 함경남도 청진 등의 대도시로 넘어갔다. 특히 평성은 수도 평양을 옆에 낀 데다 전국 각지로 연결되는 철도 도로망의 중심지라는 유리한 여건으로 단번에 북한 최대의 유통 거점 도시로 등장했다. 최근에는 이 도시의 전통적 과학기술 인프라와 중국에서 수입한 원자재를 결합한 새로운 제조업 생산지로 부상하고 있기도 하다.
7·1 조치 이후 지방의 제조업 공장들도 큰 변화를 겪었다. 예전에는 각 공장들이 국가가 정해준 생산 목표를 현물로 달성하면 그만이었다(예컨대 철강 1만t). 그러나 7·1조치 이후에는 현금 액수만 채우면 되는 액상목표 체계로 바뀌었다. 공장 지배인만 똑똑하면 외부 자금을 끌어들여 현금 목표를 채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돈주의 자금이 이때부터 지방산업 공장들에 대부투자 내지는 명의 임대 방식으로 본격적으로 유입됐다고 한다. 2000년대 중·후반 이후로는 시장화가 더욱 진전됨에 따라 중앙의 대규모 공장들에도 돈주 자금이 본격적으로 유입되었다(<북한 시장 실태 분석> 중에서).
이처럼 국제사회의 제재 속에서도 북한 경제성장의 물주 구실을 해온 세력은 바로 시장화의 물결 속에서 북한 전역에 확산된 돈주들이었다. 김정은 시대의 북한은 생산수단의 ‘공식적 소유자’인 국가와 ‘붉은 모자 쓴 개인사업가’ 돈주의 공생체제다.
‘시외버스 택배’로 읽는 북한 경제
북한의 교통과 유통 그리고 소액금융 부문을 보면 시장이 북한 특유의 방식으로 빠르게 발전 중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북한에서 가장 중요한 광역 교통수단은 시외버스(사진)다. 신의주·평성·남포·해주·함흥·청진 등 전국 주요 대도시는 모두 시외버스 망으로 연결돼 있다. 군소 도시로 가려면 먼저 이들 대도시로 간 다음 거기서 다시 시외버스로 이동해야 한다.
북한의 시외버스는 그 자체가 소규모 개인 기업이다. 대개 2인 1조로 돈을 모아 중국에서 버스를 구입한 다음 각 시도 인민위원회 운수사업소 소속으로 등록시킨다. 개인들이 국가의 명의를 빌려 시외버스를 실질적으로 운영하고 그 수익을 챙기는 것이다. 북한 국가는 재정 투입 없이 운송 수요를 충당할 뿐 아니라 세금과 명의 사용료까지 받을 수 있다. ‘붉은 모자 쓰기’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시외버스 사업자들은 택배 업무도 병행한다. 장거리 택배를 의뢰하는 인민들이 시외버스에 물건을 실은 뒤 휴대전화로 수령자에게 통보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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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ickr |
휴대전화는 최근 관심사로 떠오른 북한 소액금융 사업자들의 필수적인 사업 설비이기도 하다.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가 한 세미나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현재 북한에는 10개 이상의 대부업자가 전국적 네트워크를 통해 ‘지역 간 송금’을 시현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함경북도 청진의 ㄱ씨가 황해도 해주의 ㄴ씨에게 10만원을 보낸다고 가정하자. 이 경우, ㄱ씨가 청진의 대부업체에 10만원과 수수료를 주면, 청진 대부업체는 휴대전화로 해주 대부업체에 ‘ㄴ씨에게 10만원을 주라’고 연락한다. 그리고 청진 업체와 해주 업체는 차후에 자신들끼리 접촉해 차액을 정산하면 된다. 은행 시스템이 미발달한 북한 특유의 금융결제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해 탈북한 조순선씨(가명)는 이들 지역 거점망을 ‘이관집’이라 표현했다(19쪽 증언 참조).
“북한은 뒤지면 다 돈이다”
지난 6월30일 ㈔NK지식인연대가 주최한 ‘북한 실상 설명회’(사진)에 증언자로 나선 조순선씨(가명)는 인민군 외화벌이 부원 출신으로 2014년 4월 탈북해 12월에 입국했다. 다음은 조씨의 증언 내용이다.
인민군 외화벌이 기관에서 조개원천 동원하는(수출할 조개 산지를 찾는) 일을 3년 동안 했다. 산지 개척에 어려움이 많았다. 원래 우리 영역이 아니다 보니 생산자에게 직접 받는 제1원천자가 따로 있고 우리 같은 제2원천자가 받는 곳이 또 따로 있다. 생산자에게 직접 받으려고 가격을 2~3배 더 쳐줬는데도 발붙이기가 힘들었다. 북한에서도 신용이 없으면 한 걸음도 못 걷는다. 그다음이 능력이다. 신용은 생산자들이 인정해준다. 자기가 거래해보고 믿는다. 돈이 아무리 있어도 물건을 구하기가 힘들다.
오후 3시에 현금을 갖고 조개 사러 산지에 나간다. 나한테 다 주는 게 아니기 때문에 배정된 물동량을 채우기가 힘들다. 가지고 나오다 단속에 걸리기도 한다. 4t 가지고 나오다가 안전기관의 단속에 걸렸는데 t당 얼마씩 돈을 토해내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조개를 회사에 가져오면 10~20명이 검수해서 합격·불합격을 판정하고 식양장에서 모래를 뺀 뒤 상품으로 만든다. 3일에 한 번 70t씩 한국으로 수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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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하영 제공 |
조개 채취를 해서 돈을 벌면 금을 사서 저장해두거나 땅에 투자한다. 북한은 뒤지면 다 돈이다. 땅을 가지기 위해 투자자들 간에 경쟁이 심하다. 10%만 국가에 바치면 나머지는 자기 땅이다. 가막조개가 나오는 구역이 있는데 그 강을 쟁취하기 위해 투자자들 간에 경쟁이 심했다. 나는 조개를 안 할 때는 원산항에서 중고 자전거를 사다가 도매로 넘기기도 했다. 한 가지만 가지고는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조개는 대부분 달러로 받아서 국내 돈으로 환전했다. 전국 어디에 가나 암거래로 화폐 교환이 이뤄진다. 아파트 밑에 가면 화폐 장사꾼들이 있다. 따라가면 국내 돈으로 바꿀 수 있다. 은행에서는 안 된다.
국내 상품의 질이 개선되기 시작했다. 중국 상품은 질이 낮다. 평성에서 자체 브랜드로 상품을 만드는데, 질이 많이 좋아졌다. 회사는 돈 많은 사람이 운영한다. 그리고 개인집에서도 생산을 다 한다. 월 20달러만 내면 전기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 상품은 전국으로 운송된다. 도매시장에서 판매되는데 예전에는 직접 가서 사와야 했지만 지금은 집 앞까지 배달된다. 이제는 사람이 왔다 갔다 하지 않고 다 전화로 장사한다. 돈은 이관집(민간 소액금융 사업자들의 지역 거점망)을 통해서 주고받는다. 갈파스(소시지)는 밀수품으로 국가에서 통제한다. 혜산에서 200㎏을 사면 열차로 안내원을 통해서 보낸다. 그러면 함경남도에서 받으러 나온다. 돈은 양강도의 이관집에 가서 함경남도에서 돈 받을 것 있다고 하면 수수료 5%를 떼고 내준다.
북한의 돈주는 독이 든 사과?
돈주들은 북한 경제의 시장화를 대표하는 세력이다. 이들이 북한 경제의 장기적 발전을 촉진할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정치권력과 유착해 부를 독점하게 되면 오히려 경제발전의 걸림돌로 전락할 수도 있다.
‘돈주’들은 신분상 취약한 계층인 경우가 많다. 더구나 북한에서는 사적인 기업 활동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어 당국이 걸면 걸리게 되어 있다. 돈주들은 일상적인 단속의 공포에 시달리기 때문에, ‘3년 열심히 뛰어 평생 벌 것을 마련해야 한다’는 식의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다. 살아남기 위해 도당 책임비서, 보안서 처장, 보위부장, 군단장 등 지방 권력자와의 결탁에 필사적이다. 북한판 정경유착이다.
2000년대 이후 북한에서도 주택건설 시장이 나타났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주택을 사고판다는 이야기다. 돈주들은 이 부문에도 적극 참여한다. 국가기관은 상부에서 주택건설 허가를 따오기만 하고 실제 짓는 것은 건설업 돈주에게 맡긴다. 건설업 돈주는 선(先)분양 형태로 투자자를 모집해 아파트를 짓고 국가기관에 일정 몫을 떼어준 뒤 분양해서 이익을 챙긴다. 토지 사용 허가 및 입사증(특정 주택의 사용권. 사실상 소유권으로 볼 수 있다) 발급까지 모든 사업 절차가 권력과의 유착 속에서만 가능하다.
최근에는 정치 권력자들이 돈주를 앞세워 주택건설 시장에 뛰어드는 양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건설업 돈주로부터 떡고물을 챙기던 수준을 뛰어넘어 아예 목 좋은 땅을 선점해주고 큰돈을 받는 것이다. 북한에서도 아파트 분양 등 부동산 투자 및 투기가 새로운 부의 축적 수단으로 부상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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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조선중앙통신 2013년 9월 평양 문수물놀이장 건설현장을 찾은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 |
이처럼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돈주들은 현재 북한 경제의 시장화를 대표하는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돈주들이 북한 경제의 장기적 발전을 촉진할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특히 돈주들이 정치권력과 유착해서 부를 독점하게 되면 이에 따른 빈부격차와 사회혼란이 경제발전의 걸림돌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저개발국이나 비자본주의국이 시장경제를 도입하는 경우, 북한의 돈주들처럼 일부 계층이 자금을 축적하면서 ‘자본가’로 변신하는 혼란스러운 과정이 불가피하다. 국가 차원에서는 적절한 시장경제 제도를 도입하면서도 적절한 소득분배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경제 시스템 전환기를 안정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 전환기 국가의 정부가 어떤 정책을 취하느냐에 따라 그 나라의 운명이 결정된다.
러시아에서는 ‘노멘클라투라’로 불리는 옛 소련의 당료나 관료 등 특권층이 체제 전환기를 틈타 지하경제 세력과 손잡고 국가 자원을 사실상 독점했다. 기존 권력과 이에 따라 취득한 정보를 활용하면, 사유화되는 국가 자산을 놀랄 만큼 저렴한 가격으로 매집할 수 있었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러시아가 그럴듯한 산업 발전을 이루지 못한 데에는 극소수의 거부들이 자원을 사유화했을 뿐 시장경제다운 질서를 만들지 못한 탓이 크다.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국가의 경우에도, 몇몇 가문이 국부를 장악하는 바람에 결국 빈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에 비해 중국은 군의 경제적 특권을 박탈하고 고위직 인사들의 부정부패와 비위를 가끔씩이나마 가혹하게 처벌하는 등 러시아에 비해서는 훨씬 단호하게 부패 문제에 대응해온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신흥 계층인 산업자본가의 재산과 신분을 보장하고 자본-임노동 관계를 제도화함으로써 시장경제의 지속적 성장 토대를 만들 수 있었다. 경제개발기의 한국 역시 각종 특혜를 통해 재벌이라는 ‘돈주 집단’을 육성했다. 그러나 정부가 재벌과 결탁해 사적 이익만을 취한 것이 아니라 재벌을 압박해 경제계획을 밀어붙이는 등 산업화 과정에서 주도권을 행사했기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북한은 어떤 길을 갈 것인가. 김정은 정권의 선택에 달린 문제다.
북한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IS가 처형 동영상을 이용하는 목적은 중국 정부가 톈안먼 사건 당시 취한 행동과 다르지 않다. 제3세계 독재자들은 서구가 글로벌한 기준을 강요할수록 ‘로컬성’으로 맞받아쳤다. 이런 역사는 훌륭한 반면교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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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호] 승인 2015.08.12 09:02:44 |
이슬람국가(IS)는 지난해 8월19일 미국 언론인 제임스 폴리를 시작으로 서방 인질, 요르단 공군 포로, 이집트 콥트교도, 스파이로 지목된 이라크 주민을 잔학하게 처형하는 장면을 담은 동영상을 제작·유포해왔다. 올해 들어 IS는 참수와 화형뿐 아니라, 피처형자를 산 채로 물에 빠뜨려 죽이거나 차에 감금한 채 대전차 로켓포를 쏘는 등 잔혹성의 수위를 높여왔다. 그런데 지난 7월19일, IS의 최고 지도자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가 갑자기 “지나치게 잔인하고 야만적인 처형 장면이 담긴 동영상의 제작·유포를 금지한다”라는 지침을 내렸다. 잔혹한 동영상이 무슬림 어린이들에게 공포를 주며, IS의 이미지를 나쁘게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여태껏 IS는 처형 동영상을 통해 많은 것을 얻었다. 처형 동영상은 전 세계 무슬림에게 난립한 지하드 조직 가운데 IS를 가장 선명한 노선을 가진 지하드 조직으로 인각시켰다. 처형 동영상은 80개국에서 1만5000명이나 되는 젊은 전투원을 불러 모으는 효과를 낳았다. 그것을 기반으로 IS는 아랍 각국에 흩어진 수니파 야심가들의 지원을 얻거나 작고 큰 지하드 조직을 흡수할 수 있었다. 처형 동영상이 서방의 정치 지도자를 단결시키는 역효과도 있었지만, 참혹한 동영상은 서구인으로 하여금 지금까지 아랍·이슬람 세계에 저지른 자신들의 죄과를 학습하게 만드는 부수적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 일로 IS가 밑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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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영 그림 |
레이 초우의 <디아스포라의 지식인>(이산, 2005)은 동영상 제작·유포가 금지되더라도, IS가 시아파나 샤리아를 위반한 무슬림에 대한 처형 자체를 결코 중단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귀띔해준다. 이 예측을 음미하기 위해, 1989년 중국공산당이 민주화를 요구하던 학생·시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한 톈안먼(天安門) 사건의 현장으로 시간여행을 해보자.
톈안먼 사건은 같은 해 4월15일, 공산당 전(前) 주석이자 정치국 상임위원회 위원인 후야오방이 갑작스러운 심장병 발작으로 서거하자, 이틀 뒤인 4월17일 대학생 수백명이 톈안먼 광장에 모여 그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요구했던 것이 발단이다. 완고한 마오쩌둥주의자와 부패한 공산당원을 숙청한 후야오방을 애도하는 모임은 곧 대학생 5만~10만명이 ‘반관료’ ‘반부패’ ‘청렴한 공산당!’ 구호를 외치는 시위로 번졌고, 5월13일부터 학생·노동자 3000명이 톈안먼 광장에서 무기한 단식 농성을 벌였다. 그러자 중국 정부는 베이징 여러 지역과 톈안먼 광장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무력 진압이 통고된 6월4일 새벽 1시, 대다수 시위대가 하루 전에 광장을 빠져나갔으나 수천명은 해산을 거부한 채 광장에 남아 있었다.
무력 진압이 초읽기에 들어간 6월4일 전후로 세계의 눈(미디어)은 톈안먼 광장에 집중되었다. 서방은 세계의 강렬한 응시를 인식한 중국 정부가 비슷한 처지에 놓인 비(非)서양 세계의 여러 국가처럼 행동할 것이라고 믿었다. 즉 중국 정부가 학생들에게 무력을 행사하기보다 대화할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그날 새벽 3시, 중국 정부는 탱크 부대를 앞세운 계엄군으로 무차별 유혈 진압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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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의 지식인>레이 초우 지음김우영·장수현 옮김이산 펴냄 |
“서양의 소망은 처참히 좌절되었다. 세계 미디어의 응시를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해석한 중국의 지배권력은 무력 행사를 불사함으로써 그 난국에 대처했다. 그러므로 시각을 통해 진실을 검증하고 규제하고 확보하려는 형식으로 의도된 것이 정반대의 결과를 야기했다. 시각은 원래의 목표인 통제 또는 검사의 기능이 아니라 연극적 기능을 수행했고, 그 과정에서 교환된 것은 응시가 아니라 체면(명예 또는 긍지와 유사한 의미를 갖는)이었다. 서양의 응시가 ‘계속 지켜볼 테니 어리석게 행동하지 마라’는 말로 풀이될 수 있다면, 중국 정부의 반응은 ‘그런 식으로 예의 주시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 수 있는지 한번 보여주마’였다.”
중국 공안부의 공식 발표는 875명, 국제적십자위원회의 발표는 2000명, 비공식 집계로는 3000명에 이르는 사망자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부상자를 내면서 중국 정부가 무력 진압을 선택한 까닭은 단순하면서도 신중했다. 중국 정부는 자신에게 집중된 서양의 시각이 인권이나 민주화 같은 ‘글로벌(global)’한 의제를 강요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했고, 중국 대학생들의 로컬(local)한 투쟁과 서양의 관심(미디어)이 상호 결합하는 것을 방지해야 했다. 중국의 전략은 톈안먼 사건을 철저히 ‘중국 내부의 사건’으로 취급하면서 서방의 응시에 순응하지 않는 독자적이고 고유한 해결을 과시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톈안먼 시위는 “군대의 폭력에 의해 유혈 사태로 마감되었다”.
서구세계의 지탄에도 불구하고 IS가 적극적으로 처형 동영상을 이용해온 목적도 중국 공산당의 전략과 하등 다르지 않다. 톈안먼 사건 당시 중국 정부가 서구의 응시에 굴복했다면, 중국 공산당은 물론 중화인민공화국 자체가 와해되었을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서구의 응시에 중화인민공화국 자체의 방식으로 대응함으로써 스스로를 서구 보편성의 예외로 만듦은 물론, 서구의 시각적 간섭을 서구 제국의 중국 침탈 음모로 선전하여 중국 인민의 단결과 애국심을 불러일으켰다. IS가 그와 같은 전략을 모범으로 삼아 충실히 따르는 한, 자제되는 것은 잔혹한 동영상 제작·유포이지 공포 전략 자체가 아니다.
서구가 글로벌한 기준을 강요하면 할수록 제3세계의 독재자들은 언제나 보란 듯이 ‘로컬성(性)’으로 맞받아쳐왔다. 일례로 박정희가 ‘한국적 민주주의’를 들고 나온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이런 역사는 우리가 북한에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할지를 가르쳐주는 훌륭한 반면교사다. 김정은과 북한을 세습과 전체주의 국가로 일방적으로 성토하면서, 인권과 민주주의 원칙을 강요하는 것은 북한을 더욱 ‘북한답게’ 만들어준다. 박근혜 정부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내놓은 ‘남북경제교류 신 5대 원칙과 7대 전략과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