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통일 문제

'종북'과 '극단적 민족주의'의 차이는? - 한국의 사대주의 지식인들과 민족주의

일취월장7 2015. 3. 14. 12:49

'종북'과 '극단적 민족주의'의 차이는?

[한윤형의 우왕좌왕] '두 개의 민족주의', 그리고 북한인과 일본인의 민주주의

한윤형 칼럼니스트 2015.03.12 11:32:36

주한 미국 대사 피습 사건에 대한 반향은 그 사건 자체보다 더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우리 사회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많은 이들은 '부채춤'에 관심을 쏟았겠지만 '극단적 민족주의'에 관한 논란도 눈여겨볼 만하다.

사건 직후 새정치민주연합 유은혜 대변인은 기자 간담회를 자청하고 이 사건을 '극단적 민족주의자의 개인적 돌출행위'라 규정했다. 그러자 새누리당 의원들의 반발이 잇따랐다. 새누리당의 입장에선 새정치민주연합 측의 이러한 대응이 이 끔찍한 사건의 '배후세력'이 '종북'일 수 있음을 미리 부정하는 '꼬리 자르기'였던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논란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김기종 씨가 모종의 정치의식에서 범행을 저지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그의 현실인식은 '정치적 과대망상증자'라고 불릴 만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목표로 한 한반도 평화와 대북관계 개선에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행동을 했다. 북한이 사후에 이 사건을 자신들의 체제정당성의 근거로 선전했다 한들, 그들이 이 사건을 기획할 이유가 있었을까?

혹자는 근자에 '이석기 일당'이 워낙에 황폐한 세계관을 드러냈기에 '종북세력'들은 충분히 그러한 과대망상을 조직적으로 실현했을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물론 그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단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합정동 회합 발언'과 '김선동 국회 최루탄' 같은 것을 강조하면 보수 성향의 시민들은 그런 가능성에 솔깃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역시 합리적으로 따져본다면 가능성이 지극히 낮은 일이다. 이석기 전 의원의 회합에서의 발언은 진지한 정세판단이었든 내부단속을 위한 엄포였든 간에 곧 전시가 닥쳐올 거란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녹취록을 신뢰하더라도 해당 모임에서 참석자들은 이석기 전 의원의 발언의 취지를 잘 따라가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이는 보수세력에게 '종북'이라 불리는 NL 운동권들 역시 평상시 테러를 전술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키리졸브와 같은 한미군사활동은 거의 매년 있는 일이며, 이에 대한 북한의 항의 역시 그렇다. 이 사건을 구 통합진보당이나 다른 친북단체들이 기획했을 거라고 믿을 근거가 별로 없다.

물론 김기종 씨 본인은 통합진보당의 해산판결 등에 더 자극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구 통합진보당 멤버들 역시 최근 키리볼즈 군사훈련에 대한 반대시위를 하고 있었다. 김기종 씨가 경찰에서 '종북'으로 분류되는 인물과 친분 내지 교류가 있었을 가능성도 높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정황들은 이 사건이 정치적으로 기획되었을 가능성을 높여주지는 못한다. 수사당국은 그의 방북 행적과 이적 문건 소유 여부를 집중 수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심지어 헌법재판소가 해산판결 결정문에서 언급한 많은 문건들도 어떤 시점엔 인터넷에서도 구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여기서부터 상식 수준의 반박을 넘어 좀 더 흥미로운 부분으로 나아가 보자. 새누리당 의원들은 '개인적 돌출행위'란 말뿐만 아니라 '전투적 민족주의'라는 규정에도 분개하는 것처럼 보였다. 단순하게 접근한다면, 그들은 '민족주의'는 긍정적인 것이기에 김기종 씨의 '악한 행위'에는 '극단적'이란 어휘가 붙는다 해도 '민족주의'란 말이 쓰여선 안 된다고 믿는 것 같았다. 

▲지난 6일 보수단체 회원들이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리퍼트 대사 쾌유와 함께 종북세력 척결을 주장하며 인공기 화형식을 진행했다. ⓒ연합뉴스

▲지난 6일 보수단체 회원들이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리퍼트 대사 쾌유와 함께 종북세력 척결을 주장하며 인공기 화형식을 진행했다. ⓒ연합뉴스  

 
 

그들의 이러한 태도는 아주 오래 전 김대중 정부 초창기에 <월간 조선>이 정치학자 최장집의 논문을 난도질했던 논리를 떠올리게 한다. 당시 <월간 조선>의 우종창 기자는, 최장집 교수가 김일성을 "사회주의자라기 보다는 민족주의자"라고 진단한 것에 대해 문제제기를 했다.  

단순논리를 이해하기 위해 단순해져 보자. 그들에게 '민족주의자'란 말은 '좋은 것'이다. 반면 '사회주의자'란 말은 '나쁜 것'이다. <월간 조선>의 시비는 왜 김일성을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은 것'에 빗대느냐는 수준의 것이었다. 내 주변엔 '사회주의자'를 '민족주의자'보다 더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도 제법 있지만, 새누리당이나 <월간 조선>이 이와 같은 정치적 소수자들의 처지를 고려할 것 같지는 않다.

아니, 이것은 단순히 '고려'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상 대한민국 사회의 시민들은 거의 모두가 민족주의자다. 그렇기에 그들은 민족주의를 공기와 같이 여기며, 그것이 여러 가지 사상 중 하나이며 누군가는 가지지 않을 수도 있는 이념 내지 정서임을 쉽게 납득하지 못한다. 이는 "한국인이라면 박지성 응원합시다"라는 농담 아닌 농담 안에 들어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 대다수의 민족주의자들이 크게 두 패로 갈린다는 점이다. 그리고 양자는 결코 서로를 '민족주의자'로 지각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비극이 생겨난다. 그렇기에, 새누리당이 김기종 씨를 '극단적 민족주의자'가 아닌 '종북'이라 부르고 싶어 하는 심리구조는 어떤 개신교인들이 개신교인의 범죄 행위를 '극단적 개신교인'이라 부르기 싫어하고 차라리 '사탄'이라고 부르고 싶어할 심리구조와 흡사하다고 여겨진다.

이 '두 개의 민족주의'의 논리구조는 실은 매우 유사하다. 기본적으로 '피해자-민족 서사'를 절대적인 판단의 심급으로 끌어들인다. 차이가 있는 것은 다만 '민족'의 범위다. 새누리당이 지지하는 '민족주의'의 서사에서 '피해자-민족'은 남한 사회에 한정된다. 북한은 '민족'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고 거기에서 일탈한 공산주의나 김일성주의를 숭앙하는 외계인들이다. 북한은 명백한 '가해자'이기에 그들을 이해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용납될 수 없다.

앞서 언급한 <월간 조선>의 최장집 교수 논문 검증 사건에서, 그들은 최장집 교수가 '북한에서 6.25 전쟁의 피해자는 북한주민이었으며 수혜자는 북한 정부, 남한에서도 6.25 전쟁의 피해자는 주민이었으며 수혜자는 이승만 정부'라고 분석한 것에 대해 발끈하며 "6.25 전쟁의 피해자는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이라고 주장했더랬다.

과거 그들은 북한이 '민족'의 범주에서 이탈했다고 말하기 위해 '공산주의'라는 외래의 사상을 받아들였음을 강조해야 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북한이 다른 공산권 국가와도 구별되는 김일성주의자들의 왕조국가라는 사실을 좀 더 강조하는 중이다.  

반대 편에 있는 '피해자-민족 서사'는 우리에게 좀더 익숙하고 친숙하다. 여기서는 북한까지 우리 민족의 범위 안에 끌여들여진다. 여기에서 명백한 가해자는 '일본'이 되며, 이 논리를 좀 더 끝까지 밀어붙이는 이들은 '가해자의 최종보스'로 '미국'을 발견하게 된다.  

두 개의 사고방식은 너무나도 유사한 선악 이분법의 폐쇄회로이기에 타협할 수 없는 증오의 대상이 된다. 전자의 시선에선 6.25 전쟁을 발발시킨 냉전의 논리와 이승만 정권의 호전적인 행태가 생략된다. 전자의 시선으로도 일본은 '가해자'의 위치에 올라서기도 하지만, 더욱 명백한 가해자인 북한을 배격하기 위해 타협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한편 후자의 시선에선 일본은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기에 전자를 믿는 이들을 '친일파'라고 비난하게 된다.  

두 민족주의 종교의 정치적 환상을 동시에 적용하면 우리 사회는 '북한인과 일본인의 민주주의' 체제가 된다. 새누리당 지지자가 생각하기에, 상대 당파는 대한민국을 북한에 넘기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북한인들이다. 또 야권 지지자가 생각하기에, 상대 당파는 대한민국을 일본에 넘기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일본인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신봉하는 민족주의 선악이분법의 구조를 조금만 뒤틀면 상대방의 논리가 도출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상대방을 대한민국이란 정치공동체를 언제든지 가해자 집단에게 넘기려고 발광하는 적대자로밖에 인지하지 못한다. '종북몰이'와 '다카키 마사오 비판'이 과격해질수록 양쪽 지지자가 열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따라서 양쪽 당파가 이 정치적 환상을 넘어서려는 노력을 조금도 기울이지 않는 한, 정치담론의 양극화는 불가피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또한 이러한 양극화 속에서 번번이 좀더 적은 결집으로 패배하는 진보세력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대립이 실질적인 사회개혁을 담보하지 못하는 실패의 길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새누리당이 '종북'을 규정하고 구별하는 방식 역시 마찬가지다. 원래 이 단어는 민주노동당 분당 과정에서 좌파들이 먼저 만들어냈다. 하지만 당시 그 단어는 '북한 체제에 대한 온정주의를 버리지 못하는 이들'이란 의미 정도로 쓰였다. 적어도 상대방이 민족주의자란 점은 인정한 셈이다. 좌파들은 '민족주의자'란 말을 부정적인 의미로 쓰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새누리당은 '종북'을 '북한 체제의 지령을 받아 대한민국의 몰락을 호시탐탐 노리는 이들' 이외의 의미로 해석하지 못한다. 북한을 민족의 범주 안에 넣을 경우 꼭 북한 체제가 남한 체제보다 우월하다고 여기지는 않더라도 이해할 만하거나 배울만한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든가, 북한 사람들이 너무 순박해서 그 사회에도 배울만한 점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이 모든 이들을 모두 '종북'이라고 부르니 그들은 '신은미'에서 '황선'까지의 스펙트럼이 모조리 '종북'이 된다. 새누리당이 '극단적 민족주의'라는 진단을 거부하고 굳이 '종북'이란 표현을 꺼내드는 맥락이 이렇다.  

이 '두 개의 민족주의'의 사회에서 일부 좌파들이 "민족주의는 선진 사회에선 진보적 가치가 아니니 이제 그만 넘어서자"라고 말하는 것도 몹시 공허해 보인다. 우리는 우리 사회의 정치적 환상을 분석할 수 있지만, 나름의 역사성이 있는 그것을 아예 없는 것처럼 취급하고 넘어설 수는 없다. 오히려 우리는 양자의 사고방식과 논리구조 안에 들어가 서로의 접점을 넓히고 그로 인해 그 사유 바깥을 생각하도록 해야만 한다. 진보진영이 상대당파를 쉽사리 '친일파'로 낙인찍는 행위의 위험성을 함께 생각해봐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국의 사대주의 지식인들과 민족주의

                                         前, 이화여대 강철구교수님

 
한국 지식인들이 서양학문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요사이 일만이 아니다.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지식인들의 목소리가 높다. 민족주의는 세계화 시대에는 이미 낡은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배타적이며 폐쇄적이라고도 하고 나치의 파시즘과 같이 독재적이며 약자를 억압하는 이념으로 공격하기도 한다. 이제 민족주의를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민족과 민족주의를 제대로 알기나 하고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일까? 유감스럽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다. 서양학자들의 글을 몇 자 적당히 읽고 떠들어대는 소리다.

 

우리 입장에서 정말로 민족주의가 무엇인지 왜 필요한지를 고민하지 않는다. 이런 태도는 모두 1980년대에 서양에서 등장한 새로운 민족주의 이론에서 비롯한다. '근대주의 해석’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어네스트 겔너나 에릭 홉스봄 같은 영국 학자들이 대표다. 서양의 민족주의 연구자들 다수가 이 방향을 따르고 있다. 이 이론에 따르면 민족은 길어야 200년의 역사 밖에 갖고 있지 않다. 18세기 말부터 자본주의 발전이나 산업화라는 근대의 요구에 따라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통 민족이 수천 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주장이다. 이 사람들은 민족주의가 역사 속에서 유혈과 전쟁을 불러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주장이 옳은 주장일까?
부분적으로 일리가 있는 것 같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엉터리 주장이고 서양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만들어진 이론이다. 우선 민족의 역사는 이들의 주장보다 훨씬 길다. 유대민족 같이 수천 년 되는 경우도 있고 수백 년 되는 경우도 많다.

 
민족주의는 다른 민족과의 경쟁 속에서 태어났다. 이것은 민족주의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영국과 프랑스에서 17-18세기에 분명히 나타난다. 두 나라 사이의 경쟁이 민족주의를 발전시켰다.

유럽에서 19세기가 민족주의의 시대가 된 것은 산업화가 나라들 사이의 경쟁을 더 격화시켰기 때문이다. 산업화한 나라와 그렇지 못한 나라 사이에 힘의 차이가 커졌기 때문이다.

 

 

20세기에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민족주의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된 것도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다. 이렇게 민족주의는 내부적 요인이 아니라 외부적 요인에서 비롯되었다.

민족정체성은 매우 강인한 힘을 갖고 있다. 민족의 종족성이나 언어, 문화, 종교, 관습, 공동의 역사적 경험이 그것을 만들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간다고 해도 몇 세대씩 민족정체성이 이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또 민족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이다.

 

 

다종족으로 구성된 많은 유럽국가에서 19세기에 민족주의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고 그것이 많은 정치적 분규를 만들어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산업화로 국가 사이의 경쟁이 치열해지며 국가 안의 주된 종족이 다른 소수 종족들을 더 강하게 지배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언어나 문화, 역사 해석마저 강요하니 반발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 원인을 살피지 않고 민족주의가 분란만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태도이다. 민족이 얼마 안가 사라질 것이라는 것은 비현실적인 주장이다. 세계화 시대라고 하지만 스스로를 지구인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외계인이 지구인을 공격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민족이 쉽게 사라질 수 있겠는가?

 

또 지금의 세계화 시대는 그야말로 모든 세계 사람들이 평등하게 대접받는 코스모폴리타니즘의 시대가 아니다. 약소국가에 대한 선진국의 억압과 착취가 더 강화되고 있는 시대이다. 그러니 이런 차별과 억압의 시대에 민족주의가 더 강화되면 되었지 약화될 수가 없다. 현재 영국과 미국학자들이 주도하고 있는 이 '근대주의 해석’은 기본적으로 이들 나라의 이익에 맞게 만들어진 것이다. 강력한 정치력, 경제력, 군사력으로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특별히 민족주의를 주장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후진국의 민족주의는 자기들의 세계 지배 야욕에 방해가 된다. 전 세계적으로 그것을 해체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또 이들이 민족주의를 억압적이고 비도덕적인 이데올로기로 모는 것은 겔너나 홉스봄 같은 사람들의 개인적 경험 때문이다. 이들은 동유럽 출신자들로 나치독일 민족주의의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강대국들의 파괴적 민족주의와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과 자주를 지키려는 제3세계 국가들의 민족주의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러니 이런 이론을 우리가 무작정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황당무궤한 일인가. 그것은 진리도 아니고 보편타당한 원리도 아니다. 그것은 후진국들과 약소국의 이익을 침해하는 학문적인 무기이다.

 

 

한국의 지식인들이 이런 잘못된 이론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학문이 자주적 성격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태도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사대주의적인 태도로서 빨리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은 경제력으로는 이제 세계 10위권에 근접했지만 정치적 군사적으로는 매우 취약한 수준에 있다. 유감스럽게도 세계 4대강국에 둘러싸여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따라서 민족을 통합하고 외세에 대항하기 위해 민족주의는 우리에게 아직도 매우 중요한 이념이다. 섣부른 해체는 금물이다. 그렇다고 우리 민족주의가 배타적이거나 폐쇄적일 필요는 없다. 국제사회와의 협력이나 개방경제와 배치되는 것도 아니다. 외국의 쓸 데 없는 간섭을  막고 우리의 이익을 지키는 것으로 충분하다.

 

일부 비판론자들은 한국사회에서의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민족주의 탓으로 돌린다. 물론 한국인들이 다른 아시아 노동자들을 부당하게 멸시하고 억압하는 것은 잘못된 일로서 고쳐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민족주의와 직접 관련되는 것은 아니다. 또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 민족이 단일민족이 아니라든가 한국이 다민족사회라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다. 민족은 핏줄로만 연결되는 존재가 아니다. 여러 정치적 역사적 문화적 요소가 긴 역사 속에서 그것을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고대에 여러 종족의 핏줄이 섞였다 해도 그것 때문에 한국이 단일민족이 아니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외국인 노동자나 외국인 신부들이 많이 들어왔다고 해서 다민족사회가 되는 것도 아니다. 다민족사회라는 것은 여러 민족이 함께 국가를 만들고 그 안에서 각각의 민족이 고유의 민족적 성격을 계속 유지할 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은 현재 다민족사회로 갈 수 있는 싹을 갖고 있을 뿐이다. 그 이상은 아니다. 우리의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도록 계속 노력해야 한다.


강대국들이 우리보다 더 민족주의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사실을 결코 놓쳐서는 안 된다. 미국인들이 즐겨 말하는 애국주의는 민족주의의 미국식 이름일 뿐이다. 두 개가 전혀 다른 것이 아니다. 모든 인류가 평등하게 사는 코스모폴리타니즘은 이상일 뿐이지 현실이 아니다. 우리가 그런 이상에 현혹되어 현실을 잊는다면 결코 외세의 시달림에서 벗어날 수 없다. 민족주의는 낡은 것도 시대에 뒤떨어진 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