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문화, 예술

늙은 여자들이 ‘떼’로 나와 망한 영화?

일취월장7 2015. 3. 11. 11:25

 

늙은 여자들이 ‘떼’로 나와 망한 영화?

한국 사회에서 여성은 여전히 소수자다. 여성을 소재나 주제로 상업영화를 만들기 쉽지 않다. 심재명 대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에게서 영화의 주제를 찾아내려 노력하는 제작자다. 그 실패와 성공의 20년을 돌아봤다.

  조회수 : 456  |  심재명 (영화사 명필름 공동대표)  |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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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0호] 승인 2015.03.11  08:51:37

심재명 대표가 이끄는 영화사 명필름의 첫 영화는 여성의 몸을 다룬 <코르셋>(1996)이었다. <코르셋>은 명필름이 앞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어 나갈지 보여주는 ‘깃발’과 같았다. 흥행에 성공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8), <마당을 나온 암탉>(2011)을 비롯해 지난해 개봉한 <관능의 법칙>과 <카트>를 하나로 묶어주는 키워드 역시 ‘여성’이다. 최근에는 영화사 최초로 문화재단을 만들었다. 20년 동안 영화사를 운영하며 쌓아온 노하우를 좀 더 많은 이들과 공유하기 위해서다. 2월9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흥행의 공식을 넘어’라는 주제로 진행된 강좌를 지상 중계한다.

영화를 공부하는 분들도 아닌데, 여러분이 이 추운 날 왜 저를 만나러 여기에 왔을까 생각했다. 저는 할 줄 아는 게 영화 만드는 일밖에 없다. 누가 나에게 영화가 뭐냐고 질문하면 꿈이고 밥이라고 답한다. 어릴 때부터 꿈이었고, 그걸로 먹고사니까. 그런 면에서 행복한 사람이다. 제작자로서 영화인들을 많이 만난다. 그러다 보면 나도 ‘팬심’으로 얼굴이 빨개지기도 한다. 몇 년 전 영화감독조합에서 시상식이 있었는데, 장동건씨를 화장실 앞에서 맞닥뜨리고선 당황해 “안녕하세요, 강동원씨”라고 내뱉어놓고는 화장실에서 머리를 찧은 적도 있다(웃음).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신선영</font></div>2월9일 ‘흥행의 공식을 넘어’라는 주제로 강의하고 있는 심재명 대표. 심 대표가 이끄는 명필름의 영화들은 ‘여성’이라는 키워드로 묶을 수 있다.  
ⓒ시사IN 신선영
2월9일 ‘흥행의 공식을 넘어’라는 주제로 강의하고 있는 심재명 대표. 심 대표가 이끄는 명필름의 영화들은 ‘여성’이라는 키워드로 묶을 수 있다.
한국 영화계에서 내가 어떤 역할을 할 건지, 또 할 수 있는지 많이 생각한다. 나는 여성 제작자로서 내가 만드는 영화에서만이라도 여성성이 왜곡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마음을 갖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아직도 여성은 소수자다. 여성을 소재나 주제로 상업영화를 만들기가 쉽지 않다. 나는 여성 중심 이야기에서 주제를 찾아내려고 노력한다. 칼부림 심한 영화는 굳이 나까지 만들지 않아도 되지 않나(웃음).

여기에 <카트>를 보신 분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다. (일제히 손들자) 여기 오신 분들은 많이 보셨는데, 수익률은 -30%다. 영화는 정서적인 매체라 1000만명이 봤다고 모두 좋아하는 게 아니고, 보는 사람마다 생각이 제각각 다르다. 상업영화에서 여성을 통해 비정규직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카트>뿐만이 아니라 영화를 만들 때 늘 경계하는 게 ‘절대악’을 만들어서 관객을 공분하게 만드는 것이다. <카트>에서는 싸워야 할 대상을 특정하기보다는 싸움 자체를 직시하고 여성 노동자들이 연대하고 노력하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힘든 삶 속 연대의 소중함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에 즉자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악인의 등장을 지양했다. 이런 이야기를 우리 사회에서 많이 보게 하는 게 미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흥행 면에서는 아쉬웠다. 손익분기점이 130만명이었는데 82만명이 봤다.

  영화 <카트>(위)는 상업영화 최초로 여성 비정규직 이야기를 다뤘다. 제작 기간만 6년이 걸렸다. 하지만 수익률 -30%로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했다.  
영화 <카트>(위)는 상업영화 최초로 여성 비정규직 이야기를 다뤘다. 제작 기간만 6년이 걸렸다. 하지만 수익률 -30%로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했다.
<카트>는 제작 기간만 6년이 걸렸다. 긴 시간 시행착오를 겪고 고군분투하면서 고민 끝에 만든 영화를 본 관객이 주제를 명확히 이해하고 소통하는 순간, 굉장히 짜릿하다. 최근 한 고등학생이 <카트>를 보고 “앞으로 살아갈 사회에 대해 미리 알려줘서 씁쓸하지만 고맙다”라고 말하더라. 그게 소통의 순간이다. 관객과 통하는 순간이 가장 행복한 것 같다.

얼마 전 ‘단원고 어묵 사건’이 있었다. 일베 회원이 단원고 교복을 일부러 사서 입고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어묵에 빗댄 사진을 올렸다. 주목받고 싶어서라고 해명했다더라. 한국 사회가 참혹함을 이렇게 소비하는구나, 굉장히 씁쓸했다. 사회가 냉소적으로 변하고, 한편으로는 굉장히 보수화되고 있다고 본다. 정규직을 부추겨 비정규직 갈등을 만들고, 을과 을끼리 싸우고, 세대 간 가치관에 따라 갈등한다. 사람들은 시스템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우울한 상태인 거다.

경제를 잘 모르지만 양극화가 심화되는 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응석이 아니라 영화계에도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다. 2014년 한국 영화 지표를 보면, 2조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역대 최고다. CGV나 롯데시네마 극장의 매출도 사상 최대다. 그런데 왜 양극화냐. 영화를 제작하는 처지에서 의미 있는 수치는 투자수익률이다. 지난해 투자수익률이 0.3%였다. 10% 이상 되던 수익률이 굉장히 줄었다. 매출 전체는 늘었지만 수익률이 줄어들면서 투자하는 처지에서도 리스크가 커졌다. 한국 영화 관객 수도 감소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지난해 8월18일 한 극장에 <명량>의 기록을 알리는 포스터가 붙어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8월18일 한 극장에 <명량>의 기록을 알리는 포스터가 붙어 있다.
다양한 영화가 관객과 만나야 하는 이유


1000만 영화가 이렇게 많이 나오는데 투자수익률이 줄었다는 게 무슨 소리냐 하실 거다. 우선은 대기업의 독과점, 수직계열화 문제를 짚을 수 있다. 대기업이 주도하는 멀티플렉스 수익률은 증가했지만, 현장이 느끼는 양극화는 점점 심해진다. 규제하지 않는 게 가장 큰 이유다. 프랑스만 해도 예를 들어 상영관이 10개라면 특정 영화를 5개 이상의 스크린에서는 상영하지 못한다. 법제화되어 있다. 우리는 어떤가. 10개 중 8개가 <인터스텔라>, 새벽 시간에 <카트>… 이런 식이다. <명량>이 18일 만에 관객 1000만명이 넘었다. 스크린 독과점 때문이다.

전국에 2280개 스크린이 있다. 여기에 예술영화 전용관은 40~50개다. 그중 절반을 CGV아트하우스가 운영한다. CJ가 그쪽까지 장악하고 있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도 아트하우스에서 스크린 수가 확보되면서 입소문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아무리 영화가 좋아도 상영관을 확보하지 못하면 내려야 하니까. 1980년대에는 상영 계약서를 쓸 때 2주 이상 보장해줬다. 관객이 안 들어도 2주까지는 상영을 보장해주는 거다. 그런데 요즘은 개봉 이틀 만에 영화를 내리는 일이 횡행한다.

중요한 건 법적 제도화다. 관객이 많이 드는 영화도 중요하지만 문화의 다양성을 중요한 가치로 놓고 생각해야 한다. 다양한 영화가 관객과 만날 때 빛나는 상업영화도 만들어진다. 상생 측면에서 다양성을 지켜내는 게 중요하다. 대기업의 다양성 영화에 대한 관심은 칭찬받아야 하지만, 여기에서도 역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무엇보다 예술영화 전용관이 늘어나야 한다. 수익사업은 아니기 때문에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 보여주는 공간이 있어야 일정한 점유율도 확보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산업에서 중요한 건 ‘허리’다. 영화계로 따지면 이른바 ‘중박 영화’다. 500만~800만 관객 영화가 줄었다. 독립영화와 예술영화는 더 형편없다. 누군가 이런 말을 인터뷰에서 했다. “보고 싶은 영화를 보는 게 아니라 보여주는 영화를 보는 시대가 됐다.”

기사에서 보셨겠지만, 부산국제영화제 사태가 있었다. 정부나 지자체가 주관하는 영화제 영화에는 ‘등급 분류 면제 추천’이라는 게 있다. 부산국제영화제도 일일이 심의를 받지 않았다. 그런데 앞으로 영화제 영화들도 등급 심의를 받게 하겠다고 한다. 한국 영화의 다양성 확보에 중요한 영화제조차 위축시키려는 어려운 제작 현실이다.

1년간의 영화 상영 시기를 보면 성수기와 비수기가 극단으로 나뉜다. <명량>이 7월에, <국제시장>이 12월에 개봉했다. 특정 시기에 몰린다. <카트>처럼 상대적으로 적은 예산의 영화, 대기업 배급사를 통하지 않은 영화는 그런 영화들끼리 경쟁한다. 을이 을과 경쟁해야 하는 거다. 점점 더 생각이 많다. 나만 해도 <접속> <공동경비구역 JSA> <조용한 가족>을 만들 때에는 패기가 넘쳤다. <살인의 추억>을 요즘 만들 수 있을까? 나서는 제작자가 없을 거다. 왜냐고? 영화를 보면 결국 범인이 안 잡히거든(웃음).

우울한 이야기만 했는데…. 이제 내가 제작한 영화의 실패와 성공 사례를 나눠서 이야기해보겠다. 최근 성공 사례로 <마당을 나온 암탉> <건축학개론>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 있다. 소수자, 여성, 소외된 장르라는 단어로 세 영화를 묶을 수 있다.

< 마당을 나온 암탉>의 경우 한국 애니메이션 사상 처음으로 200만 관객을 돌파했다. 그동안 애니메이션이 좌절과 실패의 역사만 있었는데, 한국 애니메이션의 저력을 알리고 싶었다. 사실 애니메이션은 더빙만 하면 글로벌한 영화가 된다. <마당을 나온 암탉>에서는 모성애도 중요하지만 현실에 순응하지 않는 용감한 여성의 삶이 잘 담겨 있다. 알만 낳기 위해 살아가는 암탉이라는 미물이 결국엔 자유의지와 정체성을 이야기하는 주제의식이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 건축학개론>을 여기에 왜 포함시켰나 의아해하는 분도 있을 거다. 당시에는 ‘멜로는 잘 안 된다’는 인식이 있었다. 이용주 감독이 그 시나리오를 10년이나 들고 돌아다녔다. 남들이 잘 안 한다고 하기에 멜로라는 장르에 오기가 생기더라(웃음). 남들이 안 된다고 하는 걸 보란 듯이 성공시키고 싶었다.

<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도 크게 성공한 영화 중 하나지만, 기획 단계 때 내부에서부터 반대가 컸던 영화기도 하다. 핸드볼은 비인기 종목 아닌가. 비주류를 대표하는 종목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심지어 경기에서도 진다(웃음). 경기를 지고도 시상대에 오른 선수들이 환하게 웃더라. 이기고 지는 것보다 최선을 다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다. 투자도 몹시 어려웠다. 개봉 때까지도 제작비 마련을 못할 정도였는데, 보기 좋게 성공했다.

영화의 구실 중 하나가 사회의 순기능이다. 언급한 세 흥행작은 남들이 가지 말라는 길, 실패가 뻔히 보이는 저점을 보기 좋게 타고 넘어가서 결과적으로 성공한 영화다.

여기에 <관능의 법칙>을 본 분은 얼마나 있을까? 정말 조금 보셨네(웃음). 왜 중년 여성을 다룬 로맨틱 코미디는 없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제작했는데, 누가 이렇게 댓글을 달았더라. “젊은 여자가 떼로 나와도 안 보는데 늙은 여자가 나오면 누가 보느냐.” 영화나 예능이나 남자들이 주도한다. 여자는 주로 게스트다. 하다못해 아기 키우는 것도 남자들이 하지 않나. 여자들의 이야기로 상업성을 구현하는 게 그만큼 쉽지 않다. 대학 영화과에 여학생이 50%나 되는데, 상업영화에 진출하는 수는 적다. 할리우드도 마찬가지다. 그만큼 진입장벽이 높다. <관능의 법칙>이 실패하면서 대중문화 트렌드를 놓치고 있는 제작자구나, 싶어서 반성했다. 잘될 줄 알고 제작뿐 아니라 투자까지 했는데 회사에 손해를 끼친 대표가 됐다. 예술영화 제작자라도 손익은 맞춰야 한다. 그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재생산을 할 수 있으니까.

< 카트>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성공이 없었으면 용기를 내지 못했을 거다. 어떤 영화는 현실의 망치 구실을, 어떤 영화는 고달픈 현실을 잊게 만드는 구실을 한다. 영화마다 미덕과 가치가 다르다. <카트>를 10대도 많이 봤으면 좋겠다 싶어서 아이돌을 캐스팅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웃음). 현실이 아픈데 돈 내고 아픈 현실을 또 보게 만드느냐는 분들이 많았다. 영화가 주는 위로, 판타지, 이런 측면에서 <카트>가 팍팍했던 것 같다. <카트> 상영 때, 몇몇 선생님이 자리를 마련해줘서 학생들 앞에서 GV(관객과의 대화)를 한 적이 있다. 약간 미안했다. 아이들은 <인터스텔라>를 보고 싶었을 텐데 왜 이런 걸 보여주나 했을지도 모르고, 그런데 보고 싶은 것만 볼 수 있나 싶기도 하고.

영화사 20년 노하우 전수하는 문화재단

<카트>에는 후원자 5500명이 있다. 제작비 30억원 중 2억원이 소셜 펀딩이다. 일부러는 아니었지만 대기업 투자도 받지 않았다. 만들기 어려운 소재의 영화인데, 그분들에게도 성공했다는 보람을 드리지 못해 미안하다. 개인투자자 분들에게 정말 미안하게 생각한다. 제목도 잘못 지은 게 맞다. 누가 ‘카트라이더’냐고 하더라(웃음). <관능의 법칙>은 전혀 관능적이지 않아 관객을 호도했고, <카트>는 제목이 주는 해석의 여지가 그 영화의 본질을 사전에 차단시킨 게 아닌가 싶다. 이것 역시 제작자의 책임이다.

일종의 오기를 부려본 셈이다. 남들이 다루지 않는 이야기니까. 앞의 세 편은 성공하고, 두 편은 안 되었으니 반면교사 삼아 이후에 어떤 영화를 해야 할지 고민이 더해졌다. 사실 계속 실패하다 보면 심리적으로 위축된다. 영화는 리스크가 크고 긴장해야 하는 비즈니스다. 하지만 실패든 성공이든 관성에 매몰되지 않는 태도가 중요한 것 같다.

최근 명필름 문화재단을 만들었다. 영화사로서는 최초로, 일종의 영화학교다. 2월에 시작했는데 무상 기술학교다. 공짜로 교육받고 장편 영화감독으로 데뷔할 수 있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것과 달리 현장에서 영화 만드는 법을 가르치고 개성 있는 인재를 배출하고 싶다. ‘계속 멋진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영화인으로서의 의지도 있었다. 무엇보다 20년 동안 영화사를 운영하면서 영화 36편을 만들었는데, 많은 이들과 경험을 공유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개봉할 영화 중 한 편이 <화장>이다. 임권택 감독의 102번째 영화이자, 김훈 작가의 단편소설이 원작이다. 요즘 40~50대 관객이 극장에 많이 온다지만 그래도 흥행을 이끄는 건 젊은 세대다. 죽음과 생명의 문제를 다루는 만만치 않은 이야기이기 때문에 마케팅이나 흥행 측면에서 많이 걱정이 된다.

여기 모인 분들처럼 저 역시 ‘뭐라도’ 해야 한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니까 앞으로도 영화로 실천하고 영화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정리·녹취/장일호·임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