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도라의 상자’ 선관위가 열다
‘판도라의 상자’ 선관위가 열다
2월24일 선관위가 정치관계법 개정 제안을 내놓았다. 국회의원 비율을 지역구 200명 대 비례대표 100명으로 바꾸고, 전체 의석 배분을 정당 득표율에 맞추자는 게 핵심이다. 이 제안을 두고 정치권의 계산이 복잡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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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0호] 승인 2015.03.09 08:54:54 |
선거제도를 바꾸는 것은 헌법을 바꾸는 것과 비슷하다. 권력이 어떻게 배분되는지를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헌법이라고 한다면, 선거제도 개정 역시 권력 배분의 원리를 뿌리부터 바꾸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학자들 중에는 선거제도를 규정한 일련의 정치관계법을 ‘준헌법적 법률’이라고 부르는 이도 있다.
2월24일 선거관리위원회가 국회의원 선거제도 개정을 핵심으로 하는 일련의 정치관계법 개정 제안을 내놓았다. 내용만 놓고 보면 선관위가 개헌 발의를 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중대한 제안을 선출직 기관도 아닌 선관위가 해도 되는 것인가라는 비판은 타당하다. 입법부의 권한을 침해했다고 볼 소지가 많다.
먼저 선관위가 밝힌 제안 배경부터 보자. 헌법재판소는 현행 선거구 인구비례 기준(최소 선거구와 최대 선거구가 3배까지 차이가 날 수 있다)은 지나치게 폭이 넓다며 헌법 불합치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이제 인구비는 최대 2대1을 넘을 수 없다. 이에 따라 국회는 내년 4월 20대 총선을 앞두고 선거구를 대폭 조정해야 한다. 이 문제를 다룰 국회 정치개혁특위는 3월에 출범하는데, 지역구 조정이라는 핵폭탄급 숙제를 풀어야 해서 연말까지 격론이 이어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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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선거제도는 ‘현상 유지 편향’의 지배를 받는다. 제도를 바꿀 권한이 있는 당사자인 국회의원이 현재 선거제도의 수혜자이므로, 다른 변수가 없다면 국회는 현 제도를 유지하자는 결론을 내린다. 즉, 국회는 구조적으로 ‘현상 유지파’다(소수 정당은 예외).
그런데 헌재 판결이라는 ‘다른 변수’가 생겼다. 이제 국회는 대규모 선거구 조정을 강제당했다. 학계와 정치권의 선거제도 개혁론자들은 이를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현상 유지 편향이 헌재의 힘으로 흔들리는 지금, 더 밀어붙이면 선거구 조정을 넘어 선거제도의 근본 변화를 이끌어낼 수도 있다는 기대에서다. 이들을 ‘제도 개정파’라고 부르자.
그런 구도에서 선관위의 제안이 등장했다. 선거구 조정에만 그치지 말고 큰 틀에서 제도를 바꾸자는 게 핵심이다. 이 제안은 현상 유지파인 입법부의 호응은커녕 관심도 받기 힘들지만(“선관위 제안은 ‘엔진’ 없는 멋진 자동차” 기사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론을 환기시키는 의미가 있다. 국회 외부에 제도 개정파가 존재하고, 이들이 선관위의 제안을 지렛대로 쓸 것이다. 적어도 연말까지 이어질 격론에서 제도 개정파는 무기 하나를 논의의 출발점에서 얻은 셈이다. 이들은 선관위가 그럴 권한이 있느냐라는 문제 제기에 동의하면서도 전략적으로 묵인하는 분위기다.
선관위가 제안한 선거제도 개정안의 핵심은 두 가지다. 첫째, 지역구 246명 대 비례대표 54명으로 되어 있는 현재 국회의원 비율을 지역구 200명 대 비례대표 100명으로 바꾼다. 지역구 46석을 줄이자는 폭발력 강한 제안이다.
하지만 두 번째가 더 근본적이다. 현행 제도는 정당 득표율에 따라 비례대표 의석만 배분한다. 지역구 득표와 정당 득표는 별개다. 그런데 선관위 안대로 하면, 비례대표 의석이 아니라 전체 의석 배분을 정당 득표율에 맞춘다. 2012년 19대 총선을 예로 들면 이렇다. 통합진보당은 비례대표 투표에서 10.3%를 얻었다. 이 득표로 비례대표 54석 중 6석을 받았다. 여기에 지역구 7석을 더해서 총 13석이었다. 그런데 선관위 제안이 도입되면 통합진보당은 득표율인 10.3%를 그대로 의석으로 보장받는다. 300석 중 약 30석 안팎(몇몇 변수에 따라 달라진다)을 얻게 된다.
어떤 원리일까. 선관위 제안에서는 비례대표 100석을 일종의 ‘보증금’으로 간주한다. 이 보증금의 목표는 국회 의석 분포를 정당 지지율에 맞추는 것이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 전국 지지율이 15%인 제3당이 지역구에서 1석도 얻지 못할 수 있다. 승자독식인 지역구 선거에서는 1등만이 살아남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례대표 100석이라는 보증금이 있다. 지역구에서 전패한 3당은 이제 정당 지지율에 따라 45석(전체 300석의 15%)을 보증금에서 인출받는다.
‘독일식’ 선거 원리 도입하면 의석수 출렁
독일의 선거제도가 이런 원리로 운영되므로, 이런 식의 보증금 시스템을 ‘독일식’이라고 부르곤 한다. 선관위의 제안은 독일식을 기본으로 하되 세부 사항에 변형을 준 것이다. 독일식은 지역구와 비례대표의 비율이 1대1이지만, 선관위 제안은 2대1이다. ‘보증금 계산’은 전국이 아니라 6개 권역 단위로 이루어진다.
반면에 현행 선거제도는 지역구와 비례대표가 ‘독립회계’를 한다. 정당 투표 결과는 비례대표 의석 배분만 결정하고, 지역구 선거 결과와 단순 합산한다. 이런 식의 독립회계 시스템을 흔히 ‘일본식’이라고 부른다.
같은 비례대표 100석이라 해도, 독일식과 일본식의 운영 원리와 결과는 큰 차이가 난다. 19대 총선 결과를 놓고, 몇 가지 가정을 단순하게 해서 시뮬레이션해보자. 부산·울산·경남 권역의 유권자는 전국의 약 16%이므로, 선관위 제안대로라면 이 권역은 지역구 32석, 비례대표 16석을 배출하게 된다(현행 제도에서 이 권역은 지역구 40석과 비례대표 약 8석을 배출한다).
아래 <표>를 보자. 부산·울산·경남 권역의 19대 총선 실제 결과, 지역구와 비례대표를 합쳐 새누리당은 40석, 민주당(현 새정치민주연합)은 6석을 얻었다. 이 결과는 새누리당이 의석의 83.3%를 휩쓴 것으로, 정당 득표율 57.4%와는 격차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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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 제도에서 지역구를 200석으로 줄이고 비례대표 숫자를 100석으로 늘리되, 일본식 독립회계를 유지하면 어떻게 될까. 전체 비율 변동대로 각 당의 의석수를 조정해보면, 새누리당은 38석을 얻게 된다. 이는 실제 총선 결과보다 2석이 줄어든 것으로, 비례성이 다소 개선되기는 했지만 큰 차이는 아니다. 여전히 의석의 79.2%를 가져간다.
이제 지역구 200석, 비례 100석에서 비례 100석을 보증금으로 활용해보자. 독일식이다. 부산·울산·경남 권역에서 새누리당의 정당 득표는 57.4%로 의석으로 치면 28석이다. 그런데 지역구에서 이미 30석을 얻어 이 숫자를 넘겨버렸다. 그러므로 새누리당은 보증금을 받지 못한다.
반대로 민주당은 정당 득표율이 31.2%로 의석으로 치면 15석인데 지역구에서는 2석만 얻었다. 비례대표 16석에서 13석을 찾아야 하는데 통합진보당과 나누다 보면 보증금이 약간 모자란다. 새누리당이 지역구를 휩쓸어서 그렇다. 민주당은 12석을 인출해 총 14석이 된다. 의석 기준 29.2%로 정당 득표율에 근접하게 된다.
아래 <표>를 보면 확실해진다. 선관위 제안에서 진정으로 근본적인 차이는 ‘비례대표 확대’가 아니라 ‘일본식에서 독일식으로의 변화’ 때문에 일어난다. 개헌에 준하는 파괴력이다.
의석 변화가 끝이 아니다. 정치학계에서 합의에 가까운 공리가 있다. 승자독식형 제도에서는 양당제가, 비례성이 높은 제도에서는 다당제가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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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선관위의 제안은 다당제를 강화할 가능성이 높다. 정의당(사진), ‘국민모임’ 등은 비례성이 높은 제도에서 독자 생존을 모색하기가 쉽다. |
비례성이 높으면 승자독식형 소선거구제에서 1위를 할 수 없는 정당이라 해도 어느 정도 의석을 얻을 수 있다. 이러면 연대나 통합을 해야 할 이유가 줄어들기 때문에 다당제가 등장한다. 독일식 보증금 제도는 비례성을 아주 강력하게 보장한다. 제3당의 생존 가능성은 극적으로 올라간다. 정당 득표율 10%면 30석을 얻어 단번에 국회 교섭단체 기준(20석)을 넘긴다.
양당제는 통치의 안정성이 높고 극단주의를 걸러낸다는 장점이 있다. 다당제는 다양한 민의가 대변되고 세력 간 타협을 강제한다는 장점이 있다. 다당제 국가의 타협 모델은 복지국가를 잉태하는 경향도 있다. 보는 이에 따라 취향과 선호가 갈릴 수 있다. 하지만 ‘2017년 대선의 집권 가능성’이라는 주제로 초점을 좁혀보면 얘기가 다르다.
첫눈에 보기에 선관위 제안은 여당보다는 야당에 유리한 듯하다. 서로 상대의 본진 격인 영남과 호남에 교두보를 만들 수 있는데, 영남의 의석이 훨씬 많다. 새누리당의 호남 지지율보다는 새정치민주연합의 부산·울산·경남 지지율이 더 높기도 하다. 하지만 출판사 후마니타스의 박상훈 대표(정치학 박사)는 “당장 제도 효과만 보면 새누리당의 재집권 가능성을 높일 것이다”라고 예측했다. 무슨 논리일까.
대선은 승자독식형 단순다수제 선거다. 통합이 유리하고 분열은 불리하다. 그런데 독일식 비례성은 다당제 경향을 이끌기 때문에 통합보다는 분열을 촉진하는 경향이 있다. 비례성 총선-승자독식 대선 제도 조합이 야당 분열을 촉진하므로 여당이 대선에서 유리하다는 얘기다.
의문은 남는다. 왜 야당에 일방적으로 불리하다는 것일까. 여당 역시 분열 가능성은 있다. 2012년 총선에서 박근혜 당시 비상대책위원장이 ‘친이계 공천 학살’을 단행할 때 새누리당도 분열 직전까지 갔다가, 김무성 현 대표의 당 잔류 선언으로 겨우 진정되었던 적이 있다. 당시 선거제도가 독일식 비례성을 보장했다면 여당의 분열 가능성이 더 높아졌을 것이다.
박상훈 대표는 두 가지 차이를 근거로 든다. 첫째, 집권 가능성이 높을수록 분열보다는 잔류를 택할 이유가 있다. ‘먹을 것’이 많기 때문이다. 범여권은 집권이 걸린 게임에서 분열을 제어하기 쉬운 고정 지지층을 갖고 있다. 두 번째 이유도 이와 연관된다. 새누리당이 조직과 지지 기반에서 더 강하고 성숙한 정당이다. 같은 조건하에서라면 분열 압력에 더 잘 버틸 수 있다. 반면에 야권은 국민모임 등 창당 준비 세력이 지금도 존재한다. 원내 3당인 정의당도 현 제도에서는 총선 전망이 밝지 않지만 비례성 높은 제도에서라면 독자 생존을 모색하기가 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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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선관위의 제안은 다당제를 강화할 가능성이 높다. 정의당, ‘국민모임(사진)’ 등은 비례성이 높은 제도에서 독자 생존을 모색하기가 쉽다. |
선관위가 내놓은 개정 의견 꾸러미 중에 거의 주목받지 않는 조항이 하나 있다. 후보자 사퇴 금지 기간을 설정하고, 그전에라도 후보자가 사퇴하면 선거보조금을 반환하도록 하자는 제안이다. 제안 자체만 보면 큰 쟁점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비례성 총선-승자독식 대선 제도 조합과 엮어보면 의미가 전혀 달라진다.
선관위 제안대로라면 후보 단일화 거의 불가능
사퇴 금지와 보조금 반환 조항은 후보 사퇴의 비용을 높이므로, 독자 완주로 후보를 이끄는 효과를 낸다. 비례성 총선으로 다당제 재편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해보자. 다당제 국면에서 후보 사퇴의 비용이 높아지면, 대선에서 후보 단일화는 현 제도에서보다 더 어려운 과정이 될 수 있다.
총선은 더 험난하다. 독일식 제도에서 제3당의 총선 지역구 후보는 정당 득표율을 높이기 위해 완주하라는 압력을 크게 받는 데 더해, 완주하지 않으면 선거보조금도 받지 못한다. 지역구 후보 단일화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게임이 될 수 있다.
비례성 강화와 사퇴 비용 강화가 조합되면, 개별 정치세력에게는 단일화보다는 독자 완주가 ‘합리적 선택’이 된다. 그런데 집권 가능성과 정당의 성숙도라는 변수 때문에, 애초에 야권이 여권보다 다당제 압력에 휩쓸려갈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이 제도 조합은 여권보다는 야권 분열을 더 강하게 일으킬 수 있다. 박상훈 대표는 “전략적 의도 없는 정치 행위는 없다. 선거제도는 최고의 정치 전략일 수밖에 없는데, 특히 상대의 요구를 수용해 의도를 관철하는 것이 최고의 실력이다”라고 말했다. ‘비례성 강화’라는 야권 의제를 수용하는 형식으로 여권의 재집권 가능성을 높이는 제안이라는 얘기다.
최태욱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정치학)는 비례성 강화에 학문적 과업을 걸다시피 한 제도 연구자다. 그는 이 제도 조합이 다당제 효과를 낳을 것이라는 데 동의하면서 그 효과는 다르게 예측한다.
“첫째, 다당제는 오히려 연합정치를 제도화한다. 지금까지 보았던 어정쩡하고 변수 많은 연대보다 질서 잡힌 연합정치가 오히려 깔끔하게 전선을 정리하는 효과가 있다. 둘째, 다당제가 대세로 정착하면, 그때는 대선 결선투표 의제가 등장하는 것은 필연이다. 결선투표가 도입되면 단일화 논의 자체가 무의미하고, 그러면 제도 조합상의 모순은 자연스레 해소된다.” 비례성 총선-승자독식 대선 제도 조합에 모순이 있다면, 아예 다당제 모델에 맞게 대선 제도까지 바꾸는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라는 예측이다.
독일식 비례성 강화가 도입되는 가능성 희박한 시나리오가 현실이 된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 해도 2017년은 문화적으로나 제도적으로나 다당제와 양당제의 어정쩡한 동거가 불가피하다. 장기적 효과와는 별개로, 과도기 국면에서라면 여당이 제도 조합의 모순을 파고들 여지가 더 크다는 것은 개연성 높은 예측이다.
이런 맥락으로 보면 선관위 제안은 ‘거대한 거래’로 번역되어 읽힌다. 선관위 제안에는 비례성 강화는 물론이고 지구당 부활과 같은 진보적 정치학계의 주요 의제가 다수 들어가 있다. 하지만 이 제도 조합을 야권이 수용하면 당장 분열이라는 비용은 야권이 더 크게 질 수 있다. 역으로 말하면, 선관위가 내놓은 비례성 강화에는 아예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 새누리당이, 나중에는 대선 전략 차원에서 비례성 강화를 통한 다당제 모델을 검토할 가능성도 있다는 얘기다. 야권 분열은 여권이 즐겨 노리는 고전적 전략이다. 김영삼 정부는 당시 재야의 비(非)DJ 노선이라 할 만한 민중당을 사실상 지원해 야권 분열을 연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당시 민중당 간판인 김문수·이재오 등은 지금 새누리당에 있다).
진보 성향의 학계나 정치권으로서는 장기적인 제도 효과와 단기적인 분열 비용을 견줘보는 복잡한 계산을 해야 할지 모른다. 장기적인 제도 효과가 더 크다고 확신하는 전략가라면, 야권의 분열 비용이라는 미끼로 새누리당을 비례 강화파로 끌어들이는 ‘대담한 전략’도 구상할 수 있다.
판은 헌법재판소가 깔았다. 판돈 없는 선관위가 첫 카드를 오픈했다. ‘큰손’인 입법부와 여론은 일단 관심을 두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판은 연말까지 이어질 것이고, 수많은 변수가 기다리고 있다. 일차방정식으로 간단히 풀릴 문제는 아니다.
“선관위 제안은 ‘엔진’ 없는 멋진 자동차”
선관위의 제안에 대해 새누리당은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영남을 기반으로 하는 여당이 입을 타격이 크기 때문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은 공식적으로는 ‘환영’한다고 하지만 속내는 다르다. 앞길이 첩첩산중이다.
“우환이 든 집에 폭탄을 던진 거지.” 선관위발 정치 개혁안에 대해 새정치민주연합 중진 의원이 내놓은 평이다. 우환은 지난해 헌법재판소가 선거구당 인구 편차가 2대1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결정을 내린 일이고, 폭탄은 선관위가 내놓은 정치관계법 개정안이다. 헌재 판결에 따른 선거구 조정만으로도 머리가 아플 지경인데, 정치관계법 개정안이 여의도를 흔들었다는 이야기다.
폭탄이 머리 위에 떨어진 쪽은 새누리당이다. 선관위 개정안을 도입했을 때 영남을 지역 기반으로 하는 새누리당이 입을 타격이 더 크기 때문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의 영남권 득표율이 새누리당의 호남권 득표율보다 높은 현실을 볼 때 새정치민주연합이 비례대표로 얻을 수 있는 의석은 상대적으로 많아진다(‘판도라의 상자’ 선관위가 열다 기사 참조).
선관위 안대로 석패율제가 시행될 경우 영남에서 3% 이상 득표한 새정치민주연합 후보 44명, 호남에서 3% 이상 득표하고 전원 탈락한 새누리당 후보 13명에게 ‘회생’의 길이 열린다. 19대 총선에서 대구 수성갑에 출마해 40%를 득표한 김부겸 전 의원 같은 이들이 살아 돌아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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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선관위 안처럼 지역구를 200석으로 줄일 경우 인구가 적은 농어촌 지역의 의석수가 줄어든다. 농어민 단체 대표들의 반대가 거세다(위). |
새누리당이 반길 리 없다. ‘정치 개혁’을 반대하는 것으로 비칠까 봐 대놓고 반대하지는 못하지만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국회에서 차차 이야기해보자는 쪽이다. 당 지도부도 공식적으로 말을 아끼고 있다. 그러나 <영남일보> 보도에 따르면 유승민 원내대표는 “어느 정당이 선거제도 바꾸면 자기 의석수가 줄어들 것을 뻔히 알면서… (하겠냐). 취지는 좋아도 찬성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공식적으로는 ‘환영’이다. 문재인 대표가 직접 나서 “저와 우리 당은 정치의 고질적 병폐인 지역대결 구도의 해결 방안으로 권역별 비례대표제와 석패율제 도입을 주장했는데, 독립 기관인 선관위도 같은 의견을 냈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속내는 다르다. 선거제도에 밝은 새정치민주연합의 한 전략통은 선관위 안이 “허황되고 무책임한 안이다”라고 잘라 말했다. 선관위 안처럼 지역구가 246석에서 200석으로 줄어들 경우 인구가 적은 농어촌 지역의 의석수가 매우 줄 수밖에 없다.
특히 인구 감소에 시달리는 호남이나 대구·경북이 직격탄을 맞게 된다. 이 전략통은 “지금도 진안·무주·장수·임실이나 영양·영덕·봉화·울진처럼 기초단체 여럿을 묶은 지역구가 있는데 선관위 안대로 의석수가 줄면 국회의원 한 명이 한 도의 3분의 1을 대표하는 결과가 생길 수 있다. 지역 대표성이 완전히 무너진다”라고 말했다.
석패율제와 지구당 부활은 처리 가능성 있어
현역 지역구 의원의 ‘결사항전’도 불을 보듯 뻔하다. 선관위 안 발표 이후 농어촌 지역 의원들은 선거제도 개편을 논의하는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정개특위)에 참여시켜 달라고 요구하는 등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다. 이들은 3개 이상의 기초단체로 1개의 지역선거구(복합선거구)를 구성할 경우 인구와 상관없이 현행 선거구를 유지하도록 하는 것은 물론, 단일 선거구 면적이 전국 선거구 평균 면적의 2배를 초과하는 경우에도 선거구를 유지하는 법률 개정안까지 제출할 계획이다. 선관위 안과는 정반대 방향이다. 전체 의석의 4분의 1에 달하는 농어촌 지역 국회의원이 여야를 초월해 똘똘 뭉치는 형국이다.
그동안 선거제도를 논의해온 정치권 인사들이 이번 선관위 안에 ‘냉소’하는 것은 선관위가 도무지 타협 가능성이 없는 안을 던져놓고 나 몰라라 한다는 점이다. 지난해 헌재 판결로 인한 선거구 조정만으로도 국회는 이미 ‘불난 집’이었다. 62곳에 달하는 선거구 조정을 어떻게 할지 골머리를 앓고 있던 차였다. 일부 현역 의원들은 도리어 비례대표를 줄여서 지역구를 지키자고 주장했다. 그러다 보니 국회의 현실을 감안할 때 이번 기회에 ‘의원 정수’를 늘려 비례대표 숫자를 ‘유지’하는 것이 합리적인 해법이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시사IN> 제376호 ‘뜨거운 감자, 의석수 늘리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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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자료 석패율제가 시행되면 대구에서 40%를 득표한 김부겸 전 의원 같은 이가 ‘회생’할 수 있다. |
비례대표를 줄이자는 주장까지 나왔던 판국에 선관위가 ‘비례대표 대폭 확대’라는 폭탄을 떨어뜨렸으니 여의도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각 정당의 전략기획 파트도 헌재 판결에 따른 선거구 조정만 논의하고 있다가 뒤통수를 세게 맞았다. 앞서 언급한 새정치민주연합의 전략통은 “선관위가 이번에 의원 정수를 늘리자는 주장을 펴고, 정치권이 그에 발맞춰 비례대표 확대를 논의하는 순서였다면 좋았을 것이다. 이번 선관위 안은 ‘엔진이 없는 멋진 자동차’라고 보면 된다”고 덧붙였다.
확실히 현실성은 떨어진다. 3월 들어 가동될 예정인 국회 정개특위에서 선관위 안이 논의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문재인 대표가 “정개특위에서 선관위 안을 최우선으로 논의해야 한다”라고 밝혔지만, 이를 액면 그대로 믿는 이들은 없다.
선관위 안을 지렛대로 진일보한 타협안(예컨대 석패율제)이라도 도출하려는 것 아니겠느냐는 추측이 우세하다. 석패율제의 경우 새정치민주연합이 2월8일 전당대회에서 당헌·당규로 못 박았고,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도 검토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지구당 부활의 경우 그동안 정치권에서 꾸준히 필요성을 제기해왔던 만큼 처리될 가능성이 크다.
적어도 정치권 내부에서는 선관위발 정치 개혁을 추동할 동력이 거의 없다. 그나마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에 따라 당선 가능성이 높아질 영남 지역의 새정치민주연합 원외 당협위원장들, 호남 지역의 새누리당 원외 당협위원장들이 지역주의 완화를 요구하며 움직일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이들 상당수가 현역 의원의 영향권 아래 있음을 생각하면 그마저도 큰 동력은 아니다. 새정치민주연합 내부에서는 문재인 대표가 선관위 안을 계기로 강력한 정치 개혁 드라이브를 걸 수도 있다는 전망이 조심스럽게 나오지만, 앞길은 첩첩산중이다.
속담을 비틀자면, 떡 먹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선관위가 김칫국부터 내놓은 셈이다. 떡을 먹도록 할 수 있는 건? 여론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