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국제정세 칼럼

고인이 된 대통령이 피고인석에 있었다 - 그 수첩에 적힌 이름 ‘유유상종’ 정다워라

일취월장7 2015. 3. 5. 10:29

 

고인이 된 대통령이 피고인석에 있었다

‘사초 폐기’ 논란에 휩싸인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사건이 검찰의 망신으로 일단락됐다. 검찰은 대규모 수사팀과 예산을 들여 봐주기 수사와 무리한 기소를 남발했다. 그런데도 담당 검사는 법무부 대변인으로 영전했다.

김은지 기자  |  smi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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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0호] 승인 2015.03.05  08:28:33

 

지난 2년 동안 한국 정치를 뒤흔들었던 ‘2007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정상회의록)’ 사건이 검찰의 잇단 망신으로 일단락되었다. 정상회의록을 둘러싼 검찰의 이중 잣대가 법원에서 연달아 깨졌다. 지난해 검찰은 정상회의록 내용을 유출한 여당 인사에게 약식기소라는 가벼운 처벌을 하려다 법원의 정식재판 명령이라는 제지를 당했다. 그 결과 검찰 구형보다 센 형이 선고되었다. 이례적인 경우다. 검찰의 칼날이 무뎠다는 법원의 판단을 받은 셈이다.

반대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지난해 5월 ‘정상회의록 삭제’ 1차 공판. 직접 모두진술에 나선 서울중앙지검 공안2부 김광수 부장검사는 프레젠테이션에서 신흠의 한시 ‘상촌휘언(象村彙言)’을 인용했다. “선조 즉위년부터 임진왜란 직전까지 역사 기록이 깜깜하다/ 임란 도중 사관 4인방이 사초책을 모두 불태우고 도망갔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사적을 다 찾아 기록하자면 10년 걸려도 완성할 수 없을 것이다/ 도망자들에게 다시 역사를 맡기는 것은 나라의 수치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정상회의록 폐기를 공모한 혐의로 기소된 조명균 전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정책비서관(왼쪽)과 백종천 전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가운데)이 2월6일 무죄를 선고받은 뒤 법원 건물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정상회의록 폐기를 공모한 혐의로 기소된 조명균 전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정책비서관(왼쪽)과 백종천 전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가운데)이 2월6일 무죄를 선고받은 뒤 법원 건물을 나서고 있다.

사관들이 사초를 불태워 ‘선조실록’은 <조선왕조실록> 중 가장 질이 떨어진다는 오명을 얻었다면서, 자신이 맡은 사건을 여기에 빗댔다. 이에 앞서 2013년 11월 그는 참여정부 시절의 백종천 대통령비서실 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과 조명균 통일외교안보정책비서관이 정상회의록을 대통령 기록물에서 삭제했다며 대통령기록물관리에 관한 법률위반 등으로 기소했다. 피고들의 행위가 역사에 남을 대역죄라는 힐난이 담긴 비유였다. 그 정도로 검찰은 이 사건에 매달렸다. 서울중앙지검 공안2부 부장검사가 사건을 진두지휘했고 검사 7명, 수사관과 분석관 21명을 투입해 114일 동안 수사했다.

검찰은 수사 결과를 내놓으면서 “역사적 진실을 규명한다는 의지로 91일간 압수수색을 통해 객관적 사실을 확인했고 정치적 논쟁을 배제하고 오로지 법률에 따라서만 수사했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백 전 실장과 조 전 비서관을 각각 징역 2년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검찰의 논리는 법원에서 철저히 깨졌다. 지난 2월6일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30부(부장 이동근)는 두 사람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1심 재판부의 판단은 단순명료했다. 두 사람이 삭제한 회의록은 대통령 기록물이 아니라고 봤다. 사초(史草)가 아니라는 뜻이다. 대통령의 결재 여부가 대통령 기록물을 가르는 기준인데, 당시 처음 올라온 녹취록을 열람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검토를 지시하며 결재를 하지 않았다.

또 재판부는 처음 만들어진 정상회의록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사건 회의록 파일은 최종 완성된 단일본을 전제로 하는 녹취 자료 초본의 속성을 가진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 사건 문서관리 카드에 대해 재검토 지시를 하는 과정에서 이 사건 회의록 파일의 내용에 오류가 있음을 지적하면서 전체적인 수정·보완을 지시했으므로, 이 사건 회의록 파일은 완성본이 아니다(2013고합1232).”

그렇기에 초본은 삭제하는 게 타당하다고 밝혔다. 완성된 정상회의록 파일과 헷갈릴 우려가 있기에 초본은 없애는 게 맞다는 것이다. 재판 과정에서 제출된 통일부·국정원·대통령비서실 등의 사실 조회나 관련자 진술만 봐도 그런 관례는 존재했다.

‘선거용’으로 정상회의록 꺼내든 여권

검찰은 처음 만들어진 녹취록을 ‘원본’, 노 전 대통령의 지시로 수정·보완된 녹취록을 ‘변경본’이라 규정했지만, 재판부가 ‘초본’과 ‘완성본’이라는 단어로 각 문서의 성격을 정리해 사건의 본질을 명징하게 했다. 실무자가 정상회의록의 녹취 완성본을 만들면서 부정확한 초본은 보안과 혼선 방지 등을 위해 지웠다는 것이다. 초본과 완성본 사이에는 반말이 높임말로 바뀌는 등의 변화가 있지, 내용은 기본적으로 같다는 점은 검찰조차 인정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자료</font></div>‘사초 폐기’ 논란은 여권이 주도했다. 왼쪽부터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정문헌 의원, 남재준 전 국정원장.  
ⓒ시사IN 자료
‘사초 폐기’ 논란은 여권이 주도했다. 왼쪽부터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정문헌 의원, 남재준 전 국정원장.

하지만 검찰은 재판 내내 ‘노무현 탓’을 펼쳤다. 훗날 정상회의록이 공개될 경우 자신이 정치적으로 곤란해질 상황을 막기 위해 삭제를 지시했다는 논리를 법정에서 설파했다. 심지어 기소 후 1년이나 지난 지난해 11월에서야 이와 같은 범행 동기를 추가해 공소장 변경을 했다. 이 때문에 “샅샅이 뒤지며 수사할 동안에도 찾지 못했던 범행 동기를 재판 중 갑자기 어떻게 찾았느냐”라는 변호인 쪽의 반발을 샀다.

무죄판결이 난 날 노무현재단은 “검찰은 수사는 물론 공판 과정에서 노 대통령에 대한 모욕 주기에 열을 올렸다. 노 대통령을 끊임없이 보이지 않는 피고인석에 앉혔다”라고 논평을 냈다. 그만큼 이번 재판은 ‘노무현 재판’이기도 했다는 말이다.

검찰은 항소하겠다고 밝혔지만, 당장 체면을 구겼다. 수사팀 29명에 4억여 원 상당의 디지털 증거분석용 특수 차량까지 투입하는 등 대대적인 예산을 투입했던 수사가 1심부터 실패했다.

기록 관리의 정상 프로세스가 ‘사초 폐기’ 사건으로 둔갑한 데에는 정치권의 영향력이 컸다. 연산군도 안 하던 짓이라며 2013년 7월 새누리당이 고발해 시작된 수사였다. 검찰 수사가 시작된 다음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나서 “사초 증발은 국기를 흔드는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언급했다. 정권에 코드를 맞춘 무리한 기소였다는 지적을 받는 이유다.

정상회의록을 봤다는 혐의로 수사를 받은 여당 인사들은 ‘봐주기’로 일관한 점도 검찰 비판에 힘을 싣는다.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부장 이현철)는 “남북정상회담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NLL 포기 발언을 했다”라고 말해 이 사건에 불을 붙인 정문헌 새누리당 의원만 약식기소했다. 정상회의록과 똑같은 내용을 대선 유세장에서 읊었지만 출처가 ‘지라시’라고 둘러댄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2급 기밀문서였던 정상회의록을 일반문서로 재분류해 공개한 남재준 전 국정원장 등에게는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그나마도 법원이 제동을 거는 바람에 정문헌 의원은 정식재판을 받았다. 이현철 부장검사는 약식기소 때와 같은 벌금 500만원을 구형했지만,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6부(부장 김우수)는 두 배인 벌금 1000만원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이 사건 범행으로 오랫동안 정치·사회적 논란과 대립이 일어났고, 외교 신인도에 큰 손상을 초래했다. 향후 남북 정상 간 회담 개최 결정 및 회담 과정에서 남북 정상 모두에게 큰 부담을 안겨주게 될 여지도 없지 않다(2014고합704)”라며 양형 이유를 밝혔다. 자신의 발언에 정치 생명을 걸겠다던 정 의원은 슬그머니 항소를 포기했다.

정상회의록을 둘러싸고 봐주기와 무리한 기소를 남발한 ‘정치 검찰’은 결국 법원의 제재를 받았지만, 이 판결이 검찰 인사에까지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김광수 부장검사는 지난 2월23일 법무부 대변인으로 영전했다.

 

 

 

이토록 노골적인 언론 플레이

주진우 기자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 때만큼 검찰이 언론에 친절했던 적은 없었다. 검찰은 지난 정권의 주변을 먼지 털듯 털었고 의혹들을 부풀려 언론에 흘렸다. 언론은 신나게 받아썼다. 무차별적인 피의사실 공표였다. 정도가 심했던지 검찰 고위 간부는 “인간적으로 형편없는 빨대를 색출하겠다”라고도 말했다. 물론 말뿐이었다. 당시 ‘빨대’로 의심된 사람이 수사 책임자였던 이인규 중수부장(57·법무법인 바른 변호사)이었다. 대검을 출입하던 한 기자는 “이인규 부장을 필두로 수사팀 간부들이 신문과 방송에 돌아가며 기사를 줬다. 마치 군사작전처럼 착착 진행됐다”라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을 소환해서는 ‘박연차 회장과의 대질신문이 있다’고 발표하고, ‘조서 확인 시간이 길다’고 언급하는 등 모욕 주기에 스스럼이 없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  
ⓒ연합뉴스

수사를 지휘하던 이인규 부장은 노 전 대통령 서거 직후 법무법인 바른으로 자리를 옮겼다. ‘바른’은 박연차 전 회장의 변호를 맡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공격하는 자리에서 수비하는 자리로 말을 옮겨 탔다. 중수부가 존폐를 걸고 수사를 벌인 부산저축은행 수사에서 부산저축은행이 최대 10억원의 성공보수를 주기로 하고 변호사를 고용했는데, 그가 바로 이인규였다.

변호사가 되어서도 이인규는 노무현을 입에 달고 다녔다. 조현오 전 경찰청장이 노 대통령 차명 계좌 발언으로 재판을 받을 때, 이 변호사는 <중앙 선데이>에서 차명 계좌의 존재를 시인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그가 노 전 대통령을 원망하는 발언도 언론에 소개됐다. “평생을 검사로만 살고 싶었는데 그 꿈을 이루지 못하게 됐다. 저승에 가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만나면 왜 그랬느냐 (그런 선택을 해서 검사로서 삶을 그만두게 한 것을) 따지고 싶은 심정이다. 빚을 갚으라고 말할 것이다.”

최근 이 변호사는 느닷없이 “2009년 국정원이 ‘노무현의 논두렁 시계’ 보도를 만들어냈다”라고 폭로했다. 무슨 노림수가 있는지 짐작만 할 뿐이지만, 이처럼 노골적이고 지속적인 언론 플레이는 검찰 역사상 없었다.

 

 

 

그 수첩에 적힌 이름 ‘유유상종’ 정다워라

박근혜 대통령이 현직 국정원장을 비서실장으로 앉혔다. 김기춘 비서실장 후임으로 이병기 국정원장을 임명한 것. 이병기 신임 비서실장은 ‘북풍 공작’ ‘차떼기 사건’ 등 흑역사에 연루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이오성·김동인 기자  |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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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0호] 승인 2015.03.05  10:57:10

박근혜 정부 3년차의 코드는 명확하다. ‘친위 체제 구축’이다.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의 사임 이후로 혹시나 했던 기대감은 역시나로 끝났다. 정의당의 논평이 맞춤하다. “자기 사람은 끝까지 챙긴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인사 고집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청와대 비선 논란 이후 세간의 뜨거운 관심을 모은 차기 대통령 비서실장 자리는 또다시 안기부 출신 ‘공안통’에게 돌아갔다.

2월27일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임명된 이병기 전 국정원장의 경력은 ‘어두운 쪽’으로 화려하다. 1974년 외무고시에 합격해 1981년 노태우 전 대통령의 정무보좌진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김영삼 정부 시절 안기부에서 일했다. 1992년 대선 때 김영삼 후보를 도운 공로였다. 1997년 안기부 2차장(해외 담당)으로 재직할 당시에는 두 가지 큰 사건에 직간접으로 연루되었다. 우선 황장엽 전 조선노동당 비서가 망명했을 때 한국으로 데려오기 위한 막후 작전을 총괄했다. 북한 최고 실세가 망명한 이 사건은 당시 대선을 앞두고 정국을 급랭시켰다.

대선을 코앞에 둔 그해 12월에는 이른바 ‘북풍 공작’ 사건이 터졌다. 북한이 야당 후보인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정치자금을 지급했다고 안기부가 폭로한 사건이다. 정권이 바뀐 뒤 안기부가 돈으로 관련 증언자를 매수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이때 문제가 되었던 해외조사실이 이병기 비서실장이 이끌던 안기부 2차장 산하 조직이었다. 이병기 실장은 이후 북풍 사건이 벌어질 당시 해외 출장 중이었다고 밝혔지만, 의혹을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2월27일 박근혜 대통령이 이병기 국정원장을 비서실장에 임명했다. 위는 지난해 7월 국정원장 임명장 수여식.  
ⓒ연합뉴스
2월27일 박근혜 대통령이 이병기 국정원장을 비서실장에 임명했다. 위는 지난해 7월 국정원장 임명장 수여식.

2000년대 들어서도 ‘흑역사’는 계속되었다. 이른바 차떼기 사건이다. 2002년 대선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의 정치특보였던 이병기 실장은 이인제 의원 측을 만나 이회창 후보에게 유리한 역할을 해달라며 5억원을 건넸다. 이때 전달된 돈이 이회창 후보가 대기업으로부터 ‘차떼기(현금을 차 트렁크에 실어 전달하는 것)’로 받은 돈이라는 것이 밝혀져 큰 이슈가 되었다. 이병기 실장은 당시 사건에 대해 “단순 전달책이었을 뿐”이라는 주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지난해 6월 국정원장으로 지명되었을 당시 차떼기 사건으로 벌금 1000만원을 받은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논란이 되었다. 벌금 1000만원은 정치자금법상 최고 벌금형이다. 이 사건으로 한나라당은 오랫동안 ‘차떼기당’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중요 국면마다 등장했던 ‘선거 전문가’

이병기 실장이 박근혜 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것은 2004년 3월 한나라당 대표 경선 때였다. 그는 외교·안보 자문역으로 기용됐다. 차떼기당 논란에 이은 탄핵 역풍으로 한나라당이 총선에서 대패할 위기에 처했을 당시 박근혜 대표에게 천막 당사 아이디어를 낸 인물이 이병기 실장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때는 박근혜 캠프 선거대책부위원장을 맡아 현장에서 뛰었고, 2012년 대선 때는 여당의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소 고문으로 박 대통령의 ‘정치적 멘토’ 구실을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병기 실장은 지난 20여 년 동안 중요 국면마다 빠짐없이 등장해온 ‘선거 전문가’인 셈이다.

이병기 실장 임명에 대한 정치권의 반응은 허탈 그 자체다. 오랫동안 뜸을 들였던 인사치고는 참신하지도 않고, 소통형 인사도 아니기 때문이다. 현직 국정원장을 비서실장으로 앉힌 것에 대해서는 대통령의 ‘오기’까지 느껴진다는 평이 나온다.

여당에서조차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새누리당의 한 관계자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유죄 판결로 정권의 정통성마저 논란이 되는 마당에 과거가 어두운 공안통을 최측근으로 앉힌 대통령의 인사가 당혹스럽다. 여론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