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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지진+원전 사고=대한민국 침몰! - 어쩌면 붕괴 중인 한국형 싱크탱크

일취월장7 2016. 9. 27. 10:39

경주 지진+원전 사고=대한민국 침몰!

2016.09.27 09:32:43


[복지국가SOCIETY] 세월호 때도, 지진 때도 '가만히 있으라'는 정부

             
한반도 전체를 공포로 몰아넣은 경주 지진이 난 지 2주가 지났다. "지진은 끝났다"고 하던 정부의 발표를 비웃기라도 하듯, 지난 19일 저녁 8시 33분, 진도 4.8의 지진이 발생했고, 국민안전처의 재난 문자는 '또' 제대로 발송되지 않았다.

"지진을 못 느낀 사람들에게 재난 문자를 보내면 문제가 생길까 봐 전국 발송은 안 했다."

국민안전처의 공식 대답이다. 국민안전처 홈페이지는 지난 12일 마비 사태를 경험하고 처리 용량을 80배 늘렸음에도 또 마비되었다. 점입가경이다. 

한반도는 지진 안전지대가 아니다 

한반도에서 본격적으로 지진 관측을 시작한 1978년 이래, 2014년까지 총 1168회의 지진이 발생했고, 최근 들어 지진 발생 횟수는 더 많아지고 있다. 1980년대에는 연평균 16회, 1990년대 연평균 26회, 2000년대에는 연평균 44회의 지진이 발생했으며, 2010년 이후로 총 292회, 연평균 58.4회에 달하는 지진이 발생했다. 그 가운데 2013년은 무려 93회의 지진이 발생하여 관측을 시작한 이래 가장 많은 지진이 발생한 해이다. 지진 발생 빈도와 규모 3.0 이상의 지진 발생 횟수도 점점 증가하는 추세이다. 

이처럼 지진의 위험은 현실이 되었으며, 진원지 또한 동해(2004년 울진 앞바다 지진, 최대진도 5.2)와 서해(13년 백령도 지진, 최대진도 4.9)를 가리지 않고, 내륙에서 발생한 지진도 많다(1978년 속리산 지진, 최대 진도 5.2). 현실로 다가온 지진의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우리 정부는 1996년에 제1차, 2005년에 제2차 지진 방재 종합 대책을 수립했고, 2008년 중국 쓰촨성 대지진 이후 지진 재해 대책법을 제정·시행했다. 2011년 1차 개정을 거치고, 2014년에 세월호 참사를 통해 2차 개정을 거쳐 국민안전처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국민안전처는 국민에게 실망만 안겨주고 있다. 

▲ 박인용 국민안전처 장관이 지난 21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안전행정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경주 지진 대응과 관련한 의원 질의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반도 역사상 가장 큰 지진(地震)인가, 지진(遲進) 정부인가?

국민안전처는 지진 관련 8개 분야 58개의 세부 과제를 추진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예보 체계, 지진 재해 대응 시스템에 대해서 알아보자. 지진 재해 대응 시스템은 지진 발생 시 인명 및 건축물 등의 피해를 예측하여 초동 대응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시스템을 말한다. 이 시스템은 2005년부터 2009년에 걸쳐 개발되었고, 이후 지진 해일 대응 시스템으로 발전하기 위해 2013년까지 추진된 계획이다. 하지만 이번 지진에서 이 시스템이 정상 작동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12일 1차 지진(19시 44분)이 일어난 지 10분 여가 지난 시점에 1차 지진을 알리는 경보가 발령되었고, 그 후 2차 지진에 대해서는 문자를 받지 못했다는 사람들이 계속 나타났다. 또한 2차 지진의 경우 한반도 전체가 진동을 느낄 만큼 큰 지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만 재난 문자가 발송되어 서울과 수도권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아무런 정보를 제공받지 못했다. 진동을 느낀 사람들이 사실을 확인하고자 국민안전처 홈페이지에 접속을 시도했으나 홈페이지가 마비되어 많은 국민이 불안에 떨어야 했다.

정부는 지난 7월 울산 동구에서 지진이 발생했을 때(진도 5.0)도 17분이나 늦게 재난 문자를 발송했다. 그마저도 울산 4개구와 경남 4개 시군에 제한적인 문자 발송이 이루어졌다. 당시에도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지난 12일 지진 때도 같은 잘못을 반복했다. 지난 19일에 발생했던 지진의 여진에 대해서도 10분 늦게 문자가 발송되었다. 홈페이지가 마비된 것은 덤이다. 과거의 잘못으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다. 

박 대통령이 사랑하는 '골든타임'
 

박근혜 대통령과 정부는 지금까지 수차례의 '골든타임'을 허비하고 있다. 지진의 발생 빈도와 강도가 점차 강해지고 있는 지금이 지진에 대비하기 위한 '골든타임'이지만, 정부는 아직까지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이번 지진을 통해 발굴된 몇 가지 문제점에 대해서 살펴보자. 

1. 일본과 비교되는 국민안전처의 역량 

지난 12일 기상청은 지진 발생 20초 만에 각 방송국에 경보 전달을 요청했다. 하지만 국민안전처의 긴급 재난 문자는 지진이 끝난 후에서야 발송이 되었고, 국민들은 지진을 경험하고 나서야 이게 지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국민안전처의 대응이 느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기상청의 지진 규모 분석을 거치고 지진 영향권 분석이 마무리된 이후에야 긴급 재난 문자가 발송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만 약 10분이 소요된다. 굉장히 심각한 수준이다.

지진이 위험한 이유는 다른 자연 재해(태풍, 홍수 등)와 비교했을 때 아무런 전조가 없다는 것인데, 그렇기에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빠른 전파를 통해 대피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다. 또 지진이 발생하는 그 순간 정부 차원에서 교통을 통제하거나, 가스 공급 등을 차단하여 지진으로 인한 2차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다행히 이번 지진에서 민가에 설치된 보일러의 지진 감지 장치가 작동되어 가스를 차단, 2차 화재 등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지진 경보에 대해서는 일본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일본은 과거부터 지진 피해를 꾸준히 받아왔고, 대응해 왔다. 게다가 2011년 도호쿠 대지진을 경험하고 이러한 지진 경보 체계 발전에 박차를 가해왔다. 그 결과, 일본은 지진 발생 후 수초 이내에 긴급 지진 속보를 발송하고, 이어서 1~2분 이내에 지진의 정보를 담은 진도 속보를 알릴 수 있게 되었다. 현 일본의 시스템으로는 10분이면 지진은 물론이고, 해일에 대한 경보와 주의보까지 발송할 수 있다. 지진 전파에만 10분이 걸렸던 우리나라와 비교해볼 때 확연한 차이가 느껴진다.

▲ 지난 21일 오후 경북 경주시 황남동에서 기술자들이 잇따른 지진에 파손된 기와 교체 작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2. 재난 전파 매체의 늦은 대응 

방송은 재난이 발생했을 시 이를 전파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신뢰할 수 있는 매체다. 지진 발생 후 기상청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각 방송국들은 자막 송출을 서두르지 않았다. 정규 편성 방송을 내보낼 뿐이었다. 하물며 재난 방송 주관 방송사인 한국방송(KBS)도 지진 발생 3분 후에 자막을 내보내고, 이후 4분짜리 특보를 내보냈다. 늦었던 이유에 대해 KBS는 기상청의 요청이 사실인지 확인하는 데 시간을 사용했다고 변명한다. 기상청에 비해 어떠한 전문 인력이나 장비를 갖추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일본 공영 방송 NHK의 경우, 기상청이 발송한 긴급 지진 속보는 자막으로 알린다. 이후 정규 편성 중인 방송 중에도 뉴스 스튜디오로 바로 전환되어 지진에 관련된 정보를 알리고, 재난 전용 스튜디오가 마련되는 즉시, 지진에 관련된 정보를 계속해서 전달한다. 물론 시민의 안전한 대피를 위한 안내와 행동 지침도 반복해서 방송한다. 

이와 비교해 KBS에서 전달한 지진 특보는 단순히 지진이 발생했다는 사실만을 알린 특보였고, 지진 대피 요령 등에 대한 정보는 전달되지 않았다. 다른 방송사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라디오 또한 제대로 된 재난 방송을 하지 않았다. 국민안전처는 재난 발생 시 정부 발(發) 정보를 참고하여 대피할 것을 지침으로 삼고 있지만, 그 지침은 아무도 모르고 또 알려주지 않았다. 

3. 턱없이 부족한 건축물의 내진 설계 

지진이 덮치고 간 경주 시내의 모습은 참혹했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건물의 통유리가 깨지고 기숙사 건물의 천장이 무너졌다. 각종 문화유산도 큰 피해를 입었고, 전통 가옥들도 기와가 깨지고, 지붕이 무너지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피해 규모는 약 45억 원에 해당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경주 지역의 특수성도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 사회의 내진 설계 수준은 상당히 낮다. 

현행법에 따르면 내진 설계가 필수인 건물은 "3층 이상, 면적 500제곱미터, 높이 13미터 이상인 건물"이다. 내진 설계란 진도 6.5에 버틸 수 있도록 건물을 건설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국토교통부의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12월을 기준으로 했을 때 전체 건축물 698만 여동 중 내진 확보가 된 건물은 겨우 47만 여동으로 6.8%에 지나지 않는다. 내진 설계 대상 건축물인 144만 여동을 기준으로 보아도 겨우 33%의 건축물만이 규제를 지키고 있는 셈이다.

▲ [표 1] 우리나라 건축물의 내진 설계 현황(건축물은 국토교통부, 학교는 교육부, 병원은 보건복지부 발표 자료).


위 [표 1]에 따르면 그나마 병원의 내진 설계 비율이 높지만, 실제 사건 발생 시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이기 때문에 피해 규모는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이렇듯 낮은 내진 설계 비율은 내륙에서 지진이 발생할 경우, 그 피해 규모를 예측조차 할 수 없게 만든다. 또한 내진 설계를 했다고는 하나, 건축 후 시간이 지나 원래 내진 설계치를 유지하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경주 지진이 위험한 진짜 이유 

지진은 최근 들어 전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연재해이다. 그럼에도 이번 경주 지진이 어느 때보다 위험한 진짜 이유는 진앙지 부근의 원자력 발전소(핵발전소)다. 지진으로 인한 원자력 발전소의 붕괴는 동일본 대지진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인근의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가 파괴되어 막대한 양의 방사능 물질이 바다로 흘러들어갔다. 최후에 해수 유입을 주저했더라면,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하여 과거 '체르노빌 사건'보다 더 심각한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다. 만일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했을 경우, 그 파괴력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최소 5배, 최대 10배에 달한다고 한다. 

이번 지진의 진앙지는 경주 인근이고, 그 지역은 우리나라 원자력 발전소 밀집 지역이다. 경남은 그린피스에서 선정한 원자력 발전소 밀집 지역 순위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하고 있다(고리 8기, 월성 6기). 총 14기의 원자력 발전소가 건설 계획 중이거나 위치하고 있고, 고리와 월성 주변에는 각각 380만 명과 130만 명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8기를 운용하고 있는 캐나다 브루스 지역의 주변 인구가 겨우 3만 명인 것과 비교하면, 고리/월성 원자력 발전소 주위의 인구 밀집 정도는 비정상적으로 높다. 

환경 단체는 이와 같은 원자력 발전소 집중에 대해 수년 전부터 계속 경종을 울리고 있지만, 정부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외려 노후 원전을 계속 운용하고 추가로 설치하려고 하고 있다. 신고리 5, 6호가 건설되면 무려 10기가 넘는 원자력 발전소가 밀집된다. 이쯤 되면, 지진으로 인한 피해보다 원자력 발전소 폭발로 인한 피해가 훨씬 클 것이다. 북한의 핵폭탄보다 훨씬 큰 위험을 안고 있는 셈이다. 최근 더불어 민주당이 '신고리 5, 6호기 건설 중단과 기존 원자력 발전소 안전 강화 촉구안'을 당론으로 정해 본격적인 문제 해결을 요구했지만, 정부가 이를 받아들일 지는 지켜볼 일이다. 

이번에도 가만히 있어라? 

세월호 때도 그렇고, 이번 지진에서도 그랬다. 정부는 국민에게 '정부의 지침에 따를 것'을 강조하면서 어떠한 지침도 내려주지 않았다. 또 '가만히 있어라'는 거였다. 오죽했으면 한 시민이 직접 지진 알람을 만들었고, 이미 수백여 명의 시민들이 정부의 재난 경보 문자보다 해당 알람을 더 신뢰하고 있다. 실제로 19일 이후의 지진에 대해서는 정부의 경보보다 빠른 속도로 지진 사실을 알리기도 했다. 

박인용 국민안전처 장관은 최근 대정부 질문에서 재난 대응 메뉴얼 문제에 이렇게 답했다. "메뉴얼은 영원히 완성되지 않는다." 일정 부분 동의할 수 있는 발언이다. 모든 상황에 완벽히 대응할 수 있는 매뉴얼이라는 것은 없다. 하지만 아무런 지침도 알려주지 못하는 매뉴얼은 존재해선 안 된다. 일본 도쿄도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도쿄 방재'에는 무려 320여 쪽에 달하는 지진 대응 매뉴얼이 있다. 이에 비해 우리 국민안전처의 매뉴얼은 겨우 9쪽에 내용도 일반 상식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문제는 이러한 일반 상식 수준의 매뉴얼조차 교육되지 못해 이번 지진을 통해 시민들이 피해를 보았다는 것이다.

지진을 피해 나온 시민들의 곁에는 질서 유지 요원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당장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교육받은 적도 없다. 시민들의 불안을 해소해줄 어떤 방법도 정부는 준비하지 못했다. 무서운 것은 이런 재해에 우리 모두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보다 남의 집 불구경하듯 하는 정부 책임자들의 무성의한 태도이다.

더 이상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 

정부는 이번 지진을 경험하고 기상청에서 경보를 바로 보낼 수 있도록 체계를 개선하기로 했다. 내진 설계에 있어서도 관련 법규를 강화(내진 설계 의무 3층→2층)하고, 보강 공사 예산을 대폭 증액(연 2000억 원)했다. 또한 피해 복구를 위해 경주 지역을 '특별 재난 구역'으로 지난 22일 선포했다. 이는 모두 환영할 만한 조치다. 단 계속해서 이어나갈 수 있는 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긴다. 

우리나라가 일본과 같은 지진 대비를 갖추려면 상당히 오랜 기간이 걸릴 것이다. 당장 체계의 개선은 가능할지 모르나 기존 건축물들의 내진 강도 보강이나 시민 교육 등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과제이다. 이번 사태만 넘기려고 하는 정부의 안일한 태도가 더 이상 이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남 탓만 하는 박근혜 대통령과 박인용 국민안전처 장관의 모습이 아닌, 책임자로서 당당하게 행동하는 모습을 기대한다. 또한 우리 국민 역시, 위정자의 계속된 노력을 촉구할 수 있도록 꾸준히 관심을 가져야 한다. 



어쩌면 붕괴 중인 한국형 싱크탱크

2016.09.27 14:08:57


[홍일표의 시민/풍/파] '인구 절벽', '초불안', 답이 있는가

             
서울 종로에서 수원 권선구청까지 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었다. 버스와 지하철, 버스 그리고 다시 도보로 해서 두 시간 가까이 걸렸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진 않았지만 벌써 4회째 개최되는 '대한민국 정책 컨벤션&페스티발 : "우리가 만드는 대한민국…각자 그리고 서로"'의 둘째날 싱크탱크 토론회 세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일주일간 1000여 개가 넘는 토론회가 조직되어 스웨덴의 현재와 미래를 함께 고민하는 알메달랜 정책 박람회는 한국에도 이미 여러 차례 소개된 바 있다. 이들처럼 보수와 진보, 시민과 전문가, 정당과 시민 단체, 그리고 개인의 경계와 구분을 넘어 함께 토론하고, 결론을 모아 내는 자리에 대한 열망은 한국 역시 작지 않다. 그래서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이 공동 정책 박람회를 국회에서 개최했고, 대한민국 정책 컨벤션&페스티발 역시 그런 취지라고 스스로를 소개했다(물론 현실은 취지에 부합할 정도가 아직 아니었다는 게 냉정한 평가일 테다).

첫날 토론회에서 '노동 개혁'을 둘러싼 보수와 진보 논객 간 논쟁이 뜨거웠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저출산·고령화 시대의 경제 정책'에 대한 토론은 과연 어떨지 신경이 쓰였다. 발표와 토론이 진행되자 '격렬한 논쟁'보다 '무거운 우려'가 회의장 분위기를 압도했다. 다른 어떤 나라보다 급격하고, 오래되고, 치명적인 한국의 저출산·고령화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이견은 없었다. 그러나 국책 연구 기관이 내놓은 대책들은 여전히 현상적, 단기적, 단편적 수준을 넘지 못했다. '인구 절벽'이 아니라 아예 '지방 소멸'에 대한 우려에 걸맞는 급진적, 혁명적 발상을 기대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을 지도 모른다. 그건 어쩌면 토론자들의 몫이었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나 역시 "5년, 늦어도 10년 내에 정말 획기적인 대책을 내놓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면서도 '무릎을 탁 치는 제안'을 내놓지 못했다. 경총 소속 토론자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렵고 거대한 질문들 앞에서 '생각의 빈곤', '상상력의 부족'을 절감한 자리였다.

오후에는 지역 정책 역량 강화와 정책 지식 생태계 활성화에 관한 라운드 테이블 토론이 연이어 열렸다. 두 세션 모두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수원, 창원과 같이 인구 100만 명을 넘는 기초자치단체에는 수원시정연구원과 창원시정연구원이 설립되었다. 최근에는 고양시와 용인시가 각각 연구원 설립을 준비 중이다. 인구 100만 명이 되지 않는 전주시는 감사원 지적에 따라 연구 인력을 공무원으로 채용해 정책 연구소를 시청 내부에 두고 운영 중에 있다. 그동안 나는 국책 연구 기관과 광역시도연구원에 대해서는 문헌 연구와 인터뷰 등을 거쳐 비교적 깊게 다뤄볼 기회가 많았다. 하지만 기초자치단체 연구 기관 관계자들과 함께 토론하는 기회는 처음이었고, 그들 또한 마찬가지라고들 했다. 37명의 상근 인력을 두고 있어 광역시도연구원급 규모로 이미 성장한 수원시정연구원은 다른 기초자치단체 연구소들의 롤 모델이자, 맏형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마치 헤리티지재단이 '자원 은행(Resource Bank)'이라는 연례 행사를 통해 미국 내 (지역 기반) 보수 싱크탱크들의 네트워킹을 돕고, 정보를 교환케 하는 것과 유사하게 느껴졌다. 

이들은 연구자로서의 정체성, 연구 기관의 독립성, 연구 결과의 독창성, 연구 기반의 현장성 등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이는 국책 연구 기관이나 광역시도연구원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직과 예산 규모를 어떻게 키우고, 공고히 할 것인가 또한 중요한 과제였다. 당연히 규모와 역사는 달랐지만, 기존 국책 연구 기관 등에서 나타나는 문제와 고민은 반복되고 있었다. 물론 일본에도 이들과 유사한 형태와 기능의 싱크탱크들이 있다. 하지만 한국처럼 법과 조례에 의해 만들어진 국책 연구 기관-광역시도연구원-기초자치단체연구원 체제를 갖추고 있지는 않다. 더욱이 전 세계 어느 나라도 중앙과 지방 정부 출연 연구 기관을 이렇게 많이 두고 있지는 않다. 그렇다고 중국 사회과학연구원과 같이 중앙과 지방의 '위계화된 구조'로 설립·운영되고 있는 것도 아니다(그래서 한국의 경우 연구 기관들 사이의 수주 경쟁도 치열하다). 3단계에 속한 수십개 연구 기관에 수천명의 박사급 인력이 포진되어 있고, 한해 예산은 수천억 원을 넘는다. 

한국 정책 지식 생태계의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국책 연구 기관의 규모와 역할이다. 기초자치단체 연구 기관들의 계속된 설립은 그러한 특징을 더욱 확고하게 한다. 물론 국책 연구 기관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정책 지식 생태계는 다른 나라에 비해 규모나 구성의 다양성 면에서 뒤처지지 않는다. 국고 보조금의 30% 정책 개발비로 운영되는 정당 연구소들이 있고(여의도연구원이나 민주정책연구원의 한해 예산만도 각각 수십억원이 넘는다), 삼성경제연구소와 현대경제연구원, 하나금융경영연구소 등 재벌과 금융 계열 싱크탱크들도 적지 않다. 기업인의 수천억 원 사재 출연으로 만들어진 여시재나 아산정책연구원과 같은 초대형 민간 싱크탱크에서부터, 규모는 작지만 의미 있는 연구 활동을 계속 해 오는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등 민간 싱크탱크들까지 다양하다. '준정당'만이 아니라 '준싱크탱크' 역할을 수행해 왔던 참여연대나 경실련 등 시민 단체도 빼놓을 수 없다(이 또한 한국 싱크탱크 생태계의 중요한 특징이다). 국회에는 예산정책처와 입법조사처까지 있고, 국회미래연구원의 설립까지 시도되었다. 그 중심에 국책 연구 기관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 토론자는 "기초자치단체 연구 기관들까지 더해지면서 한국형 싱크탱크 체제가 완성된 게 아닌가?"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겉만 본다면 '싱크탱크의 나라' 미국이 부럽지 않을 정도다. 그러나 막상 누구도 그렇게 얘기하지 않는다. 최근 논란이 된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의 지진 보고서처럼 국책 연구 기관 연구 결과에 대한 왜곡, 조작, 은폐, 묵살 의혹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국책 연구 기관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경제인문사회연구회는 기획재정부의 '기관 평가'와 더불어 연구자들을 옥죄는 데 사실상 앞장서고 있다. 특히 세종시로 옮겨 간 이후 존재감을 점차 잃고, 부처들의 영향력만 더욱 강화되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국책 사업을 따내기 위한 프로젝트 업무에 매달리는 광역시도연구원에 대한 우려 또한 작지 않다. 그나마 '다른 목소리와 새로운 시각'을 내놓을 물적 기반을 갖췄던 재벌과 금융 계열 싱크탱크들의 위상도 크게 위축되었다. 한 때 정부 정책에 대한 지나친 관여를 비판받았던 삼성경제연구소는 삼성 내부 연구소로 이미 변신하였다. 현대경제연구원 또한 구조 조정의 칼날 위에 서 있다. '노동'과 '시민' 기반의 싱크탱크는 규모면에서 처음부터 비교조차 되지 않았기에 이들은 더 이상 줄어들 것도 없는 상황이다. 

'국가'와 '자본' 싱크탱크와 '시민'과 '노동' 싱크탱크 사이의 불균형이 조금이나마 해소되었다면(그렇지도 않지만), 그것은 후자가 성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전자가 약화되었기 때문이라 할것이다. <유라시아 견문>(서해문집 펴냄)의 저자 이병한 박사는 "중국의 젊은 지식인들이 30년 앞을 내다보며 연구하는데, 한국 지식인의 사고 단위는 1∼2년에 불과하다"며 우려를 표했다. 토론에 참가한 기초자치단체 연구 기관 소속 연구자들은, 공무원들의 당장 업무 지원에 주로 참여하면서 겪게 되는 정체성 혼란을 호소했다. 국책 연구 기관 소속의 베테랑 연구자조차 "국회와 청와대, 정부 부처 모두 단기적 관심과 부처의 자기 이해에 급급하다. 우리 역시 그것에 맞춰 일하게 된다"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한국형 싱크탱크 체제는 지금 '완성'이 아니라 '붕괴'되고 있는 중일 지도 모른다. "인구 절벽의 시대", "대공포와 초불안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풀어야 하는 문제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데 질문도, 대답도 단기적, 파편적, 현상적 수준에서 그저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년 대선을 준비하는 정치세력 가운데 과연 누가, 어떻게 한국 싱크탱크 체제의 혁신과 전환을 기획하고 있는지 정말 궁금하다. 그것이야말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이들의 준비 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명료한 척도가 될 것이다.